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2. 19:01

압살롬의 쿠테타 (사무엘하 15:7-12)

압살롬의 쿠테타

2010년 5월 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7-12

(삼하 15:7, 개정)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삼하 15:8, 개정)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삼하 15:9, 개정)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삼하 15:10, 개정)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삼하 15:11, 개정)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삼하 15:12, 개정)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스라엘 나라에 졸지에 왕이 둘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다윗왕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아들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현재 사람들의 호응도가 많은 쪽이 왕이라는 인식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꼭 다윗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다윗만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사람들은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점지해주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힘이 모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평소에 백성들이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다윗은 신자인데 다른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다윗은 성경에 준해서 주어진 왕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에 백성들은 전혀 그런 점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얼굴 돌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들이요 우리가 압살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현실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성경 현실을 벗어난 우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게 되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죄의 지배를 받고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러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인은 남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만의 현실을 따로 갖고 싶어했습니다. 동생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가인의 성질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성질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짜증날 문제입니다. 내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자들이 주변에 있게 되면 결국 내가 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삼키지 아니하면 삼킴을 당하는 구조라고 사람들은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말들을 하지 않습니다.

고집 센 남편이 아내보고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혹은 용서해주세요”라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편의 내부에는 권력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작용하는 현실만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런 권력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죄인의 입장에서 왕으로 삼았고, 당연히 죽을 자의 입장에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왕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고 왕 앞에서 죽어 마땅한 자가 될 때만 그 왕이 우리를 살려주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고 죽을 자라는 조건 하에 참된 현실적 왕과 결합이 됩니다.

다윗은 바로 날때부터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부름받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다윗을 달리 생각한 겁니다. 평소에 백성들의 마음 속에 성경 말씀 휘감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력으로 휘감겨 있다는 증거가 디는 겁니다. 자기 속에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즉 7 귀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누구를 봐도 자기처럼 현실을 그런 식으로 본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간 역사를 그냥 폐기처분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현장 보전하십니다. 과거의 사건이 그대로 후대에서 연속되고 이어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동일산 성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후대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공개하십니다. 그 사건을 그대로 담아서 모든 인류의 몸 안에 작용하는 원리와 능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왕의 시대에서 이러한 원칙이 필히 되풀이 되어 현실 위로 퍼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지배받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서, 혹은 죽어야 될 자로서 간주하는 법을 우리는 태어나면서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교회 내부에 이런 권력자들이 설치댑니다. 여기에 비해서 마태복음 20:25-2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 하에 헤브론에서 자신의 왕됨을 선언하게 됩니다. 권력이란 실상 인간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6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참새나 들풀이 권력에 관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길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길러주시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어줍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인간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질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되는 권력을 맛본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보고 다시 권력이 없는 곳으로 곱게 밀리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을 낳습니다. 하지만 진정 자신이 죄인이며 현재 자신은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함을 아는 자라면 압살롬의 권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의 마음 속에는 온통 성경 말씀으로 칭칭 감겨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서 권력욕을 빼어버리게 하옵소서.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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