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5. 22:39

엘리야의 심령 (누가복음 1: 8-20)

엘리야의 심령                    

2009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8-20

(눅 1:8, 개역)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눅 1:9, 개역)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10, 개역)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눅 1:11, 개역)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2, 개역)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개역)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개역)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6,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눅 1:18, 개역)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 1:19,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1:20, 개역)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인간은 말씀에 휩쓸릴 때만 영적 세계에 눈이 뜨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서 영적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자기 자신을 영적 세계에 대해서 더욱더 장애자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귀가 있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들을 수는 없고 그냥 소리만 들을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눈이 있어도 제대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이 하늘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두 눈과 두 귀는 기껏 자신이 정상적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증명하는 도구로만 쓰여졌을 뿐입니다.

사람이란 눈을 통해서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때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듣게 되어 있는데 이 자아라는 것이 영적 세계와는 단절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차 세례요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영적 장애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남들처럼 정상적이고 훌륭한 자아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니 전혀 사정이 딴 판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휩싸인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독백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은 압니다. 더 이상 자기 몸을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계시의 반응체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인으로 보는 것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어떤 분출구에서 나오는지를 알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무지개가 하늘에 떱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는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벌어진 일을 근거에 두고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피 값’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인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인해 땅을 피를 머금게 되었고 그 억울한 피는 하늘에 하소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피의 사건을 놓쳐버리고 자신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처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에는 모일 때 마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32에 보면,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라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하면서 그 대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피흘리게 되는 억울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이 세상의 본질을 전부다 보여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주님의 죽으심’에 근원을 두고 주어지고, 세상에 대한 정죄도 또한 ‘주님의 죽으심’을 근원을 두고 주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나서니 아브라함은 그 낌새를 채리고 정면으로 말리게 됩니다. 말리는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그 의인을 악인과 더불어 멸망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충돌을 일이키는 모순된 일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죄 이전에 다른 근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은혜를 주시는 그 근원을 인간들이 틀어막고 있다는 그점입니다.

이 세상이 여태 보존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선행이나 착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보존되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의를 배척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주심에 대해서 영적 장애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자기 삶의 자리로 다듬어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죽으심’이 세상 유지의 힘이 된다면 자신들은 늘 그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본인들의 위신이 서지 않는 식이 된다고 여깁니다. 십자가 죽으심을 잊고 살아야지만 자신들의 노동의 가치가 빛이 나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 조치를 말리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은 없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소돔과 고모라성에 있는 조카 롯을 심판의 자리에서 빠져나가도록 천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비로소 롯은 영적 장애인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한 집에 같이 살았던 아내나 그리고 그 두 딸의 사위는 이런 천사가 전하는 복음 소식을 ‘농담’으로 간주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닥치게 되면 우리 주체에 분열이 되면서 우리의 자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에서 다시 본모습이 발각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잃기 싫어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그 은혜의 자리를 죽음으로서 되갚는 범행을 매일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출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휩싸이게 되면 그동안의 자기를 형성한 모든 관계는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신만의 자리를 성립될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휩싸이는 자리로만 갖게 됩니다. 그 자리는 곧 예수님의 피만 솟구쳐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그만큰 우리 인간은 결코 정상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그동안 지탱해준 주변의 관계가 끊어지는 사태를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상인으로 스스로 판단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의 자리에서의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재판하거나 용서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에 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위하여 세상을 용서하면 안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세상을 사랑하면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가랴나 그의 아들 세례요한를 통해서 세상 분리작업에 나서십니다. 사가랴는 그동안 자신의 기준에 의해서 말씀을 해석하기를, 자신과 아내를 늙었기에 자식이 생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인이 영적 장애자인 것을 나타내보이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것이 곧 세상 분류작업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이 이런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곧 영적 장애인을 영적 정상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그 복음 속에 하나님의 죽으심이 개입하셔서 작업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바로 영적으로 정상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를 피에서 출발함을 알고 항상 십자가 피와 자신을 견주어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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