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6. 10:03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1장 46-56절)

마리아의 찬양

2009년 12월 6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46-56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6, 개역)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찬양이란 ‘내가 하지 않았음’에서 오는 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적도 없는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상으로 작업을 걸어오셔서 일방적으로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졸지에 ‘비천한 종’이 되는 겁니다.

이 ‘비천한 종’이 결코 슬픈 일이 아니라 도리어 감격스러워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예를 들면, 수해가 나서 안방 잠자리까지 물이 차 오르면 기가 막히지요. 안방 아랫목은 아무에게도 개방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까지 만약에 하나님께서 작업을 해오신다면 우리로서는 할 말을 잃습니다. 그냥 ‘비천한 종’입니다라는 고백만 할 뿐입니다.

사람이 살아남고 오래 사는 것이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본인들의 자리가 이미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자리로 바뀌어서 본인들이 그 위에는 날마다 ‘비천한 종’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귀합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자꾸 붙잡아서 부려먹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인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와서 흔적만 남깁니다. 그 흔적이 갈라디아서 6:17에 나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남겨놓고 떠나지만 항상 다시 성도에게도 오시는 이유는 자신이 남긴 그 십자가 흔적 때문입니다. 그곳을 관리하기 위해 늘 되돌아오십니다. 그 십자가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것인 마리아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십자가 흔적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의 찬양 내용이 상당히 살벌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노동 현장에서 혁망의 투사들이나 외칠 민중 가사의 내용 같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아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해당될 뿐입니다.

에베소서 3:9-11에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령한 일, 곧 성령님에게 속한 일은, 인간들의 요구사항이나 한풀이를 들어주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예정된 일의 구체화 작업의 일환으로 성도에게 덮쳐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는데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자에게로 들어가서 여자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성인이 되어서 출몰하시지 않고 갓난 아기로 오셔야 하는 겁니다. 혹은 왜 아담처럼 흙으로부터 만들어 내시지 않을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4:4-6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성령이 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못 알아들음’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못 알아듣는 말씀’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서 하나님이 친히 주신 영을 받은 자들만 따로 불려나오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즉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쉿!”라고 여전히 비밀로 두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엡 3:5)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실시하시는 그 예정된 비밀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마리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아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49절에 보면,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모양으로 새로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남자를 피하여 ‘여자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뱀의 머리를 치는 주체자는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성령께서는 여자 만들기에 나섭니다. 여자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가 규정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들어 있는 자는 모조리다 ‘여자’가 됩니다. 즉 예수님이 찾아들지 아니하면 남자와 더불어 사는 여인은 있을지언정 남자없이 여자만 있는 여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의 특징은 악마의 관점에서 대립적인 입장에 놓인 자로 취급받게 됩니다. 뱀과 여자는 서로 원수지간이 되도록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배치를 그렇게 해두신 겁니다. 성도는 그 노선 속으로 뛰어들게 된 팔자를 지닌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한 예로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에게는 자신을 괴롭혀주는 적이 있었습니다. 브닌나라는 첩이 있었습니다. 이 브닌나라는 여인은 자식이 있었지만 반대로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이러한 상황구조를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서, 즉 창세전부터 예정된 숨어있는 비밀과 연관되어 있음을 나중에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놓고 난 뒤에 알게 됩니다. 그 찬양이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찬양입니다. 거기에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의 용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나의 원수’라는 용어요 다른 하나는 ‘구원’이라는 용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에 관여된 모든 자, 곧 ‘여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원수에 해당되는 요소와 ‘구원에 해당되는 경우를 병행해서 쏟아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인하여 발생된 영적 대립쌍으로 강한 세상 힘이 여자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힘으로 극복되는 식으로 구원을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4:5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고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나신 이유는, 이미 ‘여자’가 될 자라도 율법 아래서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 속으로 예수님께서 참여하시므로서 더 이상 율법의 틀과 굴레에 억매이지 않는 자가 될 때에 이들이야말로 창세전 부터의 ‘피로 인한 거룩’의 내막을 아는 유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다음의 성경 말씀과 같이 그 어떤 법적인 것에도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4:8-11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로 나오는 겁니다.

한 방울의 피도 이미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악마의 시험에 놀아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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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1:45-56/마리아의찬양) 
2009-12-07 14:15:02 녹취 : 오용익

20091206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1장 45-56절/마리아의 찬양(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45절에서 5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45-5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 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하나님께 감사해서 찬양을 하는 그 대목입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 노래를 하는 거예요. 보통 성경에 보면 꽉 채워서 쓰는데 이렇게 두 줄 세줄 늦춰서 쓰지요. 이게 노래 가사라는 뜻입니다. 찬양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하느냐 하면 내가 하지 않았는데 뭐가 주어졌을 때 찬양합니다.

내가 안했는데 분명히 내가 한 게 아닌데 그런데 뭔가 일이 주어졌을 때 그 때 고맙고 감사해서 찬양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죄 씻음입니다. 내가 죄 씻으려고 용을 안 썼는데 ‘너, 죄 없어.’ 라고 했을 때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주어졌을 때 ‘고맙습니다’ 하는 그것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제물도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맛난 음식도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찬양이다.’ 이래 했어요. 하나님께서 찬양과 감사를 원한다 했으니까, 이것은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동반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동반하려면 우리 것을 하나님께서 넘겨주면서 ‘이것 하나님 하세요.’라고 이렇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헌신하고 바치지 않더라도 우리 몸 가지고 이미 하나님께서 무슨 작업을 벌렸어요.

작업을 벌이니까 오늘 본문 48절의 말씀처럼 마리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쉽게 말합니다. ‘이 비천한 여종에게 주께서 친히 능하신 작업을 하셨군요. 제가 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셨습니까?’ 라고 너무 고마워서 찬양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이런 고마움과 찬양을 하게 될 때에 마리아에게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야’ 라고 따로 자기 것을 갖고자 하는 생각은 없어요.

그런 생각은 가지가 행한 것 가지고 살아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했듯이 하나님의 찬양과 감사는 자기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작업을 거셨고 그 일이 이루어졌으니까, 이것은 누가 압력 줘서 협박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대번에 하는 소리가 ‘이 비천한 종, 나같이 부족한 종’이라는 말을 하게 된 거예요.

거리에나 교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온 것, 내가 이만큼 살았다 하는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텔레비전 틀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나 이만큼 살아왔다.’는 것을 자랑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세상을 이겨냈다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그래요. ‘그래. 잘 살았다. 그렇게 해서 평생 동안 충성해서 제 한 몸과 자기식구만 건사해서 잘 살았다. 그래. 좋겠다, 너는!’ 그래 되는 거예요.

그것은 감사와 찬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 본문의 48절의 말씀처럼 ‘비천한 종’이라는 말을 성공한 사람한테는 감히 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여, 비천한 종한테 무슨 이런 큰일을 하셨습니까?’ 이러한 진정한 감사, 순수한 찬양 이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살아온 것을 떠벌이면서 살아갈 거예요.

‘나 살아남았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너만 살아남았나?’ 이렇게 되지요. 그러다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해서 졸지에 자식이 죽는다든지 누군가를 잃으면 그 사람은 대번에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지난 금요일에 울산에 공부하러 가면서 황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추도식에 갔는데 어떤 목사가 50대에 죽은 사람의 유족에게 막 위로의 말을 한 거예요. ‘용기를 내세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전도사님이 거기에 초를 쳤어요. ‘예수님은 서른 세 살 밖에 안 살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추도식 인도하던 목사가 가만 보니 맞거든요. ‘그 말은 맞네.’

33년, 66년, 99년 산 게 아니고 그 평생 가운데서 한번이라도 솔직하게 ‘저 비천한 종입니다.’라는 말을 언제 해 본 적이 있느냐 이 말이지요. 달리 이야기해서 이 나를 비천한 종이라고 까발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이 엄청난 천국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죽어서 편안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곳까지 데려다 인도해주시니, 이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작업을 걸었던 것이니까 어찌 제가 찬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그런 고백.

그 고백이 참 귀합니다. 제가 지금 본론을 안 들어가는 이유가 늦게 오시는 분이 있어서 계속 본론을 미루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이게 우리 욕심인데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24시간 ‘나는 비천한 종입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해보고 싶지만 이상하게 그게 안돼요. 교회 말씀 들을 때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점심시간에 자장면 먹을 때는 다 잊어버리고 그만 온 몸이 발산을 해요.

‘나 살아남았다. 나 대단하잖아. 좀 대단하다고 이야기 좀 해줘. 나 살아남았어. 나 괜찮은 존재야.’ 이걸 막 발산하고 말하고 싶어서 들썩 들썩 거려요. ‘우리 애 이번에 서울대학 들’어갔다.’ 이걸 말하고 싶어서 입이 막 근질근질해서 어쩔 줄을 몰라요. 갑자기 ‘비천한 종’이 공중 한 2킬로쯤 날려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감사와 찬양도 없어요. 그 다음부터는 짜증과 짜증의 연속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늘 사라진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늘 사라져요. 우리는 늘 하나님을 붙잡아서 주머니에 넣어두고 뭐든지 필요할 때 써먹고 싶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악 당하지를 않고 자꾸 떠나버려요. 성경보고 말씀 통해서 십자가 들을 때는 가슴 아프다가도 갑자기 누구 전화 한통 받고 나면 다 떠나버려요.

그런데 감사할 것은 하나님은 늘 사라지고 우리 손에 늘 포착이 안 되지만 흔적은 남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 흔적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남기신 흔적이 있는 이상은 하나님은 흔적보고 늘 그 자리에 되돌아오십니다.

그 흔적이 뭐냐? 십자가라는 겁니다. 우리 교인들은 수준이 높으니까 어렵게 해 볼까요? 그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 합니다. 더 어렵게 하면 ‘언약의 완성’, 더 어렵게 해 볼까요? ‘나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로 교체됨’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여름철에 수해 나면 계속 근처나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넘치면 위험하잖아요. 그런 장면을 뉴스에서 카메라가 죽 찍은 것을 보니까 안방 TV 놓인 자리, 이불 올려놓은 자리까지 물이 차 있어요. 기가 차지 않겠습니까? 물이 차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어젯밤처럼 이불 펴서 잠자리를 하겠습니까? 수영장도 아닌데 이불이 둥둥 뜨지요. 물 퍼내야지요, 또 말려야지요.

하나님께서 이 마리아같이 작업을 실시하고 하나님의 흔적을 남긴 사람은 이렇게 스멀스멀 물이 기어 들어옵니다. 이게 원래 내 행함의 내 자리인데 어느새 스멀스멀 기어들어온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찾아오고 다녀간 흔적이 내 자리, 내 아랫목을 점령하고 말아요. 그리 되면 그 다음부터 내가 사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고 비천한 종에게 은헤를 주시는 은혜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수해 난 것이면 찝찝해서 못삽니다. 다 말라야 되지만 이 은혜의 자리란 우리의 자리에 용서가 들어오는 자리이고 불쌍히 여겨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여기는 어디에 누워도 그 자리는 주님의 불쌍히 여김이 대기하고 있는 자리, 하나님의 용서가 대기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뀌는 거예요.

이것이 안 바뀌면 교회 올 때만 하나님과 잠시 관계하다가 집에 가면 ‘예수님,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 집은 내가 돈 벌어서 산 집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스멀스멀 하나님의 작업이 마치 땅거미 들어오는 것처럼 저녁노을의 햇살이 길게 죽 뻗어서 우리 안방까지 들어오는 것처럼, 내가 가장 귀히 여기는 아랫목까지, 침대 놓은 자리까지 만약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교회 있으나 집에 있으나 ‘주여, 오늘도 비천한 종을 왜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지 ….’ 찬양이 절로 나오지요.

‘비천한 종’이라는 이 용어 뒤에 나오는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가사가 마치 어떤 사람의 찬양을 그대로 베낀 것 같아요. 그게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누구 엄마냐 하면 사무엘 엄마입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지요. 그 한나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 사무엘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난 뒤에 너무 너무 감사해서 찬양하는 그 대목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한 것처럼 되었는데 마리아가 베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찬양이 되는 겁니다.

그 찬양내용이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내용이 꼭 운동권 같아요. 봅시다. 51절,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그 다음에 52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절,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것은 완전히 민중 운동하는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밤빠밤빠밤빠밤~빠♬” 국가권력에 대항하고 권가권력을 전복시키려는 노동운동현장의 가사처럼 들린다 이 말이지요. 그 연약하고 비천한 처녀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비정한 노래가 나오게 되는가? 이래 생각하셔야 돼요. 마리아가 찬양할 때 ‘저는 비천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라는 사적인 내용이 담김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마리아의 몸을 가지고 그 평생을 하나님이 원래 하고 싶어 했던 뜻을 마리아에게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서 이 땅에 펼치시는 거예요.

전부터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그 뜻을 마리아를 통해서 펼치시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운동권 투사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할 계획을 하나님이 작업을 거는 사람과 더불어서 다른 사람에게 펼치시고 전달하는 겁니다. 그 여린 처녀의 입에서 이런 비정한 내용이 어떻게 이렇게 나왔느냐?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부터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자식을 주려면 아예 직접 바구니에 하늘에서 두 살 난 애를 담아주시든지, 아니면 창세기처럼 흙으로 빚어서 아들 되게 하시든지 혹은 피노키오처럼 나무로 깎아서 아들 되게 하시든지, 이러면 될 터인데. 하나님께서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시면서 슈퍼맨처럼 오신다든지 혹은 터미네이터처럼 벌거벗고 시간이동 하듯이 오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다면 어른이 되어서 ‘나 메시아다. 날 믿어라. 날 믿으면 구원받는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가자, 천국으로.’ 이러면 간단하잖아요. 그냥 어른으로 오시든지, 아니면 애기로 바구니에 담겨서 오시든지, 단군신화처럼 오시든지 이러면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왜 여자에게서 태어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느냐?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지요? 김장하기 바쁜데 그런 생각 하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비천한 여자 안에서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속량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속량(贖良)’이라는 것은 ‘죄를 씻어준다.’ 그 말이거든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속량하기 위해서’ 이게 얼른 감이 안 오지요?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것 하고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법에서부터 얽매이지 않는 상태하고 이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어려워요.

제가 지금 설교하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이유, 그리고 여러분도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교회 오기 전부터 우리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수정을 해야 되거든요. 성경으로 수정하려면 우리의 바닥부터 뜯어내야 돼요. 일군 불러서 우리의 자리,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바닥부터 뜯어내야 된다고요.

바닥부터 뜯어내야 하는데 그 뜯겨진 바닥이 뭐냐 하면 법대로 사는 거예요.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도덕이 죄를 낳습니다. 왜 도덕이라는 게, 윤리가 죄를 더욱더 증가시키느냐 하면 이 바닥이 계속해서 율법을 전파하게 돼요. ‘이대로 살아야 착하다.’는 것을 전파하는 거예요.

제가 십자가마을 글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유혹을 이기려면 유혹에 굴복해라.’ 유혹을 피해서 도망가 봐야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삼키려고 유혹한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를 삼키고 있는 율법, 우리의 선악적인 구조, 법적인 구조, 도덕, 그게 있으니까 계속 유혹이 따라 오는 겁니다.

제 온 몸에다 꿀을 발라 봅시다. 꿀 바르고 벌이 있는 곳에 가 보세요. 그러면 저는 도망가잖아요. 그런데 벌이 이 근호 언제 봤다고 따라 옵니까? 이 근호 보려고 따라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 뭐가 발려 있습니까? 설탕이 발려져 있으니까 그걸 보고 벌이 오는 거예요. 인간에게 유혹이라는 것은 우리를 삼키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법대로 깨끗하고 법대로 정당하고 나는 법대로 훌륭하고 법대로 하자 없고 나는 법대로 바르게 살았다.’ 하는 이 ‘법대로 해보자. 나는 천당 가는지 지옥 가는지 법대로 해보자.’ 불교처럼 ‘부모 공경하면 극락 간다는 것’ 이게 다 법 아닙니까, 이 법대로 해보자는 이 법을 갖고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마귀가 유혹이 사탄이 악마가 계속 쫒아옵니다.

‘그래. 너 법대로 잘한다면서? 그래 얼마나 훌륭한가 한 번 보자.’ 계속 따라와요. 그러니까 우리는 유혹을 막 피한다고. ‘사탄아 물러가라. 난 지난달에 담배 두 갑 피웠지만 지금은 한 갑밖에 안 피운다. 사탄아 물러가라. 전에는 진로 세병 깠는데 이제는 내가 인간되겠다고 한 병 밖에 안 먹는다. 사탄아 물러가라. 어디서 두 병을 권하느냐?’

보통 그렇게들 하지요. ‘나는 하루에 커피 석잔 이상 안 마셔야지.’ ‘커피 드세요.’ ‘오늘 석잔 다 먹었습니다.’ ‘그래도 커피 드세요.’ ‘당신은 날 넘어지게 하는군요. 당신은 날 유혹하는 거야.’ 여러분, 커피 석잔 마시나 넉 잔이나 마시나 다섯 잔 마시나…, 그렇게 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그렇게 그 유혹을 이겨봐야 사람이 평생 살아온 것은 자기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백 살을 버텨봐야 그게 자랑거리 못돼요. 바닥시공을 새로 합시다. 인테리어 새로 합시다. 우리가 전에 이런 바닥, ‘하나님이여, 그동안 교회 온다고 유혹이 많았습니다만 제가 이겨냈습니다.’ 하게 되면 마귀가 바보입니까?

마귀가 주는 유혹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혹을 준 적이 없습니다. 마귀가 주는 유혹을 이겼다 하면 그 사람은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유혹에 굴복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쌓아놓은 우리의 의와 거룩함, 소위 비천한 것이 안 되려고 시도하는 괜찮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도, 여러분이 설사 해 봤지요, 쫙 빠져 나갔습니다.

그 유혹,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통해서 주신 거예요. ‘네가 평소에 갖고 있던 모든 것 쫙 빠지라.’고. 왜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속에 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속에 옴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속에는 하나님이 다녀갔다는 흔적이 있는데 그 흔적이 뭐냐, 십자가고 그 십자가라 하는 것은 ‘모든 율법이 주는 유혹과 정죄로부터 이겼느니라.’라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고 성도는 그때부터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어요. ‘나는 유혹이라는 유혹은 오면 다 다 넘어가는 놈이다. 하루 커피 석잔 이상 안 먹는다고? 줘 봐라. 또 먹지. 나는 유혹이라는 유혹은 다 넘어가는데 그런데 무시하지 마라. 내 속에 예수님의 흔적인 십자가가 있느니라. 그 십자가가 모든 율법에서 속량하느니라.’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속량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다.’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다는 말이 엄두가 안날 정도로 너무 어려운 말이에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은 그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누구 아들이었나? 에베소서 3장 5절에 보니까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 하늘의 비밀을 너희에게 알려준 것은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알게 하지 아니했다.’ 이 말입니다. 하늘의 비밀, 쉽게 말해서 한글자로 쉿! 쉿! ‘내가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비밀, 이 자유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쉿, 안 알려주고 오직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세상살이가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요. 어떻게 힘듭니까, 죽 조사를 해보면 그 힘든 이유가 뭐냐 하면 비천한 종이 안 되려고 힘들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비천한 종이 되어도 괜찮은데 하늘나라에서도 비천한 종이 되라고 하는데 우리는 억지를 부려서 비천한 종이 안 되려고 하니까, 원래 비천한 종이고 현실적으로 우리는 비천한 종인데,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인데 쓰레기가 쓰레기 안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니까 누가 힘드냐 하면 본인이 힘들어요.

목사가 되어가지고 ‘저 쓰레기거든요.’ 이러면 참 편한데 ‘저 훌륭한 목사거든요.’ 이러면 아, 진짜 그 인간은 쓰레기에요. 정말 이런 인간은 아무 쓸모 짝이 없어요. 그 사람은 90년 살아도 소용없어요. 마리아에게 비천한 종이 되게 하신 것은 마리아 본인이 ‘비천하다. 아 슬프다’ 이게 아니고 마리아가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출 것 같이 ‘주여, 비천한 종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인간에게 작업을 걸었습니까? 너무 좋습니다.’ 이래 되는데 이게 싫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목사님, 묻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됩니까?’ 그런 질문하면 참 감사해요. 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너무 너무 감사하지요. 사람의 아들하고 하나님의 아들하고 다릅니다. 다른데 사람의 아들은 어디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벗어나는 것을 성경에서 구원이라 하는데 구원된 적이 없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하기 위해서 사람으로서는 안 됩니다. 안되고 하나님이 마리아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 대목을 다시 읽어 드릴게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진짜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여자 속에 들어온 것은 이미 마리아라는 여자가 어디에 묶여 있느냐 하면 율법에 묶여 있었어요. 율법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도덕적이고 아무리 완벽해도 또 모자라고 또 후회되고 또 반성될 일이 생기고….

사회가 그렇잖아요. 나 하나 살려면 여러 명 엎어져야 돼요. 남을 밀어야 내가 숨이라도 쉬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남 밀 때 양심의 가책 안 느끼겠어요? 다 느끼죠. 몰라서 그렇지요. 애들은 몰라요. 애들은 세상 보는 범위가 좁아서 자기 딴에는 잘했다고 보지요. 세상의 모든 것이 좁은 범위 내에서는 잘했다는 그 일이 넓은 범위로 들어가면 이게 거짓이 되고 오류가 수두룩해요.

9급 공무원도 자기 딴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아무 오류 없지요. 나중에 5급, 3급, 1급 해 보세요. 그 전에 오류 없다고 여긴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다 자기가 살아남고자 해서 한 짓이라는 것이 위에서 보면 다 보입니다. 그런데 9급 공무원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기 때문에 모르지요. 자기는 월급만 받았으니까 착한 줄로 알고 있지요.

세상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완벽하고 싶어도 점점 더 계속해서 어떤 일을 만나고 범위를 넓혀 가면 인간에게는 완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대표자가 마리아, 여자가 되는 거예요. 여자의 몸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한테는 안들어옵니까?’하는데 예, 남자한테는 안 들어와요.

남자한테는 하나님이 안 찾아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남자는 한명도 없겠네요. 구원받은 남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그럼 베드로는 여자겠네요? 엘리야는 여자겠네요? 모세도 여자입니까?’ 이 땅에서는 남자지요. ‘그런데 구원받은 남자는 없다면서요?’ 남자가 여자로 바뀝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요. 뱀의 머리를 치는 것은 여자가 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이 쳐버려요. 여자의 후손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은 한명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자가 여자의 후손을 낳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되시는 그 분이 여자를 만들어요.

여자의 후손되시는 분이 찾아오면 여자의 후손 계열이라는 뜻에서, 그 노선이라는 뜻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찾아온, 여자의 후손이 찾아온 여자, 예수님의 신부, 처녀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가지고 정결한 처녀라고 했습니다. 정결한 처녀라는 말은 ‘네 인생을 책임질 남자는 이 세상에 주님밖에 없다.’ 그런 뜻이에요.

그걸 정결한 처녀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썼던 이 용어들, 이거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안 나옵니다. 이 용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찬양을 통해서 그 몸을 집어 넣은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일반 용어들이 아니에요.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감추어진 비밀을 색 다른 용어를 써 가면서 성경에 담아놓는 거예요.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에요. 윤리 책이 아니에요. 신령한 책이에요. 신령한 책인데 어떻게 신령한 책을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작업에 들어오면 하나님만 달랑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업무, 숙제가 엄청나게 많아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내 맡기면 돼요. 맡기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는 겁니다.

차량 검사 얼마 전에 했는데 차량검사 해 보세요. 차타고 있으면 밖에서 검사 다 해줍니다. 돈이 좀 비싸기는 한데 차타고 있으면 알아서 다 해 줘요. 자동세차기에 들어가면 자기가 내려서 본네트 닦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요. 죽 들어가면 뒤에서 미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나와 보면 세차 다 됩니다.

그 작업이 뭐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 오셔서 율법으로 우리를 죄 있다고 저주하는 모든 저주의 그 틀, 그 구조, 우리의 양심을 건드리는, ‘아, 이것은 내가 죄졌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그 모든 장치를 다 벗겨내는 거예요. 다 뜯어내 버려요. 무슨 짓을 해도 의인되도록. 무슨 짓을 해도 천국 가도록 다 뜯어 내 버린다고요.

그게 바로 ‘모든 율법에서부터 너를 속량’하는 거예요. 율법이 아니고 십자가에 해당되는 사람, 용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이 여자의 후손에 해당되는 사람만 되는 거예요. 그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친다 했습니다. 뱀의 머리를 치는데 그 뱀이 처음에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으면 너는 신처럼 된다.’ 했거든요.

‘선악과 따먹으면 신처럼 된다.’ 했으니까 그때부터 아담은 선악과 따먹어서 그게 우리의 자리가 되었고, 그 법으로 차 있는 우리 자리,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은 존재다.’라고 버티는 자리, ‘비천한 종이 아니고 괜찮은 존재다.’라고 여기는 그 교만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마리아의 찬양에 나오는 ‘권세 있는 자, 힘 있는 자, 부자, 가난한자’의 의미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적 의미가 아니고, 돈 많고 적고의 의미가 아니고, 법적으로 자체적으로 ‘내가 율법을 지켜서 내 힘으로 내 도덕적인 의지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그 교만을 한 판 엎어 치시는 일을 하시고자, 주여, 내 몸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셨군요.’ 라고 찬양하는 겁니다.

한나라는 사람이 그 전에 이런 비슷한 찬양을 했습니다. 한나라는 사람이 사무엘을 낳을 때 그냥 낳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통 자식 낳으면 ‘엄마, 나는 어떻게 해서 생겼는데?’ 라고 묻게 되면 ‘그것은 다 크면 알게 된다.’ 하고 그냥 넘어가잖아요. 출생의 비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한나라는 여자는 마리아를 낳을 때 출생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브닌나라는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자꾸 약을 올려요. ‘본처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될 것인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거지요. 나 보세요. 이렇게 복을 받으니까 아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으스대고 자랑을 했어요.

그것 때문에 한이 맺혀서 이 한나라는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 달라고.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들 사무엘을 낳게 했고 그걸 바쳐놓고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2장에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며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기에 두 개의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는 ‘주의 구원’이 나오고 또 하나는 ‘내 원수’가 나와요. 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그 절차에 보면 반드시 우리의 원수가 있다는 것이고, 그 원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있는 비밀에 의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원수지간의 그 구조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말려든 상태에요.

그게 성령이 오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전체가 다 눈에 보이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버렸으니까 ‘아, 내 몸이라는 것은 내 몸 하나 밥 먹고 살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작은 몸 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어서 한쪽에서는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쓰고 한쪽은 천국으로 끌고 가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서로 대립되는 두 세력과 두 주체가 내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전쟁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 원래는 나는 마귀의 자식이었고 비천한 종이고 나는 율법에 속해서 예수님도 모르고 사랑도 십자가도 모르고 그저 ‘나는 잘났다, 잘났다, 법대로 해라. 나는 형무소 간 적 없다.’ 하면서 평생토록 하자 없고 죄 없다.”고 버텼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거룩한 하나님이 내 안에 찾아오고 난 뒤에, 십자가라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피 흘린 피의 흔적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니까, 내가 그렇게 아둔하고 무지하고 너무나 어리석게 주님의 구원을 모르고 하나님의 원수 편에 서가지고 내 잘난 맛에 천당 가려고 교회 와서 충성 봉사 다하고… , 우리 교회는 전혀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는 충성 봉사 한 적 없습니다, … 가장 충성 봉사 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그러면 자식 잘되고 내 사업 잘되는 줄 알고 열심히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고 전도 많이 하고 전도 상 받고 바자회 하고 구제하고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고 아들 목사 만들기로 서원했다고 자기아들 신학교 보내고 그래서 목사가 되어가지고…, 어이구 쓰레기~! JM, 절망! 어두워! 그 쓰레기가 목사라고.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사회유지가 되어서 신문에도 나고 불려 다니고 어떤데서 회의하면 상좌에 앉고, 비천한 마리아보다 더 못해요.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흔적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장악하려 하지 마세요. 주께서는 잉크 한 방울처럼 똑 하고 피 한 방울…, 여러분, 피가 두 방울 있어야 구원받습니까, 세 방울 있어야 구원받습니까? 리트머스 시험지에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피 한 방울만 있어도 그 피는 “이미 네 안에서 네 속에서 내가 작업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속에 삼차대전 벌어졌다. 마귀는 너를 다시 옛날처럼 법적으로 ‘나는 유혹을 이겼다. 사탄을 이겼다.’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십자가 때문에 용서 받아서 의인되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구나.” 여러분은 그 십자가의 피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모르고 내가 지어낸 내가 상상한 하나님이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유를 모르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십자가 피만 남기고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 안에서 작업하시는 그 주님의 작업을 우리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