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7. 10:28

저주가 복으로 (사무엘하 16장11-14절)

본문 : 사무엘하 16장11-14절
제목 : 저주가 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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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가 복으로

2010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6:11-14

(삼하 16:11, 개역)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2, 개역)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삼하 16:13, 개역)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삼하 16:14, 개역)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성경은 축복과 저주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맞추어서 인간의 평소에 하던 행세들도 같이 나열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평소에 쉽게 하던 행위들이 결코 축복과 가까운 것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게 합니다. 사람이란 눈만 뜨면 힘을 모르는 일에 나섭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권력의 장을 벗어나본 적이 없습니다. 힘이 되는 곳으로 쏠리고 힘이 엷어졌거나 없어진 곳에서는 주저없이 떠나고 맙니다. 시골에서 점차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도시에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모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힘이 없이는 안되는 일은 모조리 기피하는 성향은 타고났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우선 되는 일이 바로 힘 모으는 일입니다. 이 점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두 종류의 관점으로 나눕습니다.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일로 나눕니다. 문제는 축복과 저주가 이 기준에 준해서 분류된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곳은 저주가 임하고 인간이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곳은 축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축복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자력으로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일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는 가만 두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본성인 인간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를 포기할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축복받을 만한 위인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자들이 발생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자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그 사람을 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또한 권력의 장입니다. 인간이 평소에 하던 행세대로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을 집합시킨다면 그곳이 바로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잘 보이는 일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롯의 가족은 아버지 롯의 말을 듣고 같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남편보고 따라 나왔지 결코 남편이 믿는 그 천사의 말을 본인이 곧이듣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언명은 실은 하나님께서 혹처럼 붙어있는 롯의 처로 하여금 떨어지게 만들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남편따라 나서는 것은 여느 여인네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믿는 그 하나님을 함께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이처럼 축복이란 같이 모여있다고 해서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받지 못할 자를 철저히 가려내는 조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축복제공입니다. 그 어떤 구실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축복받지 못할 자에게 축복이 돌아가는 법은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므이가 다윗이 저주하는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힘과 권력이 이제 다윗에게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힘과 권력이 탐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사건에서 롯에게 붙어있던 롯의 처도 롯이 남편으로서 갖고 있는 힘이 그리워서 나오고자 했습니다만 결국 뒤를 돌아보고서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도록 허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사건입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그것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도리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12지파가 동등된 수준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12지파 가운데서 유독 다윗 지파에게만 왕을 허락하겠다고 하십니다. 자연적으로 다른 지파 사람들의 원성을 품게 되게 되었습니다.

특정 지파에게 다른 지파가 종속된다는 것은 출애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 자리를 이방나라처럼 권력의 우세로 결정 짓는 것이 옳다고 여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 모음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게는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약한 사람을 구박하기는 참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힘의 우열 위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평범하게 삽니다”는 말은 곧 “나 권력 모으기 위주로 삽니다”가 되고 이는 곧 “나 지금 지옥 가는 중입니다”가 같은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앞에서 다윗의 몰락은 인간들의 본색이 유감없이 나타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리, 곧 왕의 자리란 그렇게 힘이 모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힘이 빠지고 깨어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남으로서 다윗의 혈통적 가문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자리란 인간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긴긴 이스라엘 역사가 이제부터 시작이 됩니다. 왕의 자리란 ‘아들’의 자리입니다. 아들의 자리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이 땅에 성취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윗 계열의 왕들은 이 이스라엘을 두 조각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왕은 이미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인간의 왕 자리를 원했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라도 자신들이 기대하는 축복된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시면서 이로서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망하게 하십니다. 힘과 힘의 투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붕괴되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진정 하나님의 왕 되심은 권력이 보장되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이 빠져버린 자리에는 ‘힘없는 왕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머리되시는 예수님 섬기는 곳이지 결코 인간 목사의 자리를 인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데살로니가후서 2:4의 말씀처럼 악마입니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악마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 자리를 은연 중에 계속 탐을 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중심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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