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6. 18:19

예수님의 제자들 (누가복음 6:12-19)

예수님의 제자들

2010년 5월 23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12-19

(눅 6:12, 개정)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개정)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4, 개정)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 개정)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눅 6:16, 개정)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눅 6:17, 개정)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8, 개정)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눅 6:19, 개정)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되었다고 하니 자꾸만 옆에서 시비겁니다. “죽은 예수 말고,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했기에 구원되었느냐를 이야기해야지”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은 이미 죽었다고 간주합니다. 당연히 귀신도 없다고 봅니다. 남아있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오로지 인간들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은 이런 인식 자체가 귀신들린 인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뽑아 세운 것은 마치 개울가에서 조약돌 12개를 주워서 호오스에서 나오는 맑고 힘찬 물로 말끔하게 씻어서 반짝반짝 예쁜 조약돌을 가지는 작업 같습니다. 평생 귀신들린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예수님께서 친히 씻어내시면 귀신의 비늘 같은 것이 씻겨 내려가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능력없이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그동안 내가 악마의 씌인 채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항상 노리는 바는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우리 마음에 비취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이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게 되면 십자가 복음이 어느 정도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가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마치 가인이 신에게 제사하는 것처럼 자신이 직접 신과 상대해서 자신을 ‘근사한 자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극심하게 됩니다. 일단 자기에게 관심이 쏟은 상태에서 신을 거론하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를 충족시킬 그런 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원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출몰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없어도 무방한 인간이 여기 나타났다면 다음에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 뿐입니다. “왜 하나님은 저를 아직도 살게 하십니까?”입니다. 즉 “왜 저를 못 살게 굽니까? 기분 더럽습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왜 하나님은 여전히 저를 살려내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답변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된 그 존재 자체가 영광스럽고 과분한 축복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긴 마음도, 생각도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죽음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군대에 재징집한다는 문자가 봐도 겁이 덜컹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죽을까’ 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늘 신에게 질문하기를 “왜 하나님은 저를 죽이시려합니까?”라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살아왔다는 티가 나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신에게 항의하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은 귀신 씌여서 그런 겁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그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가리워 온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복음 안에서 섬기는 사람 같으면, 복음의 광채가 주는 능력과 효과를 만끽하면서 기분좋게 섬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뽑습니다. 이들이 뽑힌 이유는 그 어느 인간도 맛보지 못한 의와 죄에 대해서 맛보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맛보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납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죄에 대해서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것은 언른 납득되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간음이나 거짓말 같은 것은 죄 축에도 안듭니다. 진짜 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아니하면 맛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짓고 또 지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진짜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제자를 소개하면서 유독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토가 달려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 될’. 즉 예수님을 팔지 아니하면 결코 우리는 제대로 죄 지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절에 가는 불교 신자들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나오는 사람들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내 앞에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악마는 계속해서 나를 살려내고자 하기에 예수님의 피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들을 데려가는 겁니다. 즉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않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반복, 반복을 합니다.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이대로 죽으면 안 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우리 안목에서 하나님을 보는 그 안목을 교체시키기 위함입니다. 내 안목에서 하나님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목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열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필히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게 합니다.

십자가란 바로, 내가 내 식으로 살기 위해 필히 죽여 버려야 될 그 메시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라이벌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을 죽는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악마에 씌인 채 태어난 존재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의 광채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기어이 살아남는 것에 전력하는 그런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소식을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고 멋진 자아로서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기 위해서 나서게 됩니다. 즉 복음의 광채 없이 나의 광채로 신에게 다가서보려고 합니다.

자녀들을 갈수록 피가 없는 곳으로, 피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면 뻔뻔하게도,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죽여놓고서는 그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 근거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늘에 뿌리를 두고 지상에 등장한 나라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모래시계처럼 우리 뿌리를 하늘에 계시는 어린양의 피에 두고 있음을 증거하는 성도가 됩2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지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됨을 고백하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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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강-눅6장12-19(예수님의 제자들)-luk100523

2010-05-25 18:07:08 녹취 : 오용익


028강-눅6장12-19(예수님의 제자들)-luk1005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6:12-19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유다라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은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능력이 예수님께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에게 능력을 주입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능력은 예수님께로 나오는 능력이 우리를 천국에 보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어이, 너는 천국에 어떻게 갔어?”라고 툭 치면서 물으면 “예수님께로 나온 능력이 나를 살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그 죽은 예수 이야기 말고 네가 어떻게 했는데, 교회에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했기에 구원받았는지, 그 이야기를 하라니까.” 하고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 이야기하지요. “내가 교회를 어떻게 다녔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능력이 나를 구원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또 이야기하지요. “죽은 예수 말고, 이 현장에 없는 예수 말고, 2천 년 전에 왔다가 그냥 가버린 예수 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목사가 뭐라고 시켰으며 그 시킨 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순종했고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어떻게 했더니 구원되었다, 그 이야기를 해라. 죽은 예수, 없는 예수 말고 그 이야기를 하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이야기하지요. “살아계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를 구원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을 펼치니까 거기에 예수님이 나오고 귀신이 나와요. 예수님 나오고 귀신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 펼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예수님 이야기하고 귀신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제 제가 늘 푸른 교회 집회에 다녀왔어요. 섬에 들어가서 강의하고 다시 나와서 토요일에 늘 푸른 교회 사이트에 녹화되어 올라와 있는 동영상강의를 죽 봤습니다. 제가 강의 한 것도 보고 송 봉호목사라는 분의 강의도 올라와 있기에 그것도 봤어요. 제가 그걸 보고 뭘 느꼈느냐, 예수님이 여기 있고 귀신도 여기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우리 인간들밖에 없지요. 그렇지요?’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거의 종 일 제가 밥을 못 먹었습니다. 한 끼 먹는 둥 하고 말았는데, 왜 교회가 예수님 안계시고 ‘귀신은 없습니다.’라는 것부터 전제로 깔고 ‘우리 웃으면서 삽시다.’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는지, 역겹다고나 할까요? 초반부에 해병대 이야기가 나와요. 늘 푸른 교회 교인들께서 그 사람의 설교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왜 오늘날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놓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왜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합니까? 살아 있는 우리 이야기를 해야지.’라는 쪽으로 반응을 나타낼 때 과연 그것이 교회냐 하는 겁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간단해요. 개울가에 가서 이끼가 끼어있는 자갈돌을 골라 놓고 강력한 수압의 물을 뿌려서 끼어있는 이끼들을 씻어버리면 반들반들한 조약돌이 나오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느냐, 세상의 귀신들 속에 살고 있던 그 조약돌 같은 돌들을 선택해서 교회라 집어내 놓고 그것을 맑은 물로, 주님의 맑은 성령의 물로 강력하게 쏴버립니다.

그 맑은 물로 씻겨 내려가니까 그들의 눈에서 비늘이 씻겨 내려가면서 ‘아,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네요. 아, 세상귀신이 있는 것이 맞구나. 그동안 귀신이 씌인 채 살았구나. 이제는 예수님의 성령에 씌어서 살아야지.’ 비로소 제자들과 구원받은 몇 몇 사람들은 비늘이 씻겨져 내려가는 것처럼 눈을 떠서 ‘아, 예수님이 이런 분이고 우리 구원하려면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이 과연 있어야 되겠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식이에요.

성령으로 씻어주는 겁니다. 성령으로 씻어주는 것은 우리가 목욕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조약돌 씻듯이 씻어주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들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면서 뭐가 보이느냐, 예수님이 지금도 주시는 은혜와 능력이 온몸으로 수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툭 치면 본문 그대로 “저는 예수님의 능력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하는 말이 “왜 꼭 거기에 예수의 능력을 집어넣느냐? 네 능력 가지고 하면 되잖아.” 우리는 이렇게 하지요. “내 능력이 아니었어. 눈에 비늘이 씻겨 내려가니까 내 능력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귀신의 능력이었어.”

귀신이 시키는 대로, 귀신이 요구하는 대로, 악마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와 놓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우긴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 눈의 비늘이 씻겨 내려가니까 무엇도 같이 딸려 씻겨 가는가하면, 귀신의 능력도 같이 딸려 내려가는 거예요. ‘여러분, 행복하세요, 즐겁게 사세요, 웃으면서 기쁘게 삽시다.’ 그런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이 귀신들린 교인들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늘 푸른 교회 교인들이 다 귀신들렸다는 소리로 들리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고 정말 늘 푸른 교회 교인들이 귀신이 안 들렸다면 ‘아, 저 목사가 정말 귀신들렸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해줘야 됩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해주셔서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 그렇게 아셔야 됩니다.

제사 지내고 그러면 안돼요.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것이지 살아 있는 분하고는 교제하고 대화하고 만나고 기도하고 같이 동행하면 되지 제사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늘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받아야 되니까. 본문에서 귀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18절을 봅시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로서는 이 땅에 귀신이 있는지조차 몰랐지요.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귀신이 등장하고 마귀가 등장한 겁니다. 그러면 귀신이 하는 일이 그동안 뭐였는가? 그것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와 있기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 신, 이 세상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귀신, 악마가 활동하는 목적이 뭐냐, 무엇 때문에 활동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막을 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까 제가 그것을 이끼가 끼었다고 했고 또 눈에 비늘이 있다고 했지요. 눈에 비늘이 있는데 그것은 악마가 막을 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을 가리면서 이 세상을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말려들어서 우리는 귀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한 거예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칼럼을 하나 썼는데 어떤 분들은 제가 쓴 칼럼의 마지막 구절을 마음에 들어 해요. ‘무서워서 목회 못하겠다.’는 그 구절인데 그것보다 저는 그 위 구절이 맘에 듭니다. ‘복음 앞에서 교인들이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복음을 전하니까 교인들이 화를 내고 있어요. 입을 다물고 아멘도 안하고 단단히 화가 나 있어요.

왜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은 화를 내는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귀신이 그렇게 시켜서 그래요. 본심이 아니고 귀신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사람이 화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데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하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 글 중간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시원찮은 인생을 줘놓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인생, 허접스러운 인생을 줘놓고는 그것 줬다고 그것가지고 영광 받겠다는 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대는 것’ 그게 교회 아니냐 말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 모습입니다. 왜? 교회가 전체로 귀신들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귀신들렸기 때문에 ‘여러분, 사는 것이 힘들지요? 어렵지요? 웃으면서 삽시다.’ 해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이 ‘어떻게 하면 웃습니까? 여러분, 표정들이 왜 그래요? 한 번 크게 웃는 연습 좀 해볼까요?’ 이런 식의 내용입니다.

‘우리 행복 합시다, 우린 행복한 사람이에요.’ 장 경동목사처럼. 그게 바로 귀신의 앞잡이예요. 귀신이 시켜서 그런 설교를 하게 하는 거예요. 복음의 광채가 시시하게 느껴지고 복음은 있으나 마나 별로 중요하지 않고 ‘왜 자꾸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왜 자꾸 나를 불행에 몰아넣는 거야? 왜 내 인생을 자꾸 처박히게 하는 거야?’라는 분노, 복음 앞에서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 이것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마의 술책입니다.

하는 짓들이 그 짓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이제는 강력한 성령의 물줄기를 가지고 복음 앞에서 화를 내던 우리가 ‘아, 귀신이 씌어서 화를 냈구나.’하는 것을 벗겨갈 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 저희들을 이 땅에 살리십니까?’ ‘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고 웃으면서 살도록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귀신들린 것이고 ‘안살아도 되는데 왜 자꾸 살려주십니까? 무엇 때문에 살게 하십니까?’

원래 인간은 없어야 돼요. 이 땅에 안 태어나도 괜찮은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도 되는데 왜 이 땅에 출몰했느냐?’ 그 말이지요. 왜 등장했습니까? 그리고 등장해서 왜 살아가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보상 없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마귀한테 교육받아서 ‘네가 한 행동, 노동, 어떤 열심을 내면 얼마만한 대가가 주어진다.’하는 것이 쇠뇌 되었기에 우리는 그럴싸한 대가나 보상이 없으면 일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살아 있는 것, 그것도 없어도 되는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이유와 지금 죽어도 괜찮은데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신 하나님, 죽는데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뭐가 보상이고 대가인가? 이렇게 섬길 수 있는 피조물 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큰 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그 자체, 섬겨서 뭘 얻는 것이 아니고, 섬겨서 내가 원하는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피조물로 가담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느낍니다.’ 하는 이 느낌, 그 느낌을 오늘도 마귀는 훼방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귀가 짜증나는 거예요. 이유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거시 마귀가 화가 나는 겁니다. “너는 너를 섬기란 말이야. 왜 하나님을 섬겨.”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시니까 섬기지.” “만들었다는 네 인생이 고작 이 꼴인데? 이렇게 네가 원치도 않는 인생길을 가고 있는데 그래도 네가 섬길 마음이 나?”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가는 인생길인 것을 왜 못 섬겨?” “에고, 이 욕심도 없는 인간.” 이렇게 하지요.

처음 창세기 3장 때 마귀가 와서 거짓말을 했지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으면 안 따먹은 채 그대로 섬기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꼭 마귀가 와서 태클을 걸어서 넘어뜨려버립니다. ‘따먹지 말라고 했지? 그러나 너를 바라봐. 너는 따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어. 왜 너는 너를 안 바라봐. 왜 하나님의 말씀만 보는 거야? 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란 말이야. 너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지 마. 너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지 마. 너는 할 수 있어. 따먹을 수 있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쇠뇌와 지시와 명령을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서 물어요. ‘목사님,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자기 입장 생각하는 것이 죄예요. 내 입장에서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 나를 보는 입장,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보는 입장이 있어요. 내가 나를 보는 입장은 모든 것이 불평이고 불만이에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시도 불평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 입이 튀어 나왔다고 하지요. 상스럽게 말해서 주둥이가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24시간 언제라도 주둥이가 튀어나올 5분대기조예요. 왜냐하면 내 입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영 맘에 안 들어요.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섬길 맘이 나야 섬기는데 섬길 맘도 없이 무슨 재미로 섬기느냐 말이지요. 그러니 섬기고 난 뒤에 대가를 달라는 거예요.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대가 없습니다. 즐겁고 기쁘게 감사하게 섬기는 그 자체가 이런 악마가 줄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아무 대가없이 기쁘고 즐겁게 섬기는 것, 장사하다가도 ‘아, 오늘 주님 같이 섬기는 시간이지.’하고 교회 오는 것이 그게 뭐가 이상스러운겁니까?

‘교회 나오면 뭐 주렵니까?’ 이것은 자기 입장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입장은 내 입장이 아닙니다. 마귀, 귀신이 뒤집어 씌워준 입장이에요. 내 입장이 아니고 악마 입장입니다. 악마는 자꾸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하신 일에 대해서 자꾸 시비를 걸게 하고 불평하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들고 트집 잡게 만듭니다.

그런데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부모든 자식이든 교회장로든 집사든 목사까지 다 그러니까 ‘아, 이래도 용납이 되는구나. 이것이 허용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소리 하지 않고 교회 나와서 웃으면서 예배드리면 ‘저 사람은 형편이 좀 나은 모양이다.’ 하는 데 형편이 나은 것이 아니에요. ‘저 사람은 한 달 수입이 한 2 천만 원이 더 되는 모양이다.’ 한 달 수입이 2 천만 원 넘기에 웃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할 도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계속 살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 들린 사람은 ‘내가 나를 살게 하겠다는데 왜 자꾸 하나님은 나를 방해합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나는 더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자꾸 훼방을 놓았잖아요. 굶어죽으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무슨 맘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야 섬기지.’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자기입장, 마귀의 입장입니다.

이 조약돌, 강력한 예수님의 능력으로 성령 받아서 이 비늘이 씻겨 내려가야 됩니다. 씻겨 내려가게 되면 나 있음이 주님 섬기라고 있는 있음이지 이 세상 내 것으로 다 쥐고 정복하라고 있는 세상이 아닌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의 시선이 바뀌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라고 하는 겁니다.

내 입장에서 하늘 바라보고 내 입장에서 예수 보는 것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볼 때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 그 시선으로 교체를 시키는 것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능력이 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선은 어떻게 바뀌는가?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뽑았어요. 특히 그 중에 한 사람에 대해서 본문에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16절에 보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유다라.” 가룟유다 앞에는 토가 붙어 있는데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열두 개의 마귀 들린 조약돌을 먼저 주워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씻어서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씻어서 안 씻겨 져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팔게 될 가룟유다’가 있어요. 이것은 뭐냐, 열두제자는 갈 때 까지 가보는 인간들입니다. 사람이 가 볼 수 없는 그 자리까지 가야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열 한 제자는 사람이 도저히 갈 수 없는 천국을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사람이 갈 수 없는 지옥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갈 때까지 다 가보는 사람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더 피곤해지시기 전에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나님의 의를 몰라요. 그 말은 인간의 죄가 뭔지를 몰라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의가 뭔지 모른다는 것은 다 이해가 될 거예요. ‘인간이 부족한데 아무리 해도 어떻게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알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 동의합니다.’ 이것은 되지요.

그런데 ‘인간이 죄에 대해서 모른다.’는 이것은 선뜻 납득이 안 될 겁니다. 여러분이 김 길태가 되고 여러분이 살인강도를 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 죄는 기껏 자기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 들었던 풍월 내에서 들었던 죄만 지은 거예요. 도박하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도박도 한 번 해 보고, 간음한 것도 죄라고 하니까 간음도 한 번 해 보고, 사람 찔러 죽이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사람도 찔러보고, 도둑질이 죄라고 하니까 남의 담도 한 번 넘어보고, 횡령죄, 뇌물죄 이런 것이 다 죄라고 하니까 그런 것들을 다 해보는데 아무리 인간이 죄를 지어도 진짜 갈 때까지 간 죄는 인간이 맛을 못 봤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행함으로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정말 이상한 말이 하나 튀어나왔지요?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죄인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이끌어주고 예수님이 이끌어줄 때 죄인의 맛을 보게 되지 인간 천명 죽인다고 해도 죄를 알 수 없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 6백만 죽였다고 하고 스탈린은 5천만도 넘게 죽였다고 하지요. 그렇게 해 봐야 죄를 알 수 없어요. 연산군이 왕 되어서 사람 죽인 것, 그래도 죄를 몰라요. 사람도 죽이다 보면 죽이는 것도 재미없고 귀찮아요.

진짜 죄는 우리의 죄를 보여주는 대표자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뽑힌 대표자가 우리 대신 죄의 맛을 봅니다. 그가 보여준 죄가 뭐냐, 바로 메시아를 팔아먹는 죄입니다. 메시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겁니다. 말해놓고 나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예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그 책 제목을 비슷하게 패러디 한 느낌이 드는데 예수가 죽어야 내가 삽니다. ‘에이, 목사님, 초파일에 절에 가는 사람들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그쪽은 물론이고 교회 나오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 나온 사람들만 의식하는 이유가 뭐냐, 아예 처음부터 예수는 없다고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옛날에 돌아가신 분이고 지금 기념될 뿐이지 지금 예수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하여튼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는 거예요. 이것은 타고났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애가 나오자마자 ‘예수님, 예수님’ 이런 애기는 못 봤어요. 애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은 자기 죄를 깨달아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젖 달라고 우는 것이지 ‘예수님,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렇게 울지 않아요.

혈육이란 것은 인간의 죄가 자체적으로 계속 그 안에서 번식하는 것인데 인간이란 자기 혈육을 못 벗어나요. 그것을 거대한 인간이라고 보는데 개인이라는 인간은 있는데 국가를 거대한 인간이라고 봅니다. 거대한 인간 중에서 약간 거대한 인간이 가족이에요. 가족을 한데 뭉치면 남이 아니고 내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거대한 ‘나’입니다. 거대한 나가 가족, 동창생, 국가, 민족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이게 혈통이라는 겁니다. 이 혈통을 전체로 지배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바로 귀신, 마귀입니다. 그 귀신이 우리에게 타고난 습관을 주는데 그게 뭐냐, ‘예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 가인에게 동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춰주니까 가인에게 죄가 뒤집어씌워 있으니까 아벨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라이벌을 죽이게 되어 있는 속성을 지니고, 그런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꼭 국민교육헌장 같아요. 예수가 있으면 안돼요. 예수 죽고 내가 살든지 내가 죽고 예수가 살든지, 그렇게 해야 돼요. 내가 직접 하나님과 관계하고 싶어요. 중간에 누가 끼는 것은 싫어요.

내가 알고 있는 내 입장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이 와버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올 때는 십자가를 통해서 오고 하나님을 볼 때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그 십자가란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못되었는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마저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때문에 ‘좀 없었으면 좋겠고 눈에 안 띠면 좋겠다. 죽여 버릴까?’라는 심정을 가진 우리 앞에 등장했기에 우리는 본성상 ‘네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살려면 당신이 죽어야 해.’ 하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인간은 내가 죽인 예수를 껴안고 같이 합쳐서 ‘나’라고 규정하세요. “내가 누구십니까?” “내가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이렇게 해야 ‘나’ 맞아요. 그게 바로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겁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왜? ‘너무나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사는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제 우도에서 늘 푸른 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귀신들렸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란 예수여, 당신은 날 망하게 하려고 오셨지요, 라는 소리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입을 막아도 벌써 새나왔어요. ‘예수여, 당신은 날 망하게 하려고 왔지요?’ 이게 바로 악마에 귀신에 들린 거예요.

이런 고백이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최초로 인생을 살면서 죄라는 것을 맛을 본 겁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그런 것은 죄 근처도 안 갔어요. 그것은 해 놓고도 반성하면 되고 회개하는 척 하면 되는데 이것은 회개가 안돼요.

예수님이 능력이 와서 비늘이 벗겨져야 ‘아, 내 손에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구나. 하나님은 쟁반에 예수님의 몸을 바쳤지만 우리는 그것을 죽여 버렸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구원자를 구원받고 싶은 내가 내 손으로 처단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 ‘아, 이것은 내 잘못 아닙니다. 이것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용서해주세요. 내 손으로 꺾으신 그 뼈로 인하여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죠. 자기 손으로 메시아를 죽여 놓고 ‘이것은 내 타고난 본성이 이래서 메시아를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 손에 죽은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뻔뻔한 것은 ‘내 손에 죽은 그 메시아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나오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죄를 갈 때까지 맛본 사람입니다.

전에는 내가 가인처럼 근사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봤던 인간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능력이 오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하나님 앞에 십자가가 가로막아요. 십자가가 가로막히니까 ‘저분은 바로 나를 살리려고 오신 분인데 내 손으로 죽여 버렸구나. 그 정도로 나는 나 밖에 모르고 내 입장만 고수하는 못된, 아예 태어날 때부터 죄 아래 태어났고 마귀 아래 태어나서 마귀의 사주와 교육을 단단히 받은 마귀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확인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피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녀들을 계속 교육시켜요. 피없는 곳으로, 학원 같은 데, 거기는 피가 없어요. 계속 피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애는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를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마귀가 가짜 하나님이 내 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마귀가 심어준 하나님 쪽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저는 방향을 문제 삼고 싶어요. 방향이 피가 안 보이는 쪽으로 계속해서 부모가 자식을 몰아넣어요. 나중에 피 이야기를 하면 ‘엄마, 엄마처럼 그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출세 못해. 엄마는 내가 출세하는 것 원하잖아. 그러면 내가 엄마 소원대로 교회 안 나가는 대신 출세해줄게. 엄마는 돈 버는 사람 원하지? 엄마는 교회 가서 기도해서 돈 번다면 나는 교회 가서 기도 안하는 방법으로 돈 벌어줄 테니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 잔소리도 하지 마.’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엄마 아빠가 십자가 앞에서 나를 빚을 생각을 않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근사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드는 거대한 자아, 거대한 나로서의 신, 그걸 쳐다보면서 자꾸 교회 가라고 윽박지르니까 아들이 가만 보니까 ‘저 방법이나 내 방법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교회 가서 얻는 것보다도 다른 데 가서 엄마가 원하는 성공을 내가 이루어주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칭찬이 늘어질 것인데 교회 안가도 좋아, 성경 안 봐도 좋아,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로 신이라는 내 타고난 본성과 합치된 것이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한테 마중 나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었는가, 어떠한 뻔뻔함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는가, 어떠한 뻔뻔함, 내 손으로 죽였다는 그것을 근거로, 그 분 공로 힘입어서, 그 분이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이라서 구원해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작은 모래시계가 되는 겁니다. 다시 뒤집는 거예요. 원래 예수님의 이생이 저 하늘나라고 예수님의 저승은 이 땅이거든요. 모래시계를 뒤집으니까 그게 예수님의 입장이거든요. 그 때부터 뽑힌 우리 성도들도 이 땅이 바로 저승이고 하늘나라가 우리 본 고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남의 땅에 와 있는 거예요. 후다닥 빨리 나그네처럼 저쪽으로 합류하면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있고 모세가 기다리고 있고 주님이 있는 그곳, 성도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잠시 거쳤다가 가면 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그렇게 주님에게 닦달을 내고 그렇게 주님을 힘들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부터 진짜 어려운 것 합니다. 이제 본론 들어가요.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왜 열두 명을 뽑았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두 지파로 뽑아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이 14만 4천으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촉수라는 것을 들어봤지요? 문어발에 촉수가 있지요.

몸통은 하나인데 촉수가 수백 개 달려 있는 것이 문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모래시계이기 때문에 그 근본은 하늘에, 그 뿌리가 하늘에 있고 자라기를 아래쪽으로 자라나는 희한한 나무, 큰 나무, 느티나무도 좋고 포플러나무도 좋은데, 뿌리가 하늘에 있고 하늘로부터 점차점차 자라나고 숲이 메어지는 그 나무를 심어놓은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서 한 밀알을 심었는데 나중에 큰 나무가 된다는 것 이것을 주석가, 목사들, 신학자들은 어떻게 보느냐, 이 땅에 나무뿌리가 있고 그 나무가 하늘에 펼쳐지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것은 그것을 이야기한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 해석은 뒤바뀐 해석 이예요. 거꾸로 된 해석 이예요.

이 땅에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는 겁니다. 마치 허리케인처럼, 하늘에 허리케인이 찾아오면 그것이 먹구름을 동반해서 이 지상에 쏟아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의 뿌리가 뭐냐, 어린양이 있어요. 어린양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이 뿌리가 되어서 거기서 열두지파가 생겨납니다.

항상 그 어린양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구조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열두지파가 세상에 속속들이 다 흩어지더라도 거기에는 뭐가 흐르냐, 어린양의 피가 다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피가 묻힌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그 사람이 몸이 성치 않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냥 약속대로 넘어가고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피가 없는 사람은 그냥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는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세계최초로 열두지파가 어린양을 뿌리로 해서 그 피가 흘러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두 사도를 만들어요. 열두 사도를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이 맛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갈 때까지 다 가보면서 다 맛을 봐야 될 선두주자로 열두 제자들을 뽑아 세운 겁니다.

제가 어제 인터넷을 보고 있는데 ‘지금 북한동향에 이상기류가 있기 때문에 긴급으로 징집을 요합니다, 라는 휴대폰문자로 날아왔다.’는 거지요. 그 사람이 글을 잘 썼어요. 잠을 자고 있는데 휴대폰문자가 와서 깨어보니 위와 같은 문자가 찍힌 거예요. 여자들은 모릅니다. 남자가 군에 두 번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그걸 보고 그 사람이 잠이 확 달아난 거예요. 그 문자 받은 사람이 여럿인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왜 군에 다시 오라는 말에 겁을 내는가? 죽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죽기가 싫어서 그렇다면 이것은 이 땅을 떠나기 싫다는 말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 문자가 마귀로부터 매일같이 하루도 안 빠지고 신문배달 오듯이 오는 겁니다. 신문 펼치면 ‘우리 다 같이 죽지 맙시다.’ 이 소식이 가득 들어 있어요.

성경은 안보고 신문보고 동아일보 보고 각 방송사 뉴스 보니까 ‘우리는 다 같이 어쨌든 살아남아야 됩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거기서부터 조약돌로 열두제자로 뽑힌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뽑힌 사람은 다시 한 번 우리의 뿌리가 내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위에 있으며 나는 세상에 나가서 14만 4천, 그 열두지파에서 나온 그 뿌리로서 풍성한 하나의 열매로서, 주님께서 맺은 열매로서 이 땅에서 ‘죽어도 산다는 것, 죽어도 상관없어.’ 라는 외침을 하라고 이 땅에 파견 근무하는 사람들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요.

그게 바로 대가없이 그냥 구원받은 자의 섬김입니다. 겁이 없는 거예요. 뭘 아느냐, 마귀의 뜻을 알고 주님의 뜻을 알고 둘 다를 알거든요. 인간이 자기를 보는 시선 알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 우리 시선 알고 다 아는 겁니다. 신학을 이야기해도 그 신학도 마귀가 이미 점령했어요.

신학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렇게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흉측한 방법이 아니고 그냥 너를 용서한다, 너를 사랑한다, 그것으로 충분한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처참하게 매달게 하느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오해를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란 인간적인 관계로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된다. 그러면 끝이다.’ 이렇게 보거든요. 악마가 지배하는 신학은.

그런데 십자가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것은 거기에 우리의 모범되는 분을 매단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을 직접 매달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루에 수천 번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해도 하나님은 뭐하고만 상대하느냐, 십자가에 달린 자기 아들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지요.

마귀가 그것이 싫은 거예요. “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소식 들었어?” “들었어.” “그러면 용서 받은 거야.” 자꾸 우리 감정에 그냥 머물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뭐를 못 보게 하느냐하면 십자가에 이미 예수님 몸이 달렸다는 것을 못 보게 하고 자꾸 우리 감정을 우리가 알아서 유지를 해줘야 겨우 내가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마귀가 몰아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침에 은혜 받았다가 저녁에 가져다 버립니다. 아침에 은혜 받고 저녁에 화내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게 바로 마귀가 신학까지 점령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란 네가 어떤 짓을 하고 앞으로 어떤 짓을 할 것이라는 것까지 다 아시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몸, 피 흘린 그 몸을 보시는데 그 몸이 대신 죽은 몸이에요, ‘잘해, 앞으로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것이 아니고 ‘앞으로 제대로 못하면 버린다.’ 그것이 아니고 ‘대신 죽었다.’ 이 말은 ‘나는 너를 알거든. 네가 나이 80되어서 어떤 짓을 할 것인지 나는 알거든. 네가 90되어서 치매 걸려서 예수 모른다고 할 것까지 다 안다고. 알기에 나는 너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너 대신 십자가에 달린 한 몸, 그 몸을 보고 철딱서니 없는 너를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그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꾸 자기 자신을 보게 해요. 자기 자신을 보게 하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해서 십자가를 못 보게 만드는 모든 사건들을 유발시켜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기어이 못 보게 합니다. ‘잘해야지. 똑바로 하라는 말이야. 행동 그렇게 해서 구원받겠어?’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도록 하는 겁니다. ‘살아서 천당 가야지. 음?’ 맨 날 이런 소리나 하고 있어요.

이미 우리의 뿌리가 있는데, 이미 우리를 사우나의 모래시계처럼 뒤집어 놓았는데. 우리는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땅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그 피가 우리의 모래시계를 통과해서 발산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가지예요. 그리스도께서 대속해서 그 속죄가 다 이루어진 완성했던 그 완성의 피가 우리를 향해서 밑으로 발산되는 하나의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능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의 능력에서 왔지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다른 민족에서는 맛도 보지 못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사랑을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면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그 전체를 갈 때까지 가서 맛을 보지를 못했어요. 그냥 뭉치다가 깨졌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았어요.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대속으로 간다는 것을 열두 제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리고 죄가 뭐냐, 바로 예수를 기어이 팔아먹어야 될 사탄 들린 악마의 진짜 죄의 모습도 같이 겸하여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네가 귀신이 떨고 능력행하는 그것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네 뿌리가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발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발바닥이 위로 뒤집어져서 네 위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주님이 기록시킨 것을, 창세전부터 새겨 넣은 것을 오히려 더 기뻐하라.’고 우리보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커먼 조약돌에 성령의 물을 뿌려서 이끼 같은 더러운 것들이 다 제거되고 말끔하게 눈에 비늘이 떨어지면 ‘아, 십자가로 대신 다 값을 치렀구나.’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만 쳐다보고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남들도 살아 있다는 그것으로 우리의 시선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끼였고 악마가 시킨 안목이었고 복음의 광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안개에 쌓여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쩔 줄을 모르는 채, 방황하면서 방향을 잃어버린 채 지옥으로 갔던 우리를 비늘 벗겨지고 십자가의 광채가 드러나면서 ‘다 이루었다.’는 소식이 저희들의 온 몸을 감싸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