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1. 11:43

예수님의 승천 (사도행전 1:8-11) (야외 예배)

예수님의 승천(야외 예배)

2010년 5월 16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8-11

(행 1:8, 개정)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9, 개정)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개정)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행 1:11, 개정)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람이 본인들이 가지고 나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애씀도 노동의 결실물들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은 실은 자신이 애써서, 혹은 자신이 관여해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인의 제사를 거절했습니다. 진짜 하나님, 참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제대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엄청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이 해낼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창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절과 참된 교회의 차이는 바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집합해서 모아서 신에게 드리겠다는 것이 절이라면, 참된 교회란 인간이 해 낼 수 없는 것들을 고백하기 위해 모여진 무리가 교회입니다.

즉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절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을 경유하면서, 인간들이 고백하기를,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면서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사용하신 그 하나님 따라 주목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교회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있습니다. 즉 교인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경쟁하고 비교하기 위하여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구멍은 바로 구멍으로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둘러싼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합니다. 지상으로는 텅 빈 것인데 위를 보면 중심이 되는 사태가 일어나 있습니다. 위를 쳐다보며 살게 하는 구멍입니다.

반상회하면서 오랜 간 만에 손님들이 오셔서 거실을 빙 둘러 앉아있는데 그 빈공간이 좋아서 철없는 아이가 그 둥근 공간에 뛰어들어서 뒹굴고 놀고 있다면 얼른 부모는 그 아이를 그 공간에서 끄집어내어야 하겠지요. 교회라는 것은 그런 빈 공간만이 장만하는 곳이 아닙니다. 위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곳입니다.

즉 위를 쳐다보기 위해 집결된 자들입니다. 그 공간에서 일어난 사태는 바로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쳐다보며 살기에 서로가 서로를 비교할 겨를이 없게 됩니다. 비교할 이유도 없게 합니다. 경리보는 아가씨는 치과의사나 시장 난전에 고등어 파는 아주머니나 모두 위를 쳐다보게 하는 겁니다.

위를 쳐다보는 것은 인간들이 본인의 노고와 수고와 노동력하고는 무관하게 벌어진 일 때문입니다. 이는 예상 못할 섬김을 자아냅니다. 교회란 자기 만족이 아니라 이처럼 남들 눈치 못지 않고 자발적으로 섬김이 일어나는 빙 둘러싼 공간입니다. 이러한 경이로운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로 달려간다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신 이 현실을 그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참입니까?

예를 들면, 집에 애가 고3이라고 밥해야 한다고 가버릴 때,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 내력과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집으로 가셔야 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 세계에 인간들의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8-16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의 조상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위를 쳐다’보게 만드는 사태를 유발하시면서 이끄셨습니다. 이로서 본의 아니게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요 객이요 외국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정착’에 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린 자녀들이 이 땅에 정착이 시도한다면 부모들은 그런 시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이나 그 밑바닥 지상에 큰 구멍이 생긴 셈인데 그 공간에서 무엇이 쏟아지는 겁니까? 바로 예수님의 승천은 이전에 십자가라는 사건 때문에 발생된 하늘의 구멍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배척 사건’입니다. 즉 “죄가 있어? 그렇다면 천국에 못 들어오지. 천국이 너를 배척한다”입니다.

즉 저주받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힘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그 구멍난 하늘을 통해서 구름타고 합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이 사람들은 그냥 멍청하게 예수님만 홀로 올라가신 그 천국 구멍만 쳐다보며 살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에 보면, 성령이 그 구멍을 통해서 내려오신 답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 승천으로 인하여 뚫어진 그 구멍을 통해서 내려오게 되어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서 내려오신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그 구멍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 가슴에 늘 구멍이 뚫린채 살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구멍이 날마다 커지게 됩니다. 그 구멍의 텅 빔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생을 살 의미와 보람을 제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주신 것이 삶의 힘이 되고 이유가 됩니다. 빌립보서 3:12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께 잡힌 바 된’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히게 되면 골로새서 3:1-4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교회들은 이 성경 말씀이 제시하는 차별성과 분류성을 앞장 서서 가려주고 훼방해서 인간들의 정착을 장려합니다. 동시에 참된 현실을 희석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자진해서 절로 둔갑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친목의 장으로 탈바꿈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이 그리워서 뭉칩니다. 서로의 정이 그리워서 합칩니다. 그것이 바로 절입니다. 외로워야 좁은길 가는 맞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땅의 것을 소개하지 말게 하시고 위의 나라를 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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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장8-11(예수님의 승천)-acts100516

2010-05-18 14:47:40   녹취 : 오용익 
 
 
(야외예배)행 1장8-11(예수님의 승천)-acts1005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사도행전 1:8-1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데리고 하늘로 그냥 올라가버렸습니다. 이게 현실입니까? 이 현실을 누가 설명을 해줘야 돼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간 일이 없었으면 여기서 축구하고 노는 사람들처럼 이 땅에서 그냥 살면 이것이 현실의 전부입니다. 그냥 살면 돼요.

교회 안다녀도 아무 일 없고 이 성경 믿지 않더라도 아무 일 없어요. 왜, 똑 같으니까, 다 같이 인생 그렇고 그렇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교회 안다니고 예수 안 믿는다고 기죽을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다니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설명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했다는 것, 이 사간을 설명해 줘야 돼요.

사람들마다 다 똑같기를 원하고 있어요. 교회 간 인간들이나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나 똑같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가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렸어요. 그 뒤에 천사들이 와서 하는 말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그대로 구름타고 내려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조선일보에 날만 해요. MBC와 KBS에 나와야 돼요. 천안함 침몰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것이 나와야 돼요. 이게 나와서 왜 구멍이 뚫렸는가를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이 절에 다니는 것과 차이가 나야 됩니다. 절에 가는 것은 두 다리 성하고, 차 있고, 시계 볼 줄 알면 절에 갈 수 있어요. 약간의 헌금만 준비하면 절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그 하늘나라는 사람들이 두 다리 있고, 돈 준비하고, 아직 치매 안 걸려서 멀쩡한 정신 갖고 있다고 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박사, 판사, 의사 된다고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뚫어놓은 그 하늘나라에 대해서 뭔가 해명할 줄 알아야 되고 뭔가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 그 하늘나라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하늘에 구멍을 뚫어놓았느냐, 그 말이죠. 왜 올라갔느냐, 이 말이죠. 교회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겁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간 것에 대해서 ‘마땅히 그래야 되고 그것은 참으로 합당합니다.’라고 동의를 할 수 있어야 그 나라에 합세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갔다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학생들이 동의를 하겠습니까, 그것을 나라에서 법으로 정한다고 믿겠습니까? 너무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서 교회 만들어버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절입니다. 적어도 교회 왔으면 사람이 할 수 없는데 벌어지는 일,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그냥 쳐다봐야 할 이 문제, 쳐다봐야 될 그 사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평생토록 공부해서 취직해서 돈 벌어서 아담한 아파트 하나 장만하는 것,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종교하고 관계없어요. 착실하면 부금 넣어서 아파트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공부하고 취직해서 아파트 얻어서 살면 뭐합니까? 그 구멍 뚫린 하늘나라를 설명을 못하는데, 주께서 구름타고 올라갔다는 이것은 기괴한 사건 아닙니까? 그 기괴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교회입니까? 그것은 절간이죠.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들이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니까 그 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여러분이 반상회를 해 봤지요, 오늘도 여기 이 앞자리가 텅 비어 있는데, 반상회를 할 때 사람들이 자연스레 가운데 원을 형성하면서 둘레에 죽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철없는 신이가 반상회 가운데 공을 들고 들어와서 논다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부모가 얼른 애를 데리고 나가지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빙 둘러서 구름타고 올라가신 주님 쳐다보는 것이 교회에요. 서로 서로가 비교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돈 많이 벌었어? 십일조 누가 많이 했는데? 누가 기도 오래 하는데?’ 이렇게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비교하는 데가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구름타고 올라가 버리니까 ‘이게 무슨 난리냐.’ 하고 ‘주님 어디 갔지?’ 하고 주님 쳐다보는 데가 교회예요. 그런데 어떤 교회에는 입구에 뭘 붙여 놓았느냐, 안산의 어떤 교회에서 봤기에 하는 소리입니다만, ‘우리교회 사법고시 몇 명 합격’ 이라고 붙여 놓았어요. 그것은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것을 교회가 틀어막는 거예요.

인간이 뭘 할 수 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너도 못했고 나도 못했고 시장 고등어파는 사람도 못했고 치과의사도 못했고 경리학원 아가씨도 못한 것, 그런데 뭔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것, 반상회 하듯이 죽 둘러서서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에요, 위를 쳐다보는 겁니다.

우리 주님 구름타고 올라간 그 위를 쳐다보고 ‘나중에 구름타고 다시 오시리라.’ 그 사건을 쳐다보는 것이 교회예요. 거기에 경리 보는 아가씨나 치과의사나 시장에서 고등어파는 아줌마나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없어요. 쳐다보는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옷을 어떤 옷을 입고 왔느냐, 슬리퍼를 신고 왔느냐, 차이가 없어요.

슬리퍼, 하니까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인데 거기 한 집사님이 계셨어요. 그 분이 복숭아농사 짓다가 워낙 바쁘다 보니까 교회 올 때 그냥 슬리퍼를 신고 왔어요. 옛날 시골교회 예배당은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걸 그 집사님에 대해서 별로 안 좋아하는 장로님이 봤어요.

‘집사가 교회 오면서 슬리퍼를 신고 오다니’ 했어요. 그 이야기를 내가 설교하는 앞 광고시간에 했어요. 설교 초반을 어떻게 잡을까 궁금했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서 집사가 교회 올 때 슬리퍼를 신고 온 것을 가지고 운을 뗐습니다. 교회 파자마 입고 오면 어떠냐 그 말이죠. 지금 교회 왜 왔는데?

신발 신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슬리퍼든 구두든 그것 신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모아서 교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돼요. 그게 주님께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 아니고 목사들이, 목사들이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교회에 무엇을 도입하느냐 하면 정신만 바짝 차리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교회에 다 들고 들어와요. ‘새벽기도 나오세요, 십일조하세요.’ 십일조는 늘 하지는 않지만 그냥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면 돼요. ‘철야 하세요.’ 커피 석잔 마시고 하면 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모아놓으면서 ‘착하세요.’ 하는데 착한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은데도 다만 형편상 못하는 것이 인간인데요. ‘옷 깨끗하게 입고 오세요.’ 이런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끌어 모아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라고 하면 그것이 뭘 틀어막느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주님께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간 그 사건을 그 교회가 목사가 앞장서서 틀어막는 셈이 돼요.

목사가 자기도 못한 것을 이야기해야 돼요. 목사보고 구름타고 올라가 보라고 해보세요. 그게 됩니까? 어디에 날수 있는 양탄자가 있습니까? 아라비안나이트입니까? 교회라는 것이 어느 정도 희한한데냐 하면 교회에 내는 헌금 속였다가 사람 죽어나간 데가 교회입니다. 헌금 5만원 하려다가 2만 5천원 했다가 부부가 둘 다 죽어나간 사건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꼭 헌금 제대로 하라는 소리 같이 들릴까 싶은데 그것 말고 예수님의 12제자가 하나같이 순교했던 데가 교회입니다. 그것도 즐겁게.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가면서 즐겁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몰랐어요. 그것은 미친 거예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좋아서 히죽거리면서 ‘주여, 저들을 사랑해주소서.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하고 용서해달라고 했어요. 그게 교회에요.

이게 성경에 나오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안보니 교회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성경을 안보니까 대한예수교장로교가 나오고 침례교가 나오고 감리교가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을 틀어막는 곳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장사하는 데예요. 그 동네는 ‘정신 차리고 예배 참석 잘하면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동네예요.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게 하신 그런 것들을 내 놓을 수 있어야 그게 교회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나한테서 나올 수가 없었어. 나는 내 노동하는 대가밖에 몰라. 나는 내가 수고한 것 밖에 몰라. 나는 내 보상만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왔어.’ 이게 우리 본심인데 그것 말고 그런 보상 없더라도 ‘주여,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그런 흔적들을 내놓아야 그게 교회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끄십니다.’ 하는 그 무엇, 그것이 뭐냐, ‘구름타고 올라가신 주님께서 네가 본대로 구름타고 다시 오시리라.’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믿어지고 수용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고개가 끄덕여 지면서 인정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뭔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정신 차린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뭔가 작용한 결과가 그거예요.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께 사로잡힌바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절이 무엇이냐, 정리하면 절 혹은 절 같은 교회의 특징은 목사가 ‘하라, 하라’ 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다 끌어 모아서 힘을 키우는 것이 절간 같은 교회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진짜 교회, 초대교회 같은 교회는 뭐냐?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도 주님이 하신 사건이 믿어져서 반상회하는 모양처럼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고 그 중간에 구멍이 난 것, 이 예가 좋은데요, 이처럼 중앙에 구멍이 난 것이 교회입니다.

그 중앙에 구멍이 나려면 여러분 가슴에 구멍 나야 돼요. 뭔가 바보 같아요. 구멍이 뚫렸어요. 남들은 자기 것을 자기 가슴을 채우고 영혼을 채운다고 착한 일한다, 기도한다, 하는데 진짜 교회는 하나님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뚫려서 ‘이게 뭐지?’하고 바람이 술술 들어와요. 내가 누군지가 분간이 안돼요. 구멍이 뚫려서.

어느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제목이 있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우리가 교회보지 말고 성경을 보게 되면 총 맞은 거예요. 인간의 몸무게가 70킬로그램 나간다면 그 덩치가 어떻게 구름을 탑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사람이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것이 어느 순간 믿어질 때 총 맞았어요.

그리고 우리 중앙에 내 자존심이 있던 그 자리에 구멍이 펑, 하고 뚫렸습니다. 그것이 그 때부터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런 절간 같은 교회와 참된 교회의 차이점이 창세기 4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가인은 자기가 애써서 농사한 것을 바쳤다.’고 되어 있어요. 문제는, 여러분이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애써서 바친 것을 하나님은 절대 안 받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절대 받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애쓰는 것을 안 받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창기가 하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창녀해서 번 돈은 나에게 가져오지 말라.’ 고 하는데 제가 자본주의 사회를 연구해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창녀 아닌 인간이 없어요. 다 창녀에요.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애써서 한 것은 안 받습니다. 그것은 안 받고 아벨의 제사를 받는데 아벨의 제사는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그 무엇만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뭘 믿느냐, ‘저, 예수님이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 믿고 구름타고 다시 오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 가슴에 총 맞았어요. 구멍 뚫렸습니다. 교회는 반상회입니다. 이걸 믿습니다.’

이게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지 않아요.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야 믿어지는 거예요. 성경을 많이 안 읽어도 창세기 1장, 2장, 3장, 4장까지만 읽어도 나오는 것이 바로 그 이야기잖아요. 성경 다들 보시지요? 여러분, 행복하지 않습니까? 성경도 안보는 불행한 사람은 없지요? 다들 보시지요. 성경 보면서 행복하시지요? 1장, 2장, 3장만 넘기면 4장인데 벌써 거기서 ‘인간이 바친 것은 안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보세요. ‘바쳐라. 복 받는다.’ 목사도 잘못이지만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기자랑하려고 가슴이 안 뚫린 채, 총 안 맞은 채 와서 교회 크게 세우는데 자기가 참여했다는 그 자긍심으로 그 자긍심의 대체물로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더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총 맞게 해주고 가슴에 구멍을 뚫어주고 우리는 서로서로 보는 것, 목사보고 장로보고 또 목사는 교인보고 이런 것 안하고, 구름타고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어떤 사건을 보게 하신 그 이유가 뭐냐? ‘너희가 이 땅에서 정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여기 참석해 있는 애를 안고 오신 젊은 분들에게는 좀 미안한데 사람이 정착을 하게 되면 총 맞은 그 자기 가슴이 아물어져요. 정착하기 위해서 애썼던 것이 자기 자존심으로 납덩어리가 되어서 그 총 맞을 때 믿던 믿음의 구멍도 막아버려요. ‘전에 취직하려고 교회 좀 나왔는데 이제 취직했으니까 교회 안 나가렵니다.’ 자기 아쉬움을 거기에 틀어막아 버려요.

왜 사람이 그렇게 정착을 하고자 하느냐? 사람이 이런 것이 있어요. 반상회를 하게 되면 빙 둘러선 그 가운데 구멍이 있어야 되는데 그 구멍을 허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보니까 그 사람의 목걸이가 탐이 나고 그 사람의 입은 옷이 탐이 나요. 그러면 그 다음에 자기 신세가 초라해질 때 부도났을 때는 그 반상회에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처음 반상회 열릴 때는 주민들로 하여금 시에서 알려줄 것들을 알려줘서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열렸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왔는데 막상 반상회 한두 번 가보니까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하고 보이지 않는 비교와 경쟁이 되어버렸어요. 그 중간에 있는 구멍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집안이 허름하면 ‘우리 집에서 더러워서 반상회 못합니다. 다른 집에 가서 하세요.’ 이렇게 돼버려요. 원래 취지가 왜곡되어 버렸어요. 교회라는 것은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 주님을 쳐다본다는 말이지요. 거기를 쳐다보는데 주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시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성령께서 교회를 계속 몰아넣는 것은 ‘너희들도 하늘나라 갈 수 있다.’에 필요한 정보들이 성령을 통해서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주님 가신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객이고 이방인이고 외부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16절까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땅에 갔는데 가보니까 ‘아니야.’하는 식으로 살아진 겁니다. 제가 이사를 열한 번 했습니다. 다음에 또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자꾸 훌치는 거예요. 다음에는 여기, 다음에는 여기.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성질이 똑같아서 ‘자꾸 이렇게 이동할 것이 아니라 어디 한 곳에 정착했으면 좋겠다.’ 해서 정착했다 싶으면 또 이동시켜요. 그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안 것이 ‘아하, 우리는 주님이 밟았던 그 길을 지금 밟고 있구나.’

주님이 어떻게 와서 어떻게 가실 때 왜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아니하고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셔야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 땅을 잠시 거치면서 잘 먹고 잘살라고 거치는 것이 아니고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그래서 이 세상은 저주 받는다. 너는 저주에서 태어나서 저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그 내막과 그 근거를 제공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계속 훌치면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사람이 갈 곳이 있다면 이 땅에서의 성공실패를 논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좀 잘되었다고 해서 잘났다든지 좀 못되었다고 해서 못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지난 금요일에 안산과 서울에서 강의하고 왔는데 제가 강의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아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가운데 제가 은혜 받은 것이 뭐냐, ‘사람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겁니다.

사람이 어디서 살면서 무엇을 했는지 그런 것은 옥경이 한테나 물으세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잘 산다, 못 산다.’를 스스로 묻지 마세요. 왜? 어차피 떠날 장소니까, 어차피 떠날 곳이니까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떠나기는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구름타고 가신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겁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사는 것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별 의미 없고 소용없고 아무 뜻이 없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우리가 악착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악착같이 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냐, 내 힘으로 안 되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 빌려서 악착같이 이 땅에서 정착하려고, 복달라고 하는데 그 복을 어디에 써먹는 겁니까? 정착 용도에요. ‘가정에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가 공부가 안되네요, 매일 축구만 하고 게임만 하고 놀기만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애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만일에 자녀분들이 교회를 가기 싫어한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빠, 엄마는 천당 가도 나는 이 땅에 살렵니다.’ 하고 정착하려 하는 거예요. 성경에 비추어서 정착하려는 이곳이 불바다가 된다면, 저주받는 곳이라면 그것은 철딱서니가 없는 거지요. 저주받는 그곳이 좋다고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새벽 네 시에 들어오니.

이래야 됩니다.“얘야, 춤추는 그것이 그리도 좋으냐?” “좋습니다.” “그러면 짧게만 하고 다른 것 해라.” “엄마, 이번엔 컴퓨터 게임이 그리도 좋다!” “짧게만 해라.” 그것을 하면서 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한곳에 머물지 않도록 훌치는 거예요. 자꾸 때리고 훌쳐서 머물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비행기도 훌치면 나중에 뜨게 되어 있어요. 들썩들썩 하다가 비행기가 뜹니다. 비행기가 약간만 뜨면 ‘전에 가라앉았던 그 내 자리가 아무것도 아닌 자리였으며 그까짓 것에 무슨 미련을 그리도 두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뭐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던가,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하게 되는 겁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뭔가 진짜 의미 있는 곳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뭐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이 세상이 죄라는 것을 알고 ‘날 따라와.’라고 하시면서 구름타고 구멍 내고 우리 가슴에 총 맞은 것처럼 구멍 뚫리게 해서 허하게 되어서 따라가는 겁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진짜 세상을 제대로 사는 사람은 멍청하게 사는 거예요. 멍청하게 사는 것이 왔다 에요. 제발 좀 똑똑하게 살지 말고 멍청하게 사는 거예요. 멍청하게 운전하다가 단속에 걸려서 “실례합니다. 속도위반 하셨습니다.” “얼마입니까?” “4만원입니다.” 멍청하게 내는 겁니다.

다음에는 기도해서 안 들켜야 될 텐데,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멍청하게 운전하다가 멍청하게 들이받고 멍청하게 물어주고 그러면 보험료는 오르죠. 마치 총 맞은 것처럼, 안에 중심이 없어요. 그 중심은 어디서 내려오는가? 위에서 잡아주고 당겨주는 것이 있어요. ‘사로잡힌 자’, 그게 뭐냐,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잡아당겨주게 되면서 ‘너는 어느새 그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너는 오지 말라.’는 거예요. 교회는 사람 끌어 모으는 일에 환장을 했지만 원래 십자가는 ‘진짜 내가 준 믿음이 있는가, 아니면 네가 조작해낸 믿음인가?’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조작해낸 믿음 같으면 헛수고니까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오라’고 당겨주는 힘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에게 정착되려는 마음이 없고 항상 들썩들썩 하는 마음이 생겨서 점점 더 5미터, 10미터 세상이 멀어져요. ‘전에 부도나서 자살하려 했었는데 그것도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모든 것이 높이 올라가면 세상이 넓게 보이고 더 높이 올라가버리면 하늘나라 가 있어요.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는 그 마음이 우리의 뻥 뚫린 구멍 안에 중심을 차지하는 겁니다.

사람의 사정은 사람의 영밖에는 아무도 몰라요. 가족끼리도 모르고 부부끼리도 몰라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그 사람 사정이야 그 사람 맘에 들어 있어서 아무도 모르듯이 하나님의 사정을 누가 알리요.’라고 되어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사정을 주는 것을 가지고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속사정을 알게 됩니다. 그 속사정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쉽게 합시다. ‘누가 너 대신 네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너의 고향은 죄 없는 하늘나라이며 너는 거기에 가게 된다.’라는 그 속사정, 십자가의 효력을 오직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알게 돼요.

그러면 우리는 항상 ‘나 때문에 먼저 가신 분,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 분, 그 분이 나를 당기고 있다는 그 사실’ 그것이 우리 중심의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올 때 ‘주님, 오늘도 당겨짐을 당했습니다. 오늘도 나는 정착, 집착 이것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오늘도 말씀 주셔서 총 맞게 하시고 구멍 뚫리게 하셔서, 구멍 뚫린 그 자리에 오늘도 하늘나라에서 그물 던져서 죽죽 당기는 그 힘을 느끼게 하옵소서.’ 할 때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어느 집사가 돈 좀 벌어서 집을 샀다고, ‘집사님, 집도 사고 좋겠습니다.’ 하는데 그것도 정착이에요. 그것은 그냥 놔두고 가야 될 것들이에요.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골 3:3) 이 땅이 아니라 위를 쳐다보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이 터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우리 곁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사도들이 사라진 예수님을 쳐다보고 삽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성공 실패에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면 다 부질없는 짓, 하룻밤 꿈같은 것, 거기에 인생 걸지 말게 하시고 항상 우리 가슴에 총 맞은 것처럼 뻥뻥 뚫려서 그 뚫린 구멍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주시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힘만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