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7. 17:47

슬퍼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9장 1- 9절)

슬퍼하는 선지자

2009년 10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7

(렘 9:1, 개정)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렘 9:2, 개정)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렘 9:3,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렘 9:4, 개정)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렘 9:5, 개정)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렘 9:6, 개정)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7, 개정)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인간이란 각자 거짓말을 담은 채 상대를 대하게 됩니다. 만약에 자기 속에 거짓말이 들어있다고 까발리면서 남들과의 의사소통에 나서면 상대방이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진리는 발설하지 않는 것이 통념과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느 지점에 개입하게 됩니까?

거짓말은 자신들을 유능한 자로 자처하며 과시하기 위한 내부 방침입니다. 즉 상대에서 자신의 전부를 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상대가 나를 조종하지 못하고 위해 남겨두는 여분의 자기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사람치고 자신의 유능함을 포기할 마음은 갖고 있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최후의 바닥으로 간주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이 야심을 공개할 의사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던 누구를 만나던 마지막 보루만은 흔리림도 없게 하기 위해 요리조리로 위장하는데 열중합니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이 없는 곳에는 나도 없다’는 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자아의 자리에다 눈물 흘리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거짓을 비치게 하십니다. 운다는 것은 최후의 귀한 것이 무너졌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울어야 하는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 생각하고는 낯선 조치입니다. 우리 인간들 생각 같으면 아예 울 필요없을 정도로 사태를 알아서 호전시키든지 아니면 “너희들 거짓말하지 마. 진실은 이것이니까 앞으로 진실된 말만 해!‘라고 명령만 내리시면 될터인데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키면서 그 앞에서 우는 선지자를 배치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거짓말하는 백성과 그 인간들 앞에서 울고 있는 선지자가 한 세트가 되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본격화시키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문제라서 선지자가 내 앞에서 저렇게 소리내어 우는가 하고 말입니다. 선지자가 우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찌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는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거짓에서 진리로 건너올 수 있는 길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함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이 눈물의 노선을 따라가면 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이 노선은 기존의 인간 노선과 다른 노선입니다. 

사람들의 노선은 과거의 자아가 보다 발전되고 개선되는 식으로 줄 곧 이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노선입니다. 즉 “옛날에는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새 사람되어 새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나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노선에서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선지자의 울음은 그냥 한 때에 관여한 조치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옛날 내가 인간 안되었을 때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주어서 지금의 나로 이렇게 바뀌어졌기에 이제는 그 선지자의 눈물의 지금의 눈물이 아니라 추억으로만 남아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심은 이것이 아닙니다. 노선이 다른 노선입니다. 새 것은 옛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노선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 노선은 오직 예수님 노선입니다.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는 노선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 인간의 옛 사람이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획기적인 것이 낯선 것입니다. 예상못한 겁니다. 선지자의 눈물을 통해서 비로소 등장하는 예수님의 노선에서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마태복음 13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45-46절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장사꾼이 귀한 보석을 보고 난 뒤에 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귀한 보물을 사들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천국의 수능시험 같습니다. 마태복음 13;16에 보면, “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천국 합격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최면 걸듯이 이해하는 것이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천국은 진주다. 나는 방금 귀한 것을 보았다. 따라서 천국을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라고 반복해가면서 확신이 들때까지 되풀이해서라도 기어이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흘러가면서 십자가로 가십니다.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그 근처에서는 예수님께서 우시기도 하시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모독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흘러가면서 십자가쪽으로 가신 그 노선을 따라 갈 수 있어야 제대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만약에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 말씀을 되풀이해서 새기면 구원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전혀 원래 말씀과 상관없이 상충되는 사람입니다. 이 천국 비유의 말씀은, 곧 인간은 자신을 쓰레기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목사를 예를 들면, 목사가 자신의 목사직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아는 순간 그 목사를 예수님을 믿는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존재 가치나 존재 의미를 최후의 거짓말로 챙겨두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을 다 버리더라도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만은 잃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만약 그 사람 눈 앞에 천국이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챙겨서라도 기어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 천국을 소유하려고 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지요. 바로 이런 인간들이 여전히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자들이 다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거치게 되면 구원 노선에 일체 자신의 옛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것임을 압니다. 오로지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노선에 따라 새로 지음받은 자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 의미나 가치를 내세울 하등의 필요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오로지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그 구원의 능력과 예수님의 피의 능력만 보석으로 여기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 속에는 영원히 예수님의 눈물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평생 옛 몸을 지고 가면서 터져 나오는 모든 회개와 반성과 헌신을 통해서 번져나오는 자기 가치성 주장과 한 세트를 이루어서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그 어떤 회개나 희생도 우리 구원의 근원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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