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0. 10:53

다윗의 하소연 (사무엘상 26장 13-25절)


다윗의 하소연

2009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6:13-25

(삼상 26:13, 개정)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삼상 26:14, 개정)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삼상 26:15, 개정)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삼상 26:16, 개정)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삼상 26:17, 개정)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삼상 26:18, 개정)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삼상 26:19, 개정)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삼상 26:20, 개정)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 26:21, 개정)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삼상 26:22, 개정)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 26:23, 개정)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6:24, 개정)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5, 개정)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을 만나지 아니하면 다윗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이삭은 이스마엘과 만났을 때, 비로소 이삭의 의미가 드러나고 야곱은 에서와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상호 이질적인 사항과 만나서 그 차이를 대비하면서 그 속에서 진리는 밝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사울의 만남이란 참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과 그냥 ‘왕’과의 만남입니다. 다윗은 늘 머리 부분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기름부음을 받은 왕’로서의 입장입니다.

소위 ‘목없는 미녀’처럼 몸통은 있되 머리부분은 없는 것처럼 하여 하늘의 긍휼과 정의와 사랑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자폐증적입니다. 자신의 왕됨을 자신의 능력으로 지켜내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자기의 것을 지탱하는데 있어 적이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결코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라 고정된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겠다는 일념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진정 ‘기름부음받은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해 다윗은 하늘로부터 공개된 인생일 뿐만 아니라 주위로부터도 공개된 인생입니다.

쉴새없이 사울측으로부터 공격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과 부딪침과 고난이 곧 장차 오실 메시아로 인하여 정해지는 심판기준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심판 기준을 구성하는데 있어 인간들의 오해도 가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핍박받는 의인의 피’가 이런 환경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다윗이 늘 하나님의 뜻과 교류하는 것은 마치 꼬치 요리를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일단 꼬추의 머리부분을 잘라내고 그리고 배를 가르고, 그 속 알맹이는 빼놓고서는 거기에 잡채와 고기와 채소를 다져넣은 것으로 꽉꽉채워서 기름에 튀깁니다. 이럴 경우에 꼬추란 단지 그 형태만 보일 뿐이고 속은 꼬추 원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시대에 있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지옥은 잠깐만 살다고 나오는 곳이 아닙니까? 즉 그것은 천국의 영원성을 보이기 위한 지옥이지 결코 지옥 단독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지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옥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결코 자신이 내세운 기준을 자기가 달성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옥간 사람은 하늘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에 내세운 기준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함책에 있는 자는 모조리 지옥가는 겁니다. 만약에 천국에 들어간 기준이 영원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천국 간 사람이 천국에서 10년 살고 나온다면 지옥간 자도 10만 살고 나올 겁니다. 하지만 천국 간 사람이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면 지옥간 사람도 영원히 지옥불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같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비겨가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되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목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란 단지 ‘죽을 영혼은 필히 죽이고 살릴 영혼은 필히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심판주가 아니라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일하신 심판주되시는 예수님이 내린 심판의 기준에서 우리는 눈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가 예수님 하신 일이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불렀던 찬양시입니다. 1-5절을 보면, “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속 수직적으로 하늘을 봅니다. 이것은 마치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사시면서 경험하실 경험을 다윗이 미리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윗이 의아해하는 것은 분명 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고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나라에서 왜 하나님 믿는 자가 수난을 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사울왕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적을 잘못 집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더 이상 나를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유지시켜 다른 저주받아야 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성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나라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벼룩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울왕이 진정 기름부음을 입은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면 하나님을 크게 생각하셔야지 다윗 같은 자는 하찮게 여겨달라는 겁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다녀간 겁니다. 창과 물병이 이미 다윗 진영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다윗은 이 창과 물병을 통해서 다시금 자기에게 환란을 안겨준 유발한 원인이 소실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원점을 염두에 있는 겁니다. 그 원점이란 바로 골리앗을 쳐죽인 그 자리를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할례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조롱하는 상황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처지에서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다윗의 논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머리를 하늘에 들고 하나님의 확정된 기준을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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