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6. 18:22

피난하는 다윗왕 (사무엘하 15:19-23)

피난하는 다윗왕

2010년 5월 23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19-23

(삼하 15:19, 개정)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삼하 15:20, 개정)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삼하 15:21, 개정)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삼하 15:22, 개정)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삼하 15:23, 개정)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우리는 지금 깊은 말씀의 숲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의 생활이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서 오로지 자신의 행함으로만 유지되고 버티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성경 보는 것이 짜증이 나고 안해도 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양 여깁니다. 

하지만 말씀을 우리를 응축시킵니다. 축소시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제일 가는 외과 기술을 가진 의사가 어느 날 성령을 받아서 말씀의 숲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야고보서 4:14의 말씀처럼 ‘안개’가 됩니다. 즉 ‘안개’라는 말씀으로서 자신을 표현하게 됩니다.

물론 외과 기술을 여전히 국내 최고입니다. 그리고 자타가 그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말씀의 숲 속과 구조 안에서 그 사람은 ‘안개’입니다. 이것은 외과의사 뿐만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꺼운 말씀의 숲 속 안에서 자신을 죄인이며 더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교인들에게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흔히 그런 식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대단한 권력으로 중무장된 존재가 부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목사는 참된 성도와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도리어 목사는 교회를 권력의 장으로 변모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도 그 목사와 대화할 때는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힘을 내세우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되면 벌써 말씀의 구조 밖의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벗어나서는 자신이 들었던 말씀의 숲과 구조를 탁탁 털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개’로서 처신하고 ‘안개’로서 살아야 복음이 전파되는데 이 외과 의사가 교회를 떠나서는 말씀구조마저 털어버리니 남는 것은 ‘최고의 외과의사’라는 힘과 권력의 중심 인물로 나서게 됩니다.

이것은 언약도 아니요 하나님의 약속도 아닙니다. 도리어 언약의 밖의 인물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능력으로 압축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바짝 눌려있는 쥐포나 오징어포를 누르고 있는 진공포장 형태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아들의 위세에 밀려서 정처없이 쫓겨다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말은 곧, 그 시대에 있어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은 곧 다윗과 함께 동행하느냐 여부라는 겁니다. 오늘날의 언약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축복과 저주가 가름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신하들은 다윗을 마치 권력의 중심으로 본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이 있는 곳은 대단히 위험한 곳이 됩니다. 다윗 중심으로 권력이 발생하니 다윗 자체의 언약적 의미, 즉 왜 다윗으로 인하여 축복과 저주가 가름되느냐에는 관심들이 없고, 이 발생된 권력을 누가 누리느냐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하 3장에 보면, 아브넬이라는 장군에 사울측에서 다윗 측으로 귀순을 해옵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군대장군 요압 장군이 이 아브넬을 몰래 죽여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권력확보에 장애물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무엘하 4장에 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의 적의 수장인 이스보셋이라는 사람의 목을 쳐 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갑의 형제입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서 다윗에게 바치면 다윗은 크게 기뻐하고 환영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도리어 다윗은 이러한 권력 투쟁구조에 대노합니다. 그 레갑의 형제를 처형해버립니다.

다윗이 권력을 피해서 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긍휼과 사랑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처벌이 아니라 상한 심령에 대한 용서에 있음을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자신이 또한 죄인임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언약의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위인을 찾고 있었고 잘 생긴 압살롬이 다윗왕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자 대부분 사람들은 압살롬을 차기 왕으로 옹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잇대라는 사람은 도리어 패잔병 무리처럼 되어버린 다윗의 일행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려고 나서게 됩니다. 교인들이 나름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가진 재료와 원료를 교회에 쏟아 붓지만 막상 나오는 제품을 보게 되면 도저히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 제품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잘못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위험한 다윗 주변에서 무슨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주변의 제자들 무리에서 무슨 위험한 시비가 일어나고 있는 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12제자들 사이에는 ‘하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가’가 관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이미 짐승의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다니엘 7:3-6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들의 특징은 타인을 찢고 죽이고 강압적으로 정복하는 구조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자같고 독수리같고 곰같고 표범같고 그리고 이 앞의 세 짐승보다 더 센 짐승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는 각종 힘을 끌어모으니 기능들로 온 몸을 장착시키는 식으로 개별자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시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서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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