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7. 10:23

티와 들보 (누가복음 6장39-42절)

본문 : 누가복음 6장39-42절
제목 : 티와 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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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보와 티

2010년 6월 2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39-42

(눅 6:39, 개역)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 6:40, 개역)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 6:41, 개역)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 6:42, 개역)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오늘 본문에서도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명령하는 분의 권한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같은 사람들 끼리 만나서 이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에서 주저없이 다음과 같은 반발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너가 뭔데 감히 나에게 잔소리하느냐 나는 고3 졸업하고 부터는 부모님 한테도 잔소리 안 듣는 사람이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지시와 명령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이 명령 속에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전체의 명령이 배후에 진치고 있으면서 나오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오늘 본문만을 가지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5:18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에 보면, 우리 조상 아담에게 명령하기를, “선악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는 ‘타락한 영혼은 영원토록 저주와 고통을 따를 것이다’라는 선언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선언을 하나님은 취소할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된 결과입니다. 마치 그림 액자 속의 들어앉은 그림 같습니다. 다빈치라는 사람이 그린 모나리자라는 그림에 보면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여인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 밖에서 오늘날 그 여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 여인은 그림속의 여인일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두 ‘정녕 저주받아야 하느니라’는 네모난 말씀의 액자 속에 갇힌 채 그 안에서 웃고 떠들고 울고 불고 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지시와 명령은 그 자체가 인간을 가두어놓은 양상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자신의 처신을 변명하려 합니다.

즉 환경이 나빠서 죄 지을 수밖에 없노라고 버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환경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안에 숨어있는 인간에게 직접 말씀으로 들이대십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난 뒤에 남의 눈의 티를 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신체 부위를 가지고 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야 하는지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란 밖에서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동시켜서 일단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상대방의 기준을 갖고 있지 아니하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특히 구약 이스라엘 나라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이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다른 이방나라에 없는 거룩한 하나님 말씀도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정없이 그들이 자신들의 형편을 가리고 있던 그 나라 자체를 아예 돌 무더기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시편 79:1에 보면,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요즈음 식으로 해서 교회들을 모두 돌 무더기로 만든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거룩해보이고, 경건해보이고 고상하고 격조있어 보이는 그 교회들이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저 돌 무더기에 기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주변 환경들 속에 숨어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로 만들므로서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된 내막을 새롭게 밝혀줍니다.

즉 하나님은 새로운 액자 그림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 관계’로 그려진 액자 그림입니다. 그 그림 안에서 세례 요한은 황량한 광야 위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의미가 없고 돌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서서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선지자 맞는지 아닌지는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깨서 어느 노선으로 들어오시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세례요한 때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사랑이 들어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됩니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마치 축구에는 법이 있습니다.

아무데나 골 넣으면 안되고, 손으로 공을 만져서는 아니되고 축구장에서 한 팀이 12명 이상이 되면 아니되고 라는 법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어느 누구도 “정녕 저주받으리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확정적인 율법의 사각형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 저주에서 벗어날 자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천국에 가 있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법이 없는 사랑이 찾아와서 구원된 것입니다. 사랑에는 법이라는 것이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그 사랑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됩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할례 언약’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할례 언약’으로 인해 사람이 육신으로 만들어낸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으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즉 ‘정녕 죽으리라’의 힘의 저촉을 받아야 될 몸과 ‘정죄함이 없으니라’에 해당되는 몸이 따로 등장하는 겁니다.

할례란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므로서 인간의 생식 능력에 준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자식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습니다.

이 할례 언약에 준해서 생겨나는 자식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자들을 두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11-12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 뿌리를 둔 새로운 나무로서 오늘날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십자가에 피를 흘러주신 그 사랑만을 고백하고 증거합니다. 이로서 성도는 전부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목적물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억의 필름에 불과한 이 자아가 끊어지고 뼛조각 가루로 드러나는 그 날이 오기 전에 항상 태양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빛만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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