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5. 22:20

후새와 아히도벨 (사무엘하 15장31-34절)

본문 : 사무엘하 15장31-34절
제목 : 후새와 아히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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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강-삼하15장31-34(후새와아히도벨)-2sa100613

후새와  아히도벨

2010년 6월 13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31-34

(삼하 15:31, 개역)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15:32, 개역)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삼하 15:33, 개역)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삼하 15:34, 개역)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 3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윗과 후새와 압살롬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번호를 매긴다면, 각 사람 당 1, 2, 3 이라는 번호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 대신 번호만을 나열하면 1의 사람, 2의 사람, 3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1의 사람, 2의 사람, 3의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우월과 차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숫자는 하나하나가 동등합니다.

숫자로만 따져서 2가 3보다 못한 숫자도 아니요, 3이 1보다 못한 숫자도 아니요 월등한 숫자도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서로를 보면서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을 대합니다. 나는 76번이라면 당신은 544번 사람으로 만납니다. 76이라는 숫자가 544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고 544라는 숫자는 76이라는 숫자보다 더 잘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국민 투표가 한 사람당 한 장만 할 수 있다는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과연 이 민주주의적 원리가 하나님 나라까지 통하겠습니까? 1,2,3 중에서 그 중 한 사람을 바짝 위로 치겨 세워버리면 나머지 두 사람과는 다른 차원으로 분리됩니다. 이렇게 되면 바짝 올려진 그 사람으로 인해 나머지 두 사람은 강제로 좌측과 우측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바짝 올라간 그 사람으로 인해 경사면에 발생합니다. 꼭지점을 중심에 생겨버리면 나머지 두 사람은 양쪽 경사면이 되어버립니다. 서로 마주보는 식이지요. 오늘 본문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다윗은 자리는 인간이 선택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히여 선택되어진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그 위상을 흉내 내거나 모방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오직 세워놓은 2등변 삼각형의 중앙 꼭지점 위치를 다윗이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준해서 한 사람은 그 다윗의 위상을 인정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거기에 반대한 쪽에 포진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양쪽에 두 개의 십자가가 더불어 있었던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어지간하면 예수님께서 같은 날에 같은 장소에 죽은 십자가 동기동창을 둘 다 구원해주실만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한쪽은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가게되었지만 다른 한쪽은 끝까지 예수님을 욕하고 죽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특이성을 끝까지 인정못하고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같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숫자로 표시하면 그저 1,2,3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중앙꼭지점이 되게끔 애쓰게 됩니다. 인생살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세상 기준에 따라가는 나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주장하고 내가 제시하는 것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좌우로 분류가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겉으로는 평범하다고 말들하지만 자기 속성과 같은 같은 속성일 때만 나로 인해 그 사람이 내 친구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점을 견지하려면 힘, 곧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양분과 후새와 아히도벨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후새의 경우, 그는 다윗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다윗이 권력이 박탈당한 상태라도 다윗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는 다윗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도적으로 왕으로 세우셨다는 ‘기름부음’의 원칙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의 원칙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때는 특정 인물에게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원칙입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도 그러합니다. 오늘날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기름부음받은 자들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대해서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선지자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12제자들을 다 데리고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남겨두신 이유도 이 ‘기름부음’의 원칙 때문입니다. 이 원칙이 오늘 본문에서 여전히 실행됩니다. 후새에 비해서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기준만을 고집하기 위해 권력을 쌓는데 치중하면서 세상을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극히 정상적인 인물입니다.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권력이 엷어졌다고 여기면 권력이 두꺼운 구름을 형성하는 곳으로 곧장 자리를 들고 옮겨가면서 살아가는 극히 세상적이고 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런 성향 외에 다른 성향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입니다.

따라서 아히도벨보다 후새가 처신이 더욱 이상스럽습니다. 이미 권력의 추가 다윗에게서 압살롬에서 기우러진 이상, 달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하지만 후새는 권력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다윗이 내려준 사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사명이 없는 존재는 후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강도는 곧 사명없이 인생을 사는 자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었던 강도는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이 부여한 사명에 죽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평생 살아온 것도 사명을 위한 삶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명자와 사명없이 권력을 탐하는 자와 붙게했습니다. 압살롬과 다윗과의 전쟁이 이들 지략가를 전쟁으로 요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각각의 지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조언하기를, 다윗이 남기고 간 후공들과 공개적으로 동침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 권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행위를 하므로서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이미 화합될 수 없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 지경으로 돌입했기에 백성들이 함부로 다윗편에 서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 이스라엘에 날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권력이란 그 과정 자체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전력론을 아히도벨이 압살롬에서 알려줍니다. 이러한 점을 다윗이 익히 알고, 후새에게는 마치 다윗편에서 압살롬편으로 넘어온 신하로서 위장근무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일종의 다윗의 조정을 받은 비밀요원으로 활동해서 아히도벨의 지략을 차단시키라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렇다면 후새의 제안은 무엇일까요? 압살롬은 후새의 의견도 듣겠노라도 나섭니다. 그 때 아히도벨은 후새의 제안보다 더욱 더 환상적인 권력론을 들고 나옵니다. 이 이론은, 권력이란 과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말한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체 권력을 일단 손에 쥐고 난 뒤 다윗을 쳐도 늦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권력에 탐하는 자들로 하여금 최고 권력이 제공하는 맛에 쉽게 도취된다는 것을 간파해서 환상적으로 제안한 겁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다윗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압살롬은 자기 꾀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후새가 미리 말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면 후새 안을 채택해 버립니다.

그러니 오로지 최고 권력만을 추구하기에 자신의 그 어떤 낭패나 실패를 스스로 용납 못하는 아히도벨의 지략가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된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위대함을 위하여 권력을 끌어모으는 무모한 짓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노리는 약점은 ‘더 낮아지기 싫어하는’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스스로 약점없는 사람되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약점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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