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1. 17:01

부녀들의 눈물 (예레미야 9장 17-22절)

부녀들의 눈물

2009년 10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7-22

(렘 9:17, 개정)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렘 9:18, 개정)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렘 9:19, 개정) 『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렘 9:20, 개정)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렘 9:21, 개정)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렘 9:22, 개정) 『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선지자들은 일반인들 하고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반응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이런 선지자들에게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실수입니다. 일반들은 선지자를 대하면서 선지자와 하나님 사이에 오고가는 그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일방적으로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든지 아니면 긍정적으로 본다든지 하는 평은 오해에서 나온 겁니다. 선지자들은 대중들의 정신을 조작하려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현 세태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대 나라를 울음의 바다로 몰아넣으려고 하십니다. 전문적으로 슬픔을 연출하고 울음을 자아내는 업을 갖고 있는 부녀들까지 동원시켜서라도 유대나라 전체를 울음바다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제 유대나라는 망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 즉 이스라엘은 늘 자기 주제 파악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망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주제 파악이 안될 때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 나올 때, 마치 애굽인들의 가정들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그 정경을 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택한 백성에게 취하는 보호 프로젝트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왜 히브리인들이 사람이 출입하는 출입구 문지방과 문설주에 ‘흠없는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피가 거룩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도 막아내는 사랑의 피인 것을 애굽인들은 미처 알지를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제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납득이 되는 방식만 동원시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보호막은 인간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입니다.

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느냐 하며는, 하나님의 징벌, 즉 하나님의 무서운 지옥의 형벌이 그토록 깊은 이유를 인간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파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잘못하면 그 벌도 자신이 납득이 되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정해서 본인이 스스로 처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이며 인간의 불결이 얼마나 지독한지가 감이 오지 않기 때문에 생긴 오류입니다. 악마가 영원히 저주받아야 될 그 지옥불의 형벌에 인간들도 같이 던져 넣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그런 벌을 받아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떤 대우를 했던가를 판가름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나라의 집집의 창문마다 사망이 침투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은 더 이상 유대나라의 죄를 가리워주던 보호막이 철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들이 이런 처벌을 받아도 합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무서운 거룩에 대해서 인간들의 형편이 너무나도 불결한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데 기인합니다.

히브리서 10:28-29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기를 귀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막상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감히 자신의 거룩과 선행으로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길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도 바로 이런 취지의 말씀입니다.(마태복음 21:31-32)

참으로 어린양이 주시는 보호장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귀히 여기면 하나를 천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봐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곳이 교회이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과감하게 부셔버리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평생 귀하게 모았을 향수를 과감하게 예수님 발을 씻으면서 부셔버린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귀하게 여긴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앞에서는 결코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마리아의 이런 태도는 복음이 온 사방에 전달될 때에 같이 전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주제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곧 구출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디서부터의 구출입니까? 지옥으로부터의 구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도대체 어떤 위인들이 그 지옥에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그 마음씨가 곧 지옥에서 악마와 합세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을 마음자세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 와서도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서 자신을 더욱 착한 존재로 다듬어내려는 그 행위도 실은 예수님의 피를 매도하고 모독하는 행위들입니다. 참된 거룩이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녀들이 잘 우는 것은 여성들이 뭐든지 쉽게 자기 소유물과 일체감을 갖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떨어지게 되면 그 떨어진 그 공백을 눈물을 흘리면서 한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유대나라의 불행은 사실 이스라엘 수행해야 될 임무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축복 뿐만 아니라 저주가 무엇인가도 겸하여 보여주어될 사명이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교회가 정말 죽음의 권세를 이긴 모임이라면 한시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옥에서 구출되었는지 그 사랑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를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3강-렘9장17-22(부녀들의눈물)-jer091021.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3강-렘9장17-22(부녀들의눈물)-jer091021.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3강-렘9장17-22(부녀들의눈물)-jer09102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