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0. 10:10

용 서 (누가복음 6장34-38절)

본문 : 누가복음 6장34-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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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강-눅6장34-38(용서)-luk100620

용서

2010년 6월 2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34-38

(눅 6:34, 개역)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 6:35, 개역)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6, 개역)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7, 개역)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8, 개역)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라,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들이닥치게 되면 본성적인 인간은 자신의 육의 가능성으로 마중나가게 됩니다. 실천에 옮겨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 ‘∼하라, ∼하지 말라’ 사이사이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보고 계시고 정죄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계시고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대상으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즉 우리 자신을 심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동적으로 천국에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자라면 절대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살지 않으려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올 생각을 아예 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릴 적에 주위 식구로부터 보호 받을 때는, 받은 사랑으로 세상에 펼칠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보면 우선 자신의 육신의 보존이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남이 있음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육 중심의 사고방식입니다. 어릴 적에는, 자신의 몸이 이처럼 자기 위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육은 결코 육 자신의 형편과 보존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의 육체부터 우선이고 타인의 육체는 나중이 되는 법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본심을 가지고 아무리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해도 자기 육신의 본능이 우선이지 하나님의 뜻이 우선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인간의 육은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쉴새없이 말씀에 의해서 추궁받게 되어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추궁을 받다가 극에 이르면 정말 육의 본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을 감시하고,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살해하고 싶은 충동을 발산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인간은 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력한 반발의 표정을 짓게 마련입니다.

이런 육의 본성은 모든 이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17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을 얻었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430년 후에 율법도 주셨다는 내용도 소개합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정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육을 지닌 인간의 육적 본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의 육의 본성은 유감없이 발휘가 되면서 저주받을 자들이 인간임을 알려주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과 복을 따낼 수 있는 것처럼 나서게 됩니다.

이것 또한 자신의 육의 본성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막은 아브라함 이스마엘이라는 제 자식을 낳은 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이스마엘은 남의 자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이 낳은 자신의 친 자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에 의한 자식인 이삭이 잉태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어이 이스마엘을 지옥 가도록 밀어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왜 이스마엘이 지옥가야 합니까? 그것은 그 자식을 낳은 아브라함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라는 육에 만든 작품이 이스마엘이기에 이런 육적인 존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자신에게 비칠 것을 지시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와 관련 있습니다. 이삭은 뭐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도 모릅니다. 이삭의 운명은 이삭을 안고 있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삭을 살려주십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이 용서받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셨다는 점을 염두에 둡시다.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성도의 육의 실천력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의해서입니다. 선물이란 되갚으면 아니됩니다. 로마서 11:35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고 되어 있습니다. 선물을 되갚아버리면 거저 주시는 그 선물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선물로 주어진 것처럼 우리 성도에게는 예수님 자체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모든 구원의 일은 선물 자체의 포장이 뜯겨지면서 시작되는 겁니다.

인간의 육이란 선물에 대해서 모욕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실천력을 무시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막상 선물이 주어지면 하나님께서는 일체 우리의 육적인 행함을 받지 않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 선물은 ‘피’로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피’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 피 앞에서 우리가 죽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곧 항상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인하여 성도는 평생 넘어지고 또 넘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지켰다고 여기는 그 교만성이 매일같이 넘어지고 ㅉ또 넘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넘어지므로서 선물이 선물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는 육적인 본성으로 인하여 실명해서 자빠지면 그 자빠진 현상에 비로소 예수님의 피가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피를 남기시면서 그 피를 따라서 오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왜 성도는 이 생을 다 할 때까지 용서가 필요한지 자비가 필요한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알았던 ‘믿음으로 구원’의 원칙입니다. 즉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저 주신 피 선물로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전신에 피만이 흠뻑젖어서 피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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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강-눅6장34-38(용서)-luk100620

2010-06-22 16:46:01   녹취 : 오용익    
 
 
032강-눅6장34-38(용서)-luk1006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34절에서 3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9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6:34-38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른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과 사는 그 때, 천국에서는 이런 원리로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고자 하신다면 이 원리가 우리 삶의 원리로 품어져 있어야 되고 그럴 때만 주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겁니다.

천국에는 가고 싶은데 만약 이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탈락입니다.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지요. 34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죄인들도 하는 행세를 너희가 똑같이 해서는 너희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죄인이 감히 못하는 것, ‘아, 인간인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라는 것이 추가적으로 있어야 되는데 그냥 평소에 천국가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해 낼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해냈습니다.’ 하는 식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일,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제가 묘수를 쓰는 것은 아니고 35절을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미워하라.” 마음에 딱 들지 않습니까? ‘원수를 미워하라.’ “원수를 미워하고 학대하라. 그러면 너희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를 비판하거든 사정없이 비판하라. 그리고 너에게 죄지었거든 용서하지 마라. 그러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참 구원받기 쉬운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하는 행세대로 살면 천국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익히 아시고 그것을 ‘그래서는 아니 되고 그 반대로 살아야 돼.’라고 이야기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하던 품성대로 죄인의 품성대로 살아가버리면 결국 우리는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악한 자에게 인자롭고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스러워야 되고’ 그 다음에 36절에 보면 ‘항상 자비로워야 되고’ 그 다음에 37절에 ‘비판하지 말아야 되고 정죄하지 말아야 되고’ 그 다음에 ‘뭐든지 용서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살 맘이 드십니까? 방금 저와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죽 보니까 어떤 것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 본인은 그렇게 사십니까?’라고 묻고 싶지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했습니까, 예수님은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을 되묻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예수님 혼자나 할 수 있지 우리는 못합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구원받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일단 손을 놓게 만들어요. 손을 놔 버리는 거예요. 포기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 주님은 노리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신 거예요. 어줍지 않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이만큼 착했고 이만큼 훌륭했습니다.’ 가지고 스스로 자기 힘 가지고 천국 문을 두드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이 정도는 돼야 하는데 이정도 안 되거든 언감생심 아예 천국은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래, 꿈 안 꾼다. 교회 안가면 그만이지. 천국 안 가면 그만이지.’라고 삐지게 되는데 그렇게 삐지는 것을 주께서 노리신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노리신 겁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토라져야 됩니다. ‘기준이 너무 높다.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 우리 힘으로 이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런 것을 잘 몰라요. 어릴 때는 세상 보는 것이 좁고 자기와 친한 사람,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남 사랑하면서 살 것 같지요. 막상 세상에 나가서 살면서 남과 부딪히게 되면 내가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내 몸뚱이에요.

이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들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다 포기하게 만들어서 내가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이미 포기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무엇인가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어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 믿어라.’ ‘예, 믿겠습니다.’ 이러면 성경이 이만큼 두꺼울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나오고 예수님 나오고 십자가 나오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나오고, 성경이 한 2페이지나 3페이지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왜 이렇게 두꺼운 겁니까?

그것은 현재 몸, 신체, 육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는 거예요. ‘아, 저렇게 믿어서 구원받는구나. 그러면 나도 믿지 뭐.’ 자기주제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을 자기도 아브라함과 동급으로 생각해서 ‘나도 믿지 뭐.’라고 얼른 나오기 쉬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싶어도 못 믿게 만드는 요소가 너의 이 덩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못 믿게 만들고 안 믿도록 만드는 세력이 더 세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자꾸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니까 그 믿음은 행함의 일종이죠. 법 지키기의 일종으로 하나 더 포함된 것이 ‘믿습니다.’ 인거예요.

그 믿음은 전부 다 가짜고 엉터리인 거예요. 진짜 믿는 자는 ‘내 믿음으로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이유가 있어요. 내 속 마음은 성경말씀 지키고 싶어요. 원수를 사랑하고 싶어요. 하지만 또 다른 세력이 있어요. 그 세력이 훨씬 더 셉니다. 훨씬 더 세서 나로 하여금 말씀을 지키고 싶은 그것을 묵사발 내버려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싶은 그것보다 더 좋은 세상 것들을 제공해버리면 우리는 잠시 믿음을 보류하고 다른 것을 믿어버려요. ‘아, 대한민국’ 하고 박수치면서 열광하는 것 보세요. 10퍼센트 할인가로 붉은 티 사서 입고 응원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 많아요.

제가 궁금했던 것은 왜 주님한테 그렇게 열광하지 못하는가, 그겁니다. 16강에 목말라서 심신이 쇠약해졌어요. 밤 잠 못자서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비아냥거리면서 시편 84편을 썼거든요. 진짜 신앙인은 여호와의 궁정이 사모되어서 심신이 쇠약해지는 거예요. 빨리 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서요. 주님의 집에 가고 싶어서 열광해야 될 텐데, 월드컵 16강이 아니라 빨리 아버지 집에 합류하고 싶어서 그것이 소원이 되었는데, 그렇게 주님의 집을 사모하는 사람은 16강이든 8강이든 그런 것에 관심 없거든요.

그만큼 그동안 우리가 믿는다고 한 것이 헛 믿음이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천국가지도 못할 인간이 어떤 식으로 갔는가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37절에 보면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자비하라, 정죄하지 말라, 하라와 하지 말라.’ 여기에 눈독을 들여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직도 뭔가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까짓 거,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아서 천국에 가지 뭐.’ 이렇게 하지만 ,그 중간 중간의 말씀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에 우리가 섬뜩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매일같이 말씀으로 우리를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너희가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은 지금 주께서는 너희를 정죄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을 빼고 읽어보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너희를 비판하고 있다. 주님은 너희를 정죄하고 있다. 주님은 너희를 지금 용서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에 우리가 더 신경이 곤두서야 됩니다.

‘야, 하나님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구나.’ ‘이게 봐주니까 그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야. 제가 잘나서 사는 줄 알고 제 힘으로 인생사는 줄 알지. 이거 안 되겠네.’ 이런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비판 받을 필요가 없어. 왜, 훌륭하니까. 나는 누군가로부터 정죄 받을 짓을 한 적이 없어. 나? 난 누구에게 용서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괜찮은 놈이야.’

이것이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이 육체라는 덩어리가 품어내고 있는 악마적인 본성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들썩거리느냐’ 그 말이죠. ‘하나님, 저 문제없어요. 문제없어, 문제없어! 나 문제없습니다. 나는 지금 반듯하게 살고 있어요. 저는 누구에게 해코지 한 적도 없고 이만하면 나는 모범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가는 이 덩치를 하나님도 손대지 마시고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런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지 마소.’

이런 식이 바로 우리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우리의 심보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역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이, 너한테 해코지 하는 사람 있지?’ ‘있고말고요.’ ‘용서해라.’ ‘아니 그걸 왜 용서해줍니까?’ ‘네가 네 주제를 모르는구나. 아직까지도.’ ‘그 사람이 나한테서 돈을 10억을 가져가서 안 갚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놔두라고 하십니까? 너무 심합니다.’ ‘너는 나한테 2천억 빌려가서 안 갚았거든.’

그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이 육체라는 덩어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면서 자기밖에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은혜를 모른다는 행세가 무심코 툭툭 튀어나와요. 남이 나에게 해코지 한 것을 용서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너는 나에게 원수야. 내가 너 작살낼 거야. 내가 얼마나 못되었는지 이번에 보여주리라.’ 이런 것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몽땅 잊어버리고 그런 것은 나는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표시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너는 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 마땅하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데 왜 십자가 마을 목사들은 순종보다도 자꾸 예수님 이야기를 하느냐, 그냥 순종하면 되는데.’라고 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강아지 키우지요. 그 강아지 순종 잘 합니다. 백날 순종해봐야 개입니다. 개나 고양이 키우면서 먹이 한번 안주면 순종 잘해요. 그 개나 고양이가 천국 갑니까? 개나 고양이는 자기 죄를 몰라요.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순종합니다. 순종합니다. 나는 목사 될 만큼 순종합니다. 장로 집사 될 정도로 순종합니다.’ 해도 만일에 누가 자기 죄를 지적해버리면 30년 동안 순종한 것 송두리째 다 날아가 버립니다. ‘누가 날 건드려. 날 건드리는 놈이 누구야.’ 갑자기 살해의지, 날 정죄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우세합니다. 왜? 이것이 우리의 육이니까. 이거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발뺌하지 마세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몸 자체가 우리 몸뚱이에서 뭐가 나오는지 미처 몰랐지요.

어릴 때부터 부모가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주니까 그냥 순종하면 착한 딸 착한 아들 되는지 알았지요. 막상 부모 곁을 떠나서 세상에 나가보니까 착한 놈이 바보 병신입니다. 취직할 때 종교 란에 ‘무’라고 하면 취직 곱게 될 것을 가지고 괜히 ‘기독교’라고 해서 떨어져버린 거예요. ‘괜히 기독교라고 적었어. 아무것도 쓰지 말 것을.’ 믿음이 좋으면 그것으로 취직될 줄 알았지요.

우리는 어느 정도 감사해야 하느냐 하면 누가 나를 정죄하면 거기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이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것인데 일단 선악과를 따먹고 이 몸이 내 것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성경말씀에 순종해도 어느 순간 주께서는 ‘나는 너 같은 인간 천국 안 보내. 지옥 보내.’ 이러면 갑자기 울컥 하고 성질 나옵니다.

나도 몰랐던 그 울컥 성질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보게 되면 정말 천국가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막아서 못가겠다 할 정도로 천국을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천국에 골인하고 싶어도 천국 골키퍼가 200명이나 되어서 골대를 막으니 한 골도 안 넣어주니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해요. ‘천국은 네가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못 박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이 몸은 어떤 성질이 있느냐 하면 주님이 오시니까 오는 손님이라고 다 반겨서 ‘주님 오셨구나.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면서 주님이 오셨다고 하면서 자기가 그 주님을 믿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다 그렇고 선교 단체들이 다 그래요. 예수님 오시면 그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려고 한다 이 말이지요. 자기 주제가 구원받지도 못할 주제라는 것을 생각도 못하는 겁니다. 진짜 자기를 알게 되면 이래야 돼요. ‘주여, 저 같은 인간은 천국에 넣어주지 마세요. 천국 물 흐립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나같이 한 성질 하는 놈 천국 가면 주님 나라 다 버립니다. 나 같은 것이 안 들어가는 것이 천국을 천국답게 깨끗하게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주제를 안다면 그렇게 나와야 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과 율법을 이야기했듯이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과 예수님 이야기를 같이 해 가야돼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을 바친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 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왜 이삭을 주셨느냐 하면 이스마엘을 배제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마엘은 때려죽여도 천국 못 간다는 뜻으로 배제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로 복 줘서 순종하게 만들어서 천국 넣어주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극구 이스마엘을 낳게 해 놓습니다. 이스마엘 하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요. 쉽게 해서 여러분의 자식이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자식을 줘놓고 결코 그 자식은 천국에 못 간다고 아브라함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 심정은 애타지요. 왜냐하면 자식이 하나뿐인데 그 자식이 천국 못 간다고 할 때 그 자식이 태어나기를 아브라함의 육체덩어리에서 태어난 자식이잖아요. 내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그 자식이 불행스러워요.

태어나봤자 잠시 살다가 지옥가야 돼요. 이 말은 내가 지옥 간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식을 저주해버리는 겁니다. 그 저주의 원인을 추적해보니 아브라함 본인입니다. ‘아브라함 네가 바로 저주받는다.’ 하나님이 이삭이라는 자식을 주면서 졸지에 자식이 둘이 되고 말았어요. 어지간하면 둘 다 넣어주면 참 좋겠지 않습니까?

한사코 이스마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것도 이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기에 그 자식 이삭덕분에 네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뭘 비교하느냐 하면 네 몸에서 태어난 자식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그 자식 사이를 날카롭게 대비를 시키는 겁니다.

대비를 시켜서 ‘네가 네 자식이라고 여긴 자식은 지옥가고 너를 구원할 자식으로 주신 하나님의 이삭덕분에 네가 구원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육의 행함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삭이라는 자식 때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이삭이 믿음 좋으면 이삭 혼자 구원받아야 되는데 아버지가 구원받는가?

그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삭을 가져다 바치라고 합니다. 이삭을 바친다는 말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브라함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인 이삭 같은 우리를 가져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겁니다. 죽으라고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 이 인간이 대신 죽어야 되겠습니다.’ 하고 바치는 거예요.

바치면 이스마엘도 지옥가고 이삭도 죽고, 그런데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되살아 나오지요. 이 말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믿음관계가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쳐다봐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홀로 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평생토록 예수 안에서 죽어가는 그 과정을 겪게 하시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은 경사면 같아요. 경사면에 가만 놔두면 죽 미끄러져서 떨어지는 식으로 죽어버립니다.

죽어가는 인간을 가지고 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이 어떤 일이기에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우리를 어떻게 건져내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안보면 아브라함이 누군지 이삭이 누군지 모르잖아요. 성령 없이 성경 보게 되면 ‘하라, 하지 말라.’ 이것만 보고 순종만 하겠다고 덤벼들었지 그렇게 순종하려고 애쓴 우리 자체가 이스마엘이며 버려져야 되고 비워져야 되며 오히려 구원의 방해물이라 하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 전체의 핵심은 아브라함과 이삭관계, 하나님과 아브라함관계,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 그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야기예요. 다른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는? ‘너는 나가놀아라.’ 우리는 그냥 나가노는 거예요. 나가 놀 때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면서 나가노는 거예요. 그 때 믿음은 뭐냐, 선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선물은 반항하면 안돼요. 선물은 몰래 오는 거예요. 거래가 아니고 흥정이 아니니까. 몰래 주어지는 선물은 그냥 간직하면 그것이 선물이지 그것을 되갚아 버리면 선물의 의미가 깨져버리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5절에 나오지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선물을 받았으면 그 선물에 대해서 주님께 갚지 마세요. 찬양, 전도, 헌금 이런 것을 해서 갚지 마세요. 그것을 갚아 버리면 선물의 의미와 가치가 폭발해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줄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주느냐 하면 ‘너는 육체덩어리이고 욕심 덩어리이기 때문에 네가 만약에 순종해서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 사랑의 의미는 다 깨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이삭이 되살아 나오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그 관계에 의해서 이삭이 살아나온 것처럼, 예수님관계가 그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왜 이것이 선물로만 주어지는가를 아는 시기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 되고 그것이 천국가도 계속 이어져야 됩니다.

왜 이것이 거저 주시는 선물일 수밖에 없는가, 대체 이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 이 육체의 욕심이, 죄가 어떤 양상으로 나오기에 우리를 배제하고 오직 주님의 선물로만 구원하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교회 나오게 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하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야 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넘어지고 매일같이 일어서게 되는데 그 넘어질 때 무엇 때문에 넘어지는가 하면, 주님 앞에 믿음을 바쳤다든지, 주님 앞에 순종을 했다든지, 주님 앞에 사랑을 했다든지, 이런 내가 시작해서 이뤘다는 이것이 다 쓸데없고 헛짓이고 소용없는 짓이고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교만케 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일어서면 자빠져야 되고 일어서면 엎어져야 되고, 자꾸 넘어지는 그것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겁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일어서고 자빠지고 일어서고 자빠져야 돼요. 예수 믿는다고 해 놓고 그 믿음 자랑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 해 놓고 나중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 자랑하고. 본의 아니게 원수를 사랑했는데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자기가 원수를 사랑했거든요. 그 다음에는 원수 사랑한 것을 하나의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버릴 수 없는 육에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 중에 가장 오해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사랑부터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 사랑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죽음으로 나타났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얼마나 예상치도 못한 사랑인지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로 말미암아 생명 얻는다.’ 하니까 다 도망갔어요. 너무 위험한 사랑이라서. 그만큼 인간들은 누가 사랑을 주게 되면 자기가 그 사랑을 받으면 될 텐데 자기 쪽에서 꾸역꾸역 사랑받을 수 있는 뭘 끄집어내요. 그 사랑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어떤 바탕을 자기 쪽에서 준비한다고 바빠요.

어린애가 흙장난을 하고 있다고 누가 만 원짜리를 주면 그냥 덜렁 받으면 되는데 돈 만 원 짜리 받겠다고 수돗가에 가서 손 씻고 법석대는 거예요. 이게 아직도 선물의 의미를 이해를 못한 거예요. 더러운 채로, 손에 흙이 묻은 채로, 욕심이 그대로 있는 채로 주님의 용서를 받아 줘야 그게 바로 선물이 선물답게 되는 것이고 거저주심의 은혜가 은혜답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 식으로 뭔가 준비 작업이 있으면 안돼요. 그러면 그 선물이 선물 값을 못해요. 자꾸 괜찮은 사람으로 자기를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이는데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너는 오늘 살 필요 없어. 두 시간 후에 죽어도 괜찮아. 거지가 되어도 괜찮고 네 온 몸이 다 헐어서 기왓장 가지고 긁고 있어도 괜찮아.’ 왜? 선물이니까.

후시딘 연고 발라서 상처 낫는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그야말로 거지꼴이 되어서 노상에서 생활해도 천당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탕자가 되어도 아무 지장이 없어요. 왜? 선물의 위력이니까. 선물은 우리 안에 푹 담겨버리면 선물로서 그것이 최고입니다.

인간이 선물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가짜로 들통 납니다. 죽음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그들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가 너의 죽음입니다. 세 번째가 나의 죽음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하면 듣는 사람 다 잊어버립니다.

순서를 바꿉시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 이렇게 죽음이 세 가지가 있어요. 그들의 죽음이란 천안 함 사고 나서 죽은 자들의 죽음 같은 죽음입니다. ‘참 안되었다.’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측은하게 여기기는 해도 내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왜, 그들이니까, 아무 상관없는 그들이니까.

누군가 교통사고가 났다. ‘안됐다.’ 안됐지만 월드컵은 봅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그들이기에. 나의 감정까지는 흔들어놓지 못하는 죽음이 그들의 죽음이에요. 그 다음이 나의 죽음인데 이것도 별것 아닙니다. 왜, 눈감고 죽으면 그만이니까. 죽기 직전까지는 죽음에 대해 별 걱정할 것 없어요. 왜,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아직 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런데 죽고 난 뒤에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 그래서 나의 죽음은 이러나저러나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너의 죽음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거예요. 죽는 당사자는 죽으면 좋지요.

그런데 내가 평소에 사랑을 했고 모든 것을 퍼줬던 사람이 죽을 때 이것은 미칩니다. 고통이죠. 그들의 죽음도 의미가 없고 나의 죽음도 괜찮은데 인간은 내가 그동안 투자했던 나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다 퍼부었던 그 대상이 죽을 때……, 어떤 영국의 부인은 집에 불이 났는데 손자는 놔두고 개부터 먼저 데리고 나온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욕했다고요. 세상에 자기 손자를 놔두고 개부터 먼저 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손자는 그 애 애비가 키우지만 이 개는 내가 키웠다.’ 내가 정성과 온 몸을 다해서 퍼붓는 데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어요. 내 자식새끼와 내 남편이나 아내도 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 나를 둘로 쪼개서 나의 명예와 나의 위신을 옷 입혔던 나, 현재 이 나 말고 괜찮은 나, 아름다운 나, 추억속의 나, 멋있던 나, 거기에 사람들은 모든 투자를 해요.

그것이 손상되면 자살해버립니다.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 말고 괜찮게 되는 나를 상정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니까 내가 죽으면 그 나도 없어지거든요, 나만 죽으면 나 말고 내가 상상한 나, 그 나가 있는데 나만 죽으면 그 ‘나’도 없어지니까 그 ‘나’의 죽음으로 내 고통이 쉼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결국은 ‘인간은 자기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목사님 글에 이렇게 해 놓았어요. ‘돈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오늘날 교회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요.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돈보다 더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돈은 바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서 돈을 모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없으면 왜 괴로우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 되고 싶은 내가 따로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힘을 못 모으기 때문에 맨 날 이 모양 이 꼴로 지내면서 내가 소망하는 내가 뻔히 모이는데도 안 될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잖아요.

이 말은 ‘이삭이나 아브라함 너나 너 자신을 위하여 이 땅에 출몰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선물을 베풀 수 있는가를 후대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역할을 하라.’고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 있기 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 바라보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했거든요. 사람이 죽으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요. 음부에 내려가면 이 껍데기의 혀, 눈, 코는 다 없어집니다. 이것은 장례치를 때 장의사에게 맡겨서 화장하든지 매장하든지 다 없어집니다. 음부에 가면 거기에 적합한 몸이 또 있어요. 하나님도 참 희한한 몸을 다 준비했어요. 이 몸이 또 입을 놀려요. 부자가 지옥 가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를 보면서 ‘아브라함이여, 여기 물 없어서 목이 마르니 저 거지 불러다가 이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할 정도로 지금 혀와 눈이 다 화장터에서 불타고 있는데 그 눈과 혀가 다 아브라함 품의 나사로를 보고 고통을 느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몸을 준비해 놓았어요. 성형수술 해봐야 음부에 내려가면 끝납니다. 거기에는 물론 병원도 없고. 음부는 임시적으로 있는 것인데 나중에 주께서 재림하시면 음부에서 둘로 갈라지요. 천국 갈사람 천국으로 분류되고 지옥 갈사람 지옥으로 분류됩니다. 거기서 영원히 살아요. 음부에 내려가 있는 동안은 아직 입을 놀리지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 산에 있을 때는 아직 음부에 있는 거예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은 음부에 내려가도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영원한 천국의 몸은 아니지만 음부에 적합한 몸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거합니다.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빨리 죽어서 이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이 육체덩어리는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악마의 심성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현재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에게 덮쳐진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니 은혜니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백날 이야기해도 ‘내 행함으로 내가 순종하고 안하고에 달렸어. 나는 이 말씀을 내가 실천에 옮기겠어.’ 이런 식으로 천국가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지적하느냐 하면 이미 천국에 가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완전히 육의 지배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너 순종 안 되거든. 너는 나처럼 못살아. 내가 너한테 순종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피를 보여줬다.’는 거예요. 십자가 피를 보여준 이것은 선물이라는 겁니다. 선물 뜯어볼 생각은 안하고 자꾸 그 앞에서 ‘순종했나이다. 누가복음 6장을 순종했나이다. 실천에 옮겼나이다.’ 맨 날 이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조금씩 피를 흘립니다. 계속 피를 흘립니다. <헨델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에 보면 계모가 자식들을 학대해서 내보니까 애들이 돌멩이를 던지면서 가니까 멀리 내보내도 되돌아오고 또 보내도 되돌아옵니다. 주님께서 천국가시면서 피를 흘려 놓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까짓 거 실천에 옮긴다.’ 하다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보면 거기에 주의 십자가 피가 묻어 있고, 또 ‘이제는 예수 피 믿는다. 이제 믿으니까 내가 내 힘으로 성경지켜야지.’ 하다가 또 엎어지고 자빠지고 보니 거기에 피가 있고, 그 피를 따라 가보면 그 피가 있는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덮썩 안아주시는 자리입니다.

‘탕자야, 이리 오너라. 모든 것을 마련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너무 못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큰 교회 출입구에서 사람들이 예배마치고 몰려나오는 것을 보면 뭐로 보이느냐 하면 항문으로 보여요. 똥이 쏟아지는 것 같아요. 너무나 쏟아져서 설사로 보여요. 그 안에 똥 덩어리가 우글거리고 그게 밖으로 나와도 똥 덩어리예요. 똥 덩어리!

축복받겠다고, 이 육체를 섬기기 위해서 예수 이용하고 하나님 이용하는 것들이 죽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피가 나와야 됩니다. 피가! 피가 발린 채 세상에 나와야 돼요. ‘나 피 선물 받았다.’ 그거 자랑해야 됩니다.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 왜? 머리 되시는 분이 피를 흘렸기에 그 피가 온 몸, 어깨를 적시고 허리를 적시고 팔과 다리를 다 적셔서 보이지 않는 예배당, 전 세계가 피로 물든 예배당이란 사실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 알지요.

우리는 이스마엘 같은 나, 이거 진짜 포기해야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자유롭다 하는데 웃기는 소리예요. 제가 보기에는 자기 가족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좋은데, ‘목사님, 저는 교회에서 자유롭고 예수 믿습니다.’ 하는데 가만 보니 가정을 믿어요. 자기 새끼를 믿고 가족을 믿어요.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왜? 아버지의 육적인 본성이기에 그렇습니다. 내 본성이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해요. 이걸 하나님께서 아시고 기어이 그 자식을 밀어냅니다. 자식보고 대놓고 지옥가라고 할 것은 못되고요, 기어이 밀어내니까 그 자식한테 이 아버지가 ‘아버지가 믿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 있게 이야기해 주셔야 됩니다.

‘자식아, 미안하다. 나는 주님 믿어야 한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상처를 입고 결국은 나자빠져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살해의지가 생깁니다. ‘용서하라, 자비하라, 정죄하지 말라.’ 이것이 모여져서 육에 도달하면 이 육체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주님을 결국 찔러 죽이게 됩니다. ‘어딜 감히 괜찮은 나를 정죄해. 예수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그래 나 인간이다. 이렇게 밖에 못산다. 어쩔래.’ 하고 마귀적 본성, 가인의 본성이 아벨을 죽이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찔러죽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그것이 죄로 드러나고 엎어지게 되면 코앞에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인간을 위해서 흘리신 선물이 있습니다. ‘피’입니다. 비로소 내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나는 나밖에 신봉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발견한 그 순간 예수님 피가 우리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주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구나. 율법을 주신 것은 바로 내가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아브라함이 진짜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구나. 그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그 전에 우리가 결국 나밖에는 믿을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신 선물에 의한 믿음에 의해서 아브라함도 그 주님을 믿고 구원받았구나.’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매일같이 어떤 즐거움이 있느냐 하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항상 예수님의 피를 다시 한 번 발견하는데서 선물을 받았다는 이 느긋함, 누가 뭐래도 ‘나는 거지라도 좋아. 나는 병자라도 좋아.’하는 이 선물이 우리 행함으로 섞이지 말고 이 선물 그대로, 주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이, 사랑 그대로 우리가 갚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간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고 얼마나 정죄 받는 자리인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실컷 정죄 받고 실컷 비판받고 실컷 죄인이라고 이런 핀잔을 받는 그 자체가 뒤에 예수님의 피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