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4 12:02

유다 왕 (예레미야 22장 1- 5절)

본문 : 예레미야 22장 1- 5절
제목 : 유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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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강-렘22장1-5(유다왕)-jer100811

유다 왕

2010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1-5

(렘 22: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렘 22:2, 개역)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렘 22:3,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렘 22:4, 개역)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렘 22:5, 개역)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이 모든 행위는 ‘자기 자리 만들기’입니다. 천국이 가려는 시도에도 그동안 자신이 축적해놓은 그 자리를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섬김도 당연히 자기 자리를 다지고 또 다지기 위한 일환으로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왜 오늘 본문 같은 옛날 이야기를 봐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자기 자리 만들기와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일과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오늘날 교회가 진정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냐의 여부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의 지붕을 뜯어내시고 그 자리를 찢는 작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뜯고 찢을 때 과연 무엇이 보여야 합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을 선물을 주십니다. 이로서 그 여인의 내부에는 영원히 분출되는 생명수가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우물, 이런 샘물이 과연 들어있는지 알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자리를 뜯겨야 합니다.

그 뜯는 작업을 통해서 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오늘날 교회도 뜯어내면 바로 이 유다나라가 나옵니다. 그 유다나라가 왜 망해야 하며 그 유다 나라가 왜 구원되어야 하는지를 교회가 배워야하고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통치했던 이스라엘 나라가 솔로몬 이후에 북쪽 나라 이스라엘과 남쪽 나라 유다 나라로 둘로 쪼개진 것을 다들 아시지요.

문제는 왜 나라가 둘로 쪼개졌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망해도 그냥 한 나라가 된 채 망할 수도 있는데 왜 나라가 둘로 쪼개져서 각기 망해야 합니까? 그리고 이왕 쪼개지는 것, 12지파대로 12조각으로 쪼개져도 상관없는데 왜 하필이면 두 조각으로 나뉘어지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진짜 ‘다윗의 자리’을 드러내기 위해 필히 둘로 나뉘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리’가 다른 나라나 민족들이 주장하는 그런 왕의 자리가 아닙니다. 다윗의 자리란 ‘단절’과 ‘출현’을 야기하는 자리입니다. 단절이 가능하지 아니하면 출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단절이란 그 어떤 왕도 다윗의 위로 앉을 수 있는 자격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추방시킨다는 의미요, 출현이라는 것은, 인간 왕이 자리에서 쫓겨나가므로서 숨겨진 다윗의 자리에 앉을 분이 속성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단절’ 기능은 북쪽 나라나 남쪽 나라나 모두 다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남쪽 나라가 북쪽 나라와 차이점은 왕들을 추방시키면서도 꼭 약속을 유효함을 언급하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장에서, 아하스왕이 추방되어야 왕으로 나타나지만 그래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 되리라”는 약속이 그 와중에서 얼굴을 보인다는 점이 남쪽 나라의 특징입니다.

사람이란 그 누구나 자기 자리를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새삼 나쁜 짓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태어난 존재들은 어릴적부터 다 그러합니다.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고 그 마련된 자리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장만한 자리 위에 앉아서는 그것을 사수하고 더 확장하면서 행여 더 좋은 자리가 있는가 두리번거리면서 탐을 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소위 ‘빈 이자 이론’입니다. 즉 자리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힘 가진 자가 먼저 차지하면 그만이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리로 제시한 ‘다윗의 자리’란 그렇게 차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리’가 앉을 사람을 알아보고 결정짓습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자리가 먼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절’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북쪽 이스라엘에게 자꾸만 왕의 자리를 허락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오해, 즉 누구든지 힘을 축적하면 왕의 자리는 거저 주어진다고 여기는 그 오해가 전혀 진정한 하나님의 왕 자리에 맞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열왕기상 16:2-4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쪽 나라 왕들이 진정 앉을 자리는 먼저 저주받은 선왕 여로보암의 자리뿐입니다. 그 자리의 한계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단절시키는 이유는, 인간의 자리란 결국 권력을 집중시키는 중심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끌어모아놓은 것들로 자기 자리를 삼고, 다지고,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그 앉기에 합당한 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지상에 보내지셨는데 그 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리를 사람들로에게서 단절시키는 자리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그 한 남자가 앉도록 출현시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동안 모아놓은 권력 결집력을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리에 앉으신 그 남자분을 죽이시므로서 그 죽음 안에서 구원의 능력을 끄집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힘 없음의 자리로 보여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한 구원의 자리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구원의 능력을 부여받았기에 더 이상 세상적인 자리 형성을 위한 힘을 탐낼 필요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 예가 예레미야 26:23에 나옵니다.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미련없이 외치다가 죽은 우리아 선지자는 이미 자기 자리가 하늘나라에 있기에,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생의 샘물이 영원토록 솟아나고 분출되기에 이 세상에서의 권력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가 다윗의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공들여 쌓아놓은 자리가 도리어 헛짓하는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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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강-렘22장1-5(유다왕)-jer100811

2010-08-12 20:54:50 조회 : 5    이름 : 오용익
 

075강-렘22장1-5(유다왕)-jer10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예레미야 22:1-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날 21세 시대에 2500년 전의 이 예레미야를 우리가 왜 봐야 하는가? 그 때 주신 말씀은 그때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그때 내가 한 소리 했다.’라고 지나가 버린 일이 아닌가, 왜 이 이야기를 우리가 봐야 되는가?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았잖아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위에는 뚜껑을 달고 밑에는 자리를 깔고 그렇게 살지요.

여름철에 피서지에 가보세요. 텐트 친 것을 보게 되면 위에는 텐트 지붕이 있고 밑에 돗자리를 깔지요. 덮고 깔고, 인간이 자기 자리를 잡을 때 그런 식으로 잡는 것처럼 신약의 교회라고 할 때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거룩하게 보이는 그것으로 뚜껑을 삼고 밑에 자리를 깔고 ‘이것이 교회다.’라고 우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뚜껑을 확 열어 제쳐버립니다. 뜯어버리면 그 안에서 우글거리는 구더기도 나올 것이고 쥐들도 나올 것이고 온갖 것이 다 나오지요. 금요일에 공사를 할 것인데 타일을 뜯어보면 물이 어디서 새는지를 알게 될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 딴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신다. 유다를 지키신다.’ 하지만 주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시공을 하는 겁니다.

무슨 시공인가, 뜯어내는 시공을 해요. 자기가 감추었던 것을 뜯어내면 안에서 뭐가 나와야 되느냐? 요한복음 4장에 그것이 잘 나와 있어요. 샘물이 두 종류의 샘물이 있습니다. 고인 샘물과 계속해서 나오는 샘물, 이렇게 두 종류의 샘물이 있어요.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 살면서 바깥에서 얻어 챙긴 지식, 이런 것을 가지고 우물을 흉내 내고 하나님의 샘물을 흉내 내서 우리 안에 장착하고 있는지, 그걸 내가 관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안에 내가 원치 않는 주님이 심어준 생명수가 늘 터져 나오는, 생명수가 나오는 우물을 주께서 장만해주셔서 주께서 관리하시고 주께서 분출케 하는 그런 샘이 있는지, 이것은 뜯어볼 때 아는 거예요.

뜯어보면 그렇게 뜯기는 것에 대해서 아주 고맙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면서 ‘원래 이 겉치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시 내 안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이렇게 흘러넘칩니다.’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고 고마워서 남에게 떠벌리는 성도가 있는 반면에 좀 뜯어내려고 하면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이걸 숨기면서 ‘신앙생활 몇 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하게 되면 참 곤란하지요.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쓰는데 그야말로 샘솟듯이 문장들이 속에서 터져 나와서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으면 선생님이 일기장을 검사한다고 하면 ‘어서 검사하세요.’ 하고 내미는 반면에 자기 글은 없고 순 남의 것 베끼고 개학날 가까워서 몇 주일 치 일기 한꺼번에 다 써 오면 ‘아니 되옵니다.’ 하고 숨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짜 만들어 가시는 백성인지 아니면 자기가 모방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쯤 하면 백성 아니겠어.’라고 자기가 다듬는 종교생활로 어설프게 만드는 가짜교인인지, 그것은 주께서 뜯어내시면 들통 나는 겁니다. 그 뜯는 작업을 본문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라는 시공사, 철거반을 보내서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면 뭐가 있느냐, 뭘 가지고 따지느냐? 본문에서 ‘유다 왕’ 자리를 가지고 따지는 거예요. ‘아니 다윗의 자리가 뭐 길래?’ 다윗의 자리가 이런 거예요. 보통 세상사람 자리는 자기가 자기 자리를 마련합니다. 비슷한 설교를 한 기억이 나는데요. 내가 어릴 때 알았던 가수 중에 김용만 인가, 하는 분이 있는데 그 가수가 불렀던 노래 중에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1.빙글 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없어 비워 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 버렸다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2.돌아가는 의자에 회전의자에
과장이 따로있나 앉으면 과장인데
올때마다 앉을 자린 비어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 보자고
아아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그 가사에 보면 ‘빙글 빙글 돌아가는 회전의자에 아무나 앉으면 주인이지’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북쪽 나라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임금 자리는 앉은 자가 주인노릇 한다는 거예요. 빙글빙글 도는 회전의자는 차지한 자가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먼저 차지하면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힘 센 자가 와서 잡아당기면 앉아있던 자는 쫓겨나고 새 주인이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의자는 항상 빈 의자, 자리가 비어있다는 겁니다. 먼저 본 사람이 임자고 앉은 사람이 임자라는 겁니다. 그 노래에 그런 가사를 붙인 이유가 하도 온 동네가 다 사장들이 되어서 ‘타고나면서부터 사장인가 노력해서 빈자리 차지하면 사장이지, 빙글빙글 회전의자 아무나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요즘에는 칠성시장에서 5만원만 주면 회전의자 삽니다. 거기 앉아서 혼자 재미있고 돌고 또 돌면 되겠지요. 그런데 남쪽 나라 유다는 달라요. 뭐가 다른가, 의자가 결정한다는 겁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이 합당치 않으면 의자가 발로 차버립니다. ‘감히 어디서 의자를 얕잡아보고 이 의자에 앉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질 때 하나님께서 왜 둘로 쪼갰는가?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왜 둘인가? 둘로 쪼개서 망하게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그냥 망하게 하면 되는데 왜 둘로 쪼개놓고 망하게 하는가? 둘 다 나중에 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져서 한쪽은 이스라엘 한쪽은 유다로, 왜 둘로 쪼개놓고 망하게 하시는가, 그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야 이데올로기 문제로서 북한은 소련이 들어오고 남한은 미국이 들어와서 분단이 되었다고 하지만 왜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을까, 이것은 신학교 3년 동안 구약을 공부하면서 이것을 이야기한 교수가 없었어요. ‘목사님, 물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는데 물으면 찍힙니다. 신학교에서 그런 질문을 하면 요주의 인물이 돼요.

그리고 교수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로 교수가 공부했던 그 과정에서도 왜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책을 들춰보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져봐도 왜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었는가를 속 시원히 말해주는 어떤 자료도 없어요. 혹시 있는데 제가 못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없습니다.

그게 왜 둘로 나뉘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체에서 숨어 있는 다윗의 자리, 이것을 다윗언약이라 하는데 그 숨어 있는 다윗의 자리에 대해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오해하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단절과 출현인데, 단절을 보여주기 위해서 북쪽 나라가 있고 출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쪽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다윗의 자리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북쪽나라는 어떤 왕이 와도 쫓겨나는데 급급해요. ‘나가!’ ‘아무나 앉으면 의자 주인 아닌가?’ ‘이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힘 있다고 그걸로 다윗 왕이 되는 줄 알아? 이스라엘 되는 줄 알아? 나가! 꺼져!’ 그 기능이 북쪽 나라 기능이라면 남쪽나라는 흔히들 생각하기를 ‘다윗의 등불’이 있기에 그 다윗의 등불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나라를 지켜준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남쪽 나라 유다나라의 특징은 ‘너도 유다나라와 똑같아. 나가!’라고 하면서 거기에 덧붙여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그 자리에서 왕을 물러나게 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본래의 다윗의 정신이 피어난다는 점이 북쪽과의 차이점입니다. 둘 다 인간의 어떤 왕도 다윗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은 북쪽이나 남쪽이나 다 같이 해당되는데 북쪽 남쪽의 차이는 그렇게 추방하면서 선지자를 보내서 하지만 미래의 다윗의 자리에 앉을 분은 이런 분이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자리에 앉을 분은 오시는데 하여튼 지금의 너희는 아니다, 라는 것을 남쪽에서는 이야기하는데 북쪽에서는 ‘너는 여기 앉을 자격 없어. 너는 기껏해야 여로보암의 자리일 뿐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수련회에서 사람들이 참 어려워하는 성경을 많이 강의했습니다. 잠언, 시편, 욥기, 요한복음도 했고 이번에는 레위기를 했는데 아직도 수련회를 참석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성경이 역대기라는 거예요. 역대기는 참석해서 공부했는데도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겠다는 거예요. 역대기가 분명히 성경에 있고 에스라 느헤미야도 다 역대기에 속합니다.

역대기가 왜 있는지 한 번 알아보자고 시작했는데 죽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기가 대체 주제가 뭔지 감도 안 잡힌다는 거예요.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역대기를 보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영화를 봐야 영화이야기를 할 때 동의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보기도 싫은 영화인데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알 도리가 없잖아요.

역대기가 뭐냐 하면 ‘숨어 있는 다윗의 자리가 현재 왕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분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느냐.’ 그 대비를 시키는 것이 역대기입니다. 그러면 역대기를 알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께서 단절을 시키고, 북쪽 남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왕을 다윗의 자리에서 단절시키는 거예요, 꺼져, 나가, 너 아니야, 단절시키고 두 번째, 출현한다는 이것이 참 어려워요.

이것이 어렵기에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뭐라고 했느냐하면 ‘네 속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출현입니다. 계속 생성되고 발생되는 거예요.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뭐냐? 주님께서 심어놓은 영생의 물을 증거 하는 장식품, 조각품에 지나지 않아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그냥 껍데기죠. 그런데 북쪽 나라 남쪽 나라는 내 자리를 장만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 자리가 깨어지고 거기서 영생의 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나와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왕의 자리가 내 자리군요.’ 자꾸 내 자리를 장만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유다나 이스라엘 왕한테 우리가 욕할 것이 못돼요. 왜냐하면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루아침 일과의 주제가 뭐예요? ‘오늘도 내 자리가 안정되게 하옵소서.’ 그것뿐이에요. ‘오늘도 내 자리 확장되게 하옵소서.’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사업을 하든지 직장생활을 하든지 사업번창과 승진 모든 것이 이것은 남의 자리가 아니고 바로 내 자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됩니까? 그렇게 해서 구원이 안 된다고요. ‘이것은 내 교회다.’ 자기 교회라는 거예요. 자기 교회가 구원을 합니까? 그게 균열, 찌그러져야 돼요. 폭파된 거기서 주님의 생명이 마그마 분출하듯이 쫙 솟구쳐 올라와야 됩니다. 마치 온천 터지듯이 ‘심봤다!’ 하는 것처럼. 미국 영화 <자이언트>에 보면 석유 파는 메뚜기 같은 기계로 파다가 드디어 석유 나올 때 온 몸에 시커먼 기름범벅이 되어서도 부자 되었다고 좋아하는 것처럼 ‘심봤다!’ 하고 그야말로 다이아몬드광산 터진 것처럼, 매장량 많은 유전이 터지는 것처럼 우리 속에서 터져야 돼요.

터져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머리위에 어깨위에 범벅이 돼야 돼요. 그게 안 되면 우리는 아직도 내 자리 나를 천당 보내는 자리 만들려고 열심히 말씀 지키고 법 지키고 온갖 노력을 다해서 자기 자리 굳히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요.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고맙게도 예레미야를 보내서 그 자기 애씀을, 그 콘크리트바닥을 뜯어내 주십니다.

뜯어내는 것이 있어요. 매일같이 뜯겨야 돼요. 굳은 살 어떻게 합니까? 뜯어내야 새살이 나오지요. 그 뜯겨야 될 것을 가지고 저는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논문에서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굳은살인데 그것은 다 권력입니다. 자기영역, 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나의 권력이 자리마다 있어요.

양로원에 가도 마찬가지고 노인정에 가도 유치원에 가도 마찬가지고 쌍둥이가 태어나면 저희들끼리도 마찬가지고,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이것은 내 자리야.’ 하고 싸웁니다. 초등학교 애들이 한 책상을 함께 쓰게 되면 칼 가지고 선 그어서 팝니다. 선 넘어오지 말라고 하면서 책장이라도 넘어오면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이것은 내 자리다.’라고 합니다.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 자리, 자기 자리밖에 모르는 인간을 지금 구원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껏 잘하는 것은 자기 자리에다 하나님의 말씀 집어넣고 기도 집어넣고 완전히 비빔밥을 만드는 거예요. 전도, 헌금, 교회봉사, 새벽기도 나오기, 이것을 집어넣어서 콘크리트로 다지고 다져서 경화제까지 넣어서 튼튼하게 해 놓으면 그것이 마치 천국갈 수 있는 단단한 자리인줄 알고 목사들은 그것을 또 강조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해야 됩니다. 뜯겨야 되는 거예요. 다른 권력이 있어야 돼요. 그 와장창 하고 뜯어내는 그 힘이 다윗의 자리가 본래 가졌던 자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입니다. 그것이 제 책 『피』의 첫부분에 나와요.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구상한 모든 계획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속으로 전체 계획이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확정된다.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개인적 견해와 집단적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쓰레기 치우듯 그만 사라져 주어야 한다. 십자가만이 진리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갈 2:20) 사람이 개인적으로 사업에 낭패를 봤든지 부도를 맞았든지 교도소에 가게 되든지 불구자가 되든지 가정이 파탄되든지 교회가 문을 닫든지 간에 상관없이 십자가만이 사실이다.」『피』, 15쪽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자기 자리 구축하기 위해서 ‘주여, 주여’ 부르짖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희생한다고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나하고 상관하지 않고 내 곁에 한 남자를 보내시고 그 남자를 죽여서 구원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며 내가 지금까지 애쓴 것은 뭡니까? 말짱 도루묵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헛짓을 한 거예요.

기껏 내 자리에 의로움과 거룩을 채워서 그렇게 채워 넣은 거룩 가지고 구원되리라고 오해한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담의 본성으로 태어나는 죄의 단면이고 모습입니다. 꾸역꾸역 온갖 좋은 것을 자꾸 집어넣어요.

성화 론이 나오면 성화 론을 집어넣고 또 새로운 것 나오면 그것 집어넣고 나중에 보면 쓰레기만 가득하게 있어요. ‘주님께서는 한 남자를 죽였다. 너는 너의 열심을 믿지 말고 그 남자가 죽은 그 사실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을 네가 믿느뇨?’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얼마나 홀가분하고 얼마나 가볍습니까? 참 가볍지요.

50년 60년 체증 다 내려가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보이는데요. 얼마나 가벼워요. 주께서 한 남자를 죽여서 그 남자가 죽은 그 근거로 구원받았다. ‘주여, 제가 애쓴 것은요?’ ‘그것은 뜯어내버려라.’ 이것이 오늘날뿐 아니고 그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26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을 쳐서 예언하매 ……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제가 이 대목을 찾은 이유가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 말고 또 다른 우리야, 예레미야 당시의 선지자 우리야가 있는데 그 사람은 예레미야가 전한 그것이 맞다고 한 거예요. 예레미야가 진짜 하나님의 종이 맞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전한대로 ‘이 유다나라는 뜯겨야 된다.’는 거예요.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십자가마을 망해야 되고 우리교회 망해야 된다는 말하고 똑같은 겁니다.

제가 말 했지요? 저주 없이는 십자가마을이 되는 일이 없다고. 그러니까 십자가마을에 있는 이 근호라는 작자가 그 인간을 죽여 버렸어요. ‘이게 어디서 십자가마을을 욕하고 있어.’ 하고 죽여 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근호라는 작자가 한 짓이 뭡니까? 결국은 ‘주여, 주여, 복음, 복음’ 해놓고는 무슨 자리? 자기 자리 다지고, 다지고 ‘누가 감히 이 자리를 넘봐? 이 권력의 자리를 누가 감히 손대.’라는 식으로 나온 겁니다.

그 우리야가 어떻게 되었는가? 여호야김 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 성경말씀에 왜 나옵니까? 이것은 그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아무리 우리야가 진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고 아무리 우리야가 바른 소리를 해도 ‘아이고 인간아, 권력에 얻어맞아 죽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지 않습니까?

우리야가 목회를 크게 했다든지 그런 것이라면 몰라도, ‘복음을 전했더니 사람들이 존경에 존경을 마지않았으며 그의 설교 CD가 만장이 팔렸더라.’ 그렇게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야선지자는 그냥 ‘예레미야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하는 거예요. 그 소리해서 그냥 죽었어요. 죽을뻔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죽었어요.

그것도 곱게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가 죽고 난 뒤에 그 시체를 보란 듯이 시범조로 ‘어디서 권력에 대항하고 까불어.’ 한 거예요. 우리야가 죽었다는 이 말은 이 자리싸움이 지금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여튼 목사가 입을 떼서 설교를 해도 결국은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교인들은 몰라요.

목사가 무심코 ‘제직회 합시다.’라고 내뱉는 그 문장 한마디가 ‘이 교회에서 나는 내 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아마추어들, 일반교인들은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같은 목사들은 낌새를 채지요. ‘아하, 장사하려고 하는구나.’ 제가 목사의 예를 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었습니다.

우리는 순교했다는 우리야가 별로 안 좋아져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그 우리야 선지자는 진짜 알았지요.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나중에 보내서 그 남자 죽임으로써 ‘우리야 네가 죽든 말든 그 시체가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너는 구원받았어.’라는 말을 우리야가 알고 예레미야가 알았더라면 우리야는 이 사실을 그대로 자기백성에게 전하지요.

전할 때 ‘이렇게 전하면 자기 팬들이 얼마나 많아질까, 이렇게 전하면 저 사람들이 너무 화를 내지 않을까?’라고 주춤거리면서 이런 통박, 이미 하나님의 뜻을 홀가분하게 알아버린 사람들한테는 ‘이걸 전하면 내자리가 얼마나 확고할 것이고 뭘 가질 것인가.’의 계산, 꼼수를 쓰지를 않습니다. 그런 꼼수를 안 쓰지요. 그냥 ‘이게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저는 설교를 하면서 늘 느끼는 점이 이거예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간다, 이것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문제는 목사 입장에서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아느냐 그 말이지요.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위주의 하나님이 따로 있는 판국에 쑤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늘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교인들에게 구원을 시킬 수가 있겠는가, 이게 고민이에요. 목사로서 제 개인입장에서는 고민인데, 바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서 그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그 말이죠. 그런데 그 바른 하나님 바른 주님은 성경에서 꼭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자리 날아가더라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여유만만 해서 전할 때 바로 그렇게 진짜 하나님은 전달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아는 이상 ‘아, 교인들이 진짜 이 뜻을 알고 곧이 믿겠는가?’ 믿어야 구원받는데 사실 인간으로서 세상도 모르는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 천지를 안다는 이것은 기적이거든요.

그런 기적적인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버리면 성경에서 어떤 비참스러운 최후를 말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 때문에 신경 쓴다든지 두려워한다든지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끝으로 시편을 보겠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시편 78편 67절, 68절에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북쪽나라와 남쪽나라를 갈라낸 이유가 ‘이 따위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라고 버리기 위해서 ‘나는 이스라엘은 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있고 남쪽 나라는 북쪽나라하고 똑같이 왕들을 보면 전부 다 자기권력, 자기자리 보전하고 확장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남쪽 나라인 유다가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다윗언약에서 택했다는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어설픈 왕들을 갈아치우는 가운데서 샘처럼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항상 ‘하나님, 이것은 내 자리입니다.’라고 여겼던 것을 주께서는 깨버리고 위태위태하게 만들고 “언제까지 그것을 네 자리라고 하는지 보자. 그것은 네 자리 아니야. 내가 휙 하면 그것은 훌떡 날아갈 거야. 중요한 것은 네가 만든 자리 말고 내가 집어넣은 자리 ‘너는 내가 창세전부터 선택했다.’는 그 자리, ‘에브라임은 택하지 않았고 유다는 택했다.’ 하는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했다는 그 자리,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택함 받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그 자리, 그 자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너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너 자랑하지 말고, 너 구원받은 것 자랑 말고 주님 증거 하라고, 주님 자랑하라고 너를 태어나게 했느니라.”

그러한 소식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눈만 뜨면 24시간 내 자리 단도리하고 내 자리 사수하고 지키고 확장하고 깨지지 않을까 하면서 조마조마 하는 식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울증 걸리고 걱정근심 늘어지는데 이제는 내 자리 말고 창세전부터 선택한 주님의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우리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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