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8. 23:08

출생의 무서움 (누가복음 2장 8-14절)

출생의 무서움

2009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8-14

(눅 2:8, 개정)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9, 개정)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개정)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개정)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개정)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개정)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14, 개정)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세상은 하늘로부터 노출되어 있습니다. 개방되어 있기에 하늘에서 눈이나 비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도 내왕합니다. 이것은 곧 ‘하늘의 구조’ 안에 이미 땅이 갇혀있는 셈입니다. 땅은 하늘에게 운영하는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요?

그것은 땅에서 자신들이 뿜어대는 먼저가 환상이 되어 땅을 가득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덮치고 있는 땅의 환상을 걷어내고 뜯어내는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그것이 표적인데, 표적이란 ‘인간의 손을 경유하지 않고 나타난 일’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는 일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일을 이 땅에서 생기게 하므로서 이 세상이 이미 땅의 구조가 아니라 하늘이 구조에 갇혀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하늘의 구조는 땅의 것을 뜯어내기에 이러한 뜯김을 당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뜯김을 통해서 자신 안에는 진짜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들만 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나 훼방들입니다.(마태복음 15:19) 그동안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치울 곳이 없어서 계속 누적시켜 왔던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쓰레기들의 집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선 해답부터 먼저 내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것이 해답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해답부터 먼저 제공하시고 문제는 우리 인간을 이 땅에 살게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특히 이 14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 자신이 좋아서 뽑아낸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이러쿵저렁쿵 시비걸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기뻐서 따로 뽑아낸 자들 안에서 평화과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해답이 먼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환상을 자아내기 때문에 이런 해답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와도 구조가 자신을 위한 구조로 규격맞추어져 있기에 왜 기쁜 소식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동네’를 소개합니다. 이는 옛적에 다윗에게 일어난 그 일을 통해서 구원될 자들에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제대로 아는 식으로 미리 주어진 해답과 만남을 주선하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명절이나 휴가를 얻게 되면 선산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고향 친구도 만나고 늙으신 부모님도 만나서 옛적 자신의 어릴 시절에 잠시나마 빠져봅니다. 즉 자신의 자신됨을 그런 옛적 환경 속에서 다소 느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귀손본능’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나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회귀하는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해두신 고향은 선산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늘의 구조에서 보았을 때, 성도의 고향은 바로 현재 인간을 죽이게 했던 그 지점이요 그 시점이요 왜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살고자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지녔는지 그 내막을 말해주는 곳입니다. 그곳은 어딘지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즉 사람이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은 외부에서 찾아와야 합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도 별이 와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1:19에 보면, 우리 마음에도 샛별이 떠올라서 우리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말씀 속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구원된다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곧 오늘날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이 별 따라 가면 우리는 다윗의 동네에 이르게 됩니다.

다윗의 동네란 다윗이 출생했던 곳입니다. 거기가 또한 모든 구원되어야 될,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고향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의 고향이 됩니다. 다윗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환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반듯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상황이 다윗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미모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던 그 여자의 존재로 인하여 다윗의 내부는 요동쳤고, 그래서 그는 간음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윗은 자신의 잘남을 감추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여인의 남편을 제거하게 이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나타나서 이 사실을 폭로할 때, 다윗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위선과 환상과 껍질이 제거되고 뜯겨나가는 데서 오늘 희열을 가졌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는 뜯어내시는군요. 감사합니다”는 식입니다. 뜯어져 다윗의 내부에는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성신의 바람입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출생지가 저주받을 죄인의 자리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제물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죄로 인해 ‘상한 심령’ 그 자체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제사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씻어줄 다윗의 후손을 고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다윗보다 더 형편이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해답을 주신 그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러야 하는지를 맞추어내는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주시고 이미 확보된 해답과 맞추어나가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해답을 주시고 그 해답에 맞는 문제로서 우리가 평생 보내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로서 우리 자체가 오늘날 시대에 하늘의 구조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적이 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성령에 의해서 뜯겨서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돌아다니고 있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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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7우리교회주일낮설교녹취(눅 2:8-14/출생의무서움)

2009-12-28 20:23:38    녹취 : 오용익

20091227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8-14절/출생의무서움(이 근호목사)

(기도)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전체가 하나님의 양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을 이시간도 고백합니다. 어떻게 해서 소유가 되었으며 앞으로의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 날 것인지 어디에 정착될 것인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장 8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9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8-14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늘에서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고 눈만 내리는 것도 아니지요. 여기 보니까 하늘에서 조명발도 비취고 천사가 내려옵니다. 이것을 개방된 하늘이라 하는데 하늘이 멍청한 하늘, 그냥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하늘이 아닙니다. 원래 상자는 뚜껑이 있는데 그 뚜껑이 날아가서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느 구석에 가도 다 하늘나라에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가 ‘땅 끝에 가도 땅 속에 들어가도 주님이 거기 계시고 땅 끝에 갈지라도 주님이 거기 계신다.’(시 139:7-10)는 겁니다. 이 말씀은 중심점이 없다는 거예요. 명절 되면 서울에 갔던 자식들이 다시 고향으로 철새들처럼 내려오잖아요. ‘나는 역시 고향에 가니까 맘이 편해.’ 이러면서 정종 한 병 사 들고 내려가서 친구도 만나고 산소에 가서 벌초하고 소주 뿌리면서 ‘아버지예, 저 왔어예. 우리 큰 딸도 왔고예.’ 이런 식으로 절할 때 왠지 맘이 편하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본의 아니게 자기 태어난 곳을 이 우주의 중심점으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버리면 왠지 섭섭해지지요.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옛날 그 때 그 시절의 낭만에 젖어 보는데, 이것을 귀소본능이라 해서 뭔가 되돌아오는 본능이 있는데 그 되돌아오는 지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태어난 지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했던 출생의 비밀을 묻어 버린 채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왜 여기 존재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자기자리에서 제자리 뛰기 하는 식으로 뺑뺑이 돌다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것이 우리 고향 이야기는 아니잖아.’ 라고 여기신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이 성경은 진짜 우리 고향, 저 선산이 있는 그 촌 말고 진짜 우리 고향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그동안 우리들이 살았던 인생경험이 너무 많이 쌓여져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사하고 난 뒤에 보면 집안 천지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잖아요. 이걸 전부 다 벗겨 내야 됩니다. 우리 교회 컴퓨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거 고친다고 장로님 자제분이 밤샘작업 하다가 퍼져서 오늘 교회도 못 왔어요.

오늘 고쳐가지고 나오겠다고 한 것인데 본인이 퍼져버렸어요. 컴퓨터 고칠 때는 컴퓨터 뚜껑을 열어버립니다. 열어보면 안에 컴퓨터 갈빗대, 힘줄, 실핏줄, 내장들이 안에 들어 있지요. 납작납작한 반도체 칩들이 들어 있을 뿐이니까 보기에 흉하지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상상했던 컴퓨터 껍데기 같은 것을 위에서 강제로 벗겨냅니다.

죽 뜯어내면 평소에 내 내부에 몰래 감추고 있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순식간에 성경 앞에서 노출이 됩니다. 이것은 내장, 이것은 간, 이것은 쓸개, 이것은 심장이고……. 우리 머리가 매끈하게 보이지만 이 해골을 뜯어낸다면 이것은 하나의 명란젓갈? 대구탕 끓일 때 넣는 고니? 제가 엊그제 광주에 내려갔더니만 광주의 김 을수 집사님이 저보고 제발 사투리 좀 쓰지 말라고 당부를 해요. 할 수 없는데요 뭐.

그런데 그것마저 그런 물질적인 것들마저 뜯어내 버리면 안에 예수님이 이야기 하신 것이 나와요. 탐욕과 추악과 시기와 음란과 온갖 우상숭배와 질투와 미움, 이것들이 그 안에 안 들키려고 애쓰면서 소복이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만날 때는 그걸 감추고 만나기 때문에 상당히 예의 발라요.

상대방을 대할 때는 예의가 있어야 되니까 상당히 반듯하게 정돈돼 보이고 인격적으로 보이고 경건해 보이지요. 그걸 성경이 와서 컴퓨터 껍데기를 뜯어내듯이 사정없이 다 뜯어 내 버렸어요. 뜯어내 버리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만 소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껍질을 뜯어내고 쓰레기가 보이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끼신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천국 갈 성도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못가는 것은 안 뜯겨서 그래요. 누군가 뜯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자기 내부를 뜯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착한데 그 위에 예쁜 색깔로, 경건이라는 이름의 채색으로 교회 다녔다는 그것이 또 하나의 성과급이 되어서 훈장 달듯이 좋은 옷 갈아입은 모양으로 그렇게 옷만 갈아입고 천국 가겠다고 나섭니다.

뜯긴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성령이 안 오니까, 하나님의 영이 안 오니까 그들은 자신이 뜯겨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교회 안다니다가 죽을 때 되어서 강제로 뜯기는 사람 있어요. 제가 신문에 보니까 그런 사람이 나왔어요. 총신 교회사 교수인데 온 교회 부흥회를 다 다닌 거예요. 그것도 큰 교회를 가면 돈 많이 주거든요.

‘한국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라는 식으로 막 올려주는 그런 강의와 설교를 하다가 졸지에 두 가지 암에 걸렸어요. 병석에 누워서 하는 간증이 이겁니다. ‘나는 그동안 완전히 사기였다. 나는 교회의 목사와 장로 같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를 통째로, 갈빗대고 뭐가 다 뜯어내시는 주님 앞에 선 적이 없었는데 웬 은혜인지 나에게 은혜, 이 두 가지 암을 주셔서 다 뜯기고 보니까, (한 60가까이 되었어요.) 살아온 내 죄가 그 고니가 누가 안 가져가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거예요.

그걸 부흥사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감추고 그동안 위선적인 행동 참 많이 했지요. 그제서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오늘 누가복음 2장 8절에서 14절까지 읽어보시면 여러분이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크리스마스쯤 되면 이 구절을 많이 암송도 하고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 대목을 저와 여러분이 같이 보았습니다.

뭐가 생각나십니까? 딱 이것만 생각나지요. 구조, ‘하늘의 구조가 우리를 덮쳤구나.’ 솥뚜껑, 아주 큰 솥뚜껑이 하늘에서 나만 사는, 우리 식구만 있는, 우리 인간들만 복닥거리는 이 세상에 내려와서 통째로 덮어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하늘의 구조에 갇힌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늘의 구조에 갇히게 되면 그 구조에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 때부터 이 땅에 있는 위선을 그 껍데기를 뜯어내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뜯어내고 어떤 사람은 안 뜯기려고 반항하다가 지옥가고, 그런 요란한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똑같은 성경을 봤는데. 오늘 본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는 이 말을 그 동안 얼마나 자주 자주 접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걸 접할 때 마다, 목사님이 이걸 이야기할 때 마다 교인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보내겠습니다. 술 덜 마시겠습니다. 이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 자꾸 이런 쪽으로만 생각했지 우리는 지키고 말 것도 없이 이 말씀이 그냥 덮친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냥 덮치는 거예요. 어떤 커브가 심한 골목길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벌써 세 번째 차가 와서 박았답니다. 골목길 모퉁이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으니까 술에 취한 운전사가 박고 고쳐놓으면 또 박고, 이것이 연중행사에요.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세탁하고 있는데 완전히 가게가 부서지는 거예요.

수시로 우리는 이렇게 하늘나라의 그 구조에 의해서 부서져야 돼요. 그 동안 내가 고이고이 쌓아놓았던 규칙 같은 것, 어떤 스케줄이 있잖아요. 월요일에 뭐하고 화요일에 뭐하고 수요일에 뭐하고 ……, ‘나는 이렇게 하면 반듯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해? 누가 와서 나에게 이야기 해봐. 나는 반듯한 인간이야.’라고 자신만만했던 그 구조가 하늘의 구조에 의해서 들이박아 버리면 그런 구조가 남김없이 다 깨어지지요.

다 깨어지면서 고마운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하나님의 미래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약속, 선물이 내가 만든 깨어진 자리에 고스란히 소복이 남겨져 있습니다. 외부 구조에 의해서 그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이 말씀에 따라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 만날 때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 만날 때 만나고 싶은데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못 만났다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동방박사에게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별이 인도한 대로 가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를 구원할, 자기의 죄를 다 용서해 줄 구세주가 아기 모습으로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만나는 겁니다. 그런 방식이 성도가 천국 가는 방식이라고 어디에 나와 있느냐 하면 바로 베드로후서에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우리 마음속에 그 동방박사에게 떠 올랐던 샛별과 같은 샛별이 떠올라야 우리는 하늘의 구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만약에 그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안 떠오르게 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태어난 자리로 가요. 어디냐 하면 고향, 선산 있는 곳으로 소주 한 병 들고 ‘어머니, 잘 계십니까?’ 이러면서 가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난 출생의 자리, 선산 있는 곳, 우리의 본적이 있는 그곳에 갑니다.

그런데 성도의 본적, 성도의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늘로 인도함을 받으려면 그것은 하늘의 구조에서 내려온, 동방박사를 인도한 그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올라서 그때부터 우리 마음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아니고 샛별이 우리 마음을 이끌어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방식으로 한다, 이것을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에 여러분들이 저한테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찾아가지 못합니까?’라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봅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 ‘기뻐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요.

그런데 자기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크리스마스 날 기타 치면서 논다고 그것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누가 기뻐하느냐 하면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선택한 하나님이 우리를 딱 집어놓고 우리로 기뻐하는 거예요. 마치 동네 가게 앞에 돈 500원 내고 인형 뽑기 하는 기계 안에 보면 작은 크레인을 가지고 조작하잖아요. 크레인을 조작해서 인형을 위로 끌어올릴 때 인형이 기쁘겠습니까? 아니면 돈을 집어넣고 인형을 뽑아내는 그 사람이 기쁘겠습니까?

그 크레인이 내려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구조지요. 크레인이 인형을 낚아채서 올릴 때 누가 기쁘겠습니까? 인형은 아슬아슬합니다. ‘이것은 내가 출생한 선산이 있는 고향이 아닌데 지금 내가 어디로 가지? 내가 땅을 버리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슬아슬 내가 지금 위태한 것이 아닐까? 내가 광신도가 아닐까?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스스로 자기가 뭔가 불안감을 가진다는 말이지요. 그게 오늘 본문의 무서움인데 이것은 낯선 환경이고 예상 못한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조치가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계획한 대로 살았는데 그 계획한 것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미래에 이미 빨간 카펫을 깔아서 그 카펫을 따라가면 천국까지 골인하는 말씀이라는 카펫이 쫙 깔려있는 겁니다.

영화제 할 때 배우들이 화려한 드레스입고 서 있는 그 카펫만 깔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도 그 말씀이라는 카펫이 깔리면 그 카펫을 밟으면서,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하고 가는데 밟을 때마다 뭐가 터지느냐 하면 조명발,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 포착된 사람, 하나님께 납치된 사람 중에는 평화로다. 모든 죄를 묻지 않겠다. 너를 다그치지 않겠다. 너에게 정죄하지 않겠다. 너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평화로우니까. ‘피고는 고개를 들라.’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한 것인데 그렇게 말씀이 우리를 장악해서 데려가는 거예요. 지금 설교 아직 본론도 못 들어갔어요. 이제부터 본론 들어갑니다. 뭐가 지금 궁금한가 하면 12절에 보면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합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사람 손을 경유하지 않은 것, 사람 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표적이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 손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나라도 사람 손에서 움직이고 그래서 정부 각 부처와 부서가 있고 각자 하는 일이 있고 기업하면서 사업 따내고 하는 것도 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인데 표적이라는 것은 내가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발생된 그 무엇, 그게 표적이라는 거예요.

그 표적이 뭐냐? 내가 미처 모르는 출생의 비밀, 그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에게 등장한 어떤 분, 그 분이 우리의 표적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는 출생은 뭐냐?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달성군 00면,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뿐입니다. 그리고 경주이씨의 어떤 가문이다. 경주이씨 산수공파, 그 정도밖에 모르는데 그러한 출생의 비밀보다 더 원래적인 것은 뭐냐?

그 출생의 비밀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이게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출생의 비밀을 어떻게 알도록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죽이십니까?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열 살을 살아도 죽어야 되고 백 살을 살아도 항상 다음날 되면 죽어야 될 대상이 되는 우리는 왜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어떤 출생이 있었기에, 출생의 비밀이 어떠했기에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까?’를 알려주는 진짜 출생의 비밀을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너와 친하게 지내자. 평화로다.’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앞뒤도 분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이 목사님, 축하합니다.’ 영문도 몰라서 ‘뭐요?’ 하는데 ‘어쨌든 축하합니다. 장하십니다. 그렇게 훌륭한 곳에 가게 되다니 참 장하십니다.’ ‘가기는 제가 어디를 가게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다 알고 왔습니다.’ ‘아니 뭐 말입니까? 뭔데요? 사람이 이야기를 해 줘야 알지.’ ‘앞으로 차차 이야기 할 겁니다. 어쨌든 참 기쁩니다.’라고 악수하고 즐거워합니다.

지금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뭐가요? 뭐가 어째서?’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살기 위해서 돈 버느라고 미처 몰랐던 ‘나는 도대체 어디서 태어났기에 늙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신세가 되었느냐’ 하는 그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면서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이제는 영원히 안 죽는 곳으로 데려가는 그 비밀까지 아울러서 그것까지 알려주는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이고, 축하합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좋겠네요. 참 기쁜 소식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뭐가 기쁜 소식인데? 뭐가 어쨌다고. 제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당신이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적은 당신이 행한 것과 상관없이 거저 덮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뭘 할지도 모르고 뭘 했는지도 모르고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냥 내 것만 생각하는 가운데 있었는데 난데없이 축하합니다, 다행스럽네요, 좋겠습니다, 행복하시겠네요, 축복받아서 좋겠네요, 라는 말들을 하늘 쪽에서 쏟아낸다.’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시지요? 10절에 봅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는 앞뒤 내막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는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했어요. 영문도 몰라요. 천사가 왜 나타났는지, 천사가 왜 기쁜 소식을 전하는지, 그게 왜 기쁜 소식이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멍청히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빨리 다윗의 동네에 가서 강보에, 보자기에 누인 아기를 보세요. 내가 당신에게 기쁜 소식이라 한 그 취지, 이유를 그 아기 예수를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라고 하자 수많은 천군천사, 하늘의 군대가 찬송을 불러대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찬송을 부르고 천사가 떠나고 난 뒤에 목자들은 지체 없이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고 천사가 하는 말이 다 일치되는 줄 알고 그걸 마음속에 담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지금의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거예요. 왜 한국사람이 이 성경을 봐도 감이 오지 않느냐 하면 “오늘날 다윗이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기 때문이에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났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처음에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왔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찾아왔어요. ‘이스라엘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약속을 너희에게 실시하겠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준다는 말은 그 자체가 구원하시려고 찾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했어요. ‘다윗의 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천국의 가족이 되는 것과 같은 말이다.’라는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약속대로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 약속에 해당되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윗의 동네에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약속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다윗의 동네라는 이 동네가 무슨 동네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다윗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그 사람이 무엇을 몰랐느냐 하면 ‘내가 왜 날 때부터 죄인이고 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가?’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왜 몰랐느냐? 그런 질문을 다윗 본인은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 저는 왜 날 때부터 죄인입니까? 하나님, 저는 왜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합니까?’ 그런 질문을 다윗이 한 적이 없어요. 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기는 훌륭하기 때문에, 자기는 착하기 때문에, 자기는 왕이기 때문에, 자기가 최고 높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피부를 뜯어내요. 다윗을 뜯어내서 다윗을 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죄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구, 펜치, 드라이버, 망치, 죄를 만들어내는 보자기,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한 거예요.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자기가 간음한 여인의 남편을 몰래 죽였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줄로 여겼어요.

그런데 처음에 이야기한대로 모든 것이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노출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너는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살해했다.’라는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그 이야기를 해 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고, 들켰구나. 부끄럽다.’ 이렇게 나와야 할 것인데 다윗은 반대로 나갑니다. ‘나 들켰다!’ 이래 나가요.

‘나 들켰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나의 근본을 알았다. 나의 출생의 비밀을 이제야 알았다.’ 시편 51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미친 것 같아요. 자기의 껍데기가 뜯긴 것에 대해서 비로소 5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요. 여기에 시원한 봄바람이 붑니다. 발바닥부터 머릿속 두뇌까지, 머리끝까지 시원하게 스쳐갑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그야말로 성령의 바람이 불었어요. 성령의 바람이 부니까 그동안 착한 자처럼 행세했고 신앙 있는 척 했고 율법을 지킨 척 했고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사는 성화된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모든 그 심적인 부담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죄지은 것을 들킨 순간 그 뚜껑이 다 열려버렸어요. 성령의 축복입니다.

그것이 다윗이라면 그 다윗의 가족도 다윗이 경험한 것과 같은 똑같은 것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다시는 죄에 대해서 너희에게 시비 걸지 않을게. 네 죄에 대해서 묻지 않을게.’ 죄를 들추어내는 과정과 더불어서 죄 용서하는 과정이 겸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청진기를 대고 환자를 검사하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주사기로 엉덩이를 찔러대면서 ‘당신은 이런 병이 있는데 주사기 들어갑니다.’라고 쑤시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당신 내장에는 헬리코박터라는 세균이 있는데 여기 2주치 약 잡수시면 깨끗해집니다.’ 헬리콥터나 있는 줄 알았지 헬리코박터라는 세균이 있다는 것은 몰랐지요.

그 세균이 위장염과 위장암을 유발시키는 나쁜 균인데 그것은 위장의 독한 위산에도 녹아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력한 세균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이 있음을 다 알고 의사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기껏 아는 것이 경주이씨 산수공파, 저는 무슨 파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은 제 아내의 경우라면 안동 권 씨 양반집이죠.

그래서 안동 권 씨 같으면 안동에 가야 되는데 출생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어요. 그것은 자기를 뜯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문자랑, 가문의 영광 자랑하는 겁니다. ‘나 어디 출신이다. 나 이만큼 잘났다.’ 그것은 출생의 비밀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뜯겨야 됩니다. 드드득, 뜯겨야 돼요.

그 뜯기는 과정이 뭐냐? 다윗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행위가 뜯길 때 다윗은 이야기합니다. ‘구세주여, 당신이 나를 손댔구나. 당신이 나를 침대에 눕혀놓고 손댔지. 고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제물도 아니요, 헌금도 아니요, 봉사도 아니요, 착한 일도 아니요, 바자회도 아니에요. 찬송 부르기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나의 뜯긴 상한 심령, 뜯어내면 나오는 그 구더기가 있는 쓰레기, 온갖 탐욕과 질투와 시기와 간음, 온갖 쓰레기가 가득 담겨 있는 그 정경, 그 모습이 그대로 쟁반에 담겨서 그대로 하나님께 다 바쳐질 때 주님께서 거기에 솔솔 죄용서의 피를 뿌려줌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 작품이 뭐냐? 붕어빵, 다윗이라는 붕어빵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럼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습니다. ‘나의 죄를 씻을 분은 내 후손에서 일어난다.’ 그 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동네에 아기예수를 임신한 마리아와 요셉을 강제로 어느 땅에서? 바로 다윗의 동네에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해서, 다윗 같은 인간도 구원해준 그 다윗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하나님께서 구조를 뜯어내면서 용서하신 그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약속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오늘 이야기가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우리를 또 즐겁게 하네요. 앞으로 될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이미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다윗은 죄부터 먼저 지어놓고 자기후손으로 예수님 오기를 기다리는 아주 답답한 심정이지만 우리는 이미 해답부터 먼저 나와 있습니다.

의사가 주사기의 액을 팍팍 뿌리면서 ‘보이죠? 여기 주사액 나오는 것 보이죠? 자, 이제 검진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팍, 쑤시죠. 이미 우리의 죄를 씻어줄 주사액이 이미 있어요. 그걸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거늘’ 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 죽어야 될 너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렇게 죽었다 살아난 능력이 너에게 들어온다.’는 거예요.

신앙생활 우리가 몇 년 했습니까? 그리고 목사가 된 저는 몇 년 되었습니까? 문제를 우리가 만들면 안돼요. 문제를 우리가 만들면 그 해답을 내가 만든 해답가지고 자꾸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금 제가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님들이 성경보고 지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일단 행동을 해놓고 ‘이게 어느 성경구절에 맞는가?’ 하고 꿰어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성화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합니다. ‘아하,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했구나.’ 그렇게 하는 거예요. 문제를 자기가 내고 답을 자기가 만들어서 꿰어 넣으면 다 만점이지요. 세상에 그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천국 간다고 하고. 여러분, 아침밥 했다고 해서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밥 짓는 것은 내 행함으로 짓지만 아침이 오는 것은 지구와 태양의 문제지요.

우리에게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문제를 만들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문제 주는 것도 다른 세계에서 문제를 가져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해답, 복음이라는 해답, 십자가라는 해답도 우리가 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십자가가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데서 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몸 아픈데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 기에 제가 반대했어요. 병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면 예수님의 근원적인 해답, 우리의 문제를 안고 있는 그 해답, 십자가의 피를 내가 만든 문제, 나는 병에서 나았으면 좋겠다는 내가 만든 문제에 그 해답을 적용시켜 버리니까 이것은 무엇에 대한 모독이냐 하면 주님의 피 흘려 죽은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에요.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주님의 생명이 쏟아졌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지금 문제가 밥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고 몸이 아파서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해도 죽고, 부자 되어도 죽고, 공부 잘해도 죽고, 서울대학 다녀도 죽고, 자식이 행복해도 죽고, 교회가 부흥되어도 죽고. 그것도 죄로 말미암아.

취직 잘되어도 죽고, 안 되어도 죽고, 백수라도 죽고, 연봉 1억이 넘어도 죽고. 이 문제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문제에요. 그 문제를 손대기 위해서 주께서 뜯어내는 겁니다. 다윗에게 찾아와서 뜯어내서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야, 이제 뜯겨보니까 진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를 알겠다.’

완전히 뜯겨보니까 내 속에서 올라오는 욕심을 교회 와서 기도해서 해결해 보겠다는 이런 나쁜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나쁜 짓 했다고 헌금 보탠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그런다고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하는 식이죠. 예수님께서 아예 벌거벗고 죽으신 것은 좀 윤리 도덕 걸치지 말고, 또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도 말고, 문제 만드는 것도 주님께서 만들어서 줍니다.

‘뜯겨라, 내 앞에, 십자가 앞에 나와.’ 다 뜯어내고 그 다음에 뜯어내면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한쪽에는 주사기, 우리가 문제 해결할 필요도 없이 문제의 해답을 이미 쥐고 있어요. 쥐고 십자가, 십자가는 원래 끝이 뾰족하거든요, 그 십자가 봤지요, 그 십자가를 우리 내부에 집어 넣어버리면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우리 내부를 적시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리되면 우리 안에 뭐가 남느냐 하면 우리가 손대지 않았던, 우리를 경유하지 않았던 다른 하늘의 요소가 우리 안에 돌아다니면 그때부터 우리 자체가 예수님 계신 표적이 돼요. 낯선 것이 돼요. 이것 말하고 설교를 끝내겠습니다. ‘손대지 마라.’ 오늘 주시는 기쁜 소식입니다. 제발 여러분 자신에게 손대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은,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뜯어내고 주께서 해결 짓고 주께서 회수해서 걷어가지고 주께서 천사 같은 사람 만들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마음에 가벼워하면서 ‘또 뜯어줘요.’ 해서 또 낱낱이 뜯겨서 예수님의 용서가 얼마나 고맙고 좋은 것인지를 깨닫는 다음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의 동네에서 누가 나셨답니다. 그 죄 많던 다윗마저 용서했던 그 용서의 효과를 주실 그분이 오셨답니다. 이미 과거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지신 이유를 저희들은 알지 못했는데 우리의 모든 사정이 낱낱이 뜯기는 그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피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그릇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속에 피가 출렁거리게 하여 주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