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5. 22:18

사랑 (누가복음 6장27-33절)

본문 : 누가복음 6장27-33절
제목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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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강-눅6장27-33(사랑)-luk100613

사랑

2010년 6월 13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27-33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28, 개역)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9, 개역)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눅 6:30, 개역)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눅 6:31, 개역)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2, 개역)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 6:33, 개역)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이 허구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도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부터 챙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와같은 말씀은 전혀 우리 몸을 통해서 나올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것을 건지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신의 것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으시고서는 그 자신의 것을 도로 획득하는 식으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나라호 로켓이 두 번씩이나 하늘에 쏘아올렸지만 땅으로 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 교인들을 그 로켓 위에 얹어놓고 우리교회에서 쏘아 올렸는데 얼마 안가서 도로 지상에 추락한다면 목회자의 심정을 어떠하겠습니까? 기가 찰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도로 떨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 자체가 하나님 보시고 헛되고 헛된 존재인 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것이 하늘의 고리에 걸리는 부분이 따로 있어 그것에 걸어서 하늘나라에 당기면 구원되는 겁니다. 따라서 나라호 로켓처럼 지상에서 추진력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당기는 힘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8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마저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걸개를 알려주는 믿음입니다.

그 걸개는 바로 로마서 8:36-39에 나와있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사랑을 찾지 말하는 말입니다. 도마라는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찾아왔습니다. 과연 예수님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가름합니까? 바로 손에 난 못자국과 허리에 난 창자국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못자국과 창자국이 가까이 접근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멀어진다는 것은 그 못자국과 창자국이 멀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못자국과 창자국이 멀어진다는 말은, 그 흔적과 관련지어서 나 자신을 규명하거나 규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규정하게 되면 자신을 항상 잘난 존재가 되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앞에서마저 죄인이 아닌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우리를 걸어서 건져주시는 걸개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식입니다. 올라갔다고 공중에서 폭발하고 도로 땅에 추락되는 형국입니다.

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마치 명승지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연도에 가득 들어선 선물가게에 매혹되어 진짜 명승지의 가치를 놓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실천에 옮겨본다는 식으로,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떡을 해다 바친다든지, 아니면 돈 떼먹기 위해 돈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그냥 돈을 줘버린다든지는 하는 짓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놓고 천국 입구에 들어서니 하나님께서 들어오지 말하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원수 여기 한 사람 추구요!”라고 천사가 외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헛된 죄인이라고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관계에서만 파악됩니다. 그 외의 노선에서는 사랑을 모르게 됩니다.

5:10-11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란 어디서 발생하는 겁니까? 원수란 자신의 의를 가지고 창조주께서 하신 일을 무효화 만들어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서는 진정한 원수란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원인은 원인되시는 분끼리만 모이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이 원인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원인을 자기 행함에 두고서 출발하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독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자되기 위해 야곱은 태어나야만 했고, 하나님께 미움받는자 되기 위해 에서는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존재 원인은 각자 본인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점일획이라도 양보없는 그 말씀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왜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일 밖에 없는 가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만약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그 때부터 그것이 곧 허구요 허무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성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사랑과 용서의 훈풍이 불어옵니다. 그러면 성도는 비로소 ‘원수에 대한 예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압니다. 야곱을 야곱되게 하신 그 창세전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즐겨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몽땅 하나님이 것임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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