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8 11:10

돌아오지 못할 땅 (예레미야 22장 8-12절)

본문 : 예레미야 22장 8-12절
제목 : 돌아오지 못할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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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할 땅

2010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8-12

(렘 22:8, 개역)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렘 22:9, 개역)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렘 22:10, 개역)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렘 22:11, 개역)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렘 22:12, 개역)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예레미야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이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은 결코 그 예언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행복합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자기에게 그 어떠한 불리한 상황이 오더라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말한 그 예언의 실제성과 현실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어디까지나 예레미야의 사견이나 견해니 해석인 것처럼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더나아가서는 인간 위주로 해석하게 됩니다.

즉 결코 예수님 위주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조차 예수님 위주로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해석해버립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피곤하니 쉬게 하려고 저녁을 주시고, 아침에는 근무하라고 아침을 주셨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런 해석이 얼마나 일방적인 엉터리해석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저녁과 하나님을 위한 아침이 있음을 인간들은 이해하거나 해석해내지를 못합니다.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합니다. “사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되묻고 싶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묻지 말고 이렇게 솔직하게 물어라고 말입니다. 즉 “내가 신이면 되지 왜 나말고 신이 따로 있어야 합니까? 신이시여. 당신만 신되지 말고 나도 신이 됩시다. 아니, 오직 나만이 신으로 살아보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이제 신 노릇 그만하시오. 오로지 나만 신이다”라고 반말쪼로 질문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성경을 보면서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자기 마음 깊숙한 곳에 오로지 나만 신이다는 의식을 숨겨놓고서는 자꾸만 교회에서 철야하고 새벽기도하고 예배 참석하면서 마치 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듯한 티를 냅니다. 다 거짓된 행위들입니다. 그런 것을 유도하는 목사들은 다 돈 뜯어내는 양아치들입니다.

목사가 교인 생각하고 목회하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 복음으로부터 등돌리는 순간이요 멀어지는 순간입니다. 목회는 주님이 하십니다. 목사가 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일 뿐입니다. 그것도 오직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 와중에서 목사는 형편없이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능이 바로 그런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의 기능과 역할을 다음과 같이 보십니다. “너희들은 이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을 떠나는 기능을 해야 할 자들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로지 자신만이 절대신이 되고 싶은 품성을 갖고 있음을 까발려주어야 될 유일한 민족이 너희들이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놀랍게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었습니다. 땅 위주였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땅을 ‘자기를 위한 땅’일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신들을 위한 저녁과 아침일 것이라고 우기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위한 저녁이요 아침입니다. 이 사실을 인간으로서 누가 알았겠습니까!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이 죽으심과 살아남을 유일하게 관념이 아니라 실제 현실로 여긴 분은 오로지 예수님 혼자 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결부시키는 과오를 범합니다. 즉 “나는 신이다. 따라는 나는 영원해야 한다. 따라서 신께서 나같은 인간을 죽었다가 다시 영원히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먼저 시범쪼로 그런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구나. 옳다구나 나는 그 십자가를 믿고 나는 영원히 신이고 싶은 목적을 이루어야지”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구성이 추상이요 환상이요 상상이요 허망한 관념에 해당됩니다. 실제로 예수님만이 느끼는 십자가의 현실성이 우리들의 현실성이 되려면 그 십자가의 현실성이 우리를 덮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위주의 역사’와 ‘나 위주의 역사’가 늘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를 들면, 노숙자가 구원받기 위한 모든 시도는 다 거짓이요 허망한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영원히 신이 되고싶은 본능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망하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망가짐, 그 이후의 희망에 마음을 둘 정도로 여전히 자신의 절대신성을 포기하지 않고 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위주의 역사, 즉 예언이 능력이 되어 들이닥치게 되면 우리는 그냥 모든 희망마저 날려보낸 체 “허!”하고 웃고 말지요. “저를 죽여주세요”라는 요구사항은 실은 “이런 고생을 할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어 편하고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절대신이니 신이 신답게 편한을 누릴 권리가 마땅히 있기 때문이다”는 속셈을 드러낸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땅은 오직 예수님의 시간만이 허용하면서 흐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란 애초부터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땅은 바로 예수님께서 계신 곳, 곧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이 땅을 중심으로 추방될 자가 거두어 드릴 자로 계속 구분됩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의 위력을 성도를 향하여 덮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냥 “허!”하고 웃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어지지 않아도 되는 이 예수님의 중심의 약속이 왜 저에게 들이닥치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공로 덕분에 나의 중심의 모든 생각이 곧 악마의 생각이요 지옥의 생각인 줄 알았습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조차 예수님의 예언, 말씀 성취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유다는 비로소 말씀의 현실성 속에 동참되고 있습니다. 전에 당연히 자기네들 땅이라고 여긴 그 약속의 땅은 순전히 메시아의 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추방된 처지에서 증언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쓸모있게 써 먹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찾아오신 십자가 은혜를 계속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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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렘22장8-12(돌아오지 못할 땅)-jer100818

2010-08-20 07:37:55 조회 : 10     이름 : 오용익
 
 
076-렘22장8-12(돌아오지 못할 땅)-jer10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8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예레미야 22:8-12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아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예레미야가 선지자지요. 예언하는 자입니다. 예언이란 장래 일을 마치 확정된 것, 인간이 나서봐야 변경이 불가능한 확정된 일만 주어지는 겁니다. 예언대로 된다는 것은 우리가 슬퍼할 일이 아니고 즐겁고 행복해야 될 일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예언의 내용대로 확정되어서 진행된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속편하게 만들고 맘 편하게 만듭니다.

그런 예언자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지요. 그런데 이 예언의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지거든요.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고 실제 현실 속에서 그대로 녹아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선지자,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런 호칭을 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기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해야 돼요.

남들 보기에 성경 이야기가 추상적이고 허황되고 관념적으로 보이지만 예언자의 기능을 해야 될 우리들에게는 실제고 현실인 겁니다. 마치 예레미야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장래 일을 이야기하면서 주저하지 않았고 기죽지 않았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 그야말로 주위에서 멸시 천대를 받아도 끄떡도 하지 않은 것처럼 현실이라는 것이 확정된 그 코스 그대로 가고 있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인다면 우리 또한 세상한테 기죽을 일 없고 겁낼 일도 없습니다. 당당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 허황되다고 여기거든요. 허황되고 추상적인 것이 어떻게 현실화되느냐, 어떻게 실제화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에게는 분명히 현실이지만 안 믿는 사람한테는 이것은 허황되다고 치워버린다 그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느냐 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허황되게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그것은 인간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세상을 인간중심으로 보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중심이고 자기중심이죠. 한 가지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흔히들 아시는 내용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이 이야기, 이것을 허황되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녁이 되면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이고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그것이 내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주어지는 저녁과 아침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중심으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신기한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 왜 저녁이 있고 왜 아침이 있습니까?’ 새삼 하나님께 물어봐야 돼요. 평소에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거예요. ‘저녁에 캄캄해야 내가 잠을 잘 자고 아침에 너무 오래자면 담 결리니까 그만 눈뜨고 일어나라고 아침이 있다.’라고 해석할 겁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으로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하니까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 아니고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대자연의 이치지.’ 하고 미루어버립니다. 제가 과학책을 보고 과학을 하는 사람들을 죽 보면 그들은 과학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진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항상 과학을 하면서 인간중심, 자기중심으로 과학을 해요. 우주도 자기중심으로 DNA이야기도 자기중심으로, 모든 의학도 인간중심으로 합니다. 어느 과학자도 자연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밝혀낸 사람이 없어요. 과학자 중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있을 수가 없지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을 이야기하면 전부 다 자기중심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으니 우리가 죽었다가 사는구나.’ 우리 죽었다가 살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부활한 거예요.

우리 인간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죽이고 살리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요. 아예 안 죽이면 돼요. 선악과 따먹었다고요? 생명과 따먹게 해서 안 죽이면 돼요. 선악과 따먹었다고요? 그러면 벌 안 내리면 돼요. 우리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면 성경전체가 하나님 자체가 이해가 전부 다 이해가 안 됩니다. 말도 안돼요. 하나님은 쓸데없는 짓들을 한 거예요.

예수님 중심으로 봐야 선악과 따먹는 것이 저주가 돼야 되고 그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는 일체 따먹어서는 안 되고, 이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봐야 밝혀지는 겁니다. 아담이 왜 있는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왜 있는가? 인간이 왜 있는가를 인간은 파악해 낼 길이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은 왜 있는지도 언급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 신학자들이 ‘인간은 왜 있는가?’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가짜거든요. 그 하나님은 인간위주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왜 있는가.’를 그 신학자들에게 제가 질문하는 것은 이런 뜻으로 한 거예요. 인간 위주라면 인간이 신이 되어야 되지 인간 말고 신이 되어야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를 질문한 거예요.

사람이 여기 있다면 그 사람 자체가 신이 되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을 신으로 만들면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을 신으로 만들면 되는데 인간 말고 신이 왜 있는가, 그 이유가 뭔가를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보기 전에 이미 자기가 자기한테 그런 질문들을 해댔는데 이걸 들키지 않고 고이 숨겨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있어야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내가 하나님이 되면 되지.’라는 본색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속에 숨겨놓는 그 질문을 비겁하게 안 끄집어내는 거예요. 교회 교인들이 뭐합니까? 빌고 있는 거예요. 새벽기도회에서 철야기도회에서 빌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들 앞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빌 것 뭐 있나, 하나님한테 깨놓고 이야기해라, ‘하나님, 두 번 다시 빌지 않도록 내가 하나님 되게 하옵소서.’ 왜 그런 기도를 못하느냐 말입니다.

내가 아쉽게 누구에게 빌 것 없이 아예 아쉬운 것 없이 ‘나 자체가 그만 절대자가 되고 신 마저 쫓아내버리고 내가 그 자리에 앉게 하옵소서.’ 왜 그런 솔직한 기도를 못하느냐 말이지요.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고 저런 구절이 나온다고 하는데 성경에 백날 나와도 우리가 솔직한 기도를 하지 아니하면 그런 해석은 다 거짓말입니다. 다 위선이에요.

목사는 양아치거든요. 양아치들입니다. 서울 다녀오다가 기차에서 보니까 한 떼의 무리들이 노회를 하러 가는 모양이에요. 가면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교회 교인들이 어쩌고저쩌고’ 해요. 목사가 교인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졌어요. 목사가 목회 생각하면 이미 십자가는 관계없어요. 십자가는 벌써 등 돌렸습니다.

목사는 십자가만 생각해야지 교인이나 목회생각하면 안됩니다. 목사가 목회생각하고 교회 생각한다면 이것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귀찮고 이 교회에서 자기가 자기의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본성, ‘나는 신이 되지 않으면 화가 난다.’ 하는 그 본색을 목회라는 이름으로 살림꾸미고 있는 거예요. 교인들은 그런 교회 가서 자기 집안, 자기혈육중심의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너는 네 살림 차리고 나는 내 살림 차리는 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실 때 하나님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꼴좋다. 내 백성아!’ 이 말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조롱을 듣도록, 이런 멸시를 듣도록 하겠다. ‘저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믿다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꼴좋게 쫓겨났다.’”라는 소리를 듣도록 만들겠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이지 인간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인간에게는 먹혀들지를 않습니다. 왜, 인간이라고 생겨난 이상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강렬한데 그게 뭐냐, ‘하나님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중심입니다. 나는 내 중심 포기 못해요.’라는 그것이 계속해서 차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부 다 ‘뒤로 돌아 갓’ 하고 다 훌쳐내고 다 쫓아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런 인간들밖에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자꾸 감추고 안 드러내는 그것을 강제로라도 들추어내주는 것이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백성과의 관계의 취지고 의도였지요.

자기백성이라고 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백성이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차마 모든 인간이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내용을 들키게 만드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만나버리면 내 위주로 성경말씀을 해석했고 내 위주로 교회 나왔다는 것을 들통 나게 만들 때 하나님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최성수의 ‘동행’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지금 함께 동행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가라’ 합니다. 나가라! 이 땅 때문에, 이 땅을 위해서 나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인간 위주가 아니었고 땅 위주였습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9절에 보니까 그 땅을 가지고 ‘언약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은 그 땅에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죽은 자를 위해서 울지 말라. 애통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죽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량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남의 나라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 했지요, 모든 것을 빼앗겨야 그리스도가 보인다고,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다 빼앗길 때에 비로소 빼앗긴 쪽에서 다시 하나님 계신 땅을 향하여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빼앗기지 않으면 빼앗기지 않은 이 땅을 자기 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빼앗겨야, 그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봐야 ‘자기 것이 없는 남의 땅에서 그 동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그 땅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 그 땅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긴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내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 말씀을 엉터리로 해석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추방시킨다면 그 땅은 누가 디뎌야 할 땅인가? 그 땅은 장차 오실 예수님만이 서실 땅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서 땅이란 예수님 계신 곳이 땅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약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제대로 알고 그 언약을 다 이루신 분이 계신 곳이 제대로 하나님 보기에 언약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이야기했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그 당시 포로 잡혀가는 이스라엘한테는 실제고 현실이지만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그런 역사마저 전부 다 추상적으로 들릴 거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와 부활을 실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 살아나신 분도 예수님이 살아났기 때문에. 십자가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이론이고 관념이고 교리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지만 이게 교리정도가 아니고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실제상황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이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살면서 경험해온 이것이 우리 위주의 경험이고 현실이라면 이것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익히 알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저녁이 되고 예수님을 위한 아침이 되기 위해서 변동이 되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예수님 중심의 현실로 바뀌어져야 거기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점점 이야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내 위주의 저녁이 아니고 내 위주의 아침이 아닙니다. 밤에 잠자라고 저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침에 직장에 가라고 아침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그건 모르지요. 하여튼 내 위주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실컷 저녁에 잠자고 실컷 아침에 직장에 나가놓고는 지옥 가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는 평생 듬뿍 받아놓고는 저녁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아침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지옥에 가서 ‘아, 이제야 알겠군요. 그것이 나 위주의 저녁이 아니고 주님 위주의 저녁이고 나 위주의 아침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아침인 것을.’ 이것을 아는 직장인들 몇 명 됩니까? 새한미디어 창업주의 아들이 이것을 알았으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서 자살하지 않았을 것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사람이 오늘 자살했는데 그 사람이 분명히 저녁에 잤을 것이고 아침에 일어났을 것이고 사업이든 직장생활이든 했을 것이란 말이지요. 뭘 하든 이 저녁이 내가 피곤해서 잠자기 위한 저녁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아침이고 저녁인 것을 그 사람이 알았겠어요? 현재 이 대통령이 그것을 압니까? 지금 탈북자들이 그것을 알아요? 베트남에서 한국에 시집오려고 하는 아가씨들이 그것을 압니까?

바그다드의 자살폭탄테러집단이 그것을 압니까?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앙 선생님이 이것을 알았어요? 도대체, 아 ……, 그 사람들은 자기위주가 될 때에만 현실로 보고 자기 위주가 될 때만 역사로 보고 자기 위주가 될 때만 실제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언의 혜택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 예언 속에 있으면서도 전혀 예언을 감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애통하고 운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위주로 산다는 거예요. 사람이 울고 애통할 때는 아직까지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거든요. 전혀 다시 일어날 기력을 완전히 빼앗겨 버리면 허탈해져버려서 허허 웃어버리지 울지는 않아요.

비로소 그때 지금까지 살아온 현실이 내 위주의 현실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약속,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를 그동안 내 자리라고 우겼던 그 오만함, 억지, 바로 그 억지스러운 나 인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셔서 허허, 웃을 정도로 이제는 다 날아가서 일어설 기력도 없고 허허 웃기만 하는 그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습니다.’ 하는 고백이 절로 나오지요.

죽고 사는 것도 주님의 홀로에 해당되는 사항인 것을 알지요. 그런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세리와 창기입니다. ‘내가 세리와 창기가 되어서 회개하면 주께서 용서할 것이고 용서하고 난 뒤에 주께서 크게 쓰셔서 노회장하고 총회장해서 간증집회해서 돈 많이 벌 것이다.’ 이런 계산이 세리와 창기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암에서 나아서 기도원마다 교회마다 간증하러 다니면 수입이 한 달에 500백만 원 된다.’ 이런 계산이 없어요. 그냥 허허, 하고 웃을 뿐입니다. 이제는 죽여 달라는 말도 못해요. 왜냐하면 죽여 달라는 것도 욕심이거든요. 고생 덜하겠다는 욕심. 노숙자생활 중단시켜달라고 죽여 달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아직까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로 희망이 없느냐하면 노숙자 되어서 죽여주든 살려주든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하고 허허 웃어버려요. 그게 지금 다 잃고 내려가는 본문의 이스라엘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울어라. 잡혀간 자들을 위하여 슬피 울라. 그들은 다시 와서 이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나가!’ 이런 뜻입니다.

‘너의 역할은 두 번 다시 이 땅에 오지 못하고 나가야 될 이유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기능이 너의 기능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서신 그 땅에서 살 수 있으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시간이 필요해요. 다시 이야기하면 언약의 땅이 하나님의 땅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가요.

하나님의 시간이 흘러가면 이것은 무엇과 경쟁이 되느냐 하면 내가 태어나서 내 위주로 형성시키는, 내 위주로 순서지우는, 내 위주중심의 일기장과 예수님 중심의 일기장과 전혀 들어맞지를 않습니다. 전혀 안 맞아요. 내 일기장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색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속성 때문에 내 중심이 아니면 어떤 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완전히 꽉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치면 ‘주님께서 일으켰구나.’가 아니라 근본적인 생각은 ‘언제 어디로 이민가면 이 전쟁 통을 벗어날 수 있을까? 뉴질랜드? 호주? 미국?’ 그런 생각이 들지요. 전쟁이라는 것과 나의 이민과 연결시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사고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다. ‘허허’ 웃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도망을 가야되는데 비행기 표 값이 없는 사람입니다. 비행기타고 도망을 같이 갈 일가친척도 없고 비행기장까지 갈 차비도 없는 사람, 전쟁 나서 피난민들 다 죽인다는 소리 듣고 그냥 허허, 하고 웃지요. 항상 하나님의 언약은 뭔가 우리를 잃어버리게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도 아니고 복음중심의 일도 아니고 주의 동행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 위주의 시간을 항상 강탈하고 찢어버려야 돼요. 나 위주의 시간순서, 이걸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항상 내가 원인이 되어서 건전한 결과를 얻어내려고 시도하거든요.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회개하면 복 받는다, 나쁜 짓 하면 저주받는다,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것이 이것밖에 안돼요.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것은 어떤 사람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줘야 믿게 되는데 성령을 주지 않으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것만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힘으로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것은 제 힘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밖에 안 나와요.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유대인의 왕이다.’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에 쓸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다 나름대로 구약성경의 증거를 찾으면서 ‘저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유대인의 왕이냐, 이런 이유로 인해서 아닐 것이다. 만약에 진짜라면 그 증거는 뭘까?’ 이런 식으로 찾고 탐색할 거예요.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증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는 겁니다.

죽어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의 왕은 죽는다.’ 어떤 CF에 보면 ‘……똑같다.’ 라는 것이 있어요. ‘유대인의 왕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이 뭡니까? 그 죽음을 따라가려면 우리가 사라져야 돼요. 우리가 블랙홀에 들어가면 ‘블랙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다 깨져버립니다. 강력한 중력에 의해서 몸의 세포가 다 찢어져버리니까 들어갈 때에는 ‘야, 이게 블랙홀이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들어가 버리면 블랙홀이라는 생각도 다 찢어져버려요.

죽음이란 이런 겁니다. 주님 따라 죽어버리면 ‘죽고 난 뒤에 부활할 것이다.’라는 생각조차도 다 찢어져서 없어요. 그러니 예수 믿고 살아보겠다는 이런 노림수는 그 중심에 나도 한 번 신이 되어보겠다는 그 노림수로 만든 가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이 오게 되면 ‘주님이여, 왜 저로 하여금 주께서 내버리지 않고 왜 부활시키십니까? 왜 주님의 약속을 저에게 적용시키십니까?’ 이래요.

‘살고 싶은데 잘되었다.’ 그것이 아니라 ‘왜 죽었다가 부활한 그 능력이 왜 하필이면 저에게 들이닥쳐서 제가 이렇게 죽어도 살게 되어 있습니까?’라고 할 때 그 내용을 믿음의 내용이라 합니다. ‘네가 죽어도 살겠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살겠고.’를 죽어라고 믿는 거예요. 백날 믿어봐야 그것은 수 쓰는 겁니다. 양아치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어라, 믿어라.’ 하는 거예요. 믿어 봤자 ‘내가 신이다, 내가 신이다.’ 그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에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했을 때 ‘성경말씀 이 모든 말씀이 왜 나에게 다 적용시켜서 이 세상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몸까지 다 포함해서 왜 나의 역사가 아니고 주님의 역사가 되게 하시고, 내가 맞이하는 저녁과 아침이 왜 나의 아침과 저녁이 아니라 왜 주님이 주시는 저녁이고 아침입니까?’ 그 기쁨을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구상하고 내가 상상하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었고 그런 상상하는 이 현실이 다 거짓임을 깨닫게 하는 이 현실이 진짜 주의 중심으로 주시는 현실인줄 압니다. 성경말씀 보면서 이 말씀이 또다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늘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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