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22:35

아기와 시므온의 만남 (누가복음 2장 22-33절)

아기와 시므온의 만남

2010년 1월 3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22-33

(눅 2:22, 개정)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 2:23, 개정)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눅 2:24, 개정)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 2:25, 개정)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개정)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7, 개정)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개정)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29, 개정)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개정)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개정)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개정)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개정)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교회 없이도 구원이 될까요? 오늘 교회없이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속 중앙부가 텅 빈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빈 속을 채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누구나 그 중심 부위가 빈공간으로 치워지게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신의 중앙부에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건드리면 그 중심분야가 발동해서 성질 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이라는 사람에게 있어 관심사와 기대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빈 자리를 채워줄 분이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야지만 더 이상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길 분이 따로 계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자기 힘으로 빈 여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특정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갖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전 작업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고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예를 들어 노름하는 자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은 왜 밤 낮으로 노름에 열중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애시당초 사는 의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어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사는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사 있다고 우기더라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목표일 뿐입니다. 노름이나 도박이나 내기를 눈이 돌아간 자들은, 사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억지로 감추고 싶어 환장한 자들입니다.

악마란, 사는 이유도 의미도 없는 존재들에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의미와 목적을 찾아보라고 부축이는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화투 도박판 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이 전부다 악마의 얼굴들을 하고 다닙니다. 건설업에서, 시장에서, 공무원들도, 군인들도, 심지어 목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있지도 않는 존재의 의미를 억지를 부리더라도 덮어 씌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나면서부터 인간의 신체에서는 죽음이 뿜어져 나옵니다. 인간의 신체는 그 이상의 것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시기와 분노와 불평과 허약함과 광분 같은 것 모두를 모아놓으면 모두가 곧 ‘죽음의 힘’입니다. 즉 이미 죽음이 인간의 신체를 장악하고 있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란 ‘죽어야 될 의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이제사 종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아기 예수의 신체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아기 예수님의 신체에서는 ’율법의 완성‘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중심부를 비워놓게 하시는 것은 그 자리에 자신의 발을 놓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구두닦기가 만든 구도통 위에 신사의 구두가 놓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자신의 발을 담그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발을 빛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이 생명이 아기 예수님의 운명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시므온은 약속을 통해서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양식집에 가서 안심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하는 것은 ‘살기 위함’입니다.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하면 굶어죽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예수님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아 놓고서 우리들보고 칼 질해가면서 먹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힘든 것은 사람들 하고 늘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T.V 드라마를 보세요. 맨날 상대하는 것이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시므온은 사람들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하고만 상대합니다. 그 ‘아기 예수’가 어떻게 해서 생명이 되는 겁니까? 27절에 보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과 아기의 만남입니다. 아기 안에서 모든 율법은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레위기 12:2-8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여성은 아기 낳는 기계인 동시에 남자들이 차마 접근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죽음에 가장 가까이 접근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결예식에 해야 될 이유는, 단지 여자가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 뿐입니다. 인간의 신체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것이 아기가 되었든지 아니면 배설물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다 더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여성성은 아기 놓으면서 다 깨어집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는 과정 속에서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다 날려보냅니다. 아픔에 비명 지르는데 그것은 저주스러운 죽음과 가까이 갔다는 의미입니다. 자식을 놓고 난 뒤에 여자는 자신의 잃었던 품위를 자식의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자 합니다.

어쨌든 이 레위기 말씀대로라면 인간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정도로 더럽습니다. 그런데 이 더러움을 깨끗하게 바꾸는 작업은 바로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법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보다 여자를 낳았을 때에 배나 더 기간이 필요한 것은, 처음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에서 비롯된 더 낮은 저주의 자리에서 올려서 남자와 같이 원상복귀해 주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런 의인으로 전환시켜는 분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교회 내에서 이런 주님의 자리를 거쳐서 남들과 대화에 나서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늘 상대방 속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바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도 남들처럼 만만치 않을 정도로 더럽다는 사실을 우리 중심부에 자리잡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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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3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2:22-33/아기와 시므온의 만남) 

2010-01-06 15:46:43  녹취: 오용익

20100103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22-33절/아기와 시므온의 만남(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명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주께서 일어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때라.”(시편 102:12,13)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계시고 영원히 긍휼을 베푸시고 영원히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저희들이 알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끼리 남겨두지 마시고, 우리 인간들끼리 살라고 방치하지 말아주시고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3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2-33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에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만약에 교회가 없어진다고 할 때 여러분, 구원 됩니까? 교회가 없는데 구원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교회 없이도 구원이 되는 쪽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도 구원이 되는 쪽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교회라 하는 것은 등록하고 다니고 참석하고 내 쪽에서 뭔가 베풀어주면 그쪽에서 뭔가를 주는 식의 그것이 교회인데.

교회가 없는데 천국 간다? 교회가 없는데 구원을 받는다?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것이 성립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 뭘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 안에 어떤 빈자리가 있어요. 자기 안에 빈자리가 있는데 자기 안에 구멍을 뻥 하고 뚫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면 그걸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후레쉬에 건전지가 들어가는 구멍이 있어요. 거기에 건전지만 채워주면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자기 안이 텅 비워져 있다고 보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것이 채워지면 자기가 하나님이 만든 교회가 되지요. 세상에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교회가 있지만 시므온은 그런 생각이 없고 나 자체가 교회이고 나 자체가 하나님이 채우는 부분이 있기에 그것만 채워주시면 교회 다니든 안다니든 구원받는다는 쪽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하나님, 내 빈자리를 언제 채워줄 겁니까?’ 이래 나오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이 사람들과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해야 된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심적으로 힘이 드는지 몰라요.

초등학생부터 경쟁입니다. 그 경쟁이 하나님하고 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시므온은 경쟁이라는 말 자체를 모릅니다. ‘주께서 만든 빈자리 주께서 채워 줄줄 믿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주여, 저놈을 이길까요? 저 놈보다 더 나아질까요?’ 그런 스트레스를 시므온이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므온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시므온은 자기 안에 빈자리가 있고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할 텐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와서 예식을 치르는데 그걸 시므온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이제는 저의 빈자리가 마저 채워졌습니다. 이제 저의 영혼을 평안히 쉬게 하시는군요.’

시므온이라는 사람 안에 있는 빈자리는 ‘너는 반드시 너의 구원할 분을 만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담길 빈자리에요. 하나님의 약속, 하늘나라 정보가 들어올 그런 빈자리를 성령께서 비게 만들어 놓고 성령께서 그것을 채우시는 겁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시므온이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구원받은 것을 고맙게 여깁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나의 빈자리가 채워졌습니다.’ 그 말입니다. 그 빈자리를 뭐라고 하느냐, ‘따로 섬길 자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자기 빈자리란 ‘내가 섬기고 싶은 분이 앉을 자리’에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기 섬기기 바빠서 자기가 자기 것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섬겨? 내가 제일 잘났는데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그분을 섬겨? 나는 섬길 자가 없어. 그냥 이용의 대상일 뿐이지. 하나님이든 예수든 나는 그냥 이용해 먹을 뿐이지 내가 왜 그분을 섬기는데? 내가 뭐가 못나서,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섬기는데?’ 그런 사람 앞에서 ‘섬긴다’ 하면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광신도라는 평을 받을까 싶어서 움츠러들어요.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라고 하면 ‘이 미친놈아! 네가 학교 다닐 적에는 안 그랬는데 언제부터 그런 광신도가 되고 말았느냐? 너는 사람과 상대해야지 하나님을 상대하면 안 돼.’라는 그런 평을 받을까 싶어서 겁이 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드라마를 봐 보세요. 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나오는가. 안 나오지요.

드라마는 첫 회부터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복잡해져요. 덕만이 나오는 선덕여왕,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를 섬기는 것이 없어요. 가끔 신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이용해 먹는 거지요. 그런데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자기 안에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는 자기의 자리가 아니고 내가 섬겨야 될 분이 안착해야 될 자리인데 그것을 구약의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촘촘히 읽어본 분들은 그 용어를 기억할 것인데, 바쁘다 보면 성경에 나오는 ‘발등상’이라는 것이 뭔지, 할 거예요. 하나님의 발을 안치하는 자리를 ‘발등상’이라 합니다. ‘슈샤인보이’, 구두닦이소년들을 보면 ‘아저씨, 구두 따끄이!’ 하잖아요. 그러면 구두 통, 꼭 네덜란드풍의 지붕을 연상시키는 거기에 발을 올려놓는데 그걸 발등상,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이라 합니다.

발이 있다는 말은 구두닦이가 그 발을 닦아 주면 되는 거예요. 그 발등상이 있는 자리를 구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자로 ‘성전’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전이라고 하면 부동산이잖아요. 예배당이라는 이름의 부동산, 터 닦고 집짓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려면 내 안에 하나님의 발이 들어올 수 있는 빈자리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빈자리가 형성되려면 그동안 나의 욕망과 비전으로만 꽉 차있던 나의 중심자리가 ‘물렀거라!’ 하는 것처럼 옆으로 살살 빠져주고 거기에 빈자리가 형성돼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빈자리가 형성되도록 기존의 나의 것이 빠지게 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얘야!’ ‘예!’ ‘너 구두닦이 할래?’ ‘무슨 구두 닦는데요?’ ‘내 구두 좀 닦아줘.’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오셔서 ‘다른 사람 말고 너한테 구두 닦게 하고 싶다. 너를 나의 발등상 되게 하고 싶다.’ 이걸 구약에서 성전이라 하고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그 발목을 우리가 붙잡아야 돼요.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24절에 보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를 사랑하면 필히 다른 하나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주인을 사랑한다.’ 하거든 거짓말인줄 알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뭐를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나를 섬기는 나의 신당, 나의 신전을 스스로 포기해야 돼요. 나를 섬기고 또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치고 그런 경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여러분이 자기영광만 위하고 자기가 섬길 자가 따로 없다고 한다면 ‘네가 뭔데 나를 건드려?’라고 나올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의 속이 텅 비어 있다면 자기를 건드리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건드리면 그때는 발끈하지요.

인천 송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짓는데 그 건물 설계사가 하는 말, ‘건물 안은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지 않으면 지진에 흔들려서 무너집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물로 채워서 바람이나 지진이나 오면 흔들릴 때 같이 요령 있게 흔들려서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그 중심점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시므온은 그 안이 비어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그 안을 비게 만들었고 이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약속만 오면 되는데, 그리고 시므온은 나를 구원하실 분, 그 약속이 안착하는 그 날을 기다렸는데, 마치 성령께서 미팅주선을 해서 아기예수를 만났을 때 비로소 시므온이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행복합니다. 편안합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준 그 구멍에다 하나님께서 또 그 빈자리를 채워주시니 나는 하나님의 발등상을 외곽으로 둘러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백성이 맞습니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기뻐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중심은 비어 있습니까? 많이 비어있습니까? 제가 어제 마귀를 봤어요. 마귀 생긴 것이야 보통 우리 인간과 똑같이 생겼는데 뭐가 마귀인가? 노름에 미친 사람을 봤어요. 제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데 어떤 것은 그걸 푸는데 20년 이상 걸리는 것도 있어요. ‘선악과를 왜 심어 놓았는가?’ 그것이 한 20년 갔어요.

지금은 그것이 풀렸습니다만 20년 이상 계속해서 안 풀리고 있는 것이 ‘사람은 왜 노름을 할까? 왜 고스톱을 칠까?’ 그것이 계속 안 풀렸어요. 어릴 적에 명절에 고모나 삼촌, 친척들이 모이면 민화투, 혹은 섰다, 육백, 그런 것을 모여서 했어요. 노름을 처음에는 재미삼아 십 원 놀이부터 시작하는데 나중에는 세뱃돈 받은 것이 다 나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생각한 것이 ‘왜 사람은 여기에 왜 미치는지?’ 그걸 나이 50이 넘도록 해결 못 보다가 어제 해결을 봤습니다. 왜 사람은 경마나 화투 같은 도박에 왜 빠지는가? 의미가 없는데 자기한테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노름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존재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어딘가에 몰두하고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그게 자기에게 무슨 중요한 의미가 되는 양, 자기존재의미를 찾아가기를 시도하는 방법으로 노름이 확 땡기더라는 겁니다.

화투치고 노름하는데서 비로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어떤 즐거움, 내가 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는 안도감, 그걸 존재의 가치라고 보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 것인데 억지로 의미를 만든다고 하다 보니까 인간이 마귀가 된 거예요. 마귀라 하는 것은 노름뿐만 아니고 건설현장, 모든 직장, 공무원, 군인, 경찰 그리고 그동안 너무나 흔하게 본 마귀는 바로 목사였다는 겁니다.

설교나 이런 것이 의미가 없는데 자기는 설교하는 것으로 뭔가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그 마귀들을 저는 숱하게 많이 봐 왔습니다. 가정주부, 애들 과외에 매진하는 부모, 제가 보기에는 그냥 딱 마귀에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했어요. ‘당신, 불교 그만큼 많이 공부했는데 불교의 의미가 뭡니까?’ 외국 사람인데 하는 말이 ‘제가 불교에 의미가 있으면 찾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이야기 할까요? ‘불교에 의미가 있다면 애당초 불교 공부도 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뭔가에 매진하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험악한 존재인가를 새삼 노출하는 것 밖에는 안돼요. 자기가 도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왜 사는지도 전혀 모르는 채로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뭔가 중요한 것이 있어서 스치는 가운데 발각당해요.

노름에 미쳐서 눈이 벌게지도록 밤샘하는 그런 인간이 악마라면 또 연말에 술집에서 밤새도록 미친 듯이 술 푸는 악마, 그것도 술집에 가면 여럿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왜 먹습니까?’ ‘몰라요.’ ‘왜 마십니까?’ ‘그저 취하고 싶어서.’ ‘왜 취하고 싶은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취하고 싶어요.’ ‘사는 목적이 뭡니까?’ ‘생각한적 없습니다.’ ‘어디까지 살 겁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사는 재미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중합니까?’ ‘행여나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봐서 오늘도 찾아다닙니다.’ ‘어떻게?’ ‘눈이 벌게져서.’

만약 그렇게 본다면 그렇게 의미를 찾고자 교회 오는 사람들은 역시 마귀입니다. 교회 다니는 교인들은 마귀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없었으면 마귀인줄 아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마귀 아닌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더욱 마귀를 더욱 마귀답게 변장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시므온을 보세요.

시므온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걸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요즘 말로 하면 시므온에게 중요한 것은 구세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미 없는 쓰레기들을 모아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거두어들였다는 겁니다. 의미 있다고 여기는데다가 구멍을 뚫으니까…, 그걸 펀칭이라고 합니까, 한국은행에서 못 쓰는 돈 수거 해다가 구멍을 뚫어버리잖아요.

구멍을 뚫린 인간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 없는데 그 구멍을 채우려고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지요. 그냥 뚫린 채로 있으면 그 구멍을 채워주는 것은 나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그분 소관이고 구분이 채워줄 것이지 내가 채우면 그것은 완전히 마귀가 되는 겁니다. 의미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마귀, 그게 더 나쁘지요.

그래서 돈 잃으면 살인하고 돈 잃으면 달려들고, 내 판돈 책임지라고, 내 인생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이번에 용산사건 보상으로 45억 받았다는데 도박 같아요. 시민단체, 종교단체까지 합세해서 45억 받아줬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용산 그 사람들이 각자가 구멍 뚫린 사람들인 줄 모르고 그 용산참사에 인생을 다 걸어버렸어요.

연초 되면 교회마다 ‘우리 교회는 가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의미 있습니다.’ 하는데 그것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가치 없는 것들끼리 모여서 무슨 가치가 있어요. 시므온이 아기예수를 만나고서 기뻐한 것은 죽어버려야 할 나, 펀칭되어서 껍데기뿐인 나, 죽는 날 까지 의미 없이 죽어야 할 나에게 아기예수가 와서 중심부를 채워줬는데 그 아기예수에게서 율법, 하나님의 법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시므온은 생명을 받은 겁니다. 안심스테이크 먹을 때 뭘 먹는 겁니까? 소의 생명을 칼질해서 먹는 거잖아요. 그거 안 먹으면 배고프니까. 하나님께서 시므온에게 생명을 줬는데 그 생명은 예수님 스테이크, 그 스테이크가 여러분에게 제공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것을 잘라 먹을 겁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잘라먹어야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양식집이에요. 원래 우리 교회가 양식집 하던 카페에요. 커튼 젖히면 전망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 내라, 봉사해라, 충성해라, 헌금해라.’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살리는 안심스테이크가 될 테니까 너는 칼질해라.’ 그 말입니다.

이게 생명을 접수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칼질하는 거예요. 칼질 하려면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애당초 죽은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접시에 있는 예수님의 안심스테이크, 그 살점을 찍어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성경전체가 다 주님의 몸과 살이 굽혀서 나오는 문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양식집에서 스테이크 먹을 때 반들반들한 소스를 그냥 보지 마시고 그 속에 창세기가 있는지 레위기가 있는지 한 번 보세요. 말씀 전체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으니까 들춰보시면 그 안에 민수기 나오고 사도행전 나오고 로마서 나올 거예요. 스테이크 하나 잡숴도 그렇게 은혜스럽게 잡숴야 돼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석가모니는 말하기를 우리 신체에서 분노가 나오고 생사고락이 나오고 아픔이 나온다고 하지만 성경은 간단해요. 인간의 신체에서는 죽음밖에 안 나와요. 인간은 신체 그 이상이 뿜어져 나옵니다. 화, 원통, 분노, 적개심 그런 여러 가지가 나오지만 그것을 하나로 묶어 버리면 죽음의 힘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으앙, 하고 울고 나오잖아요. 애가 배고파서 죽겠다는 거예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죽음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데 나이가 많아져도 계속해서 죽음의 힘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스테이크를 쟁반에 담아서 준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준거예요. ‘너 자체는 의미 없다. 만약에 이 스테이크 안 먹고 세상 돌아다녀봐야 거기에서는 같은 미친놈들, 마귀들만 만난다.’

전부 다 노름하는 사람들, ‘이번에 좋은 사업 하는데 돈 투자 안하렵니까?’ 전부 다 이런 노름하는 사람들, 도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시므온이라는 사람하고 우리 일반인들, 현대인들하고 얼마나 다른지요. 그런데 아기예수한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뿜어져 나오지요.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나오는데 예수님한테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인가를 봅시다. 23, 24절에 보면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렵지요?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1절부터 8절까지 내용을 보게 되면, 19금, 청소년들이 듣기에는 민망한 내용입니다.

성인 남녀만 들어야 될 내용이 나와요. ‘아기예수에게서 율법, 진리가 나오고 그 진리가 완성되면 생명이 나와서 우리에게 안심스테이크가 바쳐졌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한테서는 죽음이 뿜어져 나오고 아기예수한테서는 뭐가 뿜어져 나오는가, 그것이 레위기 12장의 그 내용이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청소년들이 있지만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 윤리, 도덕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여자의 자궁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길이 있어요. 그 길이 아들이 통과할 때의 더러움보다 딸이 통과할 때 더 더럽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성경이야기를 할 때 참석을 해야 알지 전부 다 참석을 안 하니 …, 이번 수련회 요한복음 한다고 하는데 좀 많이 참석해 주면 좋겠어요. 진즉에 좀 안 가르쳐주시고? 가르쳐 주려고 전을 펴도 안 오는데 할 수 없지요. 여자가 아기를 낳았으면 더러운 물건을 낳았다는 거예요.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은 다 더러워요.

오줌만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름, 피, 호르몬, 월경 하여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더러운데 사람이 더럽다는 말은 사람 자체가 썩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 속에서 죽음만 나온다는 거예요. 저주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저주가 빠져나와야 빈 공간이 생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만약에 안에 암세포가 있다면 의사가 ‘암세포 참 곱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의사가 아닙니다. ‘자, 마취 들어갑니다. 주사 놓습니다.’ 하고 배 째고 암세포 전부 다 들어내야 돼요. 결혼식이 화려한 이유는 인간의 동물성을 감취기 위함이에요. 결혼식 때 어깨파인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예쁘다고 해서 결혼식 다음날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그 여자는 미친 여자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만큼 결혼식이 아름다워야 될 것은 그만큼 결혼의 현실은 비참하고 짐승과 짐승의 만남이라는 사전포석이에요. 이것은 제가 혼자 생각한 겁니다. 동의하지마세요. 제가 좀 과장해서 해석해 본 겁니다. 아내의 더러운 것을 뽑아내 줘야 빈 공간이 생기고 빈공간이 생겨야 나의 것이 아닌 외부의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채워져서 그 인간이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뽑아내야 돼요. 제가 언젠가 수요일설교에서 했지요. 고추튀김 할 때 고추 배 째고, 그 안에 있는 씨앗 다 빼내고 거기에 양념 다진 것 집어넣어서 튀겨버리면 맛있는 고추튀김이 됩니다. 지금 주님은 깨끗한 사람을 골라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의 속을 채우려고 해요. 이 세상은 쓰레기밖에 없으니까, 아담자체가 쓰레기니까 쓰레기를 죽 모아다가 속을 빼내는 거예요.

그런데 전부 다 점잖은 해서 교회 와서 ‘주여, 주여’ 이러면서 자기존재의미를 교회 와서 찾으려고 하니까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감추고, 감추고 아무리 점잖고 점잖아도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 자기의 더러운 것을 모두 다 어쩔 수 없이 다 노출시켜야 됩니다. 결국 여자에게서 여성성이라 하는 것은 착각이고 환상입니다.

여자란 애기 낳는 기계, 또는 애기 낳는 공구, 드라이버나 펜치 같은 것, 여자는 아기 낳아 대를 잇는 도구이면서 그 아기를 낳는 순간에 비명소리와 함께 자기가 곱게 간직한 모든 꿈과 아름다움은 포기하고 다 집어던져버리고, 겉만 그런 게 아니고 속에 있는 더러운 것까지 다 함께 쏟아져 나오지요.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더럽다 하지 않더냐!’

산부인과 복도에 있는 남자는 자기부인 고생한 것 생각안하고 가문의 대를 이었다고 좋아하지요. 그러나 안에 있는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지점까지 접근한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잠 온다고 집에 가서 자다가 걸려서 ‘내가 애 낳을 때 너는 뭐했나?’ 하면서 평생 잔소리를 듣지요.

여자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그리고 그동안 꾸미던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다 깨질 때, 그게 여자가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왜 이 땅 말고 천국에 가야 되는가를 유일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겁니다.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 철없는 남자들은 그 순간에 화투가 치고 있어요.

거기서 자기의 존재의미만 찾고 있는 거예요. 여자는 여성으로서 자기존재의미조차도 애 낳으면서 다 반납했어요. ‘나는 여자로서 인생 끝났다.’ 그 다음부터는 애를 들볶기 시작합니다. 바이올린, 피아노, 웅변, 태권도, 영어, 이제부터는 여자의 인생은 없고 ‘네가 내 인생 책임져라.’ 하는 식으로 자식한테 모든 것을 다 해요.

남자들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잔소리를 듣기 때문에 밖에서 혹은 베란다에서 담배만 뻑뻑, 피워대지요. ‘네가 애 똥 싸면 기저귀라도 갈아줬나?’ ‘아니지’ ‘그럼 밖에 나가 있어라.’ 그럼 밖에 나가야지 별수 없지요. 그 다음부터는 여자가 여자로서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반대급부, 어떤 보상을 위한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자식에게 투자함으로써 시작하는 겁니다.

여자는 자신은 죽고 자식의 이름으로 거듭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자식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실제로 어린 자식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성인이 없으면 자식은 방치되는 셈이지요. 뭐가 그른지 뭐가 옳은지 아무것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사람을 대표해서 속의 더러운 것, 죽음의 이유들을 다 쏟아냈는데, 사람은 그냥 ‘아이고 아파라, 내가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이것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거기서 나온 오물들을 긁어모아서 그걸 가지고 성경책을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들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을 놓고 난 뒤에는 칠일동안 불결하고 33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기 전에 성물을 만지지 말고 성소에 들어가지 말고 33일이 지나고 난 뒤에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번제물로 드리면 ‘제가 언제 애 낳았어요?’ 하는 식으로 다시 원상복귀 되어서 천국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레위기 1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심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일을 지냐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찌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찌니 그가 정결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을 낳을 때는 칠일동안 더럽고 삼십삼일이 지나야 그 여자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지만 여자를 낳았을 때는 칠일의 곱빼기 십사일동안 여자는 더러운 것을 낳았다는 혐의를 받아야 돼요. 더러운 여자가 쏟아졌다는 그 아기에 대한 책임으로, 또 하나의 여자를 낳아서 세상을 더럽게 했다는 그 책임으로 그 딸을 낳은 여자가 14일 동안 더러운 겁니다.

물론 그 가운데 남편과의 관계는 일체 못해요. ‘어디 더러운 것이….’ 안돼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려면 도 닦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개입되어야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 법이 ‘더러운 너를 위해서 누군가 죽어 줘야 된다.’는 겁니다. 안심스테이크, 죽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딸을 낳으면 14일 동안 경도, 아이를 낳는 그 육체의 통로가 더럽고 66일 동안, 약 두 달 동안 여자는 격리조치 당합니다. 66일을 지나서 그 다음에 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다시 공동체로 합하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하나님께 바쳐서 제사장이 안수할 때 ‘여인아, 이제 당신은 정결하게 되었으니 정결한 여인아, 다시 가족과 합치세요.’라고 합칠 수 있는 겁니다.

이 율법이 오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만난 아기예수에게 그대로 전부 다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아침 점심 저녁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나오는 것은 죽음이 나와요.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원망과 불평, 때로는 감사와 기쁨도 나오지만 그것은 자기가 평소에 원했던 것이기에 헤헤거리고 촐랑거리고 까부는 것들만 나왔을 뿐이에요.

거기서 죽은 죄인에 구원되었다는 기쁨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 ‘나는 죽으면 안 돼. 내가 썩기는 왜 썩어. 내가 죽기는 왜 죽어.’ 하는 오기와 허풍만 만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한테서는 방금 이야기했던 레위기 12장 전체가 나옵니다.

여기서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빠뜨렸느냐 하면 ‘목사님, 남자를 낳으면 7일뿐인데 왜 여자를 낳으면 곱빼기로 더럽습니까? 너무합니다. 여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곱빼기입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데, 여성들이여,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식에게 약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할 경우에는 그만큼 사랑이 많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남자보다 여자에게 곱빼기 약을 먹이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남자 지은 죄와 여자 지은 죄를 같이 봐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처음에 창세기 3장에서 누가 먼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었습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누가 먼저 어겼습니까? 여자가 먼저 어겼습니다. 그러니까 된 통으로 여자에게 더 큰 저주와 징벌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여자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남자를 위해서 희생해야 될 배필로서, 남자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고 남자는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내 버리는 그런 운명이었는데 그렇게 슬픈 운명의 레벨을 같이 맞추기 위해서는 밑에 쳐져 있는 여자를 남자만큼 올려주려면 그만큼 주님의 희생이 더 필요했다, 이렇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우리가 스스로 손대서 일할 수 없는 점을 주님께서 자기 아기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는 도대체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기예수를 통해서 문제부터 알려주고 해답 주고 다 하신다 그 말입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안 가려는 십자가로 친히 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저주받음으로 말미암아 멀쩡하게 보이는 우리가 실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가 안 가려는 길을 가게 하셔서 문제 보여주시고, 또 문제만 알면 안 되잖아요, 그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켜서, 부활시키면 그것으로 해답이 됩니까, 안되잖아요, 부활의 영을 오늘 본문의 시므온처럼 우리에게 임하도록 해서 악마같이 나의 위치, 나의 의미, 나의 존재가치만 찾는 나에게 중앙지점에 빈자리, 구멍을 만들어 버려요.

우리는 교회에서 복음을 거론하면서 자존심 챙긴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 때문에 상처 많이 받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교회나 복음이 뭐니 하지만 사실은 이 자존심만큼은 손대지 말라고, ‘나는 하나님 섬깁니다.’ 말은 하지만 사실은 중앙이 안 비워져 있어서 나로 꽉 차 있는데 그러한 기회와 흐름을 통해서 진짜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고 ‘제발 사람의식하지 말고 남 의식하지 말고, 정말 피곤하지도 않나, 사람만나는 것이.’ 하십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상대해야 돼요.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내 빈자리 중심자리를 턱 하니 차지해서 ‘나도 이제부터 섬기는 사람 있다? 나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있다?’ 그 중심자리에 죽은 우리의 레벨을 더러운 인간을 의로운 인간으로 전환시킨, 주께서 친히 이루신 법의 완성이 여러분의 중심을 턱 하니 차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필요 없나? 교회 없이도 구원된다면 교회는 왜 다니는데?’ 이렇게 하시겠지만 교회라는 것은 사람들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든 뭐든 간에 나로 바로 직통하면 안 되고 내 중심에서 나오는 그 예수님의 말씀의 완성이 주님을 거쳐서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저 사람은 나의 무엇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듣고 싶은 복음이 저 사람 입에서 나오다니….’ 하면서 그 사람의 그 복음소리를 듣고 내 안에 있는 복음과 기쁨의 화해와 기쁨의 미팅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의 만남이란 봉사를 하든 뭘 하든 ‘나는 너 때문에 못살겠다.’ 그게 아니라 ‘당신 보니까 나도 참 당신 못지않게 나쁜 놈이구나.’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보니까 꼭 나의 행세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게 욕인지 도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렇게 주님을 거쳐서 만난다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수 없지요. 미 투,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꼭 내 행세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둘 다 못난이입니다. 위 아더 월드, 다 못난 인간입니다.’ 이래 되야 돼요.

누가 돛대 되고 교회에서 어른 짓 하면 안 됩니다. 교회의 빈자리를 남겨둡시다. 목사를 차버리고 교회의 빈자리는 그 육체에서 율법이 나오는, 완성이 나오는 그 분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서 항상 그 분을 거쳐서 형제로서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평생 동안 사람 의식하면서 이용하려고 설치다 보니 어느새 악마가 되어갔습니다. 어느새 나밖에 모르는 인간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마음에 구멍이 뚫리게 하시고 그 빈자리를 죄인도 의인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아기예수가 차지하게 하여 주셔서 이제는 우리 영혼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죽어도 좋을 정도로 안심되는 그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