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4. 19:06

항복 하라 (예레미야 21장 10-14절)

본문 : 예레미야 21장10-14절
제목 : 항복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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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강-렘21장10-14(항복하라)-jer100804

항복하라

2010년 8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10-14

(렘 21:1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
(렘 21:11, 개역)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렘 21:12,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렘 21:13, 개역)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렘 21:14, 개역)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라면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해야 합니다. 이방민족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희미하게 신의 존재만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이 참된 신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마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막연하게 그들의 심성과 품성을 신의 내용으로 가득 채워놓고 자기 멋대로 그 신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계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민족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 약속대로 구성된 이스라엘만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말씀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명확하게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자부했던 그 나라가 결국에 망하게 말기 때문입니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져도 인간들은 그 말씀을 엉터리로 왜곡되게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도리어 교만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로서 이스라엘마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면 우리 이방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훌쩍 이스라엘을 떠나고 말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어디서 너희들이 말씀을 잘못 해석했느냐를 알려주시면서 떠나십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아는 자를 심어놓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참 선지자들입니다. 창세기 4장의 아벨 계열입니다. 이들은 주위사람들이 핍박을 하므로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기존 성경 해석이 오류임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선지자는 결코 대세를 차지하지도 않고 주류 세력으로 형성하지도 못했습니다.

늘 무시당하고 늘 배척받은 양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정신이 이들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배신 속에서 결코 언약의 정신을 중단시킨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곧 ‘탈취당한 자’의 신세가 되는 겁니다.

곧 미약한 힘과 세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 조직에서 큰 소리 칠 정도로 권세를 많이 확보해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야지만 ‘탈취당함’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해석자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삶을 미리 앞당겨 세상에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된 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삼손의 부모는 졸지에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22절) 이것은 삼손의 부모가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상황을 고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졸지에 들이닥친 일이요 예상 못했던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그 순간, 삼손의 부모에게 있어 이 세상에 그 어떤 사태도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그것도 세상 권력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아내가 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 것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이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긍휼임을 눈치 챈 자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긍휼이 세상 표면으로 올라오는 그 구멍에 놓인 자이어야 말로 제대로 하나님을 명확하게 아는 자들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무서움 앞에 서게 된 자는 더 이상 이 세상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안에 휩싸여 사는 것이 아니라 뚝 떨어져서 자신을 제 3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탐색하고 관찰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만약에 ‘전국 미용사 협회’가 부정한 방법이 난무하는 식으로 회장 선거를 치른다면, 미용사가 아닌 자들은 그것을 제 3장의 입장에서 보면서 한마디 거넬 것입니다.

“썩었군 썩었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자신은 그 썩지 않는 자리에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본인이 미용사라면 자기가 속한 협회의 비리 때문에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차이를 말해줍니다. 유대 나라의 대세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직접 만나서 아는 사람이고 그 와중에서 자신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쪽에서 제공한 희생물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것처럼 가짜 성직자들은 많이 배출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이란 힘의 집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있는 힘까지 하나님의 약속에 다 던져버리고 손 털어야 하는 겁니다. 레위기에서 문둥변자는 진 안에서 살지 못하고 진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남들 보기에 참으로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도리어 그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참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지는 사명을 가지고 진 밖에서 살아야 될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점차 문둥병이 낫게 된다면 그는 3 차례의 정결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진 밖에서, 그리고 진 안에서, 그리고 회막 안에서 치르게 됩니다.

여기에 막대한 희생제물이 동원됩니다. 저주받은 몸이 멀쩡하게 된데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하나님의 희생이 투입된 결과라는 겁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진 안에서 사는 자들이, 결코 자신들의 착함 덕분에 문둥병도 걸리지 않고 진 안에서 거룩한 백성 행세하며 사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채야 합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남들보기에는 죽음의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비로소 그 안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기거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무효로 돌리지 않고 고아나 과부의 하나님으로 출애굽 때 낮은 마음으로 이스라엘이 무장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스스로 자신을 버틸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자리에 하나님의 저주와 용서가 깔려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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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강-렘21장11-14(항복하라)-jer100804

2010-08-05 11:30:26 조회 : 7        이름 : 오용익
 
 
074강-렘21장11-14(항복하라)-jer10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1장 11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1:11-14

“유다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 학문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히 해야 됩니다. 명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전적으로 기댈 하나님인데 흐릿하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조작해낸 하나님일수가 있습니다. 확실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다른 하나님이 생각이 안날 정도로 ‘아,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비가 내리면 ‘신께서 비를 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불분명한 것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도 알고 있는 하나님 같으면 이것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 이야기했어요. ‘너희만 나를 알았다. 나는 너희를 알고 너희는 나를 알았다.’ 이 말은 다른 민족들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 신을 안 섬기는 것이 아니에요. 신을 섬기지만 그것은 자기들이 지어낸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사람들도 다 신을 섬겼습니다. 출애굽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짜신과 진짜신의 싸움에서 가짜 신들이 무용지물이라는 것, 헛방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히브리인들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명확하게 해야 돼요. 명확하게 알려면 우리가 다른데서 알아볼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키가 몇 센티냐 하는 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다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장악했고 이스라엘을 이끄셨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만남에서 ‘아,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구나.’라고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걸 가지고 언약이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 라고 어렵지만 간단하게 함축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 ‘약속?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 주셨다면 우리도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니 굳이 이스라엘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할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는데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하고 약속을 받아든 이스라엘의 생각하고 같아지지를 않았어요.

같았으면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같다.’ 해도 되는데 직접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언약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는 말,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막상 받아 놓고는 우리 식대로 곡해해서 우리도 같이 실천에 옮겨놓고는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우리도 같이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놓고도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한 거예요. 그렇다면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아야 된다 했습니다. 명확한 하나님은 다른 민족에게는 안 나타나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만 나타난다 했습니다.

세 번째,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놓고는 잘못 해석을 해서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하는데 그것이 영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내게 순종하지 않았다. 내 말을 어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섯 번째,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대다수가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했던 반면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뭔가 심어놓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오늘 설교의 핵심은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숨겨놓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로 주신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다리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만큼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문제는 그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소수였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무시할만한 정도로 소수였고 시답지 않게 여기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미미하고 미약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 대충 모아봐야 이스라엘의 사상을 전복시킬 만한 그만한 위력을 갖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들 중의 그들 중의 대표자라고나 할까요? 그들을 뭐라고 하느냐,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 그런데 이스라엘 내부에 참되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 말고 왜곡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복 받았다.’고 여기는 그 사람들이 대세입니다. 엄청난 숫자에요. 그 사람들의 오야붕을 왕이라고 했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을 거짓 선지자라 했는데 그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그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도저히 이것은 개혁될 리도 없고 개혁시킬 필요조차 없어요.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선지자들의 개혁이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은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선지자들의 바른 뜻은 이겁니다. 멸망해야 될 나라는 멸망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라면 우리는 죽어야 마땅하다, 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이스라엘 가운데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궁금하겠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유별나게 아이큐가 높은 것도 아닌 바에야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그러면 그 사람이 특별한 수련회에 참석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은 알았던가? 그것이 성경에 군데군데 나오는데 유명한 몇 구절만 말씀드리면 금방 아실 겁니다. 첫째는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거기에 삼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 사람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 때 삼손의 아버지가 고백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예요. 가짜 하나님 말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관심, 세상걱정, 이 세상에 내 부하가 몇 명이고 내 편이 몇 명이고,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 것은 도무지 나의 최종적인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경외하면서 두려워하면서 ‘이것이 웬 횡재인가, 우리같이 미천한 가정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다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주위에서 협박 공갈해도, ‘너, 우리가 믿는 교회 안 나오면 세금 때린다.’고 해도, 심지어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것, 사람 죽는 것 보다 더 무서운, ‘나는 하나님을 봐 버렸다. 인생 끝났어. 나는 하나님을 봐 버렸는데 뭐.’ 라고 하는 것. 또 욥은 유명하잖아요. 욥기 13장 24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이 직접 하나님한테 고난 받고 있는 그 자체가 진짜로 하나님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수련회때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과 직접 독대했으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위엄이 있다 하는 것을 본인은 아는데 직접 안 만난 자기 누나는 몰랐기 때문에 결혼문제 가지고 시비를 걸다가 문둥병이 걸렸다는 말이지요.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문둥병 걸린 사람이 오히려 문둥병 안 걸린 사람보다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문둥병이 걸린 채 진 밖에 놓인 사람을 보고 남들은 다 재수 없다고 하지만 본인조차 재수 없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저주받은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진 밖에 나갔다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다시 진안으로 들어올 때 1단계, 2단계, 3단계 거치면서 ‘야, 평소에 저주받아 마땅한데 그동안 문둥병 안 걸린 것은 된통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았는데 그 긍휼과 자비가 어디서 나왔는가, 저 제사장의 희생, 제물의 희생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똑바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은 다 거짓입니다. 마노아 가정 같은 경우도 똑같은 원칙이에요. 마노아 가정의 경우에는 마노아가 벌벌 떨면서 ‘이제는 죽었다.’ 하니까 그 마노아의 부인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하여튼 아내치고 지혜롭지 않은 아내가 없어요.

‘여보, 죽이려고 들면 그냥 죽였을 것인데 제단에 왔다는 말은 우리가 드린 이 번제로 인하여 죽어도 마땅한데 커버가 되었으니까, 이것은 남들이 모르는 경험,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받으시는 번제는 그 무서운 재앙과 저주도 중간에 들어가는 재물로 인하여 면제가 되고 속죄가 되고 용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함입니다.’라고 아내가 이야기 해주지요.

남편이 듣고 있다가 ‘그러면 다행이지.’ 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이것이 마노아 가정의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온천의 간헐천이 터지듯이 군데군데 폭폭 쑤셔놓은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건성으로 알던 그런 표면 말고 그 표면 밑에 잠재되어 있고 깔려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진노의 우글거림, 펄펄 끓는 저주와 펄펄 끓는 은혜, 그것이 그 틈사이로 나오게 되면 긍휼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진노가 겸하여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고백도 하고 그러면서도 숯불로 우리 입을 지져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하나님의 긍휼이 그 저주마저 커버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가운데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문법적 해석을 가지고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신학교 나왔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나왔다는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긍휼을 아는 사람을, 평 교인을 무시한다는 이것은 잘못 건드린 거예요. 그 잘못 건드린 내용이 본문 내용입니다. 12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자가 없으리라.”

‘탈취 당한 자’, 설교를 다시 하게 되면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었다고 해놓고는 대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아는 사람들이 대세고 제대로 아는 쪽은 미미하다고 했지요. 그러면 권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누구한테 치이게 되어 있느냐 하면 소위 대세를 이루는 사람한테 이 미미한 사람이 치이게 되어 있어요.

교회 제직회나 이런 것을 할 때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 진리가 아니에요. 교회 다니면서 진리를 인하여 ‘아, 이 세상에서 주님을 안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이 옴팍 나에게 덮쳐서 그야말로 나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는구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교회라는 것이 한두 명 모이면 그런 일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만약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이면 그 때는 모든 일을 다수결로 결정하거든요.

다수결로 결정할 때 일인당 한 표씩 준다고 해서 그게 한 표가 아니에요. 목사가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우르르 쏠리게 되어 있어요. 부채도사의 부채가 넘어지는 쪽으로 점괘가 당첨되는 것처럼 목사가 이쪽이다 하면 우르르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해 봅시다.

쉬운 예를 듭시다. 미용사 협회라는 단체가 있다 합시다. 미용사 협회 회장을 뽑는데 간부들이 돈을 먹고 부정적으로 했다고 한다면 ‘아이고, 미용사협회도 썩을 대로 썩었구먼.’ 하고 내가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쪽을 보게 되면 저쪽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미용사협회 간부가 돈을 먹든 말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미용사라면 이것은 상처받을 일이에요. 지금 이스라엘이 몰지각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인간들이 정권을 잡았고 왕과 결탁했고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신학교를 세워서 그런 거짓선지자를 대량으로 양산합니다. 그걸 보면서 하나님도 좀 위에서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도 대량양산하면 좋을 거라 생각하는데 대량 양산하는 것은 꼭 권력 잡은, 소위 장사가 되는 신학교에서 하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대량으로 학생들을 모아놓고 엉터리 같은 교수들 모아서 가르쳐서 전부 다 ‘목회 성공, 목회 성공, 권력 잡아라, 권력 잡아라, 네가 숫자 늘려야 밥 먹고 살 수 있다.’ 그런 것만 대세를 이루었다 그 말이죠. 그런 것만 대세를 이룬 입장에서 진짜 선지자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미용사 입장에서 미용사 협회에 속한 입장이 되는 거예요.

남자가 되어서 미용사하고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 ‘망했구나, 똑바로 좀 하지.’ 하고 제 삼자 입장에서 그냥 건성으로 지나갈 일이지만 막상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데, 이런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대세에 치이게 되어 있습니다.

교계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항상 치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믿는 사람들의 숫자를 좀 많게 하지 왜 자꾸 숫자를 적게 하느냐, 이게 오늘 설교의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는 아벨이 형한테 얻어맞기 전에 도와주면 어떻습니까? 형이 아벨을 죽이려고 할 때 ‘손을 거두어라.’ 해서 잡아 당겨도 될 문제인데 왜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느냐 그 말이죠.

그게 뭐냐, 예수님 가는 코스가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이쯤 하나님이 오는가 보자. 저가 장담하기를 하나님 아버지가 온다고 하고 천사가 온다 해놓고는 천사가 오지도 않는 것을 보니 가짜가 맞네.’ 끝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메시아를 죽여 버립니다. 죽이고 난 뒤에 몰래, 몰래 삼일 만에 부활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을 받은 그 아벨이나 선지자들도 똑같이 끝까지 갈 때까지 가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신학을 알았다. 내가 믿음 알았다.’ 하는 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을 맡긴 가운데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처분대로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면서 자꾸 옆을 살폈습니까?

‘어디쯤에 양이 있을 건데, 하나님이 수양을 여기 어디쯤에 감춰 놓았을 것인데.’ 그랬습니까? 그냥 이삭을 잡았어요. 그냥 칼 들고 이삭을 잡으려 할 때 ‘멈춰라.’ 해서 수양이 나왔잖아요. ‘네가 나를 온전히 의지하는 줄 알겠다.’ 이번 수련회 주제가 ‘종말의 종말’ 인데 제가 왜 그 제목을 붙였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왜 곱빼기 종말이냐? 첫 번째 종말은 사람이 아는 종말, ‘아, 이 정도면 끝이다.’ 하는 사람의 종말이지만 두 번째 종말은 사람의 종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에 참여되지 않으면 이 우주나 성경전체가 해석이 안돼요. 개혁주의신학은 종말의 종말이 아니고 그냥 종말이에요. ‘여러분, 마지막 때에 충성합시다, ~합시다, ~ 합시다, 바르게 삽시다, 우리가 복음을 알았으니 힘들어도 제대로 삽시다.’ 하지만 기껏 해봐야 힘들게 살아가는 주체는 아직 안 죽었어요.

하여튼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다 죽이는 세상입니다. 죽이는 세상이라 하니까 또 죽는 척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죽으라고 하니까 죽기는 죽는데 눈을 살짝 뜨는 거예요. ‘이쯤에서 하나님이 오시나?’ 하면서요. 그냥 죽어버려야 돼요. 예수님도 그냥 죽었고 따라서 우리가 그냥 죽으면 주의 약속대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주를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지요. 이것이 선교단체 같은데서 이야기할 때 굉장히 쉬워보였지요. 살아가면서 난감하지요. 죽는 척을 하라, 그 말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가 아니에요. 완전히 망해서 이제는 ‘망했습니다’ 소리도 못나오게 만들어야 망한 거예요.

마노아가 ‘하나님의 위엄과 무서움 앞에서 두려워 떠나이다.’라고 떠는 폼,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아다리, 진짜 만나버렸어요. 만나보니 연기로 ‘하나님은 이정도로 두렵지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니까 자기도 흉내를 낸다고 ‘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것은 연기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 진짜 봐버리면 욥처럼 입을 막고 할 말을 잊어버려요. ‘주여,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의 트릭이었습니다. 속임수, 나만 속임수이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그 속임수를 끊임없이 나에게 유발했고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내가 아는 속임수가 나만 아는 속임수인줄 알았는데 귀를 만드시고 눈을 만드신 분이 그것이 속임수 인 것을 깨닫도록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속임수 쓸 마음도 안날 때 그것이 ‘종말의 종말’입니다.

더 이상 주님 앞에서 이 속임수조차도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도록 충성한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도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고 돈이 천억이 있어도 그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물론 세상의 어떤 정권이나 심지어 교회 목사나 장로가 협박해도 그 협박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 주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 다 드러나 버렸기에 그렇습니다. 남들이 ‘너 죄인이다.’라고 약을 올려도 그 따위 시선과 평가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예요. 내가 주님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하면 되었지 사람 앞에서 그 흉내를 낸다고 사람들이 나를 더 훌륭한 목사라고 더 봐줄 것도 아니잖아요.

가짜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 저쪽에 세워놓고 자기는 빠져나와서 이스라엘을 통째로 소유해서 소유권을 행사하는 거예요.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품속에서 같이 고난 받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고난 받는 자리에 함께 고난 받고, 말을 반대로 합시다, 우리가 고난 받은 자리에 주님도 함께 고난 받고, 다시 하면 하나님이 고난 받은 자리에 우리가 참여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와 똑같은 겁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간 뒤에 그 안에서 네 번째 사나이와 춤을 췄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이 과거에 있던 출애굽이 지금도 계속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난 겁니다. 출애굽 때는 애굽이 저주받았지만 본문에서는 진짜로 하나님의 저주와 긍휼을 동시에 아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그 유대나라가 이제는 애굽이 되어서 혹독하게 하나님께 저주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이하에 보면 출애굽 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주변의 고아 과부 나그네를 절대로 학대하지 말라. 왜, 너희들이 옛날 애굽에 있을 때 너희가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가면서도 고아, 과부 같은 힘든 사람들을 왜 거기에 두느냐? 하나님은 부요한 자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출애굽시절을 되풀이해서 계속해서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이어가기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될 이유로 툭툭 불거져 나오는 고아와 과부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권력 없는 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자. 그런데 소위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면 그 가난한 자중에서 가장 부요한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서 그 인간들의 면상을 쳐버립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했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저주가 떨어져 버렸어요.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 25:40)

‘소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감추시고 연약하고 갸날픈 어린아이에게 나는 나를 나타낸다.’(마 11:25) 그 어린아이는 어떠합니까? 어른을 무서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에 그렇게 보호받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겁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마태 18:4)는 그 원리가 그거거든요. 자기를 낮추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을 진짜 만나버리면 지금 사는 것이 예수님 희생덕분으로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성도가 내놓을 것은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 그런 것을 내놓지 마시고요, ‘나도 원래 너하고 똑같이 힘 자랑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것보다도 주님의 희생, 나같이 못돼먹은 성깔머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주님의 희생이 가득 차 있으니까 내가 너에게 내놓을 것은 이 못난 인간도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살았다.’라는 것을 내놓으시면 그것이 진짜 이 시대의 남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그 무서운 하나님이, 자기 아들마저 십자가에 죽이시는 그 무서운 저주스런 하나님이, 또한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더 이상 세상 겁내지 말고 주님 경외하면서 주님 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