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0. 20:41

말씀의 목격자 (누가복음 1: 1- 4)


말씀의 목격자

2009년 11월 8일                                  누가복음 1: 1- 4

(눅 1:1, 개역)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개역)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3, 개역)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눅 1:4, 개역)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성경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관리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인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섞여서 고만고만하게 살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성도나 누가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는 특별한 존재임을 파악하려면 그들과의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목격자’가 된다는 겁니다. 목격자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골라 목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 것을 보게 된 자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사건을 일으켰고, 그 외부 사건을 내부에서 읽어내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어떻게 목격자로서의 특징을 만들어내십니까? 그것은 우리 자기 몸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세상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 인간들은 자기 몸 중심으로 시작시점으로 정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시내산 위에서 40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천기를 알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창세기요, 출애굽기요, 레위기요, 민수기요 신명기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시점과 오늘날 인간들이 각자 자기 몸 중심으로 출발하는 시작의 길이가 확연히 다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지 시각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된 세상 안으로 하늘의 원리들이 가득 담겨서 같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댐이 터져 물결들이 보를 타고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을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시작점은 어린양의 보좌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흘러나온 물로 인해 천국에는 강이 생겼고 그 좌우로 가로수가 있는 그 가로수는 생명나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를 위하여 세상은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3-4에 보아도,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작이 이 땅에서는 어떤 대우를 받게 됩니까? 처참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 몸 중심으로 생각한 시작점이 얼마나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도전하는 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5에 의하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자신이 하나님을 본 목격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것은 정작 하나님을 만난 인간들의 공통점입니다.

왜 인간은 직접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하여 축복과 저주를 염두에 두면서 세상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자기 몸 위주로 상정하는 축복과 저주입니다. 자기 몸이 유쾌하면 축복이요 자기 몸이 불쾌하면 저주로 간주합니다. 과연 우리 몸이 축복과 저주를 결정지울 수 있는 기준이 될까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현재 우리의 몸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저주를 유발시키는 몸으로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왜 교회라는 것이 이단이며 기독교라는 것이 이단일 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저주대신 축복을 요청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격하는 대신 자신의 몸을 목격하고 그 몸을 축복된 몸으로 전환하고자 용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축복을 요구할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저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율법이 가미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율법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그 십자가는 죄있는 육신의 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절단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곧 저주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도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법은 듬뿍 받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이 들어오면서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채 저주를 받을 짓들을 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즉 인간의 몸은 저주유발성 몸이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아니하고서는 한시도 살아가지 않는 자라는 점을 확실하고 명확하게 단정짓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율법에 대해 오해해서, 이 율법을 지키므로서 저주스러운 인생에서 축복스러운 인생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인간의 근본 자리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려했지만 인간은 도리어 자신의 자리를 저주의 자리로 간주하지 않고 얼마든지 복받을 수 있는 자리라도 되는 듯이 오해를 하고 있었음이 들통이 나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잡습니다. 그 공간을 가지고 타작마당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3:12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닌다고 저주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말씀을 제대로 접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한 하나님의 조치였음을 아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은혜를 받은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조치의 혜택을 입고 왔음을 아는 겁니다. 이 혜택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십자가 복음으로 나아오지 않고 자꾸만 교회라는 절로 갑니다. 그 안에서 숨어들어갑니다. 자신의 저주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타고난 저주성과 죄악성 때문입니다. 즉 한국에 교회가 있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저주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이름의 절간들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 것도 목격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증거한다면 예수님의 몸에서부터 제대로 시발이 되고 시작이 되는 축복과 저주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우리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그 능력 뿐입니다. 지옥 나라에서의 축복이란 이런 식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정육점의 고기처럼 매달려 있어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음을 자백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시체놀이를 해야합니다. 교회 안다녀도 이단이지만 교회 다녀도 이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흐름’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가 아니라 ‘흐름’입니다.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어디서부터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고 말입니다.

누가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외부에서 흘려주신 그 피의 속죄성을 우리는 증거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전체 흐름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바탕을 예수님의 바탕으로 교체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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