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2. 18:51

안식일의 의미 (누가복음 6:1-11)

안식일의 의미

2010년 5월 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1-11

(눅 6:1, 개정)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눅 6:2, 개정)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눅 6:3,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눅 6:4, 개정)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눅 6:5, 개정)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 6:6, 개정)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눅 6:7, 개정)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눅 6:8, 개정)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눅 6:9, 개정)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눅 6:10, 개정)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눅 6:11, 개정)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오늘 본문에 두 패가 나옵니다. 바리새인패가 나오고 예수님패가 나옵니다. 여러분 어느 편에 서려고 하십니까? 바래시인패가 되고자 한다면 사람들에게 밉상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주었다고 합니다. 안식일이란 모세가 하나님하고 단독으로 만나서 받은 계시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겁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날을 아무런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움직이지 말라가 아니라 생계를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감하시고 기념하시면서 모든 것이 “다 좋았더라”에 해당되어서 스스로 만족해서 안식하신 날이기에 그 하나님의 기분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그러한 안식을 제공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날입니다.

바로 이런 날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이 정상인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그동안 실시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가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정상인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지켜도 스스로 자신이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밝혀낼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리어 반대로 열심히 살면 살수록 자신이 더욱 훌륭해지고 완벽에 가까워진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면 그것으로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메시아가 새삼 이 땅을 방문할 하등의 이유가 없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의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천국을 찾아낼 수도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꾸만 자신의 정상적인 존재임을 강화하고 굳건히 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출처가 되는 그 하늘에서 제대로 율법을 지키는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이란, 온전히 다 지켜야 복을 받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에 저주받는 기준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껏 지키면 그만한 분량만큼 복을 받는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율법의 기준을 각자 자신이 해내는 능력에 따라 정해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해내니 나는 복받아 마땅하지만 너는 나만큼 못해내니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율법의 기준을 정해버리고 맙니다. 바로 이런 경향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율법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이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십니다. 예수님은 방식은 우리가 결코 정상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몰고 십자가로 달려가시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을 전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율법의 내막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백화점을 지나가는 더러운 거지를 불러다가 백화점 주인이 일방적으로 고급 의류가 제공하면서 입으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거지가 말하기를, “왜 저에게는 이런 비싼 옷을 무상으로 주십니까?”라고 한다면 그 백화점 사장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면서 말하기를, “너 대신 내가 값을 이렇게 치뤈 댓가”라는 겁니다.

반면에 사장님이 뽑아 세우지 않는 행인들은 각자 자신이 노동해서 얻은 자신의 존재감과 자신이 정상인인 것을 증명할 그 보람된 수입금으로 자기 마음에 맞는 옷을 사 입고서는 자신의 가치를 높일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우리의 품성에 확실하게 맞아떨어집니까? 거기로 살다가 공짜로 입는 것보다 내 힘으로 벌인 돈 주고 내 옷 내가 골라입는 것이 나의 가치를 높여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일 바리새인파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을 모릅니다. 어떻게 나타나는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국은 기도나 설교나 예배나 금식이나 헌금이나 전도하는 행위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속에는 자신이 ‘정상인’임을 증명하는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이런 우리가 결코 정상인이 아니라 저주받아 마땅한 비정상인임을 십자가 사건 속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를 사라지게 합니다. 늘 없애버리십니다. 늘 죽여버리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늘 다시 세웁니다. 이렇게 세움 받게 되면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만 살아가는 자임을 고백하고 증거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패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패는 고립됩니다. 격리조치 당합니다. 외롭습니다.

다윗은 당대에 유명하고 사람들에게 영웅 취급받았지만 사울이라는 권력자가 버틴 현실에서는 ‘함께 다니는 자가 없는 ’소수 집단‘으로 전락되고 말랐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은 사무엘상 21장에서, 바로 이런 다윗 소수 집단이 곧 율법의 실현인 줄 알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그 거룩한 떡을 다윗 무리에게 먹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원리를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즉 “나 예수가 있으니 먹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 예수님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이 곧 율법이 완성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율법이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율법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인생을 오래 살아도 비정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자들은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분명히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신의 행함을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려고 시도합니다.

즉 “나처럼 행해야 축복이야. 그러니까 나는 축복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서 ‘죄 없는 자가 아님’이 들통나야 합니다. 정상인인 아니라서 저주받아 마땅함이 들통나야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 십자가 능력으로만 세워지는 자가 곧 영생받은 산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자꾸만 저주받을 바리새인 패거리가 되고 싶은 것은 외롭게 인생을 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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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강-눅6장1-11(안식일의 의미)-luk100509

2010-05-10 13:40:56   녹취 : 오용익  
 
 
027강-눅6장1-11(안식일의 의미)-luk1005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1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6:1-1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 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이니라 하시더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안식일 날 패가 두 패로 나뉘어졌습니다. 한쪽은 예수 패,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하는 패, 또 한쪽은 본문 마지막에 나오지요, 예수님한테 분을 품는 패, 두 패로 나뉘어 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패에 속하고 싶습니까? 예수님 편에 속하고 싶지요. 예수님 편에 속한다면 여러분은 바리새인들인 상대방 쪽에서 분노를 받을 만반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두루 두루 좋은 것은 없어요. 어차피 패는 두 패로 나뉘어졌으니까. 패가 두 패로 나뉘어졌으니까 양쪽 다 만족하는 제 삼의 아이디어는 생각하지 맙시다. 한쪽에서 비난받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비난을 하도록 되어 있고, 비난하는 쪽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비난하는 쪽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서 내가 진정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의 규칙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어요. 네 번째 계명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어떻게 지킬까요? 그 내용이 첨부되어 있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움직이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지요. 움직이지 않으려면 하루 24시간 주무시는 채로 누워계셔야 되지요.

그게 아니고 ‘노동하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만드신 것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한 그 좋은 세상 만드신 것에 대해서 제사를 드리면서 동참하고 감사해라.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래도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서시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고 율법을 주고 계명을 주게 되면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신이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자기는 하나님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었다. 우리가 성의껏 그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하고 같은 편이다.’라고 하는 편이 바리새인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바리새인편이 여러분에게 더 당기지 않습니까? 이게 더 맘 편한 것이 아닐까요? 규칙을 주고 그것을 지킬 때 착하다고 칭찬해주고 구원해주는 방식, 그 방식이 훨씬 수월하고 이해가 잘 되는 방식이죠. 그런데 예수님 편을 봅시다. 예수님 쪽에서 안식일 지키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죽어 마땅한 자로 세워놓고 그걸 남들 앞에서 다 공개시키고 ‘우리가 죽어 마땅하며 손에 장애가 있어서 손 마른 자가 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살려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을 시켜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고친다. 내가 너를 죽은데서 살려낼게.’ 그래서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라는 편이 예수님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듭니까? 문제를 너무 어렵게 냈습니까? 쉽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동해서 월급타서 백화점 쇼윈도 앞을 지나갑니다. 지갑의 카드에 돈은 두둑하게 있고 마음에 드는 여름옷을 사 입으려고 보니 쇼윈도에 마음에 드는 옷이 보입니다. 100만원은 쓸 수 있는 형편이 되는데 그 백만 원 한도 내에서 90만 원짜리, 80만 원짜리, 50만 원짜리 죽 있는데 그 중에서 고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나도 일할 수 있는 인간이구나.’ 하는 자기존재의 가치를 흠뻑 느끼면서 자기가 성실하게 일한 보람찬 대가를 맛보면서 자기가 번 돈으로 옷 사 입는 것,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수월하게 보이고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면 있는 것도 빼앗기고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가는데 그리고 자기 맘에 드는 옷은 30만원이나 50만 원짜리 있기는 있는데 백화점 주인이 ‘어이, 여기 와보소.’ 해서 갑자기 ‘이 옷으로 입으시오. 이 옷 걸치고 백화점 밖으로 나가서 백화점 주인이 공짜로 이 옷 입혀 줬다고 자랑하시오.’ 이게 예수님 쪽입니다.

어느 쪽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줍니까? 역시 바리새인 쪽이 우리의 자존심을 높여주지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 가니까 있는 자존심도 박살내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노숙자가 되어서 거지꼴로 백화점 앞에 지나가는데 그 백화점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을 때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아하, 내가 정상이 아닌 것을 주께서도 아시는구나.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도 아시는구나.’ 라고 부른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여러분, 돈 되는대로 여러분의 형편대로 옷을 마음대로 골라 사세요.’라고 해서 쇼윈도의 전시된 옷을 산다면 30만 원짜리 옷을 산다면 그것은 ‘30만원만큼 나는 정상적이고 100만 원짜리 옷을 사면 100만원만큼 정상적이다.’ 라는 식으로 항상 자신이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이라는 것이 유지될 수 있는 겁니다.

거지꼴이 되어서 백화점 주인에게 강제로 유인되어서 옷 하나 해 입고 나오면서 ‘백화점 사장님, 무슨 근거로 거지인 나에게 이런 옷을 공짜로 주십니까?’라고 할 때에 그 사장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당신의 거지꼴 자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 못 박힌 공로로 당신에게 거저 드리는 겁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 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거지가 되기 싫어요. 우리는 정상이라고 평가받고 싶지 비 정상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해요.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항상 정상이다. 나는 정상이다. 내가 사는 것은 항상 멋있는 것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않고 계속 그것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다 바리새인과 합세하고 바리새인과 친목하고 싶고 바리새인중심의 교회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 와서까지 비정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모를 우리는 원치 않아요. 그런 소리 듣는 것은 아주 괴롭습니다. 교회 안 나가면 얼마든지 사람대우 받는데 왜 ‘너는 인간도 아니다. 너는 개 같은 인간이다.’하는 소리를 구태여 들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뭐가 아쉬워서, 다 귀한 집 자식인데, 다 어버이날 꽃 한 송이씩 달았는데.

문제는 우리 앞에 불쑥 등장한 그 분이 유일하게 천국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우리가 가고 싶은 그 영생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과 같이 다니는 이 제자들도 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따라 다니면 천국 간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다닐 뿐이지 천국이 뭔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여러분,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한 10년씩 다녔잖아요. 교회 한 10년이나 20년씩 다닌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사건 안에 있어요. 만약 내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제까지 산 내 안에 천국이 있어버리면 오늘은 지난날 내 안에 있던 천국을 수입해야 되기에 곤란하고 천국은 사건 안에 있는데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사건 안에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 있는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키느냐, 내 속에서 바리새인편을 밀어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자기의 우수함과 정상임을 표내기 위한 바리새인의 심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밀어냅니다. ‘예배 안에 천국이 없거든.’ ‘예수님, 제가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 안에는 천국이 없어.’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안에는 천국이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리새인 같은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밀어내서 우리는 내 힘으로 천국을 찾을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서 유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바리새인의 요소가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입니다. 비정상적인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 보시기에 비정상적인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예수님처럼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헌금할 줄 알고 예배참석 할 줄 알고 기도할 줄 알고 성경공부 할 줄 알고 설교할 줄 알고 강의할 줄 아는 이 ‘나’가 날마다 없어지고 사라져야 돼요. 죽어야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를 죽이시는 분,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원칙이 살아 있는, 그 원칙 속에 천국은 살아 있습니다. ‘나는 항상 죽어 마땅하고 나는 항상 없어져야 돼. 나는 뿅, 하고 사라져야 돼. 나라는 인간이 사라져야 돼.’라고 나를 사라지게 만들고 죽게 만드는 그 힘이 나오는 원천지, 그 중심지가 바로 유일하게 천국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데리고 어디로, 하나의 소실점, 점이 사라지는 하나의 소실 점,블랙홀처럼 없어지는 그 지점으로 제자들을 몰고 갑니다. 몰고 가면서 ‘얘들아, 안식일은 너희들보고 지키라고 준 안식일율법이 아니고 내가 지켜서 너희들을 내가 있는 곳인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나는 율법이 주어진 천국에서 살다가 그 천국에서 내려온 메시아다.’ 이겁니다.

만약에 내가 내려오지 않으면, 예수님이 내려오지 않으면 인간들은 천국을 찾을 수도 없고 갈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이 땅에서 율법가지고 유사천국을 가지고 장난치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래서 우리는 천국 간단다.’ 하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감추면서 자기가 정상인인양 으스대면서 드러내면서 가지도 못할 천국을 가지고 실컷 천국 놀이하다가 지옥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율법 지켰으니까 천국 보내주옵소서.’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켰느냐? 모든 율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켰으며 그것도 매일같이 어제 지킨 것은 무효고 오늘 것의 모든 율법을 다 지켰느냐?’고 묻지요. 또 내일되면 ‘어제까지 지킨 것 다 무효고 또 오늘의 것을 다 지켰느냐?’고 나옵니다. 만약에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놓고 자기들은 율법을 지켰는데 간음한 여인은 율법을 어겼다고 돌을 들고 율법어긴 여자를 치려 할 때에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정상인줄 아느냐?’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남을 돌로 쳐도 될 만큼 너희는 정상이야?’ 무슨 율법이 ‘우리는 정상이고 저 여자는 비정상이다.’라는 것을 가늠하라고 주신 그런 율법이 있는가? 그런 율법은 없다.

모든 율법은 모든 인간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인간이 다 비정상인데 그 율법 책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이래야 축복이고 이래야 저주다.’라고 결정해 버렸어요. 기도 좀 한다고 축복이고 기도 안한다고 저주, 교회 나왔다고 축복이고 교회 안 나온다고 저주, 이런 소리 듣는 여러분은 참 행복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헌금 하면 축복이고 안하면 저주받는다, 누가 그랬습니까? 누가 그렇게 축복과 저주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준에 입각해서 축복과 저주라고 정했습니까? 목사, 네가 실제로 한 번 살아보지, 주일날 교회 나올 수가 있는지. 토요일에 잔업하고 퍼져서 자다가 겨우 일어나 눈 떠 보면 11시 반인데요. ‘오늘도 교회 가긴 글렀다. 인터넷설교 들어야지.’

인터넷 동영상 설교도 처음에는 빠지면 빠지는 족족 듣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한 두 번 하다고 보면 나중에 3개월 치 밀려버립니다.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고 싶어도 몸이 피곤해서 못 따라 줍니다. 그리고 얽히고설킨 관계가 왜 그리도 많은지, 동창회, 동호인모임, 친구모임, 일가친척모임, 결혼식, 회갑연, 칠순잔치, 개업식 왜 그리 얽히고설킨 것이 많은지.

집안 모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온 집안 식구가 다 교회 나오면 인간적으로 주일만큼은 결혼식 안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는 혼자 다니는데 이미 받은 부조 갚을 것도 있고 또 앞으로 회수해야 될 부조도 계산해서 가 줘야 됩니다. 얽히고설킨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남편은 복음전하는 교회 가려고 하니까 아내는 ‘교회는 다 마찬가지인데 너는 왜 별나게 구나.’ 하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따라가 줘야 되고, 왜 그렇게 사는 게 복잡한지.

애들 교회 한번이라도 더 가서 복음 듣게 하려고 용돈 두둑하게 줘가면서 중고등부 시절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대학교 가니까 자기는 독립했다고 교회 안 나온다고 하지요. 뭐가 그리도 얽히고설킨 것이 많은지. ‘주님,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의 답변은 하나입니다. ‘네가 정상 같으면 내가 왔겠느냐?’ 이거예요.

‘너는 자꾸 네가 뭔가 할 도리를 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아는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정상이 아닌지의 그 티를 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 나는 이것 지켰으니 나는 정상이지요.’ 라고 자기 행함을 기준해서 축복과 저주를 자기 맘대로 정해버리더라는 말이지요.

그런 인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좀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생계도 포기하고 말씀 지키는 것만 연구했던 사람들이 그 당시 성직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인간을 7단계로 나눴어요. 성경에 도사된 자기들이 제일 우수한 단계입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다를 바 없어요. 신앙에 있어서 자기들은 귀족이고 성경도 모르는 인간들과 여자들과 이방인들은 밑바닥 취급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인간들은 이 땅에서도 저주받고 죽어서도 저주받는다고 아예 계급을 정해놨습니다.

계급을 정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정상에 가까운 사람과 지옥에 가까운 사람을 구분했다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그렇게 정한 거예요. 그래서 ‘저쪽에는 저주받았고 자기들은 복 받았다.’고 결정한 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너희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 그런 전제를 깔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손 마른 자, 병신 된 자, 귀머거리, 소경된 자, 세리와 창기 너희들이 저희보다 천국에 먼저 가리라.’ 했습니다. 아침 열시부터 일했다고 늦게 와서 일한 사람들보다 품삯 더 받을 줄 알았던 그 사람,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품삯을 똑같이 주니까 분노가 터졌습니다.

그걸 보고 주님께서 ‘네가 천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천국은 인간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나는 뒤집으러 왔다. 완전히 역전시키러 왔다. 이게 천국이다. 천국은 너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성경 박사가 되도 너희가 모르는 곳에 천국이 있다.’ 왜?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천국의 소실점을 틀어막고 가로 막고 있어요.

제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어떤 새댁이 부산을 가는 모양입니다. 아이를 안고 가는데 아이와 아이엄마가 차림새도 곱고 단정했습니다. 행동도 참 조심스럽고 교양이 있게 보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주 같았고 품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문제는 애가 기차 탄지 5분도 안 지나서 울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아이 엄마는 한껏 차려 입고 온갖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애는 원초적인 울음을 터뜨리니까 주변 승객들이 다 인상이 꾸겨지는 겁니다. ‘애 좀 데리고 나가지.’하는 눈총을 보내지요. 새댁은 어떻게 수습을 해보려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달래기에 들어가지요. 아무리 인간들이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고 우겨 봐도 인간 내부에 갖고 있는 원초적인 짐승본능은 사건화 되면 그 사건과 같이 울컥, 하고 다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느 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를 치장하지 말라는 거예요. 본문 2절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본문의 핵심 단어는 이겁니다. ‘하지 못할 일’입니다. 하지 못할 일을 안식일에 해야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안식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둘 중 어느 편에 속하겠습니까? 바리새인편에 속하겠습니까, 예수님 편에 속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바리새인편에 속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을 가져와야 되느냐, 안식일 날 인간이 해야 될 일과 인간이 안해야 될 일을 인간이 지킬 수가 있다고 철썩 같이 수용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바리새인편 되십니다.

‘아, 안식일에 이것은 해야 되고 이것은 안해야 되는구나.’라고 구분하고 단지 구분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신다면 여러분은 바리새인편입니다. 지옥 갑니다. 우리 속에 바리새인 다 있습니다. 날 때부터 우리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날 ‘이것은 안식일에 해야 되고 또 이것은 안해야 된다.’는 이것을 깡그리 무시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원칙을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을 때, 말이 좀 어려우니 쉽게 하겠습니다.

‘이것은 해야 되니까 하면 축복이고 안하면 저주다.’라는 그 기준은 누구나 다 있는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축복과 기준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다.’라는 기준을 받아들이시면 여러분은 예수님 편입니다. 예수님 편에 속한 사람은 항상 무엇을 갖고 있어야 하느냐, 인간이 갖고 있는 기준이 뭔가를 알고 있어야 돼요.

‘이것은 내가 할 수 있고 이것은 내가 안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내가 훌륭한 사람 된다.’라는 기준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그것을 평생 지니고 있습니다. 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안다는 이것이 천국에 못가는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기준입니다.’라는 것도 아울러 알고 있어야 돼요.

‘이것은 아니야. 이 기준은 오히려 저주받을 기준이야.’라고 그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돼요. 뻔히 알아요. 뻔히 알면서도 ‘아, 구원은 이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이런 바리새인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내가 없어져야 돼.’ 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서 내가 다시 등장해야 돼요. ‘나는 또 다른 기준을 알았습니다.’라는 외침을 통해서 다시 등장해야 돼요.

또 다른 기준, ‘예수님이 살려줬기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되지요. 본문 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하지요. ‘당신은 어떻게 안식일에 해야 될 일과 안해야 될 일을 구분도 못하느냐.’라고 욕했을 거예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계시를 알고 구약의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까 구약에서 확인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구약의 책을 본다는 것인데 구약에 나와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구약을 다 봤지?’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여쭙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다 봤지요?’ 거기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이 나옵니다. 이것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봅시다. 사무엘상 21장에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다윗과 함께”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바리새인편을 좋아하고 예수님 편을 안 좋아하느냐, 예수님 편에 선 이상 그 사람은 고립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 잘 지키고 교회 잘 다녀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군중들이 천국 가겠다고 교회로 다 몰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겠다. 너희들은 비정상이야.’ 비정상인 노숙자 뽑아서 백화점 사장님이 옷 한 벌 해 입히는 것처럼 ‘야, 너 나와! 내가 너를 임의로 딱 집어서 세워줄게. 네가 나로 인하여 천국 간다.’라는 식으로 새로 세워버리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대부분이 알고 있는, 모든 한국교회 교인들이 알고 있는 ‘인간이 말씀 지켜서 천국 간다.’는 이 모든 것과 대비가 되면서 고립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은 이걸 참을 수 없어요. 사람은 외로우면 못살아요. 저는 우리교회 나왔다가 우리교회보다 훨씬 적게 모이는 교회, 한 일곱 명쯤 모이는 교회 가서 예배드린다고 하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우리교회를 나가서 큰 교회 가버리면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외로워서 못살아요.’ 이거예요. ‘사귈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아서 못살겠어요.’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들의 걱정이나 두려움중의 하나가 복음 듣고 그 복음 들은 그 사람이 가버린다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복음 들어서 나간다는 것은 좋은데 그 사람이 나가버리면 그 다음에 오는 사람이 ‘여기 너무 썰렁해서 외로워서 못 있겠다.’ 하고 나가 버릴 거라는 그 점을 걱정하는 거예요.

사실 그런 걱정하는 목사도 날마다 주님이 십자가 앞에 새로 세워야 돼요. 왜냐하면 구원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를 하지요. 구원이, 천국이 교회에 없습니다. 천국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나를 십자가 앞에 세워줄 때, 그 때만 천국이 있는 거예요. 그럴 때만 매일같이 어제의 기준도 날아가 버리고 오늘 새로 알게 된 기준 ‘주께서 오늘도 나를 새롭게 세워주었구나.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노숙자인데 노숙자 같은 나에게 주님께서 자기 피를 근거로 또 세워주었구나.’

매일같이 주님께서 새로 세울 때 그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구원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아는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됩니다. 기도하고 예배참석하고 교회 주식사고 땅 사는 것, 여기에 일체 천국이 없는 거예요. 다윗과 함께 다닌 이 소수의 사람들, 소수라 해도 그 당시에 500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다윗의 유명세에 비추어 보면 다윗이 얼마나 고립되었으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라고 했는데 만만이 안되었습니다.

만만이요, 했으면 만만이 되어야 될 텐데, 달랑 500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사울이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다윗 네가 사람들한테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힘으로 ‘다윗과 함께 다니면 조진다. 외롭게 살 거야? 격리시켜? 고립시켜?’ 이렇게 압력을 주면 다윗이 한때 아무리 좋았어도 자기한테 손해되는 짓을 인간이 미쳤다고 합니까?

‘다윗 안 따라 다닐게.’ 요새 말로 ‘예수 안 믿을게.’ 전부 다 떠나고 그중 남은 사람이 500명 남았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삼상 21장에서는 몇 명 되지도 않았습니다. 열댓 명이나 되었는지, 이것이 선발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사람이 다윗과 함께 했어요. 그러니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다윗의 명성에 비해서 추종자가 너무 적으니까 애처로운 겁니다.

‘성공한 사람인줄 알았더니 완전히 대실패를 했네.’ 그런데 이 다윗은 ‘지금 우리가 배고프니까 떡을 내놓아라.’ 하니까 아히멜렉이 말하기를 ‘이 떡은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제사장만 먹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먹는 떡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결국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아니라 율법대로 등장하시는 분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바로 이 시대에 당신이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서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못먹어도 당신과 당신이 함께 있는 사람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고 내놓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율법의 완성입니다.’하는 거예요.

자, 율법의 완성 자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세워진 분이 있다면, 잘 들어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결국 뭐냐, 율법을 지키면 축복이고 안 지키면 저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자기가 행한 수준 안에서 나름대로 지켰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비 정상인이 비정상적으로 율법을 지킨 셈이 되어버려요. 그것은 착각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왜? 날 때부터 비정상이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지켜놓고 하는 말이 ‘내가 지켰으니까 나는 복 받아야 마땅하고 나처럼 못 지켰으니까 너는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인들이 목사들한테 기죽는 이유가 ‘목사는 성경의 전문가고 신학교 나왔기 때문에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목사가 아는 만큼 지킬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복 받아야 마땅하고 우리는 성경도 잘 모르니까 벌 받아도 마땅하다.’라고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서 나의 수준을 높여 버리면 나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곧 저주스러운 내 삶이 형편이 나아지는 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그런 법칙을 인간들은 이미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없애는 쪽이 아니고 자꾸 자기 자신을 살려내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비정상을 장려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식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교회는 위선자만 가득하게 모입니다. 그 위선자 중에는 ‘부족합니다.’ 하는 인간도 들어 있고 ‘나는 겸손합니다.’라는 인간도 들어 있는데 지난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착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착한 사람 되려고 하니까 결과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쁜 사람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말이 되지요?

제가 의아한 것이 ‘왜 자꾸 여러분은 착한 일을 해서 나쁜 사람 되려고 합니까?’ 희한하지요. 자기 자신을 자꾸 착하다, 착하다 해서 점점 더 하나님과 관계없는, 점점 더 천국과 관계없는 지옥 쪽으로 자꾸 가고 있는 거예요. ‘아, 이래서 나쁜 사람이구나.’ 이러면 점점 가까운데 ‘나, 이렇게 착할 수 있습니다.’ 하고 덤벼드니까 나쁜 사람 되는 거예요. 바보예요. 정말 바보예요.

율법의 기준은 이미 주님께서 정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이고 예수 믿지 않으면 저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에요. 신명기 28장에 나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복 받고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그 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껏 해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비정상입니다.

왜 비정상인가? 그게 정상이라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지를 않았어요. 인간들이 기껏 한 것이 바리새인처럼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상이다. 말씀 지키는 정상인이고 옳은 사람이다.’라고 우기니까 그것이 전부 다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짜 율법이 온 그 나라에서 어떤 분이 오셔서 ‘내가 살려주면 그것은 축복이고 내가 뽑아 세우지 않으면 비정상 그대로 남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내 앞에 올 때는 비정상이라는 것이 다 발각되면서 나오는데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겁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김춘수가 지었던 시에 이런 것이 있어요. 꽃이 자기 앞에 있는데 평소에는 꽃이 있다는 의식도 없이 무심코 지나쳤는데 어느 날 문득 꽃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 거예요.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어서 다가왔다.’는 겁니다. 내가 그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 꽃과 나는 아름답다는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인간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김춘수의 <꽃>과는 정 반대입니다. 내가 안 불러줘도 주께서 와르르 쏟아집니다. ‘율법대로 지켰어? 너는 죄인이야.’ 하고 쏟아집니다. 모든 율법대로 그대로 되어야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세상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1장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데 풀도 마르고 꽃도 지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돼요. 그럼 우리는 풀의 꽃처럼 져야 돼요. 나쁜 사람 되는 것이 복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와서야 나쁜 사람 되지 어디 가서 언제 여러분이 나쁜 사람 되겠습니까? 세상에 나가보세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고, 봄날은 간다! 가수 백 설희도 갔습니다. 꽃 필 때 왜 웃었습니까? 꽃은 지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꽃 없다! 이래야 돼요. 아예 꽃은 없습니다. 주님 한 분 꽃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그 분이 율법의 기준이 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 안식일 날 이것을 먹어도 됩니까, 안됩니까? 밀밭사이로 가면서 이걸 뜯어먹어도 됩니까, 안됩니까?’ 할 때에 ‘내가 율법의 주인이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본문 6절에 나오지요.

‘내가 안식일 율법의 주인이다. 바로 내가! 내가 주인이라니까. 내가 먹으라고 하면 그것이 영생이고 내가 주면 그것이 영생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아하, 예수님이 거저 줘야 될 정도로 나는 그냥 노숙자에 불과하구나. 나는 비정상적이구나. 내가 뭘 걸치고 있어도 이것은 내심의 짐승본능을 감추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겉치레에 불과하구나.’ 비로소 주님의 주심 앞에서 그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바리새인이 뻔히 보는 줄 알면서도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가면서 이삭 잘라 먹는 것을 보셨어요. 보실 때 바리새인들은 걸려들었다, 하는 식으로 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지켜야지, 너는 왜 말씀을 안 지켜?’ 주님께서 ‘너, 이리와. 너는 말씀을 통해서 네가 뭔가 지키는 것만 생각했지 말씀이 네가 누구라고 지적하는 것, 말씀이 너는 나쁜 놈이야, 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찾아봤나?’ 그 말이죠.

우리가 나쁜 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림 앞에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를 걷어치우면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 됩니다. 사람의 고민, 걱정, 짜증 다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내가 정상적인 존재다,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객기에요. ‘나는 정상적이다, 정상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상적인데 왜 하필이면 애 성적이 나빠지고 나는 정상적인데 왜 내 뜻대로 안되는가?’ 모든 것의 그 근거에 ‘나는 정상적이다.’라는 것이 있어요.

정상 아니거든요. 우리는 ‘나’라는 자체가 사라져야 됩니다. 사라지고 주님께서 세워줄 때 다시 등장하세요. 다시 등장할 때는 주님의 공로로 등장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안식일을 지키고 말고 할 계제도 안 되고 그것은 내 소관도 아닙니다. 이 성경전체를 보시면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이 성경책대로 다 지키신 주님의 그 용서와 사랑을 성경대로 받을 뿐입니다.

성경대로 받는 것은 어떻게 받는 것이냐, 성경 하나하나가 ‘너는 정상이 아니거든, 너는 이것도 못 지켰거든, 너는 돈만 사랑하거든, 저주받아야 마땅하거든, 너는 부모 공경할 줄도 모르거든.’ 모든 것이 ‘너는 못하거든, 너는 못하거든’라는 그것조차도 말씀대로 ‘너는 풀이거든, 풀의 꽃과 같이 사그라져야 되거든, 너는 안개거든.’ 이렇게 오면서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을 네게 주는 내가 너를 내가 있는 천국에 넣어 주기 위해서 사랑이 뭔지를, 영생이 뭔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0) 그런데 ‘율법 외에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우리가 못 지킨 율법을 혼자 다 지켜서 다 지킨 율법을 거저 우리에게 부어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는 복 받는 예수님 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그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증거 하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내가 정상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열심히 살아왔습니까? 이렇게 훌륭하고 똑똑하니까 살 가치 있다고 얼마나 남들 앞에서 으스댔습니까? 그러나 말씀 앞에 오니까 우리는 거저 얻어먹는 거지에 불과한 것을, 그것도 영생을 거저 얻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용서의 대상인 것을 알았습니다. 내 기준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기준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자비의 기준에 의해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