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 15:38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6:20-22)

복이 있도다

2010년 5월 3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20-22

(눅 6:20, 개정)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개정)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2, 개정)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천국이 좋은 곳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천국에서 제시하는 출입 자격요건이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그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익히 아는 자격요건을 내세워서 천국을 그려낼 것이 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이 천국 입장 요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식이 아니라 도리어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가 악하고 버림을 당하는 것’한다는 식으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결국 그 누구도 진짜 천국에서 제시하는 천국 기준을 수용할 위인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국갈 수 있는  ‘너희’는 오로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친히 찾아오신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우리가 예수님만이 친히 심판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천국 갈거냐 못갈거냐를 판정짓는 유일한 판정관이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자신의 말을 우리가 들어서도 아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기 나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준을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아무리 오래동안 길게 산다할지라도 그 마지막 퍼즐의 남은 조각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화려해도 사망이라는 뚜껑으로 몽땅 그 인생을 대변해주는 차원에서 덮히게 되면 그가 한 모든 짓이 죄를 낳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노리는 천국관과 진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항상 ‘미워하고 멀리하고 악하다고 욕얻어먹고 버림을 당하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이 땅을 통과하고 경과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는 하늘나라로 복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긁어면서 통과하게 되면 마치 꿀단지를 지상에서 끌고 갈 때에 숨어있는 온갖 개미들이 달려드는 것처럼 악마의 자식들이 예수님에게 달려들어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마가 제시하는 천국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웃으면서 천국 들어가는 것이고 부자로 변모된 채로 천국 들어가는 것이고 배부른 자가 되어서 천국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상품으로 내걸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노림수가 있습니다. 웃고 싶어서 교회오고 싶고, 배부르고 싶어서 교회 나오고 부자되고 싶어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교인수가 많고 번성하고 화목하고 웃음이 넘쳐나도 실제 천국 면접을 받는날 서류 접수조차 되지를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 기준과 전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동네가 천국 들어가지 못할 자들만 죄다 끌어모아놓은 것입니다.

웃는 자가 울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자가 웃고 싶어서 교회 나오기 때문에 교회가 이점을 간파해서 예수님께서 제시한 기준과 정반대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포섭해서 붙들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참된 기준을 제시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교회 성장에 방해한다고 미워하고 욕하고 버릴 것은 뻔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준의 결말이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1차 방문 스케줄을 완성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사람의 달린다는 것을 사람들은 유일한 하나님의 뜻을 발생하는 것을 사람들이 원치 않음을 보이는 사건입니다.

즉 악마는 예수님보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이는 십자가 매달리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십자가에 안 달리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지상에서 대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치 코치도 없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곧 예수님에게 퍼부어지는 신의 저주가 곧 인간의 몸을 지닌 모든 인간에게 한결같이 주어져야 될 저주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해도 실은 몽땅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짓을 그동안 열심히 해온 것 밖에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십자가 내막을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의 성공이라고 해석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천국의 문을 가로막는 단체가 곧 교회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교회 오기 전에 익히 알았던 그 천국의 기준이 곧 예수님의 기준과 같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펼치고 예수님의 기준과 대조해보니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 기준을 외치는 자를 미워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버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과연 이런 세상 사람들을 왜 하나님께서 아직도 번창케 하시는 겁니까? 창세기 4장에 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는 조기 이 땅에서 은퇴하고 그를 죽인 자, 가인은 안 죽고 번창하게 하시는데 그 가인에게는 마크, 곧 배지(badge)가 있습니다.

그 마크는 바로,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고집과 자신에게만은 이길 수 없었음을 떠벌리고 그것으로 사람이 이 세상을 영원히는 보람과 즐거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신마저 내가 꺽었다. 신의 뜻마저 나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음’을 자랑스레 증거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번창케 하고 성도 주변에 배치하고 교회마저 집어삼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뜻이란 결정난 겁니다.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변동될 사항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는 하늘로부터 믿음마저 선물이라는 형식으로 수입받게 되는데 그 믿음의 내용은 곧 ‘하늘의 것’이 그대로 본인에게 주어짐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게 말씀하시기를, “인간이란 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다”고 한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자기 뜻을 거기에 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하면 결코 자력으로 말씀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날이갈수록 수렁에 빠진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죄인임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 자신이 의인되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늘 가난하고, 늘 배고프고, 늘 우는 자가 됩니다. 세상의 재물이 아무리 자기 곁에 있더라도 그것으로 자아의 가치를 결정짓지 아닙니다. 곤고한 수렁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거기에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터져나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죄를 숨기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게 해주시고 그 죄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들켜버린 것을 수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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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강-눅6장20-22(복이 있도다)-luk100530

2010-06-01 11:19:17   녹취 : 오용익 


029강-눅6장20-22(복이 있도다)-luk1005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6:20-22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아멘’이 별로 안 나오는 것 같아요. 하나님나라,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좋은 곳인데 만약에 하나님나라를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안 좋다면 그 하나님나라가 과연 좋은 곳인지를 다시 한 번 고려해 봐야 됩니다. 어린이 공원이 시설이 잘되어 있다든지 혹은 우방 랜드가 시설 좋다고 합니다.

좋은 것 다 압니다. 그런데 어린이 한 사람당 입장료가 250만원 한다고 하면 ‘에이, 도둑놈아.’ 할 거예요. ‘거기 들어가는데 뭐가 그리도 비싸냐. 그러면 아무도 안 들어가지.’ 하고 뺄 것입니다. 천국이 좋다 하는데 뭘 근거해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일단 좋다고 다들 생각해요. 아마 이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좋은데 가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 들어가는 그 기준, 입구에 대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가난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나라 알고 그 즉시로 가난하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는 그것을 노리지 마세요. 계속 가난해야 돼요. 어디까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가난해야 돼요. 그 다음에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린 자가 복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배부를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그 입구에서 배 부르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배 쫄쫄 굶어야 되고 하늘나라 가기까지 계속 굶주려야 되며 그래서 하늘나라 갔으니까 배불러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있지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하나님나라 가기 전에 미리 히죽히죽 웃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계속 울고 있어야 되고 ‘내가 이제 예수님 알았으니 웃으련다.’ 하면 큰일 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갈 때까지 계속 울고 있어야 되고 가서 웃으라는 겁니다. 지난 주 우도에 가서 어느 교회 세미나 할 때에 제 뒤에 강의한 강사분의 강의 제목을 보니 ‘웃음치료’라고 되어 있어요. 그 목사님이 성경 펼쳐서 한 구절 읽어놓고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웃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웃어야 신이 나고 웃어야 기가 펴지고 웃어야 행복해집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웃었던 모양이지요. 제가 강의하고서 간 뒤에 그랬습니다. 제가 거기 있었으면 난리 나지요. 사람을 지옥을 보내려고 환장을 했어요. 웃는 자는 못 들어가는 곳이 하늘나라인데, 아니, 하늘나라 가겠다고 교회 온 거잖아요.

교회 살림 살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 통과해서 교회가 하늘나라 가는 여행사 역할을 하니까 교회 등록하면 그것이 하늘나라 등록되는 줄 알고 세례 받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줄 알고 교회 왔다 이 말이지요. 와서 등록만 하면 됩니까? 문제는 하늘나라에서 서류미비로 접수가 안돼요. 이게 미칠 지경이에요.

교회는 크고 재미있고 화목하고,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구분은 안 되지만 활기차고 서로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들 구제하고 바자회도 열고, 다 좋아요. 교회가 그렇게 화목하고 재미있어서 가고 싶어서 환장하고 다 좋은데 문제는 하늘나라에서 접수가 안 된다니까. 헛수고 한 거지요. 교회 한 50년 다닌 것 헛방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안받아주겠다는데 자기들끼리 서울광장 모여서 시위하는 거지요. ‘미국 소 수입하지 마라.’ 데모하는 식으로. 하늘나라에서 안받아주겠다는 데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주겠답니다. 교회 와서 행복한 것 인정합니다. 교회 와서 기도해서 복 받은 것 인정해요. 부부가 여자는 교회 나오는데 남자는 교회 안 나오는데 목사님이 심방 와서 잘 구슬리니까  교회 나왔다, 그것 인정해요.

어떤 분은 전도하는 것이 주특기인데 특히 어떤 주특기를 발휘하느냐 하면 아내 혼자 교회 나오고 남편은 안 나오는 가정에 가서 남편 나오게 하는 주특기입니다. 방법은 뭐냐, 그 분이 사용하는 방법이 간단해요. 옛날에 그렇게 했다는 소리를 제가 들었어요. 그 집 남편과 술자리에 가서 술을 같이 마시는 거예요.

같이 술 먹으면서 ‘술 마셔도 괜찮습니다. 교회 나오세요. 담배 피워도 괜찮습니다. 교회 나오세요.’ 만약에 거기서 더 필요하면 몇 가지 더 할 수도 있지요. ‘정수기를 팔고 계십니까? 우리교회 교인이 몇 명인데요. 한사람에 한 대씩만 팔아도 다 팔립니다.’ 혹은 ‘보험하고 계십니까? 다 한 구좌씩 틉니다.’ 또는 ‘교회 나와서 손해 보는 일은 없습니다. 가정이 하나 되면 애들 보기에도 좋습니다. 애들이 엇나가는 것은 부부가 하나가 안 되어서 그런 거예요. 종교가 하나가 안 되니까 애들부터 엇나가는데 애들을 봐서라도 교회 나와 주세요.’

이것이 얼마든지 설득력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나와 주면 전도 잘한다고 칭찬받고 분위기가 좋다는 말이지요. 교회에서 장로로 진급도 되고 좋다 이 말이죠. 참 좋은데, 그게 참 좋은데! 이 소리를 하니 CF가 생각나네요. ‘산○○, 남자에게 참 좋은데!’ 교회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참 좋은데 이 교회의 문제는 천국에서 이 교회를 안받아준다는 겁니다. 천국에서 받아주지를 않아요. 교회까지는 왔는데 천국에서는 서류접수를 안 해준다니까요.

왜냐하면 천국에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심판 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심판 주라는 용어를 헛되이 듣지 마세요. 심판 주라는 것은 우리가 천국 갈 사람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마지막 면접관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최고 자리에 앉은 면접관이에요.

그 면접관, 더 쉽게 말하면 천국 갈 사람이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서 시험을 치는데 시험 출제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오셨는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나라 하나님생각은 하나님이 내신 그 문제에 있는데 사람들은 마지막 그 면접관이 오셔서 천국의 기준에 대해서 뭐라고 외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목사님, 교회 가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교회 가면 지금보다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겠습니까? 그러면 교회 나와 줄게요.’ 또는 ‘제가 술을 못 끊고 있는데 교회 나오면 두 달 만에 술 끊을 수 있습니까? 마약도 끊고 도박도 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 나올게요.’ 혹은 ‘우리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는데 안수기도를 받으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 나올게요.’

그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기준을 스스로 정해놓고 교회 온 겁니다. 이걸 사단 났다고 하지요. 경상도 말로 사달 났다고 하지요. 이것이 서로 아귀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목사들 마다 사람들을 유인하는 요소들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중보기도 하면 응답됩니다.’

전부 다 사람들의 요구조건에 합당한 것만 전해서 그들은 자기가 교회 오기 전에 갖고 있던 양심상 ‘착한 사람 되면 천국 간다.’ 하는 그 기준이 맞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예수님 뜻과 일치되는 줄 알고 한 거예요. 왜? 강단에 선 목사부터가 인간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과 합치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아하, 교회 별거 아니네. 내가 교회 오기 전에 생각했던 것하고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오인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교회 앞에 ‘목적으로 이끄는 삶’ 이렇게 적어 놓았어요. ‘여러분이 목적하는 것은 기도하시면 응답됩니다.’ 이런 식으로 적어 놓으니까 이것은 교회 다니기 전에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지성, 정성이 가해지면 하늘에서 받는다.’는 이것과 일치되니까 ‘아, 내 뜻이 맞구나.’ 라고 된다 이 말이죠.

또 어느 교회 가니까 ‘우리 교회 사법고시 12명 합격’이라고 써 붙인 거예요. ‘아, 사법고시 합격하는 이것이 복에 해당되는구나. 그러면 내 아들이 법대 다녔는데 그리고 그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하는 것이 내 소망이었는데 내 소망과 하나님의 소망이 같기는 같네.’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모아놓아 봤지 그것은 쓰레기더미죠.

거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천불나서 교회 바깥에서는 울었는데 교회 와서 웃어보자고 교회 온 거예요. 이런 오류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 와서 목사만 쳐다본 겁니다. 보통 사람은 다 눈이 두 개가 있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3D가 되니까. 눈 두 개 가지고 성경 한 번 보라고요. 거기 뭐라고 되어 있는지.

울라고 되어 있습니다. 울어야 되고 가난해야 되고 애통해야 되고 쫄쫄 굶어야 되고, ‘그런 자가 있다면 하나님나라는 그런 자가 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를 스톱하고 ‘설교 끝!’ 해버리면 전부 다 마음이 찌뿌듯할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용감한 분들, 중직에 해당되시는 분들은 또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목사님 말씀이 성경과 어긋났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요.’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세요. ‘그래가지고 교회가 되겠습니까? 목사님 훌륭하신 것은 제가 다 익히 알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설교해서 교회가 되겠습니까?’ 결국은 교인들이 교회 되겠다고 온 거예요. 결국 하늘나라 가겠다고 교회 온 것이 아니고 교회 되겠다고 교회 오신 거예요. 진짜 목사는 교회 부수려고 하는데 교인들은 교회 한 번 만들어보자고 하는 거예요. 힘 한 번 써보겠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런 예는 빙빙 돌리는 예 보다는 실감나는 예를 들어야 이것이 머리에 오래 박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니까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그곳에 내가 거기 있다.’(마 18:20)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그리워하는 두 세 사람, 여기서 ‘세’는 빼버립시다, 두 사람만 모여도 교회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교회 장소라는 것은 뭐냐, 저 멀리 영천에 계신 이 ○○ 장로님 댁에 제가 몇 번 가봤는데 집이 두 채 있어요. 한 채는 이 ○○장로님이 기거하는 집이 한 채 있고 또 개들이 놀고 있는 집이 또 한 채 있어요. 바람만 좀 세게 불면 곧장 무너질 것 같은 집이 한 채 더 있어요. 그 집에서 예배드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까?

이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를 아니까 제가 맘 놓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장소가 없으면 우리 집에서 모입시다.’ 했으면 그게 교회 아니냐 이 말이지요. 그게 교회거든요. 이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집사들도 안 지려고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최 ○○씨도 ‘우리 집에서 모입시다.’ 송○○집사님도 ‘우리 집에서 모입시다.’ 최○○ 권사님도 ‘우리 집에서 모입시다.’

교회 어디 있느냐, 걱정할 문제는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모입시다.’ 하는 대신에 뭘 하느냐 하면 ‘교회 짓기 위해서 제가 돈 얼마 내면 됩니까?’ 하고 나온 거예요. 다 같이 얼마씩 분담해서 얼마의 뭉칫돈을 내는 것을 원하지 ‘우리 집이 피아노 학원인데 거기서 모입시다.’ 하고 자기 집을 개방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왜냐, 교회 따로 만들고 내 집 내가 따로 챙기기 위해서. 교회 갔다가 얼른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가려고. ‘내 집에는 들어오지 마라. 말씀이고 뭐고 들어오지 마라. 교회와 다른 장소에 있겠다.’ 그 기준이 저한테는 다 통할 수 있는데요, 그게 하늘나라 서류심사에 통과되겠습니까? 하늘나라면접관에게 설득이 되겠습니까?

‘예수님, 우리 집은 손대지 마시고요. 각자 돈 분담해서 공간하나 마련해서 거기서 합시다.’라는 것이 우리 주님한테 통하겠느냐 이 말이죠. 물론 자기 집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면 ‘야, 우리 집에 드디어 교회가 되는구나. 이 기회에 커튼도 새것으로 달아야지.’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 ‘교인들 오세요. 우리 이렇게 삽니다. 초라하기는 해도 청소는 깨끗하게 하고 삽니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그 집에 치매 걸린 시부모가 계셔서 온 벽에 똥오줌을 발라서 냄새가 난다고 합시다. 그런데다가 ‘자, 오세요.’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지요. 자기의 수치가 드러나지요. 바로 그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따로 꼬불쳐서 숨겨놓은 그 수치스런 그 지점에 ET처럼 주님이 손가락을 딱 댑니다.

우리가 곱게 숨겨온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 수치스러움과 손가락을 통해서 주님의 피를 흘려서 그 피가 우리조차도 차마 드러내기 싫어하는 지저분하고 허접스러운, ‘야, 인간이, 내가 이렇게 더러울 줄은 몰랐다.’ 하는 그 지점을 통과할 때 그 지점이 우리가 우는 자리고 집에 밥이 있어도 먹기 싫은 자리고 돈이 있어도 그 돈이 싫을 정도로 자기의 더러운 그 모습이 노출되는 자리요, 아무리 개그콘서트 웃기는 것 해도 자기 자신의 더러운 것을 생각하면 울음이 나오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어디로 찾아오시는가,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옷 근사하게 입고 교회만 한 번 갔다가 와 주면 하늘나라에 눈도장 찍은 것처럼 착각하는,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별로고 내가 스물네 시간 신경 쓰는 것은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뿐인 내 집구석, 이것만 위하여 평생 몸 바치는 그 자리, 그 자리 박살내 버립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청소하고, 그런 것 안봅니다. ‘너, 집구석에서 뭐하고 있느냐.’ 그걸 묻습니다. 면접관이 직접 찾아와요. 찾아와서 그 서류작성 주님이 혼자 하십니다. “일곱 살 때 오줌 쌌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 커닝도 했네. 두 번째 시간 시험 칠 때 했잖아.” “그건 남들 다 하는 겁니다. 그 때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인데 그걸 가지고 뭘.”

전부 다 퍼즐을 짜요. 죄의 퍼즐을 짜서 마지막 퍼즐조각이 뭐냐, 죽음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롬 6:23) ‘너는 네 행세를 봐서는 진즉에 죽어야 될 인간이다. 그런데 왜 살려두었는가? 네가 죽을 인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를 울리기 위해서 살려두었고 너한테 20억, 100억, 1000억이 있어도 너는 굶주리는 자로 살아야 하며 네가 아무리 너를 위장하고 변장하고 치장하려고 교회 와서 믿는 척 하고 기도하는 척 하고 헌금 내는 척 하고 뭔가로 어떻게 영광을 돌리는 척 하지만 전부 다 가짜인 것을, 사실은 네 꿍꿍이는 딴 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 위해서 너로 하여금 교회 다니게 했다.’는 거예요.

똑같은 인간들을 만나게 한 겁니다. 서로 서로 속은 거예요. 교인들은 목사 속이고 목사는 또 교인들 속이는 식으로 똑같은 인간들이 모인 거예요. 그 교회에서 칭찬받은 그것, 하늘나라 서류에는 전혀 기입이 안 되는 사항입니다. 하늘나라 이력서에 ‘어느 교회 다녔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몇 년을 다니고 직분은 무엇인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들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이 예상했던 우방 랜드 같은 천국, 살기 좋은 천국, 이런 환상을 와장창 깨기 위해서, 판유리 깨면 다 조각조각 깨지듯이 깨어지고 그것을 깨면서 난데없이 하늘나라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침투한 겁니다.

“하늘나라가 뭔지 알겠느냐?” “궁금합니다.” “궁금하다고?” “그러면 내게 배워라.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여기 22절에 봅시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의 면접관인데 우리의 마지막 퍼즐은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있습니다. ‘심판대’라는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와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그리스도께서 이 본문 그대로 출제한 이 문제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는 아무런 변경도 없이 그대로 합니다.

그대로 하면서 묻습니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변명을 내놓느냐하면 ‘교회 가기 전에는 개떡같이 살았는데 내가 인간 한 번 되어 보려고 교회 와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성경이 시키는 대로 다 지켜서 착한 일이란 착한 일은 찾아다니면서 다 했습니다. 반듯하게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적은 없습니다. 착한 일 하니까 주위의 사람들이 모이고 칭찬은 해대지만 버림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도 이유라고 대느냐? 네가 잘못 살았다.’ 그 말이지요.

본문에 두 종류가 있어요. ‘사람들’과 ‘너희’를 구분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이 찾아온 우리와 주님이 안 찾아주신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구분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등 뒤에 뭐가 있느냐하면, 여전히 하늘나라가 연결되어 있어요. 마지막 심판 주이신 예수님이 면접관이 되셔서 서류를 작성해 가면서, 심판의 기준을 툭툭 던지면서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거든요.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 가신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이 가시는 그 모습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마치 설탕이나 꿀을 가지고 가면 거기에 난데없이 개미가 들끓듯이, 예수님이 슥 끌고 가니까 갑자기 주변이 악마로 변하는 거예요. 주변이 개미떼로 변하는 거예요. 예수 말고 딴 사람하고는 서로 서로 친하게 살면서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 교인끼리 서로 사랑합시다.’ 하다가 갑자기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막 쏘아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예수님 본인이 지금 시범조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인자처럼 버림받고 인자처럼 욕 얻어먹고 인자처럼 사람들에게 미움 받으면 그게 인자와 합류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유일한 코스, 오직 좁은 길, 그 코스 외에 다른 코스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실 때 무엇으로 떠났는가, 십자가로 떠났거든요.

악마의 새끼들, 하여튼 다른데서는 점잖은 그 바리새인들이, 훌륭하다 못해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만 하면 막 달려드는 거예요. 이것이 어디까지 기어 올라가려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까지 가요.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마귀가 하는 말이 뭐냐, ‘밑으로 내려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위에서 보지 말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보지 말고 십자가는 그냥 빈 나무, 나무 두 개를 크로스해서 만든 나무쪼가리로만 덜렁 있게 하자.’는 겁니다. ‘십자가에는 아무도 없게 하고 빨리 내려오라.’고 하는 거예요. 내려오라고 하는 것인데 주님은 기어이 십자가에 올라  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올라가야 하나님께 저주받을 수 있습니다.

그 죄도 예수님 죄가 아니고 우리 대신 짊어지는 죄 때문에 아버지께 직접 저주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그게 싫은 거예요.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내가 저주받는 것이 싫어서 자꾸 예수님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판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도 신임 판사라고 합시다. 3년 전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연수원에서 수석해서 판사 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지금 주위에서 중매가 막 들어오고 난리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 판사가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올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간다는 뜻이 뭡니까? 그것은 인간의 몸이 하나님에게 저주받아야 될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 버리면 판사 되려고 애쓴, 책을 수십 권이나 달달 외우고 밤 새느라 코피 터지면서 공부했던, 남들 놀 때 안 놀고 남들 다 하는 미팅도 한 번 안하면서 수고한 그 청춘이 졸지에 뭉쳐져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뭐 받는 것이다?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이 표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며 네기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예수여, 우리 다 같이 십자가에 올라가지 맙시다. 내려와, 거기서. 올라가면 안 돼. 네가 올라가면 저주받는 꼴이 되니까 내려와서 저주 없다! 저주가 없는 것을 여기자.’

그래서 그 십자가에 올라가지 말고 빈 십자가 만들어 버리고 세상에서 각자각자 품고 있던 마귀가 요구한대로 만드는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가 천국을 막는 곳이 되고 말았어요. 면접관인 예수님은 ‘울라’고 했는데 교회에서는 ‘웃음치료’를 한다고 난리가 났어요. ‘와하하하하! 웃으세요. 웃으세요. 여러분, 행복 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가 행복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면접관 하고 생각이 달라요. 다릅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사랑하는 동생 아벨을 죽이게 만들고 죄에 뒤집어씌운 가인은 계속 살려줘요. 살려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인에게 어떤 마크가 있어요. 어떤 학자는 그것을 배지(휘장) 라고 하는데 그 배지라는 말도 요한계시록의 일곱 짐승과 관련해서 멋진 말입니다.

가인은 어떤 마크를 달고 다니느냐하면, ‘나에게 하나님의 흔적이 있었는데 그 흔적을 내가 마귀에 씌어서 지워버린 당사자가 바로 나야. 하나님의 흔적마저 이길 수 있는 게 바로 나야. 하나님마저 나한테는 못 당해.’라는 것을 증거 하는 증거인으로서 그 가인은 계속 살아서 도시를 만들고 나라를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민족을 만들어야 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살아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배지, 마크가 있어요. 하나님마저 내 손에 죽을 하나의 개밥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마저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그것을 자신만만하게 보여줄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사람들은 살아야 되는 거예요.

사람에게 두 종료의 마크가 있는데 한쪽은 어떤 마크냐,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도 그저 이 몸은 주님 앞에 저주받을 몸 맞습니다, 교회 세우고 장로 되고 집사 되고 목사 되어도 소용없고 그저 이 몸은 하나님 앞에 왜 죄인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드러내는 그런 몸입니다.’라고 하는 마크, ‘어린양의 피가 내가 가장 숨기기 싫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곳에 피가 닿았기에 그 피로 말미암아 내가 의인 되었지 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내가 천국 갈수도 없고 의인 될 수도 없는 죄인이고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어린양의 마크가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게 아니고 ‘하나님? 내 주먹 한방에 날아간다.’라고 하나님마저 꺾는 재미로 그 보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조롱하면서 즐기면서 ‘웃기네’ 하면서 예수마저 우습게 처단시키는 그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살아가는 그런 마크가 그 속에서 발산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도 실질적인 예를 들어야 팍팍 다가옵니다. 며칠 후면 월드컵이 시작되는데 만약에 월드컵경기 하는 시간이, 그리스대 한국 16강전 하는 시간이 오전 11시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갖가지 아이디어가 있어요. 우선 우리교회는 인터넷이 되니까 한쪽에는 인터넷을 열어놓는 거예요. 또 한쪽에는 텔레비전 켜놓고 축구를 보는 겁니다.

‘교회 꼭 가야 구원받나? 나는 이미 믿잖아. 내가 믿는다는 것을 주께서 잘 아시지요?’라고 한 거예요. 박지성이 한골 넣었어요. 그러면 기쁘지요. 그 뒤에 며칠 뒤에 아르헨티나하고 시합하는 날에 주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면 그 사람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주여, 이거나 보고 가게 내일오세요. 저는 이걸 꼭 봐야 됩니다.’

우리 맘속에 ‘뭔가는 제가 웃을 수 있는 여건을 제발 허용해 달라.’는 거예요. 주님한테 ‘제가 맨 날 웃고 살수는 없더라도 제발 웃을 수 있는 여건은 좀 허용해 달라.’는 거예요. ‘16강전, 8강전 들여다보면서 웃고 천당 가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나는 가난한 놈이 아니야. 난 대단한 놈이야. 나는 가진 것이 많아, 라는 티를 내고 자랑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해주시고 천당하게 해주옵소서.’라고 요구하는 그 무엇, ‘내가 이렇게 배부릅니다. 나는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정도 노력해서 이정도 재산 모았습니다, 라고 떠벌일 수 있는 그런 여건은 하나 조성해 주시고 나를 데려가면 천당 가겠습니다. 그것도 예수의 피로 가겠습니다.’라는 거예요.

무슨 예수의 피가 그런 피가 있습니까? 나의 잘난 장점하고 만나는 예수의 피, 그런 예수의 피는 없어요. 예수의 피가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너는 자력으로 구원 못 받지. 이 수렁에 빠진 놈아.’라는 지점에서 주의 피가 사랑에서 사랑으로 용서로 긍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이것은 광주에서 강의한 것인데 잠깐 해 볼게요. 사람은 죄와 악 둘로 나누는데 신약에서는 같이 봐도 괜찮아요. 악은 어떤 경우에 악이냐 하면, 법이 발생될 때 악입니다. 어렵게 말해서 양심이 발생될 때 악이 생겨요. 그래서 옛날 구약 때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키면 선이 되고 율법을 못 지키면 악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가들의 속내를 까발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주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사람은 자꾸 선악, 선악 하면서 ‘나는 악을 버리고 선 쪽으로 가야지.’ 하면서 맨 날 선악만 따지지만 그렇게 따지는 것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감추어진, 인간이 미처 모르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기는 선악, 선악밖에는 모르지 죄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죄는 어디서 아는가? 주님께서 면접관이 십자가 지실 때 비로소 ‘내가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죄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너 죄인이야.’ 하면 그냥 이유를 따지지 말고, ‘뭐가 잘못되었는데?’ 라고 따지지 말고, ‘맞습니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면 돼요. 이게 복음입니다. ‘아, 나쁜 짓하니까 그게 죄구나.’ 그게 아니에요. ‘착한 일을 했는데 왜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나.’ 그것도 아니라니까요. 죄라고 하는 것은 타고난 거예요.

“너, 이 근호!” “저는 이 근수인데요.” 참고적으로 ‘이 근수’는 우리 형의 이름인데, “제가 이 근수인데요.” 엄마, 아빠가 나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이 근호’라고 지었으면 내 이름은 그냥 이 근호예요. 참 쉽죠, 잉? 그러니까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야.’ 그러면 그 냥 죄인 하면 되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오해해서 선악구조로 가지고 와서 ‘우리보고 죄인이래. 그러니까 나쁜 짓을 안해야 복 받고 천당 간대.’ 자꾸 선악구조로 따지는 거예요.

주께서 오셔서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야.’ 그것을 다윗은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시 51:5)고 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다.’(시 51:17) 이처럼 그냥 그대로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만나주시면 뭐가 기다리느냐하면, ‘너는 의인이야.’ 하면 착한 일을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가서 의인이 아니고 교회 안 나와서 월드컵 봤다고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봤다고 해서 의인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죄인 되는 것이 주께서 ‘너는 죄인이야.’ 선고해서 죄인된 것처럼 ‘너는 의인이야.’ 하는 것도 주님이 선고해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아요. 무슨 뜻이냐, ‘내 생각 접고 주님 생각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당신은 어떻게 의인이 되어서 천국을 가느냐.’고 묻는다면 내 행동을 끄집어내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신 그것 때문에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그것을 주님에게 미뤄 버리세요.

내가 의인된 근거를 나한테서 찾지 말고 주님한테 밀어내 버리라고요. 밀어내야 돼요. 안 밀어내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나를 구원시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그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안 봐도 되겠네요.’ 천만의 소리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해서 무수한 권면과 명령들을 주셨어요.

그 말씀을 들으면 처음에는 느낌상 우리가 몇 개는 지킨 것도 같지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수렁에 빠지게 합니다. 점점 더 수렁에 빠져요. ‘야, 진짜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구나.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구나. 절망이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7장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예수 처음 믿을 때만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퍼즐조각으로 마감될 그 순간까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것이 더욱더 깊어져야 돼요. 우리가 나를 의지하고 내 실적과 교회에 가져다 바친 헌금을 의지하다가는 우리가 절망 또 절망에 빠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우는 것이고 배고픈 것이고 가난하게 되는 거예요. 재산이 있더라도 양식이 있더라도 그것을 볼 새가 없어요. 그런 것을 기대할 새가 없습니다. 월드컵이 있고 개콘이 있고 뭐가 있더라도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웃을 때 잠깐 즐겁고 1분도 채 안 지나서 다시 허탈해지는데. 깊은 수렁, 아주 깊은 수렁,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사망의 몸’ 다음에 ‘누가’라는 분이 있고 ‘나를’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와 ‘나를’사이에서 나는 항상 사망에 빠진 그 상태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사망에 빠져 있어야 ‘누가’, 주님이 그 때 그 때 크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만일 내 힘으로 내 자력으로 괜찮은 존재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우리 속에 악마가 작동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나를 그렇게 부끄럽게 하지 말고 나를 잘났다고 칭찬해 줘. 당신 십자가에 올라가지 마.’라고 끌어당기는 식이 돼요. 그러면 천상천하유아독존 됩니다. 혼자 잘난 사람 되어버려요.

그런데 ‘누가 나를 사망에서 건져내랴.’ 해놓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웃지 말라는 말은 기쁨도 없고 감사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쁨과 감사인데, 그것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명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항상 감사하라.’는 것은 그 전제가 ‘내 힘으로 안 되더라. 내 힘으로 안 되더라. 자력으로 안 되더라. 교회 50년 다녀도 안 되고 목사 되도 안 되더라. 신학공부해도 안되고 성경공부 해도 안 되더라. 뭐든지 안 되더라. 헌금해도 안 되고 전도해도 안 되더라.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것이 절대로 나에게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혹독하게 아주 혹독하게 계속 경험해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세상적인 것을 걸어버리면, 복 받았다 여기는 것, 세상적인 것을 복이라고 여겨버리면 사람들은 뭘 찾느냐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고 그것을 하나의 경쟁 입찰처럼 그것이 하나의 목표가 되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따냈느냐?’하고 그것을 따내는 방법을 모방하려고 합니다.

‘기도 세 시간 했더니 방언을 했다.’고 하면 그 방언을 목표로 세 시간을 기도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교회 봉사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부자 되기 위한 목적으로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헌신 그런 것 소용없습니다. 왜? 뭘 해도 우리는 사망의 몸이고 수렁에 빠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렁에 빠지면 빠진 채로 그냥 놔두는 것이 ‘왔다’입니다. 그게 최고예요. 그래서 주님주신 그 면접서류에 이렇게 하세요. ‘수렁에 빠진 나’라고 가득하게 쓰세요. 언제? 95세쯤 되거든, 내일 모레 돌아가시려 하거든 ‘수렁에 빠진 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써야 주님께서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될 때, 구원이 될 때 모든 공로 모든 면류관은 건방지게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면류관을 후다닥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던지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살려 내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우리를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살려내야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마귀가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주장했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이야기했던 그 마귀, 그래서 십자가는 빈 십자가 만들고 내 대신 죽는다는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곳으로, 안 들리는 환경으로 만드는 것, 그 십자가를 앞두고 나서 본문을 말씀하신 겁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속에 있는 너희가 “가난하지?” “가난합니다.” “천국이 바로 그곳에 있는 거야.” “네가 십자가에 달리니까 배고프지?” “배고픕니다.” “주린 자여, 천국이 너희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면서 히죽거리면서 웃었나?” “아닙니다. 정말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렇지. 그게 바로 천국이야.”

주님께서 우리 몸은 내 몸으로 절대로 전환시킨 적 없고 허접스럽고 죽어 마땅한 이 몸   마저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지금도 저희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함께 하시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면접을 통과해야 되고 주님의 심판을 통과해야 될 텐데 그 기준은 이미 주께서 주신 것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 달성하는 것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것, 우리는 무력하다는 것,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 차라리 그 시험지를 매일같이 찢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케 해주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의 환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십자가로 제대로 밝히 보여주셔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의인됨을 남에게 증거 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