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3. 09:13

사울의 점치기 (사무엘상 28장 5- 7절)

사울의 점치기 

2009년 9월 13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8:5-7

(삼상 28:5, 개정)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삼상 28:6, 개정)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7, 개정)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말씀은 자체적으로 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의 자체적인 능력보다는 중간 인물이 등장해서 그 인물을 자신을 믿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말씀 자체가 자신을 지적한다는 가장 근본적 요소를 빼먹게 됩니다. 즉 자기 유리하고 자기 옹호하는 쪽으로 말해주는 사람을 마치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양 오해하게 됩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 온다는 사실은 곧 사울이 자기가 구축한 영역의 위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역을 친히 부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같은 편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공격이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무엘 선지자 죽이고서 곧장 블레셋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죽은 사무엘을 찾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사울이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자신을 지켜 주는 외곽 보초처럼 간주한다는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이 돈독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여주어야 될 신앙적 내용은 전무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되었던, 사무엘이 되었던, 엔돌 지방에서 영업하고 있는 신접한 여인이 되었던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구축에 도움된다면 다 끌어당깁니다.

이러한 사울이 사는 모습은 차라리 보편적인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자기 위주로 보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 죽음을 놓고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가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넓은 빛의 영역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은 말씀의 성취 증거를 자신들의 어두움 영역 안에서 수집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수정하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자고 있으면 낮이 되면 깨겠지요”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두움에 속한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말했다고 하십니다. 즉 빛의 범위 내에서는 죽은 것도 잠자는 것에 해당되는 겁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세계가 빛의 세계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런 빛의 세계, 말씀의 세계를 증명해줄 증거를 어두움 안목가지고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사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사울이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는 시절에 블레셋 나라로 하여금 침공케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울식의 인생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외부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사무엘이 죽어버린 사태는 과연 사울이라는 인생이 평소에 사무엘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느냐를 말해주는 겁니다.

사무엘이 죽어 지상에서 없어졌다는 상황이 더 이상 자기를 지켜줄 보디가드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된다면 평소에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없이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하 평소에 무당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폭로되어도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는 인간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단호하신 분이십니다. 어중간함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충도 물리치십니다. 신앙 흉내내기와 딴 사람 신앙 모방하기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껍데기와 겉치레를 털어내는 과정이 바로 개인적으로 큰 위기를 닥치게 합니다. 스스로 힘으로 살고파 하는 자들에게 있어 ‘나만의 영역’은 절대로 포기 못할 우상같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있어 무당은 제격입니다. 참된 성도는 더 이상 무당을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위기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위기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여전히 자기 영역을 고수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는 말 밖에 안됩니다. 자기 것이 유지되는 한 무당의 기능은 항상 유혹거리가 될 뿐입니다.

무당을 찾는다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당 중의 최고 무당처럼 간주하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이런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하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은 ‘이런 류가 아니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이 주는 위기보다 사무엘이 주는, 즉 하나님 자신이 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사울에게 알리려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엔돌의 여자 무당을 사용하십니다.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의 점치는 능력은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합니다. 그냥 하나님에 의해서 사무엘이 다시 나타난 겁니다. 말씀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무엘을 보여주신 겁니다. 사무엘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이 참된 예언의 말씀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적으로 사울왕을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버리고 사울왕 곁을 떠났음을 분명히 하시고자 사무엘은 다시 사울왕 앞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사울왕은 형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서 이런 무당들을 추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28:3) 하지만 막상 본인에게 위기가 들이닥치니 그러한 정치적이 행정적인 수완은 결코 자신을 구원하는데 하등 도움이 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죄에서 해당되지 않을 것처럼 보았지만 막상 자기 영역에 위기가 닥치니 도리어 죄를 찾게 됩니다. 이처럼 사울의 문제점은 자기 내부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자기만의 영역을 따로 챙겼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특징이 바로 이러합니다.

자기 이외에는 달리 믿을 자가 없음을 늘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행함’이라고 합니다. 사울왕이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신접한 여인이 그를 돌봅니다. 이로서 본인이 죄악이라고 추방한 그들과 사울왕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즉 사울이 무당입니다. 곧 자신이 신이 되는 세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자체가 갖고 있는 능력으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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