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9. 10:33

마리아와 엘리사벳 (누가복음 1장 39-45절)

마리아와 엘리사벳

2009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39-45

(눅 1:39, 개역)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40, 개역)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개역)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2,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3, 개역)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 1:44, 개역)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5, 개역)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가족이 아닌 분이 가족으로 가담되었습니다. 마리아나 엘리사벳에 의하면 그들은 그 분을 가족으로 입양하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족이란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가족 만들기를 위하여 인간의 움직임 없이 하늘나라 쪽에서 움직여서 우리 내부에 일방적으로 들어와 버리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5:6에 보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이 없다든지, 아니면 “애들아, 지옥이란 아예 없거든.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나온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불순종의 아들’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고 지옥을 언급한다면 참으로 사람에게 중대한 문제는 이 진노를 피하는 일입니다. 진노를 피하는 경우는 순종하면 될터인데 문제는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러받은 이 몸은 결코 순종을 해내는 몸이 아니라 도리어 불순종 경향을 띠게 되는 그런 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나 안 들어서 순종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가 불순종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철회되든지 아니면 우리가 고분고분 지옥가든지 해야 할 형편입니다. 즉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못할 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고 저주가 해당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보면,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을 받은 여자가 있다는 겁니다. 복 받을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믿는 여자’인데 이 여자들의 특징은 그 몸 전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덮쳐지는 몸이라는 용도로 쓰여진다는 겁니다.

저 더럽고 천하고 쓰레기 같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이 그 허접스러운 몸을 사용하게 되면 복이 되는 특별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현상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관계가 오늘 본문에서 성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임산부의 배 안에 들어있는 두 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두 분으로 인하여 네 분 모두가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하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이런 가족이 있음을 우리가 용납합시다.

두 분이란 곧 예수님과 세례요한입니다. 이 두 분 사이의 관계는 성령님이 만들어주신 관계라서 새로운 가족 형성의 힘이 됩니다. 기존의 가족이란 인간들 육체들의 동침에서 발생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육적인 가족들은 아무리 많이 생산되고 모였다고 해도 육에서 영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양이 많아진다고 질적으로 변이가 일어나는 법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 일어난 그 관계가 주어져야 질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란 곧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목격하고 그것의 증인 노릇으로 가담된 분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따라서 주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 아니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 동일한 관계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 마리와와 엘리사벳으로 이어지는 절차란 곧 육적인 인간이 어떻게 영적 인간으로 변모되어 가는지 그 과정를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사적으로 자신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는 처지가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아무리 수많은 군종 속에 들어앉아있더라도 여전히 자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자신의 처지가 외로울 때나 생각나지 결코 가족 위주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순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위주 인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일리아스’라는 옛날 그리스의 시에 보면 ‘황금사자’ 이야기에 나옵니다. 아테네 올림푸스 산에 신들이 모여 파티를 벌리고 있는 불화를 조장하는 ‘엘리스’라는 여신이 그 파티장에 황금사자를 내놓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이 사과를 주노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라는 세 여신이 그 사과를 두고서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헤라는 정치적 야심을 아름다움으로,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를 아름다움으로, 아프로디테, 곧 비너스는 외부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의 전부로 보는 겁니다. 트로이 나라의 왕자인 파리스가 이 황금사자를 아프로디테에게 건넵니다.

서로가 자신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져노라고 우기고 나서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에게는 외부의 그 어떤 요소로 거부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 대신 이들은 유사 성령, 유사 복음, 유사 메시아, 유사 구원, 유사 천국을 상상하며 살아갑니다. 위선자이지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선조 임금은 피난가면서 어느날 ‘묵’이라는 이름의 고기를 맛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맛이 너무 기막혔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은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습니다.
나중에 전란이 끝나고 그 묵이라는 고기 맛이 그리워서 은어를 요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맛을 본 선조 임금은 실망했습니다. 그 때 그 맛이 나지를 않는 겁니다. 따라서 이름을 도로 묵이라고 해서 그 고기 이름이 ‘도루묵’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인간의 육적인 행함으로 신의 계시를 자연 속의 일부로 장착하려는 시도가 ‘주술’이요 ‘주문 외우기’입니다. 반복되는 신의 효과를 얻어내겠다는 수작입니다.

그 자연화된 계시와 자신을 일체화시켜 신으로부터 항상 얻어내어 ‘내 것’으로 삼겠다는 것으로서 곧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작업입니다. 바로 이 작업에 대해서 참된 성령은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죄라고 지적하고 예수님의 소유로 돌려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안에서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시선을 둘 수가 없이 부활의 능력 안에서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현실성을 같은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빌립보서 2:5-8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예수님과 가족이 된 사람은 십자가 마음이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마음이란 곧 ‘맏아들 잃어버림’에서 오늘 아픈 마음을 뜻합니다. 유월절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들 빼고 모든 애굽의 가정에서 맏아들이 죽어가는 통곡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죽이는데서 발생되는 아픔입니다.

즉 십자가란, 그냥 문자 나열이 아니라 실제적인 아픔이요 현실적인 하나님 아들이 나 때문에 저주받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아픔을 간직하는 이가 곧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가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인 것을 알고 그 안에 자리잡은 십자가 아픔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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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9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1:39-45/마리아와엘리사벳)
 
2009-11-30 11:34:48 녹취 : 오용익
 
 
20091129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1:39-45/마리아와엘리사벳/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39절부터 4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39-45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가족 중에서 사람들의 성관계를 통해서 생겨난 가족, 그런 가족만 우리 주변에서 익히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자식을 낳는데 남녀 간의 동침 없이 자식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인구가 줄고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장에 주문만 하면 됩니다.

키 185, 이목구비 뚜렷할 것, 아이큐 170정도, 그런 뛰어난 아이들을 주문서에 넣어서 한 달 뒤에 나옵니다, 하는 출고 날짜에 맞추어서 생산하면 됩니다. 그런데 애들 어릴 때부터 키우면 귀찮으니까 ‘일곱 살짜리 두 명 필요합니다.’ 라든지 또 공부하는데 과외비 들어가니까 아예 ‘열아홉 살짜리 다섯 명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국가에서 인구감소 때문에 걱정한다든지 보조금 줄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남녀 간에 동침을 해야 아기를 낳으니까 여자들이 동침을 안 하려고 하고 결혼을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애가 생길수가 없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이 좋고 편하다가 결혼을 안 하고, 결혼 하라고 하면 할 남자가 없다고 하고 남자는 또 할 여자가 없다고 하고 이래 되어서 지금 인구수가 줄어드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을 육적인 가족이라 하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육적인 가족이 천국을 못 간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에요. 애들 유아세례 받게 해서 가족이 다 교회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 교회 나와도 제자리 뛰기고 교회 나와도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왜 교회 나와도 천국을 못 가느냐 하면 그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인간 하나 하나가 육적인 가족이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나 성당가나 절에 가나 지옥가기는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속이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적으로 태어난, 육의 남녀의 동침으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듣기만 들어도 순종 안하기로 작심을 한 사람들만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종 안하는 것도 내 자유입니다. 교회 가고 안 가는 것도 내 자유인데 누가 관여하는데? 나도 성인인데 간섭하지 마소.’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문제는 자유를 간섭한다든지 빼앗는다든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너희는 그들과 함께 참예하지 말라.’ 이래 되어 있어요.

불벼락 맞는다는 겁니다. 같이 지옥 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는 이 철칙, 이 원리원칙을 하나님 쪽에서 취소하면 우리는 ‘네 마음대로 사세요.’ 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진노가 철수되어서 아예 없대. 지옥 자체가 없대.’라고 이렇게 하나님 쪽에서 나오신다면 우리는 하던 행세대로 그냥 사시면 됩니다.

자기 편한대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눕고 싶을 때 눕고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자기 맘대로 돼요. 순종이라든지 불순종이라는 개념 자체를 우리 머리에서 지워버리면 되는 겁니다. ‘뭘 순종하는데? 나도 성인인데 누구한테 순종하는데? 나는 명령자야. 순종자가 아니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이런 식으로 그냥 사시면 돼요.

하나님의 진노나 지옥이 없으면 괜찮아요. 모든 것이 오케이고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떨어진다.’고 한다면 그 때부터 우리에게 무엇이 의식되느냐 하면, ‘그러면 우리는 순종을 해야 되겠네.’라는 의식이 유도되게 되지요.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 만약에 순종 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순종 자체가 안돼요. 하나님의 지옥 불에 가기는 싫은데 우리 몸 가지고는 순종이 안 된다니까요.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 이 육체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 족족 순종보다도 순종 안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순종 안하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청개구리 같아요. 청개구리가 사는 재미가 말씀 어기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거든요. 오늘날 교인들의 특징 같아요. 오늘날 교인들의 특징이 말씀을 들어도 순종 안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은 아예 그 말씀을 안 듣는 재미로 살아가고, 똑 같아요. 경상도 말로 ‘캐라.’ 세상 사람들은 ‘니 캐라. 나는 내 맘대로 산다.’

이게 세상 사람이라면 교인들은 이야기하기만 하면 반대로 나가는 그 재미, 골라먹는 재미,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골라먹는 재미가 있지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순종해 보지요.’ 하는데 순종해 보면 육은 순종하는 것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순종할 수 있으면 순종하지요. 왜 지옥 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남녀의 동침으로부터 받은 이 육의 몸은 생각은 뻔한데, 순종이 뻔한데 순종 한 발자국도 안 되게 잡아당기는 강력한 힘이 작용합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아주 강력한 악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그런 구절이 나와요. 마음은 뻔한데 생각은 뻔한데…, 아침에 교회 가야 되는 것은 뻔한데 소파에 누워서 TV보고 싶다는 말이지요.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한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보면, 나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지요. 피조물로서 내가 상식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교양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합니다.’라고 하고 싶지만 내 속에 또 다른 악의 힘이 있어서 그 악의 힘이 나의 선한 힘,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는 선한 힘을 ‘까불지 마.’ 하면서 눌러버리지요.

눌러버리면 이 몸은 선에게 끌려가는 몸이 아니고 악에게 질질 끌려가는 몸으로 평생을 다 지새우고 보내게 됩니다. 그게 우리 개인뿐만 아니고 같이 태어난 형제, 부모, 5대조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우리의 5대손까지, 증손까지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똑 같아요. 본인만 순종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창회 가보세요. 등산 간다고 20명이 모이면 20명 몽땅 순종 안 해요. 500명이 모이면 500명 몽땅 다 순종 안 해요. 서울광장에 데모한다고 모인 인원이 만 명 같으면 그 만 명이 동시에 순종 안합니다. 서울에 십만 명 모이는 교회가 있다면 그 십만 명이 순종 안 해요. 왜?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순종 안 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다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이제부터 지옥이 없답니다. 오늘부로 우리 교인들은 순종 안하기로 합시다.’ 하면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합심해서 ‘아멘!’ 할 겁니다. 기쁨의 복음이에요. ‘아이고, 진즉 그렇게 하지. 진즉에. 하이고, 난 순종하라는 그 소리 듣기 싫어서 교회오기 싫었는데 진즉 알려주지. 왜 그 천기를, 그 비밀을 이제야 누설해 주지? 진즉 알려주지.’

‘아멘’ 할 것을 따로 갖고 있는데 거기에 억지로 ‘순종하세요. 아멘하세요.’ 땡땡, 종쳐 가면서 깨워가면서 하니까 ‘아멘, 에멘!’ 이렇게 억지로 하다가 순종하지 말라고 하니까 속이 다 시원한 식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한 위선자, 그걸 양산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낯선 가족이 있습니다. 분명히 임신이라 하는 것은,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식으로’ 남녀 간의 관계에서 애가 나온다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여기 오늘 본문에 몸은 두 몸인데 갑자기 네 사람 되어 버렸어요. 꼭 산후 조리원 같아요. 엘리사벳이라는 여자, 그 뱃속에 또 한 분이 들어 있고, 마리아라는 처녀 배 안에 아기가 들어 있어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애가 없을 경우를 처녀라 하는데 마리아라는 처녀라 해 놓고 애는 애대로 생겨져 있고 그러면서도 처녀인 것은 분명하고. 뭔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구조가 성립이 되지 않는 다른 가족의 탄생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낯선 가족을 우리는 용납하세요. 성경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네 같은 가족 말고 다른 방식으로 출현된, 등장한 가족이 있음을 우리는 지금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이 가족만 구원받고 이 가족만 천국 간다면 우리네 가족은 천국 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아세례 백번 받아도 아무 소용없어요. 오늘 본문의 이 가족처럼 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하늘나라하고 상관없는 나라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엘리사벳이라는 여자가 낳은 아이는 자신의 육으로 잉태한 아이가 아니고, 비록 남편인 사가랴와 잠자리는 같이 했어도 애가 생기고 안생기고 하는 모든 주도권과 권한은 성령에 의해서 생겨난 아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엘리사벳이라는 여인이 갖고 있는 아이인데 그 아이의 이름도 이미 지어져 있어요. 요한이라고. 하도 요한이 많고 요새 별의별 요한이 다 있으니….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애 이름을 짓고 요한이라는 이름도 짓는데, 제가 아는 사람의 애 이름도 또 요한인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 주술적입니다. 유사 영, 가짜 성령, 분위기 띄우는 용도.

사람의 심리가 이래요. 애를 낳아 놓고 김 저주, 박 지옥, 이러지는 않거든요. 책 이름을 지을 때 ‘천국 가는 방법, 축복받는 비결’ 얼마나 잘 팔립니까? 책 이름 짓는다고 ‘피’ 이게 뭐예요? ‘지옥의 하나님’ 그게 뭡니까? 그거 뭐, 인간 모독 아니에요? 아마 ‘피’라는 책을 들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다 기피할 건데요. 피가 묻는다고.

남녀 간의 동침 없이 임신을 해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그 사람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이리언, 외계인인줄 알아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외계인 취급 못 받으면 천국 못 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천국은 가고 싶고 교회는 만들어 놓고 교회에서 천국은 못가면서도 가는 티는 다 내요.

그걸 사칭한다고 하지요. 애 이름을 요한이니 은혜니 온갖 좋은 이름을 다 지어놓고 티를 내요. 옛날 임진란 때 선조임금이 피난길에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입니다. ‘묵’이라는 고기의 맛을 본 적 있어요. ‘아, 이게 보통 맛이 아니구나. 이런 고기가 다 있었다니.’ 그래서 그 고기 맛이 너무 좋으니 임금 티내느라고 고기의 이름을 하사하네요.

‘이제는 묵이라고 하지 말고 은어라고 불러라.’ 전쟁이 끝났는데 그 묵이라는 고기가 맛이 좋아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은어요리를 다시 해서 진상해라.’ 해서 먹어보니까 그 맛이 안 나네요. “에라, 그 이름을 ‘도루묵’이라고 해라.” 그래서 이름이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은혜 받은 것을 인간의 힘으로 장악해서 그걸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꼬신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성령을 유인한다고 할까요, 쥐 잡을 때 그 쥐가 좋아하는 고기로 유인해서 쥐를 잡듯이 성령께서 일하지 않으면 못 견디도록 내 쪽에서 성스럽고 거룩한 행위, 몸짓, 손짓, 생각,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과 권능을 받아 내려고 어떤 짓을 하게 되는데 그걸 주술, 주문이라 합니다. 무속신앙에서 주술을 하지요.

남묘호렌게교라는 것이 있어요. 이름도 어려워요. 어떤 문장을 외우면 자동적으로 효과 본다는 겁니다. 대순진리회나 동학교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있고 불교에도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천 번만 하면 극락 간다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은 주기도문 천 번만 하면 방언한다는 소리도 합니다.

이게 인간들이 천국은 가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은 되풀이, 반복, 흉내 내기, 모방(미메시스)하는 것만 할 수 있고,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남 모방하는 거니까 남 기도하면 옆에서 모방해서 자기도 은혜 받은 척 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 교회 와서 자기 동네에서는 앞으로 치는데 사람들이 박수를 옆으로 치니까 옆으로 치면 은혜 되는 줄 알고, 또 앞자리에 오면 설교 은혜 받는 줄 아는데 앞자리에 오면 좁니다.

주로 난로 가에 있으면 다 졸게 되어 있고 그래요. 인간들이 교회 와서 하는 행세가 뭐냐 하면 위선자를 만들어요. 구원은 안받아놓고, 안받아놓으니까 자기한테 미안하고 남들에게도 뭣해 보이니까 받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공중기도 하는데 기도하고 난 뒤에 ‘주 예수 이름으로’를 빠뜨려서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고 기도 끝낼 때 뭘 넣기는 넣던데…, 이걸 잊어서 그만 그냥 ‘아멘’ 했는데, 우리교회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거 괜찮아요.

그거 빠뜨렸다고 기도 응답 안 되고 그런 일 없습니다. 하여튼 스스로 자기를 주술화 시키지 마세요. 스스로 자기가 최면 걸지 마세요.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그러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사람을 건질 때 인간이 가능할 수 있는 것 가지고는 절대 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능한 것은 종교라는 거예요. 교회 다니기, 십일조하기, 전도하기, 헌금하기, 설교하기, 강의듣기, 예배참석하기, 찬송 부르기,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내놔 봐라.’ 이걸 요구하는 겁니다. 네가 못했던 것, 아버지 어머니에게 안 받은 것, 네 DNA에 포함이 안 된 것, 네 유전자의 요소에 포함이 안 된 것을 내놔봐라, 내가 준 것을 내놔봐라, 이 말입니다.

엘리사벳 같은 경우에는 있지요. 왜냐하면 자기 안의 아이는 자기 육적인 동침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생겨난 아이거든요. 여기 45절에 보면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보다 더 무시무시한 이야기 같아요.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아직도 뭐가 무시무시한지 감 못 잡겠습니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믿은 여자에게….” 여러분, 여자분들 믿는 여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큰일 났어요. 왜냐하면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여기까지는 기분 좋아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게 문제입니다.

믿는 여자는 복이 있는데 왜 복이 있느냐? 그 믿는 여자가 갖고 있는 그 육체, 키가 155, 몸무게 얼마고, 아담하고 어쩌고, 그 몸체 자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용도로 쓰여 지니까 개인적은 뜻은 이제는 접어놔라, 그 말입니다. 그게 복이 있다 이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은 못가요. 못 가는데 못 간다는 이게 기쁘고 즐거워야 됩니다.

못가니까 아예 우리가 시도 안하면 돼요. 참 쉽죠, 잉! 천국은 못가니까 천국가려는 시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그게 믿는 여자입니다. 그게 남자라면 믿는 남자가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 복입니다. 무엇을 열심히 용을 쓰고 땀을 흘리고 철야를 해야 복을 받아 낸다는 것은 만약 그 용쓰는 것을 끊는 순간 복도 같이 끊어져 버려요.

이것은 불안합니다. 이것은 불행이고 공포입니다. 위험입니다. 악마의 시험든 거예요. 하지마세요. 아무것도.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세요. 보너스로.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믿지 않더라도 믿어지고 하지 않더라도 뭔가 움직이는 것은 저쪽에서 움직여야지 내가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것은 가라에요. 가라! 가라, 또는 구라. 가짜입니다. 위선자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한테 배우는 것이 뭐냐? 자기를 가짜 신자로 위장하는 그 기술을 배워요.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복 있는 여자로부터 멀어지고 믿는 여자가 아니라 믿으려고 애쓰는 행함의 여자가 돼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은 해야 되니까 믿어보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 자기에게 최면 거는 ‘나는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믿어라, 믿는다, 믿어라.’ 이렇게 최면을 매일 같이 걸어야 되는 그런 불쌍한 존재. 주님께서는 우리 몸체 자체를 어떻게 새로운 가족에다가 편입을 시켜 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제가 뭐냐 하면 ‘새로운 가족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원래 부모가 주도되어서 부모가 동침해서 애를 낳을 때 애가 나와서 ‘엄마, 여기 어디야?’ ‘어, 너는 이 씨 집안 가족이야.’ ‘나, 가족이야?’ ‘가족이야.’ ‘아, 가족 되었구나. 주민등록에 올려줘.’ 그러니까 부모가 만들어내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그 가족이 육적인 가족이라면, 지옥 가는 가족이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 가는 가족은 뭐냐?

자식이 부모를 만들어요. 자식이 부모마저 자식이 갖고 있는 가족에 편입시키는 귀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가족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어른들은 그냥 인사만 하는데 배와 배의 만남, 불룩 배와 불룩 배의 만남, 저희끼리 놀아요.

그러면 주도권은 자궁을 갖고 있는 부모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 주도권이냐 하면 배안에 들어 있는 아이들끼리 주도권을 행사해서 어른마저 새로운 나라, 기이한 나라에, 성령이 만들어 내는 부활의 나라에 가입시키고 참여시키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자가 없다.’ 요한복음 3장 6절에 있지요.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는 그 의미가 뭐지요? 이것은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니고데모가 당시 예수님에게 물었던 그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다시 태어난다는 게 뭡니까? 제가 알기로는 제가 모친의 태중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알겠는데 그거는 아니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니고데모는 천국에 가고 싶어서 정말 궁금한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애가 밥을 먹었는지 학원에 다녀왔는지 그게 궁금한 게 아닙니다. 나는 지금 교회 와 있는 시간인데 남편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아침은 제대로 차려 먹었는지,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에요.

오늘 손님이 올 것인데,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고, 오늘 12시에 예식장에 가야 되는데 내가 몇 시에 빠져나가야 되는지 그게 아니고, 정말 인간에게 궁금한 것은 본인이 청개구리처럼 아예 말씀도 안 듣고 절에나 가고 등산이나 다니면서 아예 이 성경을 안보면 그만인데 성경을 펼치니까 하는 말이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자가 없다’는 말을 예수님 쪽에서 먼저 언급을 했기 때문에 그런 질문 같은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다시 한 번 새롭게 새롭게 발생된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 의미는 우리가 몰라요. 우리는 모르고 누가 아느냐 하면 뱃속에 있는 두 아이끼리의 관계를 통해서, 그 관계를 보게 되면 그 내막을 우리는 차후 적으로 알게 됩니다. 뱃속에 한쪽은 예수님이 한쪽은 세례요한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인간의 육의 의도에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의해서, 프로젝트에 의해서 천국을 이루겠다는 뜻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기 때문에 그 두 아이는 인간에 속한 구조가 아니라 다른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두 아이입니다. 그래서 두 아이가 속닥속닥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그 관계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우리도 그 새로운 하늘나라구조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태어나면 됩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거예요. ‘바람같이 임할 것이다. 네 쪽에서 움직이지 마라. 자꾸 네 쪽에서 움직이면….’ 사람이 움직이게 되면 자기 움직임에 대해서 의미를 주게 돼요. ‘나는 기도했다. 무슨 복이 오겠지. 나는 헌금 했으니까 복이 오겠지. 나는 세례 받았으니까 구원되겠지.’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자꾸 의미를 주게 되는데 그것은 다 헛방입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외각에서 외부에서 실시한 것이 쳐들어오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것이 ‘바람같이 온다.’입니다. ‘바람같이 온다.’는 뜻이 뭐냐 하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 아닙니까? 공기는 우리가 소유해 봐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지지요.

바람같이 오는 거예요.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냥 들이닥칠 때 어디까지 들이닥치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궁금해 하고 스스로 위선자 노릇을 하고 천국도 못가면서 가는 척 하고 돌아다니는 이 몸체, 허접한 이 몸, 쓰레기 같은 이 몸, 죽어라고 순종 안하는 이 저주받을 이 몸, 이 몸마저 하나님께서 황공스럽게도, 이 몸을 성령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용도로 이미 접수를 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된 여자에요. 허접하고 썩어가는 이 몸, 입만 떼면 자기이기주의, 입만 떼면 자기 생각밖에 못하고 때려죽여도 하나님생각 안하고 심지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하나님 외칠 때는 한 번 외치고 하나님 싫어하는 것은 두 번 싫어하는 이 정도로 정말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 저주받을 몸까지 주께서는 축복의 장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이미 개시를 했다는 겁니다.

믿는 여자에게는 이미 그 속에서 말씀의 작업에 들어갔어요. 그렇다면 이 말씀의 작업에 들어가려면 어떤 관계,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를 알아야 돼요. 그러면 세례요한은 뭐냐? 1) 세례요한은 훌륭하다. 2) 멋있다. 3) 대단하다. 4) 죄인이다. 몇 번 입니까? 세례요한은 죄인이죠. 세례요한은 성령으로 태어났다 해도 같이 훌륭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우리하고 똑같이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야 되고 지옥가야 될 그런 인간을 엘리사벳이라는 자궁 안에서 태어나게 한 겁니다.

세례요한은 일종의 모든 구약성도들의 대표자가 돼요.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고 아무리 애써도 천국 갈 수 없는 자의 대표자, 세례요한. 그 세례요한이 우리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미 복중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같이 뛰논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 그리고 세례요한과 엘리사벳의 관계, 엘리사벳과 오늘날 우리들의 관계, 이 모든 관계는 육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 영의 인간으로 탈바꿈되어서 천국에 가는가, 그 코스를 그 두 아이의 관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서 설명해주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실력이, 믿음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미 천국에 온 어린아이보다 더 못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보여줬지만 그 세례요한을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것은 세례요한의 능력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작용이 세례요한을 새로운 관계로 엮어 줘서 데려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가족이라 합니다. 가족이란 뜻은 뭐냐? 상호 의지하는 관계를 가족이라 합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버리고 도망치는 관계가 가족이 아니고 가족이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것을 가족이라 합니다. 흔히들 교회를 공동체라고 하는데 공동체란 말은 성경에 안 나오는 용어에요.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고 진짜 교회는 가족입니다. 가족이지 공동체가 아니에요.

사람이 집단 속에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이기주의냐 하면, 옛날 그리스신화에 이런 게 있어요. 올림푸스산에서 신들의 파티가 열렸어요. 술 마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파티를 하는데 거기서 엘리스라는 여신이 이벤트를 벌렸어요. 황금사과를 파티장소에 떨어뜨리면서 ‘이 황금사과를 제일 예쁜 여신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연회장이 질투의 장으로 돌변해 버렸어요. ‘2010년도에 집사임명은 우리교회에서 제일 신앙 좋은 두 사람에게만 제가 임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교회는 질투의 장으로 변해 버립니다. 세 여신이 모델로 나왔어요. 미스 대구, 미스 광주, 미스 서울 세 여신이 등장했는데 미스 대구는 헤라, 미스 광주가 아테나, 미스 서울이 아프로디테(비너스), 이 세 여신이 등장했어요.

이 셋 중에서 미의 왕중왕을 뽑는데 가장 예쁜 여자를 간택하는 것은 파리스라는 트로이의 왕자에게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그 왕자가 셋을 보는데 미스 대구(헤라)는 뭘 주장하느냐 하면 여자가 소위 팜므파탈이라 하지요, 여자가 대가 세요. 정치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미스 광주(아테나)는 사람이 머리가 좋아요. 머리 좋고 재능 있고, 쉽게 말해서 밥 잘하고 공부 잘해요.

머리 좋고 공부 잘한다는 것은 남자가 백수라도 돈 벌어다 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며느리를 볼 어른들 같으면 ‘야, 가 한 달 수입이 오백만원이 넘는단다. 고만 해버려라. 가가 나중에 정치인이 된단다. 나중에 니도 크게 된다.’ 해도 본시 남자는 20대에 원하는 여자이상형은 예쁜 거예요. 30대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예쁜 것 원해요.

40대에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예쁜 것 원해요. 50대에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예쁜 것을 원해요. 60대는? 예쁜 것 원해요. 70대에 원하는 여성상은? 예쁜 것 원해요. 우리 연세 많으신 서 장로님이 80대인데 80대에 장로님이 원하는 여성은? 예쁜 것 원해요. 외부적으로 요리도 못하고 머리에 든 것도 하나도 없는데 그냥 예쁜 것, 8등신 비너스를 선택했습니다. 그 여파로 트로이전쟁이 벌어지죠.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집단속에 군중 속에서, 아무리 어깨동무하면서 위 아 더 월드, 해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철저히 아무리 군중 속에 있어도 독자적으로 자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왜 인간이 구원을 못 받고 왜 지옥으로 가는가? 심지어 아빠 엄마가 동침해서 애가 태어나도 태어난 애가 마귀 같아요.

태어나면서 자기밖에 몰라요. ‘나실 제 괴로움’, 그런 것은 군대 가서 훈련소 때 한번 노래 부르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나실 제 괴로움’이 뭡니까? 예쁜 것 있으면 환장해서 가버리는데. 그래서 선을 보게 해줘도 꼭 예쁜 것 찾아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줄잖아요. 옛날에는 어른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선보는 것은 개인적인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족에 입문하는 겁니다. 이쪽 가족에서 저쪽 가족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옛날식이라면 요새는 가족이 있어도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자기위주의 세계를 또 키우기 때문에 가족개념은 없는 겁니다. 가족이 있어봐야 그때 그때 이용할 수 있는 공동체 개념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원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몰라요. 아기 예수와 아기 세례요한, ‘아기 세례요한’ 처음 듣는 용어 같은데, 아기 예수와 아기 세례요한, 두 아기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뭐냐 하면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새로운 가족을 움직여서 자기자식을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어야 되는가? 제가 새로운 천국가족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교독문에서 읽었던 거예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구원받았다, 또는 니고데모가 했던 ‘어떻게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까?’ 하는 이 모든 것은 예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돼요.

그러면 그 예수의 마음이 뭐냐? 사랑이냐, 온유냐, 화평이냐, 착한 것이냐, 진선미냐?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은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 예수의 마음은 “곧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죽으심’의 그 마음이 들어오면 되는데 ‘십자가에 죽으심’의 그 마음이 뭐냐? 이 말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집의 여러분 아들이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예수의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종족의 아들을 한날 밤에 다 죽인 적이 있습니다.

다 죽여 버렸어요. 그럴 때 애지중지 하던 맏아들의 죽는 아픔을 그들은 목격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와서 세례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자기 아들이 죽으면 자기가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워요.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에 이전했으니까. 그 아들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달리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마음이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고 흩날리는 단어의 연결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픔이죠. 십자가가 뭐냐? ‘우리가 내 자식 버릴 때 찢어지듯이 아파하는 그 아픔, 그 아픈 마음을 품어라.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렸던 그 찢어지는 아픈 마음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들은 그 아픈 마음이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있으면 너희는 복된 여자, 믿는 여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달라진 여자가 되는 거예요.

그 때부터 빌립보서 2장 11절에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내가 나의 주인으로 주도권이 나한테 있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쓰레기 같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아픔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나의 나 된 것은, 살고 죽는 것은 이미 내 선에서 떠나버렸고 자기 아들을 버리기 까지, 주시기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의 힘으로, 아들의 죽으심이 여기 있으니까, 피와 살이 여기 있으니까, 예수님 주신 피와 살을 보고 허접한 우리를 건져내는 그런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런 방식이냐 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외곽에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게 하시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게 하신 그 예수님을 다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했던 그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너 때문에 내 아들 죽었다.’는 것이 엮어지게 해서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는 새로운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가족입니다. 이것이 눈물 흘릴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생각하는 것은 ‘방금 목사님이 한 말이 진짜입니까? 진짜 입니까? 진짜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자꾸 내 쪽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위선자입니다. ‘기도하니까 병이 낫고, 어떻게 하니까 교회가 부흥되고….’ 그것은 자기가 조작해놓고 자기가 부풀려놓은 자기과시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복된 것도 아니고 믿는 여자도 아니고 믿는 남자도 아니에요. 그것은 말씀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증거는 내가 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외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엄연한 사실과 사흘 만에 부활해서 무덤이 빈 무덤 되었다는 그 사실이 이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안의 십자가, 내안의 부활이 될 때, ‘나는 내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로 말씀의 완성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늘 울고불고 할 필요도 없어요. 이것은 늘 감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런 거예요. ‘그렇구나. 아,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그런 일이 벌어져서 나에게도 이런 변화가 생겼구나.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이 내 죄 때문에 죽었고 내 구원위해서 부활하셨구나. 그게 믿어지는구나.’ 이 믿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해서 내 안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태어난 그러한 현실과 일치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실시해서 행함으로 성취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의 죽으심이 있을 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독자적인 세계를 포기하게 만들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그 자체가 하늘나라의 순종인줄 믿습니다. 저희들 이러한 성령이 있음을 어떤 보물보다도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