2010.08.25 18:40

가난한 하나님 (예레미야 22장 13-16절)

본문 : 예레미야 22장13-16절
제목 : 가난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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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강-렘22장13-16(가난한하나님)-jer100825

가난한 하나님

2010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13-16

(렘 22:13, 개역)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렘 22:14, 개역)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렘 22:15, 개역)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렘 22:16, 개역)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버지 요시야왕과 아들 여호야김왕을 대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들 왕들은 일반적인 나라의 왕이 아닙니다. 유다 나라의 왕입니다. 일반적인 나라는 인간이 세운 나라이지만 유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먼저 세우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들 왕은 ‘말씀에 의해서 현실화’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왕입니다.

말씀의 현실화란 인간이 말씀을 지켜서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 사람을 덮쳐서 수립되는 겁니다. 말씀 성취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지 결코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다 왕은 일반적인 나라나 민족들의 왕과 다른 적용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야김, 다음에 두 왕이 있은 후 유다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나라가 어째서 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려시고 하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선친 요시야왕이 한 사명이 나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그 아들 되는 여호야김은 자기 궁정을 리모델링하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에 몰두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망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톡톡히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가 망해야 ‘말씀의 현실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 나라에서 가난과 궁핍이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함입니까? 인간은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육신이 겁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입니다. 가난은 죽음과 가까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기가 싫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난을 안겨주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난에 처해봐야 싶숙히 숨어있는 자아의 본성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동들이 대나무통으로 물총을 만들고서는 그 앞에서 작은 물구멍을 뚫어놓으면 그 구멍에서 세차게 한줄기의 물이 분사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육신을 끝까지 몰아붙여놓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의 본심, 즉 자신을 가난하게 몰아간 그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항하고 분풀이고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육신을 생명이라고 간주하기에 그 생명에 위협에 되는 그 어떤 존재이건 다 공격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입니다. 창세기 4:1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는 아담이나 하와는 자기 자식을 얻은 것을 생명을 얻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육신의 출생 자체가 생명의 ‘얻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토 태어났습니다. 이때까지는 이 아담의 가정에서 ‘피’가 나오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얻은 증거라고 여긴 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여서 피를 발생하고부터 과연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생명이 아닌지가 분명해졌습니다. .

이 억울한 피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발생된 피입니다. 결코 인간 대 인간의 감정에 의해서 발생된 피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관여해서 발생한 피에 대해서는 인간의 해석과 이해는 접근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진정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생명이 됩니다. 이 피 말고 다른 육신의 목숨은 일체 생명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진정한 생명을 유발하기 위해 작용된 유사 목숨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의 사건이 국가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첫 번째 유월절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애굽에 사는 모든 인간의 장자를 죽이시는데 그 심판의 하나님에 대해서 피로서 마중했던 가정만큼은 장자의 죽음이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장자 죽음을 통해서 현재 각 가정은 부모의 육신으로 생명이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가정이 부유하냐 혹은 가난하냐가 관권이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되는 하나님에게 대드는 그 죄악성이 평소에는 깊숙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이 죄가 가난이라는 압력에 밀려 물총으로 죄가 발사될 때, 그 죄와 어린양의 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생명이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살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피에 담아 문 밖에 심판의 천사가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위 자신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그것이 결코 자신을 구원하는 근거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자가 되었던 가난하게 되었던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것은 숨겨진 죄성입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들기 위해 덩어리 된 권력의 뭉치입니다. 자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최후에 지켜보려는 저항력이 작용합니다. 이 저항력이 맹렬하면 할수록 자아성은 뚜렷해집니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인간의 육신적 죄성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감히 못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7:21-24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고백은 성령받았기에 비로소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즉 육신이 본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죄를 늘 뒤로 감추고서는 가난이나 부유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 맺고자합니다. 즉 “내가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가난하니 이는 나에게 마땅한 조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가난 자체가 자신의 구원을 받는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가난하기에 그 보상책으로 풍성한 나라인 천국에 살 권리가 있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가난은 그런 취지가 아니라 가난에 직면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가난케 하신 신에게 분노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가난과 결핍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 속에서 참된 생명인 예수님의 피를 멀리두게 됩니다. 진정 성령받은 자라면 예수님의 피 앞에서 자아에 대한 두둔을 멈추고 즐겁고 행복하고 남은 생을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화되어서 우리 육신에 대한 집착이 곧 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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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렘22장 13-16(가난한하나님)-jer100825

2010-08-28 21:55:23 조회 : 25         이름 : 오용익
 
 
077-렘22장 13-16(가난한하나님)-jer10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13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예레미야 22:13-16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호야김이라는 왕, 유다 이 망하기 전전의 왕에게 잘못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너 때문에 망했어. 너는 왕이지만 나라 망치는 통치를 한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는 대목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와 비교를 하면서 하느냐 하면 여호야김의 아버지가 있어요.

그 아버지가 요시야는 사람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 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호야김 왕에게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랬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 여호와는 네 아버지를 인정해 주는 거야. 하지만 너는 아버지 살아가는 것과 꼭 반대로 왕의 행세를 했기에 너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이 유다나라를 망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할 말 없지?’ 하는 식으로 들이대시는 겁니다.

여기서 초반부터 중요한 문제가 나오는데요. 하나님께서 세종대왕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안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김일성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하고 주몽이나 고조선의 단군임금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세종대왕이나 왕건이나 이런 지도자는 유다나 이스라엘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종대왕은 아무리 훌륭해도 조선이라는 이 한반도에 걸쳐 있는 이 나라와 관련되어 있지 저 멀리 있는 이스라엘과는 관련이 없는 나라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이 땅은 땅도 아니고 저쪽만 땅이냐, 이스라엘 땅만 흙이고 이쪽 땅은 흙으로 쳐주지도 않는가, 다 같이 땅에 사는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서 그쪽 땅에는 이야기를 하고 단군이나 왕건이나 한반도에 계셨던 왕들에게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라고 궁금해 할 거예요.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참 많이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만 역사고 우리나라 역사는 역사가 아니냐, 왜 교회가면 자꾸 이스라엘 역사만 이야기하고 우리나라 역사는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얼마 전에 북한 다녀온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의 목사들은 빨리 일제에서 우리나라를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했습니다. 그것은 전부다 우리나라 역사에 관련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는 왜 무시되어도 괜찮고 이스라엘 역사는 집착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나라를 자기들끼리 잘해보자는 이야기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모시고 잘해보자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초대받아서 온 사람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선점을 한 그 땅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유다나라가 되는 겁니다. 다른 나라는 인간들이 자기 혈통과 족보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구성되고 씨족과 부족으로 발전해서 나중에 민족국가가 되는 인간적인 나라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지요.

그렇다면 여호야김이라든지 요시야왕은 보통 다른 나라 왕하고는 하나님이 다르게 다루십니다. 뭐냐 하면 ‘너는 말씀이 현실화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첫 번째 중요한 점입니다. 예레미야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야김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선입감이 있느냐, ‘아, 하나님이 여호야김 그 분에게 이야기를 했구나. 그러면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네. 옛날에 하나님께서 유다나라가 거의 망할 즈음의 왕에게 한 이야기네.’ 할 수 있겠지요.

유다나라가 망할 즈음의 계보를 보면 요시야 - 여호아 하스 - 여호야김 - 여호야긴 - 시드기야, 이렇게 그 왕의 계보가 끝나게 됩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과 시드기야는 차례로 요시야의 아들들입니다.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의 아들이니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여호야긴의 삼촌이 됩니다(역대하 36:1-10).

또 제가 이렇게 거의 나라 망할 즈음의 끝부분에 있는 왕에게 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성경을 이야기하면 성급하게 이렇게 나오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야, 우리는 이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제가 두고두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또 오해해요. ‘아,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안 지키면 되겠구나.’

제 취지는 그런 뜻이 아니고 말씀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현실화시키는 거예요. 동사무소에서 어떤 연락이 왔다 합시다. ‘나는 동장한테 안 갈래.’ 우리가 생각하는 선입감은 이겁니다. 그런데 ‘내가 동장인데요. 내일 오전 11시에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동장이 찾아온다는 생각을 우리는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말씀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현실화시킨다는 그 말을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지키기 전에는 말씀이 현실화되지 않았는데 내가 말씀을 열심히 지키면 말씀이 구체화되겠구나. 그런데 이 근호 목사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못 지킨다고 하더라.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현실화 시켜야 하는데 우리가 못하니까 아예 우리는 말씀을 안 지키면 되겠구나. 참 편하기도 하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런데 제 취지는 그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말씀을 지켜서 말씀이 우리 쪽에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킨다고 우기든 안 지킨다고 우기든 관계없이 말씀이 우리에게 덮쳐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지난 여름수련회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이 말씀을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엉터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을 덮쳐버리니까 아브라함은 본의 아니게 그의 살아가는 한평생의 모든 행적이 말씀과 계시가 되고 말았어요.

그게 바로 여호야김이라는 왕과 세종대왕과의 이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호야김왕이 참 나쁘다고 하는데 그 왕이 나쁘다는데 초점을 두지 마실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야김왕을 나쁘게 했어요. 그게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야김왕을 나쁘게 했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 요시야왕을 착하게 했습니다.

항상 주어와 술어가 있다면 주어 쪽에서 생각을 해 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말씀대로 하시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죄인이기에 착할 수가 없다.’는 그 짧은 문장이 ‘우리는 안착해도 된다.’ 하는 우리 신나는 쪽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라고 해서 저는 자꾸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이 근호 목사는 저런 식으로 말씀을 전해서 자꾸 방종하게 만들고 더 나쁜 쪽으로 가게 한다.’고 해서 그 행위의 주체를 인간에게 그대로 유지하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바로 세종대왕 아들입니다. 강감찬이나 그런 사람들의 부류지 이스라엘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유다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와서 인간이 그 약속대로 착착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키더라, 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 이 성경말씀이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이 덮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더라.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이런 변화가 일어나더라.’

항상 그 주인공을 지금 이 모든 것을 시하고 있는 예수님 쪽으로 다 돌려야 돼요. 우리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입니다.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라는 말은 우리보고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오히려 우리는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됩니다.

즐겁게 피동적으로 즐겁게 수동적으로, 일은 주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동안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살았던 그 무거운 쇳덩이 같은 인생을 다 벗어버리고 이제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니까 나는 그 주님 안에서 신나게 한 번 놀아보고 신나게 살아 보렵니다, 하는 이것이 전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서의 그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그 전도서의 말씀대로 우리를 구체화 시키고 우리를 현실화시켜 내고 있습니다. 즐겁거든 주께서 그렇게 시켜서 즐거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여호야김과 그 아버지 되는 요시야는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루고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뭐냐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그랬느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아버지는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는 이렇게 했어요. 15절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으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사명이 자기가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월등했습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일을 하는데 필요하기에 먹고 마신 거예요. 요시야왕의 일이란 ‘공평과 의리를 행’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가난한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게 했어요. 그렇다면 여호야김 왕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네 아버지를 봐라. 괜찮잖아.’ 하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을 말씀화시켜서 앞장세우는 것이 뭐냐, ‘가난한와 궁핍한 자를 형통하고 신원했다’고 합니다.

가난한자와 궁핍한 자를 들춰내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드러낸 일을, 그것을 백성들에게 부각시킨 일을 아버지는 했는데 너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서 왜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느냐, 한 겁니다. 그 당시에 왕이 맨 날 부동산관리, 궁전재건축, 리모델링 이런 것 한다고 자기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에 혼쭐이 났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행세를 비교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정말 어렵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어디부터 끄집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때는 두 가지의 반응을 뽑아내기 위해서 가난으로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나 가난하니까 이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되겠지요.’라고 가난을 자기 품성처럼 소유하려는 사람이 등장해요.

‘저 사람은 부자니까 지옥가고 나는 저 사람과 비교해서 가난하니까 나는 천국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가난을 천국 가는 일종의 주특기, 일종의 재주, 밑천, 근거라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부자들 다 죽어라.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하신 것은 날 구원하려 함이라.’라고 가난을 빌미로 해서 그것을 구원받는 밑천으로 삼는 그런 작자들, 그런 작자들이 하나님께서 가난을 집어넣으면 들통이 나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가난한 게 무슨 행세입니까? 가난하다고 큰 소리를 쳐요. 그런데 인간이 가난해 봐야 그 속에 꼬깃꼬깃 숨겨놓은 인간의 저항심과 반항심, 죄가 튀어나옵니다. 이걸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학교 공작시간에 물뿌리개를 만들었어요.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피스톤으로 주사기처럼 뒤에서 밀면 구멍으로 가는 물줄기가 죽 나가는 물총이 되지요.

주님께서 인간을 가난에 직면하게 해 보면 그 물줄기가 가난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숨겨놓은 죄가 나와요. 반항이 나오고 하나님에 대한 욕설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죄를 뽑아내야 하는가 하면 천국은 가난과 관련되어 있지 않고 주께서 죄와 관련해서 일을 처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난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죄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당신이 죄가 있기에 가난합니다.’라고 보는 거예요. ‘당신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가난해졌습니다.’ 하게 되면 계속해서 그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고 반듯하게 살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어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물줄기가 죄와의 관련성으로 와야 할 텐데 그게 아니고 가난을 내세우면서 자꾸 하나님과 엮으려고 시도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환경문제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 지구상의 환경문제가 심각해서 큰 문제로 대두되었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인간이 죄 때문에 십자가지셨고 그 죄 용서받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유다나라나 오늘날 교회나 천국에 합당한 곳이 되어야 돼요. 천국에 합당하려면 천국과 지상의 연줄은 가난이나 부함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주께서는 피가 있고 그 죄와 피가 만나면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원체 가난한 것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어서 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가 가난합니다.’ 라는 것을 내세워서 가난과 천국의 풍성함을 직접 연결시켜요. 지금은 고생하고 지금은 가난하지만 죽으면 좋은데 가서 편하게 살지 않겠는가, 자꾸 지금의 가난과 천국의 부요함을 연관시켜서 그래서 천국에 집착하면서 교회 출석하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가난하지 않기를 집착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다른 사람은 가난해도 저를 가난하게 한다면 저는 화냅니다.’ 그 숨겨진 화를 내를 것, ‘하나님, 이렇게 하는데도 저를 가난하게 한다면 저는 삐집니다.’하는 그 삐짐이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튀어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유다나라의 마지막 왕들이 요시야 뒤에 배치된 것은 그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 튀어나도록 한 거예요.

이것은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만 인간의 저항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권력에서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권력이라는 것은 자아 만드는데 필요해서 자아 만들기 위해서 뭉쳐놓은 것을 권력이라 합니다. 이걸 세밀하게 알려고 들면 시간이 많이 가지요. 인간의 자아를 양파껍질처럼 벗기면 권력이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요.

권력이 모인 만큼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권력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영역에 손대지 말라고 저항하는 그것이 권력의 힘이에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물리학에서 중력에 반하는 원심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처럼 자꾸 밀어내지요. 자꾸 밀어내야 밀어낸 만큼 힘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인간이라는 것이 왜 있는지 알아요? 모든 권력은 신에게 도전하는 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목사님, 인간이 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있는지를 알려드릴게요. 하나님에게 대들으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드는 주체가 없어요.

그냥 모든 덩어리 자체가, 어떤 힘이 모여서 내가 되었는데 그 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게 대들고 저항하라.’ 그것이 세상 구석구석마다 외침이고 아우성입니다. 그게 뭉쳐서 예쁘게 깔아놓은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할 말이 없잖아요. 죽고 난 뒤에는 심판만 기다리지요. ‘너 나에게 이만큼 대들었지.’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가난과 더불어서.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 부부가 오해한 것이 있어요. 가인을 얻을 때 생명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 얻은 것을 생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놀라운 사실은 그 자아라는 우리 쉼 는 것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 흘렸던 피를 가지고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피를 가지고 생명이라 합니다. 피가 생명입니다. 아벨이라는 동생이 태어날 때 그냥 피투성이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큰 아들 가인 태어날 때 ‘아이고, 생명이 태어났구나.’ 둘째 아들 태어날 때 ‘아이고, 생명이 또 나왔구나.’ 부모는 둘 다 생명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맏이가 동생 아벨을 쳐 죽여서 비로소 피가 나올 때 그 피가 생명인 동시에 전에 가인을 얻은 것을 생명을 얻었다고 본 그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의 반대요건으로 숨어 있는 생명을 들추어내는 작용을 하기 위해서 생명 아닌 유사생명이 인간의 육신이라는 모습으로 등장 한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육신과 생명은 서로 반대 자리에 위치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여호야김같은 사고방식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육신이라는 것은 이유도 없고 맹목적입니다. 무조건 육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생명이고 생명이기에 키워야 되고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했던 창세기 4장에서 인간의 육신, 몸에서 심장 뛰는 것을 생명이라 보지 않고 아벨도 몰랐지만 아벨이 죽어서 피가 나온 뒤에 아벨의 그 피가 하나님이 원했던 원래 생명인 것이 비로소 생명인 것과 육신, 생명 아닌 것과 대비가 되잖아요. 그 대비된 것이 확대가 된 것이 출애굽 때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피 바른 장면이에요.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이스라엘사람들은 피를 양푼에 담아서 발랐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음의 사자 앞에서 ‘하나님, 여기 피 가져왔습니다.’하고 얻어맞기 전에 알아서 긴 거예요. ‘하나님, 제 피로는 안 되니까 여기 어린양의 피 들고 왔습니다. 이거 생명 맞지요?’ 그런데 저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신 그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자기가 생명이고 자기 육신에 의해서 새끼를 낳은 그 자식이 내가 생명이듯이 내 자식도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호와김은 ‘우리 아버지가 왕이라면 그 아버지의 육신의 자식인 나도 유다나라의 왕인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 요시야하고 아들하고를 쪼개서 구분해서 이야기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아버지는 생명의 사명, 가난한자 궁핍한 자를 지켜주는 진짜 하나님의 십자가정신을 사명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 되는 여호야김은 ‘내가 생명이고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내가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집을 짓고 부동산 리모델링을 하고 궁전 크게 짓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도 살고 나도 살고 그게 생명이 아니고 뭐냐.’ 그렇게 나온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옛날이야기인가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두 사람의 차별성은 그들이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말씀이 현실화시킨 거지요. 그러면 오늘날 21세기의 우리들도 똑같이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예레미야 22장에 그냥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면 오늘날 우리에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호야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바로 여호야김이에요. 한 윤범 목사님이 설교할 때 이런 설교했어요. ‘사도요한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교인들 보고 물어요.

“여러분, 사도요한이 성령 받은 사람이 맞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로마서 7장에 보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해도 또 다른 법이 와서 나를 지배하는구나. 나는 나에 대해서 내가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이 과연 성령 받은 사람이냐 아니냐?”를 또 물으시는 거예요.

한 목사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성령 받았기 때문에 ‘나는 말씀 앞에서 어쩔 수 없고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개혁주의 노선과 정 반대노선입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안됩니다. 난 도저히 안 됩니다. 나는 그냥 육신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그런 가운데서 내 쪽이 아니고 저 맞은편의 ‘주님이여’라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쪽은 이미 포기해버리고. 말씀이 와야 되고 성령이 찾아와야 되고 그래서 곤고하고 또 곤고하고 이런 것이 왜 곤고한지, 바로 이 육신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이 하나님께 저항하고 대드는 힘으로 뭉쳐진, 그래서 만들어진 자아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하지만 고맙게도 성령께서 오시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이 못난 것, 이 안되는 것, 이 어쩔 수 없는 것, 이것은 평생 교회 다녀도 희망 없는 것에 대해서 그냥 아브라함에게 말씀이 덮치듯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용서와 공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그냥 덮쳐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냥 예수님의 공로를, 그 은혜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고맙다고 증거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와 현실화되는 겁니다. 그 현실화 되는 그 과정 속에서 여호야김 이야기를 한 거예요. 가난한자 부한 자 이런 차이, 가난하기에 저주받고 부하기에 복 받았다든지, 반대로 부자이기에 지옥가고 가난하기에 천국 간다는 이런 육신적인 사고방식 그 편에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그 피는 우리가 가난하든 우리가 부자든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것이 없다는 거예요. 이제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왜, 우리 자신은 뭘 해도 이것이 생명이 아니기에 이미 생명이 아닌 것이 결론 났거든요. 오래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론 났다는 말이지요. 주님이 피로 거저주신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우리는 남은여생을 신나게, 돈이 없어서 못 놀지 돈만 있으면 진짜 재미있게 즐겁게, 전도서의 말씀처럼.

세상을 비관적으로 볼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내 자신이 비관적인데 뭘 새삼스럽게 비관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비관적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다 주님의 은혜고 공로입니다.’ 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 우리 자신이 결국 이런 여호야김밖에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면서 주님께서는 그 나라를 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 망하는 세상에서 즐거운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 주님이 이런 인간을 사랑했다는 그 용서, 그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현실화되었기에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에 그냥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생명주시고 천국의 영광 주셔서 우리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피만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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