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5. 13:53

멸망의 소식 (예레미야 22장 24-30절)

본문 : 예레미야 22장24-30절
제목 : 멸망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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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강-렘22장24-30멸망의소식-jer100922

멸망의 소식

2010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24-30

(렘 22:24,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렘 22:25, 개역)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렘 22:26, 개역)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렘 22:27, 개역)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렘 22:28, 개역)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렘 22:29, 개역)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렘 22:30,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구원도 안 받은 주제에 세상에 어슬렁거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 운명인가를 오늘 본문이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세상 관점에서 얼추 성공했노라고 자부해봐도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비록 평소에 아무리 하나님의 몸체와 하나가 된양 늘 같이 했던 반지않은 존재도 하나님께서 범죄했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내침을 당합니다. 이런 경우의 모델로서 ‘고니야’라고 불리는 유다나라의 끝자락 왕 여호야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칠 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침을 당해 저주받은 여호야긴 가족에서 초점을 모을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이라는 것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어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30절에 ‘다윗의 자리’라는 말로 언약을 나타냅니다.

이 언약의 마지막 완성은 새언약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됨이 드러날 때, 우리 인간편에서 서서 서러워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인됨의 등장과 더불어 오직 정결한 것은 예수님과 그 하신 일 뿐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 경탄하고 영광돌려야 합니다.

즉 “내가 깨끗하다”는 것을 찾을 생각말고 “예수님께서 이 정도로 깨끗하시고 깔끔하시는 구나”를 드러내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피조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영광의 전부입니다. 진정 깨끗함을 만난 사람은 오직 ‘경악’ 뿐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 덮쳤다는 말은 곧 제대로 된 정결함과 거룩함이 이미 우리 자리에 임재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홀로 깨끗하고 거룩하다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사람의 표징입니다. 가장 추잡고 더러운 설교는 ‘성화하자’는 설교입니다. 그것이 여전히 자신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미련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하얀 백지를 표현하라고 할 때에, “하나님은 하얀 분입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뭇 소리말고 스스로에게 시커먼 콜타르를 바가지 채로 덮어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원래 창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도 오직 예수님만이 정결함으로 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존재에 담긴 비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여전히 죄 아래 놓여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여호야긴이 하나님 앞에 나쁜 짓해서 멸망했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멸망당하지 않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을 보면서 단층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즉 여전히 자신은 살 권리가 있는 자라고 여기는 겁니다. 관심사가 자기 구원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이런 사람은 자신들 속에 깨끗해야 될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모독하는 악마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단층적으로 성경을 보니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자신들이 맞춰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보니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자라 할지라도 심판해버리니 이들은 자기 신세를 생각해서 염려가 되고, 또한 심판해버린 자를 이번에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해버리니, 도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어떻게 장단을 맞출지 종잡지 못하게 됩니다.

나훔 선지자의 글 1장2절에 보면, 투기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대적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3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권능이 크신 하나님,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7절에는 선하신 하나님, 8절에는 멸하시는 하나님,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는 하나님, 9절에는 온전히 멸절하시는 하나님, 다시는 재난을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고, 12절에는 멸절하시는 하나님,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 다시는 괴롭게 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3절에는 결박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14절에는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시는 하나님, 무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고 15절에 악인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노하시는 분인 동시에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니 그런 하나님에 보조 맞추려는 자신들은 구원관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겁니다.

일관성없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어느 속성에 맞추어야 자신의 구원이 보장받는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의로움은 반드시 죄와 짝만 맞추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처지만 계산하는 그 1층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2층을 준비하시는 그 2층을 위한 1층의 상황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1층에서 2층으로 이동하면서 인간은 예수님의 깨끗함 안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자신의 심판성과 죄악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난임의 언약의 깨끗함과 정결함을 제대로 만나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자리’란 그동안 1층의 이스라엘 죄인들을 덮어주던 2층의 희생물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란, “우리가 이것 때문에 용서받고 삽니다‘를 보여주는 기능을 일어난 자리인 것입니다. 고니야를 인장반지같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긴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죄로 묻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의롭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기능을 말하고 보여주어야 될 자리가 왕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긴은 희생자 되시는 하나님 대신 세상적인 힘을 제공하는 그런 이방신적인 것을 쳐다보고 살아온 것입니다.

유다의 하나님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지시했느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아들이 아닙니다. 다른 훌륭한 이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아들과 존재는 따로 특별히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이삭이며 그 이삭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성도는 그 2층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추하고 더러운 1층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용서받았음에 시선을 가져가게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의 층이 벗겨지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혹독한 저주의 자외선에 그냥 노출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한 시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눈 돌리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만 주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만이 깨끗함에 대해 경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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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렘22장 24-30(멸망의 소식)-jer100922-이 근호 목사

2010-09-25 13:31:55 조회 : 2    이름 : 오용익
 

078-렘22장 24-30(멸망의 소식)-jer1009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24절부터 3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2:24-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 내용에 고니야(여호야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고니야는 왕입니다. 유다가 망하기 전전대의 왕입니다. 고니야의 다른 이름이 여호야긴인데 이 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께서 지목하면서 다루십니다. 그의 미래에 대해서 놓치지 않고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본때를 보이는 식으로 그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잘되었다, 그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30절에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라고 하고 그 사람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26절)라는 아주 저주스러운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삶을 주목해서 아주 파멸적으로 비극적인 장면을 이야기하는 그 근거는 30절에 나옵니다.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의 위, 다윗의 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이, 넌 이런 존재야. 이런 인간이야.’라고 할 때 그렇게 지목하는 근거가 있는데요, 그 근거는 다윗의 자리에 앉아야 될 자가 앉지 못하니까 거기서 파생되는 결과가 너무나 비극적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을 볼 때에 언약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한 사람을 언약으로 비추어서 ‘언약에 비추어서 너는 아주 슬픈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쉽게 말해서 오늘 언약을 가지고 세상을 한 번 봅시다.

언약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면 ‘구원이 안 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살맛을 느끼느냐.’ 그 말이죠. TV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들에다가 다 언약을 적용시켜 보는 겁니다. 저 사람은 자기 딴에는 훌륭하다, 하지만 언약의 입장으로 봐서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대체 구원이 안 되면서도 어떻게 세상사를 생각하고 있느냐 그 말이죠. 정말 아주 웃기는 일입니다. 구원이 안 되면서도 대통령이라고 우기는 그 사고방식, 구원이 안 되는 가운데서도 한골 넣었다고 좋아하는 것, 구원이 안 되면서도 홈런을 쳤다고 좋아하는 프로야구선수, 구원이 안 되면서도 사법고시 합격되었다고 좋아들 하는 사람들.

그만큼 구원이란 것이 우리가 눈 돌리면 안 될 뚜렷한 현실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지금부터 구원이 안 될 사람들을 죽 설명하겠습니다. 구원이 안 될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야, 이 여호야긴(고니야)이라는 사람은 결국 망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안 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이 여호야긴처럼 저주를 안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다.

그게 구원이 되지 못할 자들이 공통점이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가지고 들이대는 것은 고니야라는 사람, 여호야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오른손의 인장반지처럼 딱 몸에 붙여서 다닐 만큼의 귀중품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면 하나님께서 버린다.’라고 했을 때 구원이 안 될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전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구원됩니까?’라는 발언, 그런 질문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특징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동행하면서 은혜를 줬던 이 여호야긴 왕도 내가 이렇게 아주 참혹스럽게 저주하고 내쳐버린다.’ 이 말은 그만큼 언약이라는 것이 깔끔하게 깨끗함을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진짜 언약은 깔끔하게 깨끗하구나, 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가 그 앞에서 도저히 우리 힘으로 우리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약 앞에서 우리는 으악! 하고 경악스러워 할 때 하나님은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네가 나의 깨끗함을 봤구나.’ 그러면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몫은 다 한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심판을 느낄 때 그 은혜가 다가왔다는 발자국입니다. ‘으악! 나는 추접하고 더러운 인간이구나.’ 할 때 이미 우리 안에 은혜가 덮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추함을 발견하면서, 너무나 혼쭐이 날 지경으로 그 추함을 발견할 때 그것이 한 세트가 되어서 주님의 언약의 깨끗함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절묘한 타이밍이 됩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저주라는 굴레를 못 벗어났기 때문에 무슨 발언을 하느냐 하면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관심사가 자기 쪽에 머물러 있어요. 쉽게 말해서 구원 받겠다 하는 말은 아직까지 ‘나도 깨끗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놈입니다.’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사람은 제대로 깨끗함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불 심판이 있다고 하니까 미리 앞서서 그거 면해보겠다고 자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 하나님의 거룩과 언약과 말씀은 산 건너오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거룩을, 그 심판을 이기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거예요. 준비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진짜 추하고 추한 모습이에요.

제가 보는 가장 더럽고 추한 모습은 성화론 설교에요. 더러워서, 추잡스러워서 못 듣습니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더러운 사람은 수녀들입니다. 안 깨끗한데 왜 깨끗한 체를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진짜 수녀가 하나님의 깨끗함을 맛보았다면 수녀 복에다 콜타르 가지고 시커멓게 칠해 버립니다. ‘내가 깨끗해지려는 이것만큼 더 더러운 짓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콜타르를 아예 뒤집어 써 버려요.

사람들이 죄악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단층으로, 1층으로 봐요. 세트로 보지 않고 단층으로 보게 되면 ‘여호와긴 왕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벌 받았다.’고 하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오른손의 인장반지같이 은혜를 주신 사람인데 심판을 하시거든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죽 은혜를 주셔야지 왜 심판을 하십니까?’라는 이 문제 하나와 ‘심판을 하시면 다시는 은혜를 안주셔야 되는데 왜 심판해놓고 또 다시 은혜를 주십니까?’라는 이 문제, 이것이 풀리지를 않아요.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선지서 나훔 1장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2절에 보면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보복하시며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는 분이고 8절에 보면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 내시”는 하나님이에요.

9절에 보면 여호와는 “온전히 멸 하시”는 분이고 12절에도 “반드시 멸절”하시는 분이고 15절에 보면 “서원을 갚”으시는 분입니다. 어쩌라는 겁니까? 이랬다저랬다, 이랬다저랬다 아예 중구난방이에요. 그 장단에 누가 춤을 춥니까? 그 장단에 누가 맞춰서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입니까? ‘노하시는 분이고 또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고.’

노하시면 아예 노하시든지 노하기를 더디 하시려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든지 하셔야지 그 변덕스러운 성깔을 누가 맞춰서 누가 구원받습니까? 개혁주의성화론 자들은 미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성질을 맞춘다고 개혁주의 성화 론으로 신학을 만들어놓았는데 성경을 보니까 변덕도 이런 변덕쟁이가 없어요.

바울서신에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다시는 버리지 않는다.’(롬 8:39)고 해놓고는 또 ‘성령의 빛을 얻어놓고는 더럽히면 멸망시킨다.’(고전 3:17) 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은혜 받았다고 안심도 못하고, 심판받았다고 해서 또 절망해도 안 되고. 바로 그런 인식자체가 ‘하나님, 나는 어찌되었든 구원받아야 되겠다.’하는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왜 구원받으려고 하는데요?’ ‘저는 아직도 깨끗하다고 자부하거든요.’ 그거다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깨끗한가, 덜 깨끗한가, 회색인가, 노랑색인가, 분홍색인가.’ 그걸 찾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한 마지막 언약, 새 언약, 십자가의 그 깨끗함, 거룩함에는 어느 피조물도 감히 그 앞에서 다만 입을 틀어막을 뿐 설 자가 없다는 겁니다.

새 언약의 성결함, 깨끗하고 깨끗함만 폭로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완성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층이 1층에 머무르면 안돼요. 층이 세트로서 짝을 찾아야 되는데 2층이 있어요. 1층에서 2층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멸망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사건입니다. ‘너는 이제는 망해야 돼.’ 할 때 그 사람은 1층에 머무르던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2층이 감이 오는 겁니다.

‘아하, 나 중심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깨끗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추하고 더러운 인간을 그동안 추하고 더럽게 인도하셨구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세트로 발견하는 겁니다. 1층과 2층을 가지고 세상을 아우르면서 빛을 쏘이는 가운데 전체를 조망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주여,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그 즐거움, 그 환희!

주님의 관심사가 ‘주님의 십자가 피 만이 거룩하고 정결하고 그 외에 어떤 것도 정결치 못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비로소 풀리는 선악과의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만약 하얀 종이라면 ‘너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할 때 ‘예수님은 하얗고 나는 약간 덜 하얗습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깨끗함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하얀지?’ 이러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자기 종이를 시커멓게 칠하면 돼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날마다 자기 종이를 시커멓게 색칠하면, 시커먼 연탄덩어리로 자기를 칠해대면 그것으로 ‘예수님만이 하얗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것 말고 달리 예수님의 깨끗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접촉한 사람들의 정신없는 활동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비로소 알게 된 사람들의 눈뜬 행동이에요. 성령의 열매지요. 그 앞에서 세상살이하면서 무슨 한이 맺혔다는 둥, 우리 아버지가 고아였다느니, 나는 세상에서 이런 고생을 했고, 이런 설움을 받았고, 여행하다가 설사를 했다든지 혹은 멀미가 났다는 이런 이야기가…….

조롱을 받아도 주님만 받아야 되고 우리는 조롱받았다고 입을 뗄 수도 없는 인간이에요. 멸시받았다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탓을 하면 안 됩니다. 진즉에 멸시 받아야 되고 멸시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님 종이는 하얗고 황금색으로 빛이 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본문에 보면 ‘다윗의 위’라는 것이 나옵니다. 다윗의 위라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닦달내시는 것은 여호야긴이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너의 왕 자리에는 다윗의 후손 외에 앉을 자가 없어.’ 그 말은 주님께서 무엇을 부각시키느냐 하면 ‘다윗 왕, 그 왕의 자리’입니다.

그 왕의 자리가 뭐냐 하면 1층을 덮는 2층의 자리입니다. 1층은 죄인의 자리고 2층은 그 죄를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는 희생의 피가 묻혀 있는 자리가 2층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에서는 2층이라는 다시 말해서 왕이라는, 장차 다윗의 자리라는 이 죄를 용서해주는 근거가 담겨 있는 항아리, 그러한 피가 묻혀 있는 항아리가 층을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다윗의 자리를 이동하면서 그 덮고 있던 은혜의 층을 잠시 철수한 거예요. 평소에 죄인의 자리를 덮고 있던 은혜의 자리가 철수하니까 죄가 그대로 다 노출되는 겁니다. 설교를 하면서 사람들이 못 알아먹겠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죄 있는 곳에 저주 있습니다.’ 그 말입니다. ‘죄 있는 곳에는 저주 있습니다.’ 하나라도 죄가 있으면 온갖 저주는 다 오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는 저주가 오고 죄가 없는 곳에는 축복이 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알아들어요. 죄 지었으면 저주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서 왜 입이 당나귀처럼 튀어나옵니까?

오늘도 죄지었고 어제도 죄를 지었으면 어제나 오늘이나 저주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일도 저주받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돼요.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축복이 오는 이유는 2층, 우리가 얼굴을 돌리지 말고 눈을 돌리지 말아야 될, 우리 죄를 죄로 보지 아니하시고 그 죄를 다 커버해주시는 은혜의 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왕의 자리, 메시야의 자리를 그동안 이스라엘이 쳐다봤어야 돼요. 그걸 쳐다보지 않고 엉뚱하게 이방나라가 섬기는 용서의 왕의 자리가 아닌, 메시야의 자리가 아닌 이방나라의 출세하고 성공하는 그것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다윗의 자리가 그 자리를 이동해 버립니다. 2층이 갑자기 뜯겨져 나가는 거예요. 지붕이 태풍에 훌렁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죄짓는 자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우상섬기고 벌 받는 것이 당연한데 당연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소리를 왜 하느냐 말입니다. 주님께서 메시야의 자리, 그 2층의 자리를 떠날 때는 인간의 힘으로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계속 만들어 가십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참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은혜를 모독하는 자리에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같이 키득거릴 수밖에 없는 즐거운 일들에 합세하게 만들어요. 복음을 안다는 자가 자진해서 복음을 모독하는 것에 기분좋아하면서 으쓱으쓱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안 그러고 싶어도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갑니다.

십자가 피를 얕잡아 보고 흔쾌히 무시할 수 있는 그 장, 쭈뼛쭈뼛 거리다가 나중에는 불신자와 함께 신나게 아주 가볍게 피를 모독하는 그리로 흥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으로 주께서 계속해서 몰아가요. 몰아가는데 그렇게 몰아가는 와중에서 성도한테는 아차, 하면서 갑자기 눈을 하나님의 용서의 자리, 십자가피가 떠오르는 거기에 눈을 돌리게 만들지요.

불신자, 지옥 가는 인간들, ‘예수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인간들과 같이 까불다가, 주의 주신 말씀을 같이 짓밟고 모독하다가 어느 순간 그 십자가의 피를 보면서 얼굴이 파래지면서 ‘주여, 죄인입니다.’ 할 때 또 은혜가 찾아왔어요. 그렇게 우리가 지저분해줘야 주님의 십자가는 다시 한 번 그 깨끗함이 증명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원천을 알려면 그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뭐냐, 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설명하세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때 여러 아들이 있지만 오직 이삭만을 고집하면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겁니다.

이삭을 대체할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 다른 이름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겁니다. ‘이삭이라는 그 특수한 인물, 그 존재를 대체할 만한 것을 이 세상에 아무것도 허락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삭을 바침으로서 아브람은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앞장세웠느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앞장세운 것은 이스마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이삭밖에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만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악 중에 살다가 눈 돌릴 때 어떤 시선과 마주쳐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요구하는 분, 그 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눈을 마주쳐야 됩니다. 그 이름은 예수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었어요. ‘나 회개합니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죄인입니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 이렇게 나쁜 놈입니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요구했는데 뭘 요구했느냐 말이지요.

그것은 이삭이라는 ‘단독자’였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그리고 이스라엘이 내세울 것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위에 앉은 영원한 다윗 왕, 하나님이 주신 그 안에서 함께 미팅할 때, 하나님이 원하는 분을 우리가 같이 볼 때 죄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 돌리도록, 주께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이 깨끗함을, 정결함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제대로 성도답게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2층이 없이 단층으로 봐버리면 아래층끼리 선과 악을 구분해 버립니다. 수녀는 깨끗하고 수녀 아닌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럽고, 이런 식으로 S극과 N극을 나누듯이 그 사이에서 둘로 쪼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자기 자신이 대신 앉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얼굴이에요. 악마의 노림수는 예수님 자리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2층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1층 안에서 ‘우리가 죄지으면 성령 받더라도 구원 안 되기 때문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은혜 받고 난 뒤에는 열심히 착한 일 해서 구원에 골인하자.’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뿐인가, 왜 정결한 분은 예수님뿐인가? 왜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뿐인가? 왜 하나님의 의는 내가 될 수 없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의인가?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사람 못지않게 복음 다 잊어버리고 놓쳐버리고 세상 즐거움에 푹 젖어서 같이 울고 즐기면서 먹고 마시면서 살다가 성령이 찾아오니 갑자기 우리는 경악스럽습니다. 용서받은 것을 모르고 마치 용서받은 것을 내 소유인양 여겼던 그 더러운 죄,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 죄 속에서 지금도 주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적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