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0. 18:16

예수님의 출생 (누가복음 2장 1- 7절)

예수님의 출생         

2009년 12월 20일    본
문 말씀: 누가복음 2:1-7

(눅 2:1, 개정)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2, 개정)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눅 2:3, 개정)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 2:4, 개정)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개정)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눅 2:6, 개정)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눅 2:7, 개정)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지난 시간에서는 성령의 약속에 의해서 세례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이 두 분 사이에는 어떤 노선을 형성됩니다. 이 새롭고 낯선 노선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두 개의 인간 노선이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육으로 태어나셨지만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인간들도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성경에 적혀 있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뭘 주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이 영적 노선에 합류될 수 있습니다. 이 영적 노선의 출현으로 인하여 졸지에 아담의 노선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들은 산 자가 아니라 실은 죽은 자들이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 ‘산 자’는 오직 예수님의 노선에 해당되는 그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육의 노선의 실정은 어떠합니까?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5:4-5에 보면,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일생은 이것으로 마감되지만 아담이 속해있는 아담 가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줄지어 후손계열이 이어집니다. 5:6-8에 보면,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생이란 아무리 잘나도 결국 죽게 되어있습니다. 아담 족보의 생리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실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밑에서 차고 올라오는 죽음의 힘을 감추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에 굴복되는 것을 굴욕이라고 느끼고 자꾸만 허세만 부립니다. 천년, 만년 살 것같이 말입니다. 차라리 죽음에 굴복하세요. 굴욕적으로 사는 자가 도리어 당당하게 사는 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가문은 이 구조에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낳은 남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족보를 갖지 않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땅에서 출생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은 이제 아담의 족보만 독점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족보가 관여하고 개입하는 땅의 세계입니다.

히브리서 7:1-3에 보면 그 족보가 나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입니다. 지상의 족보는 육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 이 멜기세덱의 족보에 해당되는 자는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나타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7장의 이 본문은, 세상 족보에 속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등장된 멜기세덱에 속한 인물과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두 사람은 평등하거나 대등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를 결정짓는 만남입니다. 즉 “누가 더 높으냐”를 분명히 나타내어야 할 만남입니다.

히브리서 7:4에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의 인생을 전부 멜기세덱의 세계에 일임합니다. 노선 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옥으로 통하는 하행선의 인생을 살다가 천국으로 통하는 상행선을 탄 겁니다.

이들의 만남은 사적인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 나오는 아브라함 족보에 속한 모든 이들은 이 하나님과의 맹세와의 만남의 저촉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맹세를 지상에 드러내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맹세, 즉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라면 축복받을 아브라함 족보에 해당되지 않는 자라는 것이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늘의 정보란, 바로 ‘피 제사’입니다. 아브라함 족보에서 나온 레위지파는 온종일 이 ‘피 제사’ 업무에 매달려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해서 ‘희생’입니다. 교회 내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희생보다 즐기는 식으로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눌려서 “헉헉!”거리면서 죽을 지경입니다. 사람이란 외부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 하며는, 자기 인생을 즐기는 에너지원으로 봅니다.

이 현상은 가족 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같은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사람은 매사를 자기 쪽으로 당깁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의 노선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 노선을 따라 성령님이 오르락 내리락 하시는데, 그 밑바닥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의 힘이 용수철이 되어서 그 힘으로 성도를 천국까지 쏘아 올리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는 땅의 관점이나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어떤 중학교 어린 소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지 얼마 안 되어서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하면서 하는 말이 “엄마, 식당에 가니 전부 외국사람들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본인이 외국인인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구조에서 보는 관점이 깨어져야 하는 겁니다. 본인이 그 나라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객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세입니다.

이제 성도는 멜기세덱의 노선에 속했기 때문에 ‘피 제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남은 과제는, 어째서 하나님의 맹세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출현되어야 하는 점입니다. 평생 온 몸으로 표현하고 구사해야 될 주제입니다. 복이란 가져야 될 내 몫의 무엇이 아니라 로마서 12: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다 드리게 된 신분,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장차 천국과 지옥은 엄청난 각도로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각도가 벌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산 자가 되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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