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0. 10:23

난처한 입장 (사무엘상 29장 1- 4절)

난처한 입장

2009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9:1-4

(삼상 29:1, 개정)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삼상 29:2, 개정)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삼상 29:3, 개정)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삼상 29:4, 개정)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이스라엘과 블레셋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에 없는 상태이기에 그들 끼리의 전쟁이 무슨 의미있는지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다윗이 빠져있음으로 인하여 전쟁의 양상은 다음 네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양상, 둘째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공격하는 양상, 셋째는, 이스라엘이 다윗이 공격하는 양상, 넷째는 블레셋이 다윗을 공격하는 양상입니다. 이렇듯 전쟁이 복잡해진 것은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으로 인하여 사람의 조건이 겉으로 보이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육적 조건과 다윗만이 갖고 있는 영적 조건으로 달리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즉 다윗이라는 인물을 특수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그냥 보통인 육적 사람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계신 특수한 사람이라고 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다윗을 보통 사람의 조건으로 그를 다루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웅인 이 다윗이 여태 이 블레셋 나라에 귀순해와서 그 어떤 점에서도 배신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이스라엘 전쟁에 참전시켜서 공을 세우게 하자”는 식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부하들은 달리 생각합니다. 육적인 조건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기에 인간이 함부로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평범한 인간들의 평가처럼 ‘이미 우리편이 된 사람이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을 복잡해졌습니다.

이 전쟁의 실상을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 한 예를 들겠습니다. 경북 영양에 있는 어느 교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 교육관처럼 생긴 건물 전면에 이런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신나는 드럼교실, 바다의 소리 오카리나, 남자의 로망 섹소폰, 폼생폼사 일렉트릭, 추억의 통기타 교실, 회비 4만원”

그런데 성경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함께 계신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피’만을 진리로 전파하고 간직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이 이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만을 사랑하는 성도가 한 분 계시다고 칩시다. 이 분이 실시하는 영적 전쟁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적을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 맞은 편에는 ‘천신보살’이라는 큰 가게의 점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이 교회는 그 점집을 적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 있는 성도는 세상적인 목회를 하는 목사와 같은 교인들을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피’의 가치를 훼손하고 무시하는 것들이 성도의 눈에는 하나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전체가 점집에 밀리지 않아야 하기에 교회 안나오는 모든 이가 교회가 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이런 이중 구조, 즉 교회 안에 교회가 있는 구조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이유가 뭘까요? 마태복음 10:5-6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자체가 결코 구원이나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이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따로 있고 그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게서 쫓겨난 처지에 있음을 생각해봅시다. 왜 같은 하나님을 믿고 알고 섬긴다고 하면서 그 나라에게 추방당해야 하는 겁니까?

12제자들이 과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과의 구별을 해낼 수가 있을까요? 물론 인간적인 조건에 의하면 결코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조건을 가지고 전파하면 그 전파된 복음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구분이 됩니다.

에스겔 34:2-6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목자들이 돈을 밝혀서 진정한 양들이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55:1에 보면,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생각이고 목사들 생각은 다릅니다. 교인들이 돈을 안내면 자신의 생계가 막연합니다.

따라서 돈이 되는 식으로 목회를 하고자하고 교회를 사유화하게 됩니다. 문제는 교인들도 이런 목사에 편승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해도 인간적인 조건에서 ‘잃어버린 양’이 되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루뭉실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넓은길로 합세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에 합당하다고 보는 겁니다.

분명 목사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아도 그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안합니다. 그것은 자진해서 잃어버린 양이 되는 자신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십자가 복음 속에는 예수님마저 사람들로부터 버람받았다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다같이 하나님의 뜻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 모임이 바로 영적조건 속의 성도가 됩니다. 이들이 치러야하는 영적 전쟁은 따로 있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알게 된 것 자체가 온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얻은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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