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2. 15:06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레미야 10:1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2009년 11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2-16 

(렘 10:12, 개정)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렘 10:13, 개정)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렘 10:14, 개정)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 10:15, 개정)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렘 10:16, 개정)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신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이 자연세계에서 영의 세계로의 진입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요? 사람들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만 시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것도 늘 시도하게 됩니다. 신의 세계에 대한 집념을 막을 방도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마저 자연 세계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대잔연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영적 세계에 합류한 것으로 오산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대자연에서 영적 세계를 걷어내고 모든 것을 육의 세계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더 이상 영적 세계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니고데모 같은 분들은 영적 세계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대자연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먼저 선수를 치시면서 대답해주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시도는 여전히 육에서 육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와같은 의식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데서부터 시작해서 천국 입성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나온 시도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헌금하고, 선행하고, 전도하고, 예배나 의식에 참여하고, 봉사하고, 성경 공부하므로서 그것을 통해서 천국 입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행함에 해당됩니다. 이 대자연 세계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영적 세계와 연결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결코 영으로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육적 행위란 본인부터가 육이기 때문에 그 성격상 도로 자기 자신의 행위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1-23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사단의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자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인간을 통해서 실시합니다. 이로서 인간의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참된 일, 참된 영적인 일은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에 보면,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인간들이 마음껏 죄를 지는 그 와중에서 드러나십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육적 행위를 긍정합니다. 신학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이 이로서 밝혀집니다. 신학과 성경이 다른 점은, 신학은 어떻게든 인간을 도와주고,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희망을 주고, 낙망하지 않게 하고, 위로하고, 아껴주고, 사랑하고, 사람의 행함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모멸하지 않고 모든 차이를 아우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인간은 두고 인정사정없이 죄인이라고 정죄해버립니다. 천국갈 사람과 지옥갈 사람을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났다고 통보해줍니다. 성경 안에는 예수님의 계시고 십자가 피흘리심으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행함을 인정해주는 신학을 동원시켜 자기를 긍정하는 쪽으로 의미를 재구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행함이 곧 거짓 신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대자연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중심부에 차지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에 영적 구심점을 실제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 본인이 영원히 거주하고 싶어서 만들어 놓으신 집입니다. 이 집의 특징은 사람이 만든 것을 전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터전을 그 안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사람의 노동을 거부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적 건축재료의 가치를 능가합니다. 이 성전의 특징은 그 안이 텅텅 비워있다는 점입니다. 왜 비워있을까요?

성전이라는 건축구조물은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하나님께서 와 계시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나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임의로 와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포착하고 하나님을 늘 붙잡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실제로 말씀을 가지고서는 인간들은 자기 행함의 업적으로 자기에게로 되돌려놓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우상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죽음을 당하시고 버림받으시므로서 진정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영적 세계로 진입하느냐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들에게 극히 어리석게 보이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지혜가 있는 곳을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성전, 곧 ‘하나님의 자기 집’으로 규정지었습니다. 이로서 영적 세계는 철저하게 이 세상을 우상의 세계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적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오직 십자가의 피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집으로 간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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