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4. 21:22

마음 도둑 (사무엘하 15:1-6)

마음 도둑 

2010년 5월 2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1-6

(삼하 15:1, 개역)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삼하 15:2, 개역)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삼하 15:3, 개역)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삼하 15:4, 개역)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삼하 15:5, 개역)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삼하 15:6, 개역)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이스라엘에 왕이 둘이 있는 셈이 말았습니다. 다윗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마치 자신이 더 훌륭한 왕인 양 설쳐대면서 사람들의 마음으로 자기 쪽으로 돌려놓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수월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으니 행정적 편이를 맛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왕의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권력을 많이 가진 존재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다윗왕이 하는 일을 비슷하게 하면 얼마든지 왕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백성들도 역시 그 차이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사람들이 옹립해서 세운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체적으로 법인식을 가지고 나옵니다. 즉 법대로 하면 자신이 옳은 사람이 되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울 때는 힘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해 세워진 왕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들고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을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십니다. 법과 언약의 차이점은, 언약에는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있지만 법에는 규칙에 대한 준수 여부만 있을 뿐입니다. 희생이 없는 겁니다.

희생을 발견하지 못하면, 사람은 법적인 보상을 고대하면서 하나님에게 찾아드는 겁니다. 즉 착하면 착한대로 보상이 있어야 하고, 신앙이 좋으면 좋은대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ㄷ여기는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기 내부에 법적 의식에 따른 보상 기대를 그대로 유지한채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입니다.

착하다고 해서 착한 보상을 하나님은 해주시지 않습니다. 신앙좋다고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가게문 닫고 교회에 나온다고 그 다음날 손님 더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은 교회 왔다가 안 나오는 이유는, 법적인 하나님상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길만큼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아무런 행운이나 기적이 따르지 않으니 그 교회에서 철수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런 인간들의 법적인 감각을 정죄하십니다. 그리고 보상보다 하나님의 희생하심에 눈길을 줘야 한다고 하십니다. 압살롬은 일반 백성들이 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단지 힘을 원하고 있으며 자신의 법적 자세에 합당한 보상을 받기를 원하고 있음도 압니다. 그래서 왕 앞에 나서서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 가로채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태도는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에서 ‘예수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즉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희생에 눈길돌리지 못하고 각자 자신들의 법적인 보상을 챙길 수 있다는 식으로 노선을 틀어서 자기에게로 쏠리게 만듭니다. 이는 교회를 실제로 세우시는 분이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들입니다. 교회는 힘의 단체가 아닙니다.

실권자가 중심이 되지 아니하면 무너지는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이미 무너진 곳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오로지 ‘새언약’으로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작용하십니다. 결코 인간이 만든 법을 통해서 사람들과 교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교회는 오로지 새언약적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의로움에 입각해서 추가적인 보상을 달라는 식으로 나올 리가 없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희생 앞에 자신의 법적 태도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힘을 원했습니다. 왕의 자리가 희생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의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에게 힘이 모아지고 쏠리게 되면 그 때부터 그 힘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삼손의 경우,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주신 힘 가지고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3명의 여인을 위해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세 번째 여인으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이 버림받음이 곧 삼손으로 하여금 언약적 행위를 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하여 힘을 사용하므로서 다윗왕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언약적인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틀어막은 셈이 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 때문에 잠적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천국에서 인간의 그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천국이란 하나님의 희생 앞에 놓인 자만 들어갈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희생 앞에서 자신을 커버하고 있는 법적인 칸막이가 철거되고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따라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십자가 복음을 외면해버리면 그 사람은 본인의 자존심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셈이 되어 천국은 못들어가는 자가 됩니다.

이는 곧 압살롬과 마찬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여전히 존속하겠다는 속셈밖에 안됩니다. 사무엘하 14:25-26에 보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좋아할 만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새언약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이사야 53:2-3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발 교회에 예수님은 없다고 빼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중심, 새언약 중심, 하나님의 희생이 될 때만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곳은 자존심들이 모여 뭉쳐있는 절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을 우리의 법 감정이 휘감지 않도록 늘 십자가 희생 앞에서 철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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