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5. 11:23

열방의 길 (예레미야 10: 1- 5)

열방의 길

2009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5

(렘 10:1, 개정)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렘 10:2,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렘 10:3, 개정)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렘 10:4, 개정)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렘 10:5, 개정)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방민족의 길을 배우지 말라는 것은 곧 일단 이방민족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함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민족과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여도 그 바탕에는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깔려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커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이방인의 길은 바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과 징조에 대해서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징조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자연현상을 보고서 왜 이방인들은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감사하게 될까요? 이방민족들은 대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무슨 원리 속에서 벌어지는지를 담아내고 해석할 수 있는 틀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겁을 집어먹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대자연의 그 어떤 변화라도 담아낼 수 있는 생각의 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대자연을 아무렇게나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점을 겨냥해서 운영하십니다. 그 중앙지점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내신다”고 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았는데 거기에 보면, ‘안식일 지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만드신 것을 찬미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즉 안식일제도가 대자연의 중앙지점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불분명한 점을 갖게 될 것이 뻔합니다. 자신들이 안식일날 제사드리는 것이 지금 자기네들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흐름과 질서와 무슨 연결고리를 갖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들어가면 그들은 모세로부터 더 깊이 있는 안식일과 대자연과의 연관성을 듣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지켜라. 이는 너희들이 종되었던 애굽으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라는 대자연은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길을 내어주었습니다. 반면에 그 홍해를 애굽군대를 몰살시키는 대자연의 덫으로 작용했습니다. 동일한 대자연의 기능이 상호 대조되는 방식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성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 사람들과는 다른 종족임을 드러내는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발생된 것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피를 내고 그 양고기를 식구들이 다같이 먹고,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는 이러한 제사 중심에 대해서 대자연의 움직임은 직접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는 대자연이 지켜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약속 중심으로 사는 날 동안에서 대자연도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대자연의 중심점이 되는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약속에 있어 ‘하나님의 죽음’이 관여했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빠트리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기에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약속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죽음이 핵심내용으로 들어가 있기에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수풀에 마침 잡혀있던 수양이었습니다. 그 수양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약속으로 인해 대자연은 그 중심점을 갖게 됩니다.

엿 만드는 조총을 솥에 넣고 끊이다가 작대기로 휙 젓게 되면 그 둥근 파장의 형태가 얼마동안은 뚜렷하게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작대기를 뽑은 그 중앙지점은 가운데 점으로 하여 여러 개의 둥근원이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대자연 세계는 축복과 저주를 실시하기 위한 환경으로서 중앙지점의 지시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인간들이 만든 축복과 저주는 아무런 효험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들은 자연의 징조가 두려워 신 제조에 나서게 되는데 그 제조된 신은 속성은 꼭 그 신을 만든 인간의 성품을 닮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이야지만 만든 인간의 장점에 복을 주고 만든 인간의 약점을 덮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이면 열사람마다 다 성격이 서로 다른 신을 제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진노의 세계임을 분명히 하는 바탕 위에서 전개됩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바탕 위에서만 드러납니다.

로마서 5:9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그 중앙에 있는 예수님의 피와 무관한 일을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17:2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죽으심’, 즉 ‘하나님의 피’가 들어있습니다. 이 피의 가치와 본질을 두 가지 방법으로 드러내십니다. 하나는 축복이요 다른 하나는 저주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받아 당연함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이 죽으신 그 희생의 피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란 하나님이 피가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피를 증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서 열매처럼 생겨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피의 축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반대로 저주받아야 될 자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저주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저주받는 것은 오직 ‘피 없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생을 살면서 피를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의 피로 세운 곳이기에 피의 위력만 사모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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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0:1-5) 오용익
 
20091104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0장 1-5절/열방의 길(이 근호목사)

(기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저희를 아는 것처럼 저희들이 하나님을 잘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셨으며 앞으로 어떤 조치를 하실 것인지 저희들이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사람이 자기 행위를 버리지 못하면 언젠가는 복음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복음도 가지고 행위도 가지고 둘 다 가질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자기 행함을 선택하고 복음을 참고로 해버리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할 때 주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그 안에 우리가 일시적으로만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믿을때만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다 하도록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라갈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나 홀로 살아가면 아무리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다시 생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세울 때는 부인하고 또 부인하고 평생을 부인해도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앞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 선도하여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그 뒤를 늘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 바라보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0:1-5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말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몰라도 된다, 교회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바 없다, 그냥 관계 끊고 살아가면 우리 나름대로의 완전함을 추구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시는데 오늘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렇게 합니다.

“너희는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합니다. 뉘앙스가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고 해서 열방에 대해서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니고 열방, 다른 사람들,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제대로 알아서 ‘저것은 아니거든’ 이라고 그것을 부인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런 투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회사 사장님이 자재과 직원에게 ‘중국에서만 수입하고 일본에서는 수입하지 말라’ 라고 지시를 했다면, 단순한 사람 같으면 중국에서만 수입하고 아예 일본과는 거래를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똑똑한 직원 같으면 왜 일본에서는 수입하지 말라고 했을까, 라고 해서 중국의 것도 수입하지만 수입한 중국의 것과 수입하지 말라고 한 일본 것을 나란히 비교해서 사장님이 그렇게 지시를 한 취지를 제대로 알아먹는 그것이 아주 훌륭한 직원이 되겠지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그냥, 이것이 복음이니 복음을 믿으세요, 하면 우리는 중국산 수입하듯이 ‘예, 복음 믿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을 믿지 말라’ 라고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2장 3장에 죽 나오는 이야기가 복음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들은 다른 복음입니다, 라고 진짜 대조하는 식으로 십자가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이라는 것도 그 방식이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에게 준 그 방식과 똑같은데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에 인간들이 율법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고 ‘그런 식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니까, ‘이런 식으로 구원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구원되기 전에는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사도바울에게 율법도 주고 또 다메섹에서 예수님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만난 그것이 이미 율법으로 흠이 없는 본인에게 의미가 있다, 관련이 있다고 본 겁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을 대표해요. 구원받은 사람을 대표하는 겁니다. 율법을 갖고서 인간들에게 어떻게 조치를 했으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익히 그동안 본인이 계속해서 해왔던 구원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아닌 것을 먼저 이야기하지요. 복음이 아닌 것을 먼저 이야기해서 복음이 복음 아닌 것에 섞이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헌 베를 가지고 새 옷에 기우면 안 된다’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 새 옷도 찢어진다’ 고 했습니다. ‘새 포도주도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버리면 새 포도주의 가치가 없어지고 땅에 쏟아진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양쪽 다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 때에 백지상태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 하지 말라’ 하는 그 ‘하지 말라’ 가 이미 구원받아야 될 우리 성도도 해 오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이방인들, 열방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과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서 다만 차이나는 것은, 우리는 그런데서 하나님의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그것뿐이지 평소에 깔려 있는 바탕은 그들과 동일한 바탕위에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복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들어오면, 성도만이 ‘아하, 이런 차이가 나는구나’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제가 어떤 논문을 쓰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 다른 복음이냐를 가지고 그들을 끝까지 밀치는 식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사람은 자기의 문제점은 몰래 감추고 거기에 복음이라는 수입품을 하나 더 얹으면 모든 것이 구원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새롭게 들어오는 그것이 자신이 옛날에 간직하고자 하는 것을 부정하고 추방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기존에 있는 것에다 추가적으로 뭘 하나 더 보태서 ‘나는 양쪽 다 가졌으니까 이렇게 하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저렇게 다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열방의 길을 알고서 그것을 배우지 말아야 하는데, 그 열방의 길이 뭐냐 하면, ‘그들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이야기할 것이 많아요.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한다는 이 말을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그 틀에다 그대로 집어넣어 볼게요. 이방인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반기고 감사하고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사고의 틀이 어떻게 잡혀 있기에 하늘의 징조라는 하늘의 변화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식으로 소화시켰기에 즐거움이 되어서 튀어나오고 이방인들은 무슨 기능이 빠져있기에 한껏 두려움으로 다가오느냐 하는 겁니다.

일식(日蝕), 그것을 왜 덕만공주는 좋아하고 미실은 무서워했습니까? 왜 선덕여왕은 그것을 반겼고 미실이라는 아줌마는 왜 그것을 싫어했는가? 요새 복음을 아는 집에서는 복음만 듣겠다고 텔레비전을 치워버렸는데 제가 TV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난감해지지요. 사람들이 예상 못한 자연의 변화가 올 때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왜? 예상을 못했으니까. ‘이럴 수 없느니라’ 하는 것들, 엘리뇨 같은 것, 쓰나미 같은 것들, 두려운 것이 당연하잖아요. 안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두려워하는 사람은 새로운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 바구니가 좁아서 ‘아, 이것은 예상치도 못하던 것인데, 지금 바구니가 꽉 들어차 있는데’ 하면서 그것이 들어오면 바구니가 찢어질 판인 거예요.

‘뭐 이런 것이 다 있어? 이것은 징벌인가? 저주인가?’ 이렇게 생각한다, 이말 이지요. 그런데 성도는 앞으로 세상에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전부 다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이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어진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알게 되면 신기한 일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파도가 쳐도 땅을 넘지 않는’ 늘 일상적으로 보는, 해운대만 가도 늘 볼 수 있는 일상조차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시편 136편에 보면 나오지요.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이 있고 해가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라 이 말이지요. 왜 이스라엘한테 그러한 틀이 잡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 안식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안식일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애굽에 나올 때 처음 안식일을 알았습니다.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홍해가 갈라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와서 십계명 받을 때에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왜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까, 그래서 ‘왜 안식일을 지켜야 됩니까’ 라고 할 때에, 그 안식일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천지창조 할 때의 원리원칙이 안식일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뭐가 연결이 안 되느냐 하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사실과, 안식일 날 제사지내는 것하고 어떤 연관이 있느냐가 어려웠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안식일 날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창조가 하나님이 목적한 바대로 정상대로 적용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믿겠는데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드리는 이 평범한 제사가 어떻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우리를 보호하는 환경이 되느냐 하는 그 논리적인 고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1차 들어가려고 하다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 유리하면서 주어진 신명기의 그 십계명에 보면 ‘너희들은 안식일을 지켜라’ 해놓고 창조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들을 끄집어내었으니까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하니까, 전에 천지창조를 일곱째 날 만에 했기 때문에 ‘안식일 지켜서 제사하라’ 하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그 내막이 밝혀진 겁니다.

어떻게 밝혀졌는가 하면,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올 때 아무런 사건 없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에요.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려서 골라내고 구분하는데 뭘 로 구분했느냐 하면, 착함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이웃사랑, 이런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잡는 그 하나님이 만든 간이제사에 그들이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라는 것은 인간이 손을 대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손대는 자연환경이에요. 그런데 그 자연환경도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우리에게 ‘어린양을 바쳐서 피 바르면 구원 받는다’고 했던 그 구원의 약속을 주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말씀 주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되게끔 자연의 모든 배치와 자연의 모든 움직임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홍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요단강입니다. 그들은 요단강? 여리고? 그 무엇이 있더라도 세상만사 움직이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그분의 손아귀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 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이 세상 모든 움직이는 권세를 제게 주신 이유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내 백성에게 영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세세한 모든 조치가 주님의 손에서 작용하고 있을 줄로 저는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17:1-3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미 세상만사는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조총을 한 솥 끓여서 막대기로 휙 젓고 난 뒤에 막대를 쏙 빼버리면 그 저었던 소용돌이의 흔적이 그대로 동그랗게 남지요. 그것을 성도는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테러나 자연재해나 모든 사건들, 버마의 아웅 산 사건, 이라크의 폭탄테러나 세상의 어떤 것, 아르헨티나에서 탱고경연대회 하는 것, 아마존 강 근처에 사는 아줌마들 저녁 먹는 것 같은 아무 상관없는 그 모든 움직임하나하나가 결국 소용돌이쳐서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가 뭡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아닙니까?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조총이 뺑뺑이 돌아도 딱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는 겁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죄로 더러웠던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시는 바로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10절.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 마귀의 어떤 변화, 이단의 변화라도 그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 세계를 조총의 소용돌이처럼 휘 저어 가면서도 어찌되었든 간에 이 무지몽매한 우리에게 피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피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뭐냐?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 자기 아들의 피, 예수님의 피의 본질, 그 진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전 세상을 진노의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뭐냐? 우리는 분노의 대상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마세요. 그냥 분노, 진노의 대상입니다. 응애, 하고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면 진노의 대상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식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지요. 진노의 대상입니다. 남의 새끼는 밉지만 내 새끼는 좋아하지요? 진노의 대상이에요. 나는 내 새끼를 좋아하지만 주님에게는 진노의 대상이에요.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 거기서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 하고 두자로 약속인데, 하나님의 약속 만들기에 있어서, 빼놓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죽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죽음이 거기 섞여 있어야 그것이 뭘 결정하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를 결정해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5절에 보면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말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 바탕위에서 축복과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세상의 징조가 무서워서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자기모습을 닮은 신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들은 전부 다 꼭 자기를 닮았어요. 트랜스포머, 아무리 형체를 바꾸어도 자기 닮았어요. 모든 종교의 신은 각각 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이 100명이 나오면 그 100명의 신이 전부 다 달라요.

왜? 다 자기 닮았으니까. 여자들은 꼭 여자 신을 섬기고 남자들은 꼭 남자 신을 섬기고. 완전히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의 체질설과 똑같아요. 태음인, 소양인, 이런 체질 따라서 신이 다 다를 참입니다. 정말 다 달라져요.

성질 찬찬한 사람은 성질 찬찬한 신을 섬기고 저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성질 급한 하나님을 섬기고. 그래서 자기를 닮은, 자기의 대리인 같은 자기 닮은 신을 섬기는데 왜 그런 신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 신이 있어야 내가 원하는 축복을 그 신을 통해서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축복이라는 것은 어떤 축복이냐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축복이에요.

그리고 사람이 저주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받을 경우에 저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만들어놓으면 참 두고 두고 살아도 저주받기 힘들어요. 왜? 자기가 싫은 짓을 했을 경우에만 저주가 온다고 자기 법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남은 곧잘 저주를 받아도 자기는 좀처럼 저주를 안 받아요.

법을 자기 좋은 쪽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어느 교회도 그 교회 신은 그 교회 목사가 만들어요.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나가라.’ 그런데 어느 교회 신이든 어느 인간이 믿는 신이든 간에 특징이 있어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근거로 한 신은 어느 신도 없습니다. 어떤 신도 없어요. 그래서 가짜가 100프로입니다.

이미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집어넣었으니까 100프로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왜 그 조총 같은 이 세상에 온 천지를 덮도록 만들었을까요? 주께서 일부러 만들었어요. 왜? 진노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너희들이 우상을 만들었구나.’

어떤 변화를 두려워해서 사전에 조치한다고, 두려움을 커버하기 위해서 축복이라는 것을 가지고 덕지덕지 이중 삼중으로 바르는 겁니다. ‘나는 교회 30년 다녔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온 가족이 유아세례 받게 했습니다’ 하는 이런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오는 자기저주를 사전에 커버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우상들을 만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이 다듬고 쪼아서 만든 가짜이고 우상이기에 축복과 저주가 오지 않는다’ 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축복은요, 그 축복을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축복 안에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뭘 해도 복이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나님이, 삼자가 개입해서 만들어낸 진짜 하나님의 축복은 그 근거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기 때문에 생긴 축복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자기죽음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생겨나는데 그게 바로 수풀에 있던 준비된 희생제물입니다. 그 희생제물이 핵심요소로서 찐빵의 앙꼬처럼 축복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서 개입됨으로 말미암아 그게 아브라함을 넘어서서 이삭과 야곱과 영원토록 하나님의 결정 난 축복입니다.

하나님 자기축복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합니다. 근거가 예수님의 피에 있기 때문에 축복속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를 샤워실에서 완전히 덮어쓰듯이 피바가지를 덮어씌우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조총같이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에서 어느 지점을 찍어내도 다 피로 만든 조총이야! 다 맛있고 달아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그 안에 예수의 피가 묻어 있어요. 무슨 짓을 해도 축복입니다, 그게! 교도소에 열 번 들락거려도 그게 축복이에요. 도저히 축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문둥병자 되어서 소록도 가든 안가든, 가도 축복이고 소록도 안가고 있어도 축복이에요. 전에 이야기 했지요.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모세야, 하나님 아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부터 먼저 보자. 네 손을 품에 넣어라’ 해서 모세가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니까 저주 받은 손이 되었어요.

‘다시 집어넣어라’ 해서 집어넣었다 빼보니까 멀쩡한 손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면, 진노 받을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들만큼은 멀쩡하게 되는 축복 속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결국 성도라는 것은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어진 솜씨, 그 포도나무에 달린 열매가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지막 운명은 누가 책임지느냐?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끝까지 은혜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박 용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두산 그룹 회장했던 사람인데 오늘 자살했어요. 그 뉴스를 접한 순간 제가 늘 이야기 했던 것이 다시 생각났어요. 인생은 없어요.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전 두산그룹 회장 박 용호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보세요. 오늘은 없잖아요.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제가 없다고 안 합디까? 인생은 90년이 있었는데 91년째 보면 없어요. 그냥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목사님, 성도는 있잖아요.’ 성도가 있는 것은, 성도가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이 있을 경우에만 그 지체로서 성도가 있어요.

그리스도 몸에 안 붙어 있는 사람은 없어요. 없다니까요!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너희는 안개’ 라고 했거든요. 안개라는 뜻이 뭐냐 하면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듯한데 아침 9시 반 되니까 없어져 버렸어요. 인생이란 게 없어요. 옆집에서 여러분을 누가 약을 올립니까? 없는 게 약을 올려요. 없는 게.

성경에 나옵니다. ‘조금 두고 봐라. 그들은 없어질 것이다. 너를 욕했던 것, 비난했던 인간들 없어진다.’ 없어지고 무덤 속에 가면 주께서 새로 만들어내지요. ‘너는 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줄 저주의 그릇이 되어서 지옥 불에 가기 위해서 불러 낸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축복하기 앞서 자기 아들을 축복하셔서, 자기 아들만, 그리스도 몸만을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몸에 붙어 있는 그 지체도 덩달아 예수님의 피, 살, 그것을 생명이라 합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과 살이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나는 자에게만 그 예수님의 축복의 효과를 같이 누리는, 그것을 상속이라고 하고 기업이라 하는데, 그 새로운 복을 받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한번 축복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 축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축복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돼요. 제가 지난 강의 때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율법관계와 인간들의 율법관계가 어떻게 차이나냐 하면, 인간들은 어떤 행동을 먼저 해놓고 그게 나중에 법에 맞는가, 안 맞는가를 견주어 보는 식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행동자체가 율법에서 나온 거예요.

일점일획 모든 것이 율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견줄 필요가 없이 예수님 자체가 법이고 완성이고 완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그 완료된 행위 중에 하나가 성도 만들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주기’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어떤 복을 받으면 그 성도의 복 자체가 우리가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우리에게 완료가 됩니다.

이미 완료된 복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와 버렸으니까 그 완료된 복을 받으면 우리는 그 복에서 어떻게 빠질 수가 없어요.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축복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만날 견줘보기를 하기 때문에, ‘오늘도 최선을 다했는가 한번 보자’ 하기 때문에 이것은 완료되지 못한 세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저 해변 가가 천국이라면 바다에서 무서운 상어, 죠스가 다 달려드니까 힘을 다하여 그 완료된 천국에 도달하고자 배영, 접영, 자유형, 온갖 헤엄 다 치면서 숨차게 달려가면서 성화하려고, 거룩 되게 하려고, 그래서 그 천국에 박 태환처럼 마지막에 골인하려고 애를 쓰는데 죠스한테 뜯어 먹힙니다. 미완료의 세계가 그렇게 무서워요. 오늘 본문대로 두렵습니다.

은혜 받아서 착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어떤 사태가 벌어지니까, 차를 타고 가는데 옆 차가 나를 앞질러서 지나가니까 ‘저게 나보다 빨라? 너 오늘 죽었다’ 하면서 벌써 욕이 튀어 나왔어요. ‘아니야’ 하면서 어제 은혜 받은 것 또 미완료에요. 얼마나 두렵습니까?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이 한꺼번에 부정되고 미완료가 되어 버리면, 지금까지 방언을 해왔는데 어느 날 방언이 안 터지면 그 미완료가 얼마나 무서워요.

이게 뭐냐 하면 피로 말미암아 완료가 되고 화목이 되고 의가 되고 복이 되고 생명이 되는데, 피는 없고 자기 괜찮은 행위를 주장하니까 이런 저주스런 몰골로 평생토록 피곤하게 살다가 나중에 보면 없어요. 그렇게 애썼던 것이 나중에 보면 없어졌어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 찌어다.” 진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이미 완료된 천국 안에 있는 사람은 온통 벽에 이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되 인간은 거짓되다.’ 아멘! ‘오직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네가 진노에서 구원되었으니.’ 아멘! 그것이 온 천지에 온 벽에, 위도 피, 아래도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게 교회입니다. 오직 그 예수님의 진노에서 건져주신 어린양의 피, 여러분은 그 완료된 축복을 평생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상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내가 기대한 축복 받아내기 위해서 조작된 하나님을 우리가 신학으로 만들어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진노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볼 때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요 축복의 작품인데, 어떤 두려움도 없이 이제는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