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 15:40

대제사장 사독 (사무엘하 15:24-29)

대제사장 사독

2010년 5월 30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24-29

(삼하 15:24, 개정)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삼하 15:25, 개정)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삼하 15:26, 개정)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삼하 15:27, 개정)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삼하 15:28, 개정)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삼하 15:29, 개정)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구약을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진척된 이야기의 내용은 가득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수풀 속에서 나뭇가지 하나 꺼내놓고 목사 홀로 분석하는 셈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외형적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집단을 중요시 해서 지키려고 하시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안식일날 나무를 한다면 그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수의 나머지 집단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라는 사람은 제거해서 나머지 이스라엘이 무사히 아이라는 작은 성채를 점령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중요하지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되지 못합니다.

또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무려 24,000명을 죽이는데 그 원인이 되었던 자는 남녀는 단지 두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 그 남녀를 죽이므로서 비로소 전염병이 그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는 정말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분이라는 겁니다. 이 거룩한 자신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만드시려고 하시는데 그들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거룩한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소위 자칭 거룩한 백성의 일원이라고 우기는 자들을 죽이시는 겁니다. 즉 거룩을 지키고 드러내기 위해서 거룩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제거하시는 겁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이로서 제사장은 하나님 손에 의해서 감행된 ‘묶음 작업’입니다. 마치 여성들이 긴 머리를 묶기 위해 노란 고무줄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을 거룩한 분으로 지목받은 제사장 중심으로 한데 묶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제사장을 가리고 ‘기름 부음받은 자’라고 하고 그 호칭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란 곧 ‘노란 고무줄 예수’가 되는 겁니다. 자기 안에서 구원될 자를 한데 묶는 작업을 행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최종적으로 확정지은 거룩이 제공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거룩의 유무만이 이스라엘이 살고 죽고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과 거룩이 생산되는 방식에 인정하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비거룩에서 주어지는 저주를 받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거룩 앞에서 모든 인간은 거룩이 아예 없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이 인간들이 타고난 본능과 마찰을 일으키고 충돌을 야기시키기 됩니다. 즉 “나는 할 만큼 했다. 최선을 다 한 만큼만이라도 괜찮은 존재라고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극장 입장 요금을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선 자신이 부스럭부스럭 새삼스럽게 주머니 뒤척이면서 극장에 들어갈 돈을 찾고 있는 행위가 같습니다. 일괄 묶음을 인정 못하겠다는 태도인 것입니다. 앞에서 치른 그 희생과 공로와 값어치를 모독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 안해준다면 하나님도 믿지 않겠다고 나서는 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집단 여부없이 직접 인간에게 찾아오신다는 말은, 구약을 통해서 결국 제대로 된 집단이 성립될 수 없음을 익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말은, 제대로 된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 및 거룩을 제공하는 방식 안에서 필히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출발을 하게 됩니다. 보통 세상 나라들은 제사장이 우선이 아니라 왕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왕 제도보다 제사장 제도가 우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를 본받아서 자신들도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나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구가 곧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절하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나왔다고 단정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사장의 역할이란 모든 인간의 여망과 욕망보다 더 먼저 갖추어야 될 요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인간이 고의로 지은 죄는 아무리 뒤에 엄청난 희생제물을 바쳐도, 고의로 했다는 것 때문에 용서받을 제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일괄적으로 전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제사입니다. 이 제도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담판 짓는 자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이 대제사장이 신약에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림자라고 해서 그림자만 보지 마시고 그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실체가 나올 것이니 그 실체와 그림자를 같이 연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묶음입니다. 노란 고무줄입니다.

이 제사장들은 땅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유지시켜주는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궤, 즉 하나님의 돌판이 들어있는 거룩한 상자입니다. 이 상자 안에는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서 만든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이미 깨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증거하는 증거궤가 되는 겁니다.

이 돌판을 상자 안에 담고 뚜껑을 만들어 닿게 되면 그 두껑에는 흠없는 제물의 피가 묻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 가운데서 거룩을 거룩답게 만들어내는 하나님 식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은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사독 대제사장에게 그것을 명합니다.

사람들은 제사장 제도 보다 왕 제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권력에 대한 멈추지 않는 욕망이 들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렘이 노린 것은 제사장 제도가 아닙니다. 왕 제도입니다.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동조한 것도 평소의 내심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교회 운명이나 교회 질서나 권력 계통을 따지는 일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직 앞에서는 자신들이 죄인이 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겁니다. 참된 성도라면 죽기를 다 해서라도 이 언약궤를 사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독 제사장이 다윗왕에서 명령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내부가 십자가 피 앞에서 노출되고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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