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3. 22:58

사가랴의 찬양 (누가복음 1장 67-79절)

사가랴의 찬양

2009년 2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67-79

(눅 1:67, 개역)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눅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개역)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눅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눅 1:72, 개역)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개역)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눅 1:74, 개역)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눅 1:75, 개역)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6, 개역)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눅 1:77, 개역)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 1:78, 개역)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개역)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사가랴가 찬양합니다. 사가랴라는 사람이 대단한 지식가라서 혹은 예지라도,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이 갖추었기에 예언의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67절에 보면, ‘성령에 충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로서 사가랴는 자신이 원하는 이기적인 예언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을 위하여 사가랴는 입이 막히고 혀가 굳어져야 했습니다. 이는 육적인 요소가 이 영적 예언의 노선이 끼어들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구원이란 필히 죄사함이 전제되는 겁니다. 77절에 보면,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가고 싶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구원을 아는 자라면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죄사함’에 대해서 말하게 됩니다. 천국이 있어도 죄사함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 사가랴의 찬양은 본인이 해야 할 잏이 아니라 아들 세례요한의 할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가 사가랴입니다. 그리고 사가랴의 아들이 세례요한입니다. 왜 같은 소리를 반복하느냐 하며는 부자지간의 관계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부자지간의 관계가 형성되지 아니하면 구원, 즉 죄 사함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려서, 구약의 모든 구원은 자식에 의해서 부모가 구원받는 식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구원받고, 이삭은 야곱 때문에 구원받고, 야곱은 요셉 때문에 구원받고, 다윗의 다윗의 자손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아담의 아담의 자손이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왜 이리 자손에서 자손에게로 구원의 근원이 이전되는 겁니까? 그것은 구원받을 당사자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죄사함이란 죄 지은 본인이 죄사함 작업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비로소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의 이전이 가능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서 태어났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로서 인간의 죄 씻음은 죄 지은 자가 관여될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여할 사항입니다. 경건치 않는다고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78절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께서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의 사람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 씻음의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면, 소위 낚싯대 같은 것으로 건지든지 아니면, 그냥 말씀으로 죄 씻을 수도 있을 법도 한데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번거러운 작업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하나님께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어찌하려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그 어떤 인간이라도 죄인이라면 결코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되지를 못함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죄를 지은 자가 자진해서 죄 용서를 요청할 권리까지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죄 속으로 버림받은 자를 건져내고 아니 건져내고는 죄 속에 빠진 자의 권한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결정권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시고, 그 심판에서 건져내시는 방식을 인간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로서 기독교는 이단이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그 안에 인간이 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한 병원에서 무통내시경을 받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간호사께서 입에 관을 씌우는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뒤에 기억이 없다가 나중에 깨보니 옆에 침대에 누워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순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답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촘촘히 연결되어 유지되고 층층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중간에 뭉터기로 기억이 빠져나가버렸으니 지금은 내가 그 나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기분 나빴습니다. 죽음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내시경할 할 동안의 시간과 기억은 병원측에서만 갖고 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다만 병원측 기억의 결과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 씻음이란 순전히 하나님과 그 아드님 되시는 예수님의 조치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기억이, 그동안 ‘나’라는 신체에 입각해서 구축한 나의 기억을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잠시동안 입이 막히고 혀가 닫히게 한 것은, 육적인 자아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사가랴의 입을 막았던 그 영께서 사가랴의 입을 열게 하시고 예언을 하게 하심으로서 그 예언의 세계에 사가랴로 하여금 영적 새로운 피조물로서 가담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기억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가랴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스라엘과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육신을 부모로부터 물러 받았기에 육신에 입각한 죄를 죽을 때까지 지속시킵니다. 사회적으로 범죄하여 판사로부터 ‘사회봉사 200시간’을 명받은 자가 200시간을 마감하는 그 날에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우리는 죄씻음을 이런 식으로 ‘죄와 벌’의 관계로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에 보면, 고양이가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고양이가 사라져도 웃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죄 씻음은 우리의 실체가 관여해서 성사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평생 교회 생활한 것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됨을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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