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4. 13:07

작정하였음이라 (사무엘하 17장 14절)

본문 : 사무엘하 17장 14절
제목 : 작정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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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강-삼하17장14(작정하였음이라)-2sa100704

작정하셨음이더라

2010년 7월 4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7:14

(삼하 17:14, 개역)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정말 완벽하게 다윗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왕께 돌아올 방법을 제시합니다. 압살롬이 그냥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하면 될 터인데 후새를 부르라고 합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아히도벨과 후새 사이에 그 어떤 모순점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작정하심이 개입하면 차이가 발생하면서 자살로 이어지는 비타협적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 차이가 어떤 차이일까요? 역대상 14:10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기 세계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세계 앞에서 자기 세계란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즉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온 것조차 자기 세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일어난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자신을 이해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모조리 오직 ‘자기 세계’ 확립과 확정을 위한 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견해가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하고 맙니다. 이런 모습이 신약 때의 가룟 유다를 닮았습니다.

마태복음 27:3-5절을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게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까? 여기에 아히도벨의 사고방식이 작용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예수님을 팔아 먹었고 그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 괴로워서 자살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세상을 주님의 세계로 건네주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히도벨의 자살도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 못하겠다는 차원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정신과 상관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늘상 짜증내고, 화도 내고, 예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과 이익을 우선시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 계획에 차질을 발생되면 비록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원수 취급할 만반의 준비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든, 세상살이를 하든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날 대신할 정도로 가치 있는 바는 없다는 겁니다. 이 ‘대신 할 수 없음’이 확실한 이상, 내 계획이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내가 살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나 후새에게나 인간의 자기 권력 집중은 이로 인해 그 어떤 ‘대신 하심’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따로 누군가 끼어 드는 것을 의아해 여기게 됩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될 문제를 무엇 때문에 번거럽게 제 3자가 필요한가?”라고 나서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제 3자’의 끼어듬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구나’를 인정하는 바가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작정함과 자기 결정 앞에, 다른 요소가 끼어 들면 당황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외부적 요인이 작용해서 꼭 일이 안되는 쪽으로 진행된다고 칩시다. 과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즐겁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자기가 확정해놓은 자기 결정이 있는 이상, 따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지를 받아놓고서는 전 날에 미리 짐작하기를 ‘이 문제는 안 나올거야’라고 짐작했던 그 문제만이 나왔다면 그 학생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요? 우선 자신이 자기를 믿지 못해서 한탄스럽고, 그런 자아를 유발시킨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즉 “왜 신께서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가?”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응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나님 믿으라고 나는 너를 못믿게 하는거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곧 ‘너를 대신해서 다른 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자신의 신앙심이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큰 권력으로 효능이 작용하는지를 시험하고 측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두고 자신의 신앙심의 질을 결정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대드는 불신적인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하심’의 조치를 미워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이 ‘대신 하심’으로 적용시킵니다. 

인간의 모든 일은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일은 내일이 없고 바로 지금, 인간의 일과 비교하는 그 사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후새의 등장은 다윗언약이 갖고 있는 ‘작정하심’이 인간들의 분주함과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저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이란 절대로 가룟 유다를 못 벗어납니다. 항상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계획 달성을 위해 이용하십니다. 이 이용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해야 합니다. 바로 이 작업의 장애로 등장하는 것이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이란 인간 고유의 장점이라고 간주됩니다. 하지만 실은 그 양심으로 인해 가룟 유다가 자살이라는 행동을 낳았다고 생각해보세요.

후새가 아히도벨과의 차이나는 점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자리로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앞에서 우리의 것을 철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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