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2. 01:30

백성들의 슬픔 (사무엘하 15:30-31)

본문 : 사무엘하 15장30-31절
제목 : 백성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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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강-삼하15장30-31(백성들의슬픔)-2sa100606

백성들의 슬픔

2010년 6월 6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5:30-31


(삼하 15:30, 개역)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 15:31, 개역)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죄가 될까요? 그 평범한 일이 죄라고 등장하는 것은 바로 유월절 사건이나 십자가 사건 앞에서입니다. 그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원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평소에 자기 직업에 몰두 하다보면 늘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라는 원칙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 원칙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사태를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왕도 울고 그 따르는 사람들도 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눈물 흘리는 이유가 항상 같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두 종류의 눈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흘리시는 눈물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시는 그 심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저 날마다 자기 신세가 처량해서 우는 그런 울음말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연속극을 보면서도 웁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그런 입장이라면 울지 않을 수 없기에 동감한다는 뜻에서 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울음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울음입니다.

다윗의 울음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흘리신 눈물과 관련있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다윗이 제대로 하나님을 다 알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기대한 다윗왕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백성들이 권력을 추구해서 자기 아들쪽에 거의 다 붙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권력을 상실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산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피를 보고 넘어가는”그 은혜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한 것이 슬픈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왜 다윗을 보고 울까요?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 앞에 나와 있다는 성경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8:13-14에 보면,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고 나와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백전백승입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다윗 같은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즐겨 팬이 될 것입니다.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의 소망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늘 승리를 낚아채는 그런 영웅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덩달아 영웅적인 삶이라는 느낌을 듭니다.

아마 예수님을 졸졸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단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놀라운 영웅적 성과가 마음에 들어서 추종자로 자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한 그 영웅이 아들에게 패배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 같이 아파하면서 우는 겁니다. 마치 자신이 졸지에 망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생각은 다릅니다. 사무엘하 7:25-26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지금 다윗은 자신의 가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가문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속성이 유지되어야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자비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문이 형편없이 권력의 투쟁장으로 변모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한스럽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 가문에 대한 오해 때문에 다윗은 우는 겁니다. 대다수의 백성들이 압살롬 쪽에 붙은 것이 바로 그런 오해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도 하나님이 뜻을 몽땅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해가 압살롬의 반란 사건을 통해서 더 깊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힘에 이끌림이 없는 사람은 그냥 지식으로 남을 뿐입니다. 마치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은 여성과 그 담임선생님의 아내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룬 여인이 아는 그 담임선생님은 엄연히 차이가 나겠지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가문에 끝까지 개입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예상과는 달리 그 어떤 반란이 벌어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자기 가문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그 개입을 고대하는 그 인간이 생각한 자기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용납하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작용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낱낱이 부셔버리는 겁니다. 이 부셔버림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접촉당하는 현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나의 것’이라는 울타리를 다 부셔버립니다. 전혀 ‘나의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걱정을 합니다. “나의 것이 깨어지면 그러면 남의 것이 되느냐?”는 겁니다.

즉 다윗의 것이 깨어지면 압살롬이 것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것도 아니되고 너의 것도 아니되고 그들의 것도 아니됩니다. 오로지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신의 것으로 회수해버리는 작업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누가복음 23:26-28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33-35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듭니까? 바로 자기 것이 사라진다고 항변하면서 속에 담겨있던 원초적 죄를 발산시키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이런 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시는 겁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1:7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자존심만 쥐고 있지말고 예수님의 눈물을 품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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