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2. 01:18

마지막 웃는 자 (누가복음 6:23-26)

본문 : 누가복음 6장23-26절
제목 : 마지막 웃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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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강-눅6장23-26(마지막웃는자)-luk100606

마지막 웃는 자

2010년 6월 6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23-26

(눅 6:23, 개역)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4, 개역)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하늘나라 갈 때까지 실컷 웃는 것은 유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결코 웃고 살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과 ‘너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꼭 시험을 또 치르는 기분입니다. 시험을 쳐다한다는 말은 전원 다 합격시켜 주지 않겠다는 뜻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즉 탈락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험이든 시험을 치른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인정해주지 못하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제대로 세상을 세상답게 볼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를 구별 짓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한통속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과 분리된다는 것은 곧 외로움이요 비극이요 불행이요 죽음이라고 간주합니다. 어쨌든 세상과 더불어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의식과 사상과 생각에 나의 생각을 융합시켜 일치되게 하므로서 그들 덕으로 생존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같은 통속이 되면 더 이상 ‘거짓’이나 ‘참’으로 구별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아니, 구태여 분류시킬 마음을 자진해서 접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추세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지으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구분지음은 곧 선지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평소에 보통 인간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무슨 식으로 세상을 구별하면서 사는지를 묻는 겁니다.

현 세계의 우수한 금융 인재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사진 작자로서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천황봉을 30년간 오르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이 세상에는 수 만 가지고 각기 다른 직업들을 가지고 평생을 거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수 십년간 몸담은 그 직업이 과연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해야만 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목사로서 수 십년간 목회한다고 해서 과연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눈이 생길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4:15-17,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공중에 그 몸이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자기 몸이 공중으로 끌려가는 그런 몸이라는 사실을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얼마나 큰 설레임을 가져다주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시청에서 여권을 만들어주는 담당자가 여권을 만들면서, “나도 얼른 이 일 때려치우고 내 몸이 공중으로 뜨는 그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과연 긴 긴 시청 공무원 생활 자체가 제공해 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겁니다.
교회 와서 복음을 듣는다는 의미는, 인간들이 결국 해내지 못하는 일을 고대하게끔 하는데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해내는 것보다 사람들이 해내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벌어질 일을 고대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인하여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 기어이 한 통속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심지어 가족들과는 같은 통속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이 내려와서 하늘로 올라가버립니다. 이로서 제자들은 이 세상 한 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생긴 것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살 자리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자신의 자리’는 실은 매일같이 죽음의 힘에 의해서 죽음으로 끌려가는 처지에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책상에 앉아서 20대의 제 아내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진처럼 생긴 아가씨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고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경찰서에 신고해도 그 사진의 인물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찾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우리 자신부터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어제의 나가 아닌 나로 변질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자리와 우리 자신은 매일같이 허무하게 됩니다. 우리를 매일같이 허무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그 거대한 구멍에서 쏟아져나옵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그 자리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자리입니다.

우리 자신이 허무한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한통속이고자 하는 이 세상도 틀림없이 허무하다는 것을 압니다. 결국 우리는 허무한 우리 자신과 허무한 이 세상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웃어도 길게 웃을 대상이 못되고 슬퍼도 길게 슬퍼할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허무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참된 선지자가 와서 알려줍니다. 참된 선지자는 일종의 선발대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맞부딪히니 세상으로부터 사정없는 구박과 밉상을 받게 됩니다. 아모스 3:6-7에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거짓 선지자는 어떠합니까? 미가 3:10-11에 보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배후에는 악마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참 선지자를 배척합니다. 마치 후발대로 오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이름으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님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느냐가 분류의 기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자리 확보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말고 차라리 우리 자신에 구멍이 뜷이게 하옵소서. 매일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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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강-눅6장23-26(마지막 웃는자)-luk100606

2010-06-06 22:18:42   녹취 : 오용익


030강-눅6장23-26(마지막 웃는자)-luk1006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23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6:23-26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요 몇 주째 계속 아멘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이유가 뭔지를 보니 이해가 갈만 합니다. 마지막 하늘나라 갈 때까지 웃는 것을 유보해 달라는 이야기거든요. 하늘나라 가서 실컷 웃어버리고 지금은 웃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와 ‘저희’를 계속 구분시키니까 구분한다는 이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시험 친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보통 인생살이에서 시험이란 입학시험과 취직시험으로 다 끝낸 것으로 알고 있지요. 직장에서 승진시험이라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승진은 안하면 그만이니까요. 시험을 치는 이유가 뽑는 사람은 10명인데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100명이면 10대 1이잖아요. 시험을 친다는 것은 들어갈 만한 사람과 못 들어갈 사람을 출제하는 측에서 가려내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인데 왜 그러냐? 시험을 없게 해 달라는 말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성격이나 성질을 그대로 저쪽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받아주세요.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왜 자꾸 훼방을 놓습니까? 시험을 친다는 둥 그런 부담을 주지 말고 그냥 받아주소.’라고 우리는 하고 싶은데 저쪽에서는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니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인생관이 잘못 되었을 수 있다.’는 이것이 큰 부담이 되는 거예요.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아멘 소리가 나오기가 참 힘든 것이 26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고 합니다. 칭찬받아도 문제입니다. 누가 칭찬을 해달라고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한다는 말은 한통속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한통속 되면 안 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멘 소리가 나오기가 참 힘들어요. 우리는 더불어서 살고 싶어요. 이웃집 원수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이웃과 원수 되고 싶지 않아요. 좋은 것이 좋아요. 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처럼 되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이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좋아요. 위로받고 싶어서 교회 왔고 혼자 웃는 것보다 더불어서 함께 웃으면 그것이 더 좋고, 월드컵도 혼자 보는 것보다도 서울광장에 여럿이 모여서 미친 듯이 외칠 때, ‘아!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하면 더 재미있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는 말은 ‘너희들을 칭찬하는 그 인간에게 너희들은 따로 떨어져 나왔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참 시험도 희한한 시험이에요. ‘칭찬하는 것을 피해서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따로 떨어져 나왔느냐? 나왔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을 오해해서 함부로 칭찬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한통속이 된다는 말은 이것은 곧 우리를 발목 잡는 것이고 천국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같이 놀자. 대충 살자. 특이하게 좀 놀지 마라.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얼싸안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에게 한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거짓’이라는 말이 나와요. 제가 오늘 영암의 월출산 천왕봉이 나오면서 시인이 그 산에 대해 시를 읊는 대목을 봤어요. 그 사람은 30년 동안 그 월출산 천왕봉을 오르내렸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제가 딱 묻고 싶은 것이 떠올랐어요. ‘천왕봉을 오르내린 30년 동안 무엇이 거짓인지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었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30년 동안 등산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것은 익히 알았을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은 한통속이다.’ 그것은 몸에 배듯이 흡수했을 거예요. 그런데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거짓이냐 하는 것을 월출산 천왕봉에 올라가면 구분이 되느냐 그 말입니다. 구분이 안 되거든요.

다큐멘터리로 나온 것 중에 상하이 금융가를 다룬 것이 있어요. 상하이의 금융가에 세계적인 금융가들이 경쟁하는데 중국의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얻어내는 사업을 벌이는데 세계적인 최고의 엘리트 경영자들이 100층이 넘는 고층건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세계에서 성공했다는 천재소리 듣는 엘리트들이 다 모이는데 그들에게 묻는 거예요. ‘혹시 거짓선지자에 대해서 아십니까?’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구분을 못하면서 그들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부하면서 금융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군인이 전략무기의 운영체제를 연구해서 국방을 도모하는 것, 평생을 군무에 몰두하는 것, 다 좋아요. 그런데 군대에 3, 40년을 복무하면 ‘아하, 거짓선지자가 이런 거구나.’ 하고 아셨습니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왜 제가 이 거짓선지자이야기를 모든 사람 각자의 직업에 다 적용을 시키느냐? 여러분들이 잘 안보는 성경구절을 하나 대겠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좆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7절 끝 부분입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는 이 대목입니다. 상하이금융가에서 사업하고 있으면 주께서 끌어올려 주십니까? 지난시간에도 저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중에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기껏해야 크레인을 동원해서 번지점프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그 경우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 오셨지요. 교회를 왜 오셨느냐, 제가 보기에는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기 위해서 교회 오신 거예요.

이것은 30년 등산하면서 사진 찍어도 소용없는 일이고, 상하이에서 금융으로 출세해도 소용없는 일이고, 자기직업에 매진해서, 군인으로서, 공무원으로서, 교사로서 수십 년 동안 자기영역에서 봉사하고 봉사해도 그것이 공중으로 끌려올라가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목사로서 50년 해도 마찬가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공중에 끌려올라가는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3, 40년 종사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인데.’ 맨 날 하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사실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한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요. 나한테 좋은 것, 내가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 그것이 좋은 거지요.

그런데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이용하고 끌어 모으고 거기에 투자를 했지만 막상 그래서 살아남은 ‘나’가 과연 공중에 끌려올라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딴 것, 관심조차 없잖아요. ‘그딴 것.’ 성경에 나오는 그딴 것 관심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능력이 상실되었느냐 하면,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를 구분하는 능력조차 평생 살면서 습득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것을 양성한 적이 없었던 겁니다. 결국 어느새 세상과 한통속이 되고 말았어요. 뭔가 달라야 되는데 뭐가 달라야 되는지 그런 것을 요구받은 적이 없어요. 세상은 같아야 된다고 요구했기에 우리는 같아야 된다고 여겼지 달라져야 된다고 여기지는 않는 거거든요.

지금부터 달라진다는 것이 어떻게 달라져야 된다는 것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를 보면서 아까 불렀던 찬송가가사를 바꿔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습니다.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의 후렴부분입니다.

이렇게 부르니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우리 이야기처럼 들리도록 바꿔보겠습니다. “고마워라 임마누엘 재물만 섬기는 우리 집.” 로또 당첨되면 웃음꽃이 활짝 피지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펀드만 섬기는 우리 집.” 아주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고마워라 임마누엘 주식만 섬기는 우리 집.” 이것이 왔다 아닙니까? 아무 부담 없이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노래를 상가 2층에 있는 예배당 간판이 붙어 있는 이 장소에서 이 노래를 불렀으니까 거부감이 없었습니다만 이 밑으로 한층만 내려가 봅시다. 이 밑에 곱창 집에서 술꾼들이 한참 술 마시면서 떠들고 있는데 거기서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하면 전부 다 돌아봅니다. “왜 당신은 특이하냐.”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이 지상에 남겨둬야 될 몸이 아니고 주님 재림하실 때 공중으로 크레인으로 묶여 올라가듯이 올라가야 될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참인지 그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배양 중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몸에 익히고 있는 거예요.

지난주에 결혼식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참석해 보시면서 거기서 어떤 특이성들을 많이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한통속이 못되어서 뭔가 쓸쓸함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꼈습니까? 제가 어제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 우연히 아내의 20대 때 사진을 봤어요. 제가 그 사진을 보고 물었어요. 아내의 20대 때의 사진을 보면서 ‘이 아가씨가 어디 있느냐?’

정답은 없습니다. 저는 20대 때의 그 아가씨와 결혼을 했는데 지금은 그 아가씨가 없다 이 말이지요. 왜 없습니까? 누가 없게 만들었어요? 지금 20대 때의 그 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가서 ‘이 사람을 찾아 주세요.’ 하면 못 찾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람이 지금 없어요. 그 얼굴이 없을뿐더러 그 옷도 없고 다 없습니다.

만약에 제 아내가 제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서 저의 20대의 사진을 보면서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가 어디 있느냐고 한다면 역시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없앤다는 겁니다. 대단한 진리를 발견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없애는데 그 능력이 뭐냐, 죽음의 능력이 이미 찾아온 거예요.

이미 죽음의 능력이 찾아왔는데, 우리 곁에 죽음이 와서 나를 없애고 자꾸 나를 잘라버리는 능력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반대로 자꾸 나를 확장시키고 더욱 굳히고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인 듯이 억지를 부려요. 오늘에서 내일되면 그 오늘은 허무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허무하라고 이 땅에 거짓선지자 참선지자를 보내줬는데 우리는 안 허무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요.

우리는 안 허무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하늘로 안 딸려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요. 아무리 아내가 예쁘게 단장을 해도 그 20대는 이미 훌쩍 지나고 말았어요. 내가 나쁜 놈이지요. 그 사진을 찢어야 되는데. 그것은 결국 죽은 시체의 사진을 들고 있었던 거예요. 20대 때의 사진 찍은 그 어떤 날의 하루를 살고 죽어버린 어떤 여인의 사진을, 영정사진을 내가 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 다음날 되면 그 다음날의 사진이 따로 또 있어요.

연세 많은 분들은 멋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사진기를 들이대면 화들짝 놀라곤 하잖아요. 특히 전에 오 장로님 같은 분은 사진 찍지 말라고 아주 놀라잖아요. 왜냐하면 본인이 본인 모습을 봐도 놀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귀신이 있다니.’ 허무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찾아오는 것부터 해서 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 보내주신 것은 그 허무한 것을 보고 잠시잠간 웃는 것, 그렇게 너무 오래 웃지 말라는 겁니다.

허무하지 않은 세계가 따로 있고 그 세계에 가려면 너희가 이 한통속에서 따로 벗어나서 어디에 대기해야 되느냐, 말씀의 자리에 대기상태로 있어야 됩니다. 20대 때의 사진 펴놓고 맨 날 대기하지 말고 성경 펴놓고 보게 되면 그 성경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속의 우리 자리를 마련하기 보다는 어제의 자리를 확장시켜서 그것을 다지고 또 다지고 또 다져서 그것을 뭉쳐서 자꾸 그것이 오늘의 내 자리라고 그것으로 안 허무해지려고, 그냥 가는 세월 붙잡아서 남들은 다 가는 세월이지만 나에게는 세월이 안 가는 것인 양 억지행세를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지난 야외예배 때 했던 설교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설교 한 번 했던 것이라도 이상하게 자꾸 또 하고 싶어요. 사도행전 1장 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구름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구멍이 뚫렸어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한통속, 우리는 한통속이다. 좋다. 우리는 이제 주님과 함께 부활했으니 한통속이다.’ 했는데 주님께서 여기에 구멍을 뻥 뚫어버리고 그 현장에서 구름타고 위로 올라가버렸어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구멍밖에 없어요. 구멍밖에 안 남았는데 그 구멍은 뭐냐, 주님이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흔적만 남기시고 떠난 자리로서의 그 구멍이 있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시간에 구멍이야기 하는 것 잘 못 듣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교회 있습니다. 단합합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됩시다.’ 이렇게 자꾸 눈에 보이는 것, 뭔가 채워진 것에 매진하고 돈 투자하고 헌금하고 거기에 봉사에 봉사를 거듭해서 ‘다져지고 다져진 교회 됩시다.’ 전부 이쪽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뻥, 뻥, 뻥 구멍을 뚫어놓아요. 화산폭발 시 생기는 분화구처럼 뚫어놓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가면 우리는 멍하게 되지요. ‘아하, 우리는 이 땅에 없는 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분인데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분을 따라서 우리는 사라진 분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그 분화구 같은 넓은 구멍을 보면서 새삼 확인하는 거예요.

그 구멍에 들어가면 바로 그 구멍이 우리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구멍에 어떤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말씀을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금융가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다 좋습니다,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뭐가 되든지 다 좋은데 그 구멍 속으로 매일같이 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 힘이 우리를 당겨서 ‘네가 이 구멍에 서 있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부름 받을 일은 없다.’는 겁니다. 상하이에 있는 102층짜리 건물에서 금융가를 주름잡는 그 자리, 두바이를 주름잡는 세계 최고의 엘리트 자리가 구원의 자리가 아니라 세계최고의 엘리트 소리 듣는 자리마저 의미 없고 이것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하는 거기에 구멍이 생겼는데 그 구멍은 예수님이 나에게 매일같이 뻥뻥 뚫어주는, 매일같이 허무하게 만드는 그 구멍, 그럴 때 우리는 그 자리가 나의 더 이상 헛되지 않은 영원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주와 함께 빠져버리는 자리,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나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현재 내가 만든 자리는 믿을 수가 없지요. 왜? 매일같이 죽고 그 다음날 되면 또 허무해지고 그 다음날 되면 또 허무해지니까. 10년 뒤에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10년 뒤의 6월 6일 날 보세요,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 6월 6일 날 가보시면 마찬가지예요. 또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2020년 6월 6일 날 이 자리가 나의 영원한 자리가 못되는 거예요. 그런데 혹시나, 또는 행여, 하면서 우리는 붙잡지도 못할 자리를 붙잡으려고 그렇게 헛짓을 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남 따라 한통속이 되어서 가는 겁니다. 남 웃을 때 웃고 남 울 때 울면서 웃는 이유도 모르고 우는 이유도 모르고, 남이 우니까 같이 울어야 되는 줄 알고 남이 웃으니까 같이 웃어야 되는 줄 알고, 그래서 남 따라 가다가 아무 자기자리도 없이 그냥 헛되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지요.

십자가라는 뻥 뚫린 구멍에는 하나의 블랙홀처럼, 분화구처럼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텅텅 비워놓았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으로 우리가 기쁘고 즐거우면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뭐냐, ‘더 이상 나에게는 믿을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정했다. 내가 나를 믿으면 차라리 바보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맨 날 늙고 맨 날 귀신처럼 되는데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믿을 것은 하나도 없고 진짜 믿을 것은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다고 할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구멍에서 매일같이 약속의 말씀이 흘러 넘쳐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자리에서 떨어져도 괜찮고 떠나도 괜찮게 되는 겁니다. 왜? 믿음의 힘이 나를 주님이 계신 곳으로 당겨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하나교회에서 한 윤범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역시 제가 큰 은혜를 받았어요. 그분이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종이 된 것을 그렇게 기뻐했다.’는 겁니다.

‘종의 종’, ‘종’이라는 말은 한 윤범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노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의 노예가 된 것을 그렇게 기뻐해서 그 예수님의 노예의 노예가 되기를 더 한층 기뻐했다는 겁니다. 누구의 노예가 된다는 것,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 이미 그 사람은 믿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의지할 분이 있다는 거예요.

의지할 분이 있는 사람, 종의 종이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남은 생애라든지 자기 운명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종의 종이니까. 저는 이랬으면 좋겠어요. 종의 종의 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종의 사슬이 되면 좋겠어요. ‘종의 사슬.’ 그렇게 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종이 된 것에 대한 그 자부심이 대단한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점을 성경을 통해서 봅시다. 우선 참선지자부터 보게 되면 23절에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했다는 말은 22절에 있는데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라고 해서 참된 선지자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참된 선지자는 세상 사람과 한통속이 아니었다 하는 거죠. 세상 사람과 한통속은 아니었습니다. 세상과 한통속이 아니었다면 선지자의 하는 일은 뭐냐, 선발대의 일을 합니다. 아모스 3장 6절에서 8절까지에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는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을 하시면서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그 선발대가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선발대가 욕을 얻어먹고 피해를 보는 이유는, 현재 그들은 한통속이 되어 있는데 그 한통속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와서 하늘의 낯선 것을 이야기하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용납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선지자가 옴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은 선지자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족속으로 돌변했고 자기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헛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는데서 오는 분노가 있는 겁니다. ‘왜 인간세상에서 다 같이 아는 것과 상반되는 다른 소리를 하느냐?’ 그겁니다.

그런데 선지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자기가 그들과 합세하고 싶어도 그 뒤에서 누가 째려보고 있거든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거 알지? 내가 네 입에 담아준 그 말대로 그대로 해라. 내가 하라고 했지?’라고 한단 말이지요.

지난 수요일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미가야 선지자 같은 경우는 하나님도 계시고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는 그 하늘의 천상회의를 보고 난 뒤에 목격한 그대로 자기가 본 것을 이 지상에서 이야기하자마자 뭔가 별이 번쩍 하는 것처럼 귀싸대기가 날아왔어요. 시드기야라는 거짓선지자가 뺨을 올려 부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빼놓고 너하고만 따로 일을 하실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된 선지자는 바른 말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칭찬이 아니고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거예요. ‘나가 죽어라. 이놈아! 어디서 우리를 모독해.’ 하고 뺨을 얻어맞은 겁니다. 그 때 선지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복되도다.’ 그래야 돼요. 한 방 더 맞으면 복이 두 배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습니다.

거짓선지자도 나와 있지요. 미가 3장 10절에 보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 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도다.” 한다는 겁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축복이 있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방금 말을 너무 성급하게 했는데 천천히 해 봅시다. 거짓선지자라는 말을 안 들었다 치고 잊어주시고 제가 말을 바꿔 보겠습니다. ‘여러분, 세상 살기 참 힘들지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참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셔서 주님 보내셔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 하나님의 목사고 제사장이고 선지자입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힘든 인생을 사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 기도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 돈 벌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게 하신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교회 나와서 제발 복 좀 받으세요.’라고 하는 선지자가 바로 거짓선지자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이 찾는 교회는 거짓선지자만 찾는 교회예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거짓선지와 참선지자를 구분하는 능력이 이미 상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를 참선지자로 여기고 참선지자의 귀싸대기를 때리는 험악한 세계에 주님께서는 참선지자를 선발대로 보낸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내니까 농부들이 뺨을 때리고 발로 차면서 ‘이게 어디서 품삯을 챙기려고 들어. 주인 오라고 해.’ 하고 짓밟았습니다. 또 보내니까 또 초죽음을 만들었어요. ‘아들을 보내면 아들까지야 설마 그렇게 하겠는가.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환영하겠지.’라고 포도원주인이 아들을 보냈더니 ‘이놈은 마지막 상속자니 이놈만 죽이면 포도원은 우리차지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할 때는 뭐냐, 세자로 표현합니다, 간단해요, 참된 선지자의 특징이 그겁니다, 세자로 ‘떠나라.’ 이 세상을 떠나라, 그 떠나라는 명령을 안 해도 20대 때의 사진만 봐도 이미 우리는 어떤 조치가 벌어지고 있어요. 20대 때의 그 탱탱한 피부가 지금은 없습니다. 21세대의 피부가 지금 없습니다. 22살 때의 피부 없어요.

이미 죽음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믿건 안 믿건 그 구멍에서 나온 죽음의 힘이 모든 사람에게 조치를 취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모를 때에, 그 때 참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떠나라.’ 사람들이 ‘이게 어디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우리의 단결력을 훼손해.’ 하고 귀싸대기를 날립니다.

참 선지자의 이러한 수모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는 교회마다 사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물정 모르는 풋내기 목사들이 신학교 갓 졸업해서 공부한 그대로 어줍 잖게 참선지자 흉내 낸다고 간만에 당회장목사님이 주일오후 강단에 설교자로 세워주니까 한구교회 개혁해야 된다고 한소리 했다가 내려오자마자 종용히, 아주 종용히 당회장실에 불려갑니다.

“네가 이 바닥에서 밥 먹고 살려고 하나, 죽으려고 하나.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큰 교회 추천 못한다.” 이 한마디에 꼬리 내리면서 “제가 너무 철이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물정을 몰랐습니다.” 하지요. 그 고개 숙인 머리 위에 당회장 목사가 한마디 더 추가합니다. “나도 네 나이 때 한창 혈기방장 할 때는 한국교회 개혁한다고 한참 나대고 네가 오늘 오후설교 같은 설교 많이 했다. 많이 했는데 목회 한 2, 30년 하다 보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더라. 네 자식들 피아노레슨 시키고 밥 먹고 살려고 하면 신학교에서 성경배운 것 다 잊어버리고 내 밑에서 목회 잘 배우면 시골교회 작은 교회라도 추천해 줄게. 당회장 되면 그 때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봐라.” 이 사랑스러운 충고 한마디가 고개 숙인 그 위에 얹혀 집니다.

그 초짜 목사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헛되다는 것을 본인이 미처 몰랐던 거예요. 교회마저 설마 헛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겁니다. 교회 가면 부흥되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쳐주니까. ‘여러분, 교회 가도 구원 못 받습니다.’라는 것이 어느 신학자의 책에도 그것이 없어요. 본인이 헛되다는 것을 모르면 주님이 공중에 끌어올려서 휴거되는 그 자리, 그 구멍바깥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면서 그 자리를 개간하려 해요.

그 자리에 그냥 있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정착하려고 하는 그 자리가 헛된 자리인줄 모르면 그 사람은 거짓선지자입니다. 만약에 ‘인터넷 보고 왔습니다. 소문 듣고 왔지요.’ 하면서 찾아와서 넥타이 사주고 쌀 한가마 사주면서 칭찬해주면 그 칭찬의 자리가 ‘주여, 앗 싸!’ 하면서 전을 하나 펼 수 있는 괜찮은 나의 안정된 자리라고 여기면서 다시 한 번 헛됨은 사라지고 목회성공이라는 환상이 눈꺼풀을 가리게 됩니다.

제가 목사의 예를 드는 것은 제가 목사이기에 목사의 예를 들지만 이 목사라는 직업을 금융이나 교사나 농사나 모든 직업에 다 적용시켜 보세요. 의사, 판사나 모든 직업에 다 적용시켜 보게 되면, 우리 자아는 뭔가 헛되지 않은 것을 다 끌어 모으고 칭찬도 힘이 되니까 끌어 모아서 자기 자리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6장 26절의 말씀이 어느새 우리 자리에는 들어오지 않고 그 구멍에서 나온 자리는 없게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것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한통속으로 만들었어요. 한통속으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매일같이 숨 쉬고 살 수 있는 생기를 주셨습니다. 한통속으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믿든지 안 믿든지 무엇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느냐 하면, ‘신이 은혜로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셔서 살아가고 있다.’ 하는 것을 자존심이 강해서 말은 안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어떤 민족이라도 종교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표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위험하다는 겁니다.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이 그거예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아주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왜 위험한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모든 것이 한통속이 됩니다. 분류되는 것도 없고 ‘너희’와 ‘저희’가 가려지지도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참된 선지자가 와버리고 예수님이 와버리면 한통속이 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뭐냐?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울산강의에서 ‘여호와가 여호와에게 죽었다.’ 이런 표현을 했는데 여호와가 여호와를 죽인 거예요. 주 되시는 여호와를 여호와 믿는 사람들이 죽인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내가 믿던 하나님을 걷어치우시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잠간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는 후다닥 예수님은 치워버리고 내가 전에 믿던 하나님을 그대로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여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은 고마운 예수되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당신 혼자나 가세요.’ 하고 치워버리고 예수님이 내놓으신 좁은 길로 가지 않고 옛날 갔던 그 길, ‘하나님, 은혜 압니다.’ 하고 갔던 그 넓은 길, 자기 맘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천당 간다고 여기는 그 일반적인 종교심, 그길로 그대로 다시 가는 거예요.

예수님으로 잠깐 왔다가 바로 치워버리고 이제는 예수 필요 없고 하나님하고 직접 상대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화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욕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한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하고 정반대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왜 정반대냐 하면 예수님이 갔던 것은 십자가라는 구멍을 통해서 진짜 아버지, 자기 하나님께 갔거든요.

그러면 길이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 말고 다른 길로 가버리면 진짜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촌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세례를 줄 때마다 겁을 내는 이유가 있었어요. 세례문답을 할 때 하나님이라고 하면 막 줄줄 나와요. ‘세상에, 하나님께서 우리 애 몸이 아픈데 낫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다른 집 농사 잘 안되었는데 우리 집 대추나무 농사 잘 되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 오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세례도 받게 하시고…….’

그 할머니들이 다 그렇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불쑥 뭐라고 묻느냐하면, ‘실례지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걸 보고 느낀 점은,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성경 안 봐도, 교회 안 나와도 교회 밖에서만 얼씬 거리면서도 다 알더라는 말이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도 알고 어려울 때 빌고 기도할 줄 알고,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종교심이고 그 종교심으로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을 예수님하고 바꿔야 되는데 전혀 바뀌지 않은 사람을 과연 세례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할머니들 한 두 분이 아닙니다.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한테는 아예 관심이 없었어요.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심의 발로에서 교회는 다녔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을 못 받았기 때문에 ‘아,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 이것은 사기구나. 엉터리구나. 그래서 나는 죄인이구나. 나는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을 했지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 구멍에서 나온 성령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목사들도 성령을 안받아가지고 맨 날 하나님가지고 장사하는 마당에 아침에 눈뜨면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 작업에 들어갔어요. 개인 교습을 한 거예요.

‘예수는 이런 분입니다.’ 또 확인하고 ‘예수는 어떤 분이라고요?’ 하면 또 잊어버렸어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 할머니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까 “내가 세상에 남편이 노름 좀 한다고 잔소리를 그렇게 해댔는데 그게 죄 같아.” “그 죄 말고요. 하나님을 믿은 그것이 죄 인줄을 아느냐, 그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어서 교회 나왔다.’ 그게 바로 예수를 죽이는 죄란 말이지요. 왜? 교회는 나와도 여전히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나는 내 자리, 내 남편, 내 새끼 이것밖에 모르니까. 이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며 예수님이 살려줘야 내가 산다는 그것에 비교해서 내 힘으로 하나님 믿고 내 힘으로 살겠다는 것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가지고 바꿔치기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알았다고 하는 그 하나님 다 잊으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고 나는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입장에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시 보시기 원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거짓선지자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거짓선지자가 사실은 우리가 혹하고 좋아했던, 내가 설교 듣고 싶었던 선지자, 보고 싶었던 선지자가 바로 내 거짓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선지자만 좋아한 거예요.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나를 보고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하는 그런 목사는 싫었고 ‘훌륭하십니다, 복 받으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착하십니다, 구원받겠습니다.’ 칭찬, 칭찬을 끌어 모으는 우리나 그래서 칭찬받는 목사나 둘 다 한통속이잖아요. 그래서 어디서 구름위에 올라가며 누굴 끌어올려준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있지도 않은 인간을 어떻게 끌어올려요. 허무한 것을 아는 사람이 본문에 의하면 복된 사람입니다. 허무한 것을 즐기시고 허무한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계를 시원하게 떠나는 재미로 우리는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거짓선지자였습니다. 안 떠나려고 했고 허무한대도 억지로 안 허무 하려고 힘 모으고 칭찬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적해줄 때 우리는 주님께서 대신 죽으신 용서의 의미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가 있기에 용서의 주가 대신 죽어야 되는가의 그 관계를 날마다 더 깨달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