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4. 18:15

황폐한 예루살렘 (예레미야 9장 10-11절)

황폐한 예루살렘

2009년 10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0-11

(렘 9:10, 개정)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렘 9:11, 개정)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시랑이 굴혈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예루살렘이 홀라당 불 타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자부심으로 자리잡은 것이 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거룩이 나와서 다른 더럽고 속된 이방나라를 물리쳤고, 또한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것도 다 이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덕택이라고 믿고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이 불타버린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이 없다는 말은 성전이 없어진다는 말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드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에게로 올 수 있는 발판을 철거하신다면 무슨 수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왔는지 아니면 인간들이 신을 더듬어 찾아가니 비로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는지를 말입니다. 사람이 신을 찾을 때는 온갖 나름대로 거룩의 티는 다 내게 됩니다.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거룩의 역량을 신 앞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여서 신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자 시도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방식이 예루살렘 성전에도 예외없이 덧붙여져 왔습니다. 성전에는 그 어떤 인위적인 거룩의 모양새는 없습니다. 그저 텅빈 공백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힘의 원천을 보고 싶어하고 또한 보이는 식으로 장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는 거룩과 힘의 원천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어없어질 뿐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종교의 차이가 납니다. 바알신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신입니다. 많이 바치면 복을 많이 주고 적게 바치는 자들에게 복을 적게 주는 신이 바알신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실은 바알신입니다. 즉 자아 부정이냐 아니면 자아 긍정을 인정해주느냐 여부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의 차이가 납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제사드리는 장소에서는 거룩의 위력이 뿜어져나옵니다. 이 거룩은 이스라엘을 한데 모으는 일 뿐만 아니라 거룩이 무엇과 반대가 되는가도 보여줍니다. 즉 심판하기 위한 비거룩적인 요소들을 겨냥한 기능도 함께 방출됩니다. 거룩의 원천은 어린양을 비롯한 희생제물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죄고 고백과 함께 어린양에다 자기 죄를 넘깁니다. 그러면 흠없는 그 죄를 짊어지고 무서운 놋제단불에 다 태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제사행사에 대해 그것을 인위적인 거룩행위로 해석해 버리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아닙니다. 이 어린양 희생제물 내부에 뭐가 담겨 있는지는 신약시대에 와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사 드리는 자리나 어린양의 취지에다 인간적인 생각들을 듬뿍 담아놓았습니다. 육적이고 종교적인 인상들을 입혀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룩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숭상해왔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자꾸만 이런 죄악들이 번져나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어린양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속성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의로 심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긍휼로 구원하는 속성입니다. 공의가 없으면 긍휼의 의미가 없고, 긍휼이 없으면 그들이 저주받을 이유가 밝혀지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어린양께서 좌정하시는 심판의 좌석은 어린양께서 희생을 당하신 그 자리입니다. 즉 거룩이란 죽음과 부활이라는 절차를 내포하지 아니하면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완제품으로 만들어서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절차와 과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겁니다.

어린양께서 희생당하시면서 거기에 자기 백성들의 죄가 담당되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이 이사야 53장을 거치면서 특정 인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양들의 죄를 그분에게 담당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죽으신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인간의 죄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불타버린 예루살렘이 결코 실패한 성전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실패에 자기 백성들이 참여되게 하셔서 그 불탄 재 위에서 비로소 인물로서 등장하는 어린양이 도래하는 겁니다. 즉 십자가 지고 가는 성도의 모습은 이미 거룩한 성전에 거룩한 제사장으로 참여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외부에서 볼 때에는 실패자로 보이지만 그 실패 속에 어린양의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과 연합이 되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 몸 구원 위주로 나서기 때문에 자신의 비거룩을 자신의 비거룩으로 포장을 하고 치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장된 자아를 성전 가운데 좌정해 놓게 됩니다. 자신을 거룩과 권력이 흘러나오는 원천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시편 127:1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13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밀어내고 뽑아내고 잘라내고 하는 작업은 바로 그 남아 있는 남은 자들이 결코 자기 행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남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거룩이나 자신의 행위를 자랑치 못합니다. 오로지 어린양이 앉아계시는 그 보좌의 위력을 찬양하면서 증거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서 거짓 거룩들이 무용지물인 것을 고발하십니다. 무엇이 뽑힐 자인지 무엇이 남겨질 자인지를 오로지 긍휼만 증거하는 모습에서 판명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만 바라보고 사는 그 모습을 마치 인위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은 결코 사전에 예수님과 협의해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놀라 자빠진 냉혹한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계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해자요 예수님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로서 진정한 교회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고백을 쏟아놓으면서 하늘에 있는 어린양의 보좌를 쳐다보고 사는 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가 오로지 어린양의 공로로만 주어짐을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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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예루살렘 (설교 전체 녹취)

20091014/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

2009-10-14 22:31:50   이름 : 오용익

20091014우리교회 수요설교/예레미야 9장 10-11절/황폐한 예루살렘(이근호목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눈 돌아가면 내 잘난 맛에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세월을 보냈는데 성령이 임하사 작게 보이는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 크게 보일 때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것과 긍휼을 입은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보물인지, 이러한 큰 보물을 저희들이 감사하지 못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저희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고 천하 세상을 얻은 것보다 자기 목숨을 얻은 것이 큰 축복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예레미야 9장 10-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5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9:10-11

“내가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니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 하겠고 유다 성읍들로 황폐게 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방금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한다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불을 내리겠다는 그 지역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곳은 성전이 있었던 곳이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던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했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자부를 했는데 어느 날 적들이(바벨론제국의) 쳐들어와서 그 하나님의 제사지내고 찬양했던 그 예루살렘성전부터 그 역을 모조리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럴 때 그동안 제사지내라, 법지키라, 하는 그 명령과 지시가 무효가 될 때 어떻게 구원받느냐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안해주실는지 참 난감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이고 솔로몬이 그 성전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tu서 임재하셔서 영광으로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인정했던 그 장소를 하나님이 자기 손으로 불태우고 허물어 버린다는 말은 이것은 다른 민족들이 봤을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계획에 차질이 있다.’ 즉 하나님 자체가 실패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구원은 물론 안되고 멸망할뿐더러 ‘그동안 실패한 하나님을 믿었었던가? 그동안 우리는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지 않았는가?’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지요.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비어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통 우상들은 어떤 힘이 나오면 눈에 보이는 그 힘의 출처를 눈에 보이게 세우게 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청화대가 있어서 모든 권력이 이 명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나온다는 식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힘이 나오는 것을 불안해하고 뭔가 확실하게 있을 때 있는데서 힘이 나올 때 안심을 해요.

‘아하, 저거 믿으면 되겠구나. 저게 바로 거룩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마련이죠. 여러분들도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것과, 지금도 분명히 집에서 듣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과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여기가 본부라는 느낌이 들고 자기 집은 지점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예루살렘성전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없는 것에다가 사람들은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완전히 도배시켜 놓았어요. 자기 행함으로 자기 거룩으로, 우리가 고상스럽다고 여겨지는 것, 최고의 건축물, 최고의 장인정신까지 다 동원해서 ‘하나님, 이만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정도 거룩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요’ 라고 인위적으로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행함을 총동원시켜서 소위 투자할 수 있는 거룩이란 거룩은 다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서 망했어요. 사람이 눈에 보이는 어떤 거룩을 추구하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서 아주 고상한 것, 귀한 것을 집어넣었으니까 내가 이만큼 헌신한 거기에서 뭔가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오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것이 우상숭배를 해서 그런데요, 바알종교와 여호와종교의 차이점이 뭐냐하면 바알종교는 자기가 열심히 행한 대로 복을 받고 나태하면 저주받는 종교에요.

이 종교가 사람들에게 대단히 히트를 친겁니다. 여러분, 차 두 대가 달린다면 앞차가 시속 150으로 간다면 160놓고 싶은 충동이 들잖아요. 두 사람이 교회와도 ‘내가 너보다 복을 적게 받으면 내가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경쟁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종교가 좋으냐 하면 열심히 한 그 만큼 보너스가 챙겨질 수 있는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케 합니다.

아드레날린 막 돌고 앤돌핀 팍팍 돌고, 이것은 헌금하고 싶고 헌신하고 싶어서 말릴 재간이 없어요. 충성 봉사하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그게 바로 바알종교고 오늘날 한국교회죠. 그런데 여호와성전은 인간이 가져다가 바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거기에 어린양, 희생물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의 희생물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나와요.

하나님의 거룩, 그 어린양에서 나온 거룩이 그동안 무엇과 싸웠는가 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더러운 거룩, 만든 거룩, 자기자랑하는 거룩, 이 더러운 비거룩과 싸워서 누가 이겼느냐 하면 어린양의 거룩이 늘 승리했기 때문에 그나마 이스라엘이 유지가 되었던 겁니다. 매일 아침마다 저녁마다 어린양을 잡았는데 왜 잡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린양을 바쳐야 했습니다.

물론 제사장이 대표해서 바칩니다. 바칠 때 그냥 바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죄를 거기에 넘겨줘요. 내게 있는 죄를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흠없는 어린양에게 인수인계를 해 버립니다. 흠없는 어린양에게 인수인계를 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어린양의 무서운 심판의 제단불에 들어갈 때 어린양 홀로 들어가지만 사실은 그 죄를 넘겨준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주목해야 되겠지요. 주목해 보면 어린양이 그 맹렬한 제단불에서 태워집니다.

태워질 때 죄도 함께 태워지지요. 하나님의 무서움 속에서. 그리고 난 뒤에 그 피가 흘려지면 그 피는 바로 용서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만들어내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공장에서는 공정이라고 하지요.

코카콜라공장도, 간장공장도, 선반위에 죽 지나가는 식으로 공정이 있잖아요. 시작부터 완제품까지의 과정을 공정이라 하지요. 그 공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으로서 참여합니다. 죄인으로서 참여가 되면 그 공정을 통해서 마지막 생산품이 하나님의 거룩이 나옵니다. 그 거룩은 인간이 보태거나 추가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주와 주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거룩이 나옵니다.

그 절차에 따라서 나오는 거룩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온 거예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착해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잘나서 버틴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 예루살렘 중심부에서 어린양을 태울 때 그 공백에서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그것이 받아지고 용서가 되는 작업이 일어나지요. 그렇게 해서 그들은 구원이 유지된 겁니다.

그런데 그 주변의 이방나라에서 바알종교를 섬기고 있습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하는 것 필요 없이 인간이 간곡하게 간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투자했느냐 그 양에 따라서 그만큼 빼먹을 수 있는 복의 양도 늘어나는 거예요. 성과급이죠. 그래서 바알종교같은 종교의 특징은 신에게 섬기는 열단계이상의 계급이 있어요.

창녀가 백정 같은 부류는 백날 해도 지옥가고 맨 위층의 제사장급들은 농땡이를 쳐도 천당가고 좋은데 다 가는 겁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 같은 것이 성직 계급이 제일 위층에 있어요. 그런 전통이 한 2천년 이상 이어져 왔고 그것이 온 이방나라의 공통적인 전통입니다. 성직자들이 우대를 받는 이유는 그만큼 신에게 가까이 있고, 그렇지 않고 더럽고 허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해도 구원 못 받아요.

제일 밑에서 바로 한층 위가 여자들입니다. 왜 여자들은 이렇게 천대를 받았는가 하면 남자를 자꾸 꾀인다고 그 꾀이는 죄가 심하다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가지고 ‘요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아이디어입니다. 아주 고상한 것이 무엇이며 아주 선량한 것이 무엇이며, 진지한 것이 무엇이며, 이런 식으로 자꾸 인간들이 아이디를 짜내는 겁니다.

정작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고상한 것을 자기의 품위와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만일에 어린양이 거룩을 준다면 어린양은 그냥 안죽는 어린양이 아니고 죽는 어린양입니다. 죽으시는 어린양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하는 기능, 또 하는 긍휼(자비)을 베푸는 기능입니다.

지금도 하늘나라 어린양의 보좌에서 두 가지 속성만 나와요. 한쪽, 지옥 갈 사람에게는 심판이 나오고 다른 한쪽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자비와 긍휼이 쏟아져 나옵니다. 성전은 불탔지만 여전히 하늘나라 성전은 지금 버티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보좌를 보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영생을 얻고 살아가는 그 모든 공로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윗동네(어린양의 보좌)에 있다는 겁니다.

히브리서의 경우에 지금도 주께서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셔서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는 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7: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위에서 하는 거예요. 그럴려면 그 이스라엘 백성은 뭐냐, 죄인으로 가담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바알종교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선량하고 지금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지금보다 나는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복 받아서 훌륭한 사람 되려면 지금부터 신에게 더 열심히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내손에 달렸소이다. 내 하기 나름이다’ 라고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어제 십자가마을에 글을 하나 올린 분이 있어요. 선덕여왕이라는 분이 올렸는데 그 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2000년전의 십자가와 지금의 나와 상관없는 관계인줄 알았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죽은 예수와 나와 상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 죽으신 것이 내가 바로 가해자고 내 죄로 인해서 주님께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걸 제가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느꼈어요. 그 선덕여왕이라는 분이 그 글을 쓸 때 무엇에 관심이 없느냐,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 애가 성적이 어떻고, 우리 아파트값이 얼마고, 우리교회 교인수가 몇 명이고, 내 남편 한 달 수입이 얼마고, 내가 허리가 아프다든지, 도무지 이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뭐만 이야기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그 광채가 자신의 살아온 모든 인생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겁니다. 푹 싸였어요.

아예 덮어 싸고 있어요. 온 신경이, 정신머리가 십자가 말고 다른 데로 새지를 않아요. 그 글을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는 상관없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나는 알았다. 상관이 있었다. 나는 가해자고 주님은 나로 인해서 피해를 입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되니 세상에 이런 큰 복이 어디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남북회담 이런 것, 장바구니 물가 이런 것, 휘발류값 오르는 이런 문제, 우리동네 재개발문제, 직장문제, 남편문제, 교회문제, 이런 것이 전혀 거기에 없지요. 그게 만약에 없는 순간이라면 그 사람이 자기가 더 잘난 존재 되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안들겠습니까?

일체 안 드는 거예요. 그 순간이 바로 바알종교에서 벗어나고 진짜 여호와의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너무 부러워서 이런 말을 써놓았어요. 왜 우리교회에서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없노? 말이 그렇게 다들 그렇게 고백하시는 줄 제가 알아요. 그렇게 고백하니까 다 우리교회 나오고들 하겠지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두 가지 속성, 하나는 저주고 하나는 이쪽에서 긍휼을 입혀줄 때 바로 그런 자세를 원하는 거예요. 걱정스러운 것이 뭐가 있으며 염려스러운 것이 뭐가 있으며 공포스러운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좀 어려우니까 잘 들으세요. 이 예수님의 속성, 어린양 속성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불태워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흔히 어려운 말로 단절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어려운 말을 안쓰고 이렇게 하겠습니다, 밀치는 것과 빨아드리는 그 기능이 두가지의 속성을 통해서 같이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정말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예루살렘성전의 특징은 이스라엘에 계속해서 어린양에 합당치 않은 사람, 어린양의 은혜를 모독하는 사람을 제거시키고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어린양의 은혜를 아는 사람을 계속 가입시키고, 제거하고 가입시키고 계속 그런 작업을 해 온 것입니다. 밀어낼 사람은 밀어내고 끌어 모을 사람은 끌어 모으는 그 작업이 그 두 가지 속성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여호와를 믿습니다’ 라고 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잘렸어요. 사울같은 사람들. 그러면 후대 사람들은 그걸 보고 뭘 배우는냐, ‘나는 구원받았다’ 할 때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제부터 내 원대로 내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라고 했을때 그것이 바로 여호와로 시작해서 바일종교로 빠져버리는 그런 경우를 주께서는 밀어내 버린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밀어낼 사람은 밀어내고 올 사람은 오고 계속해서 분주하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힌다’고 마태복음 15장 23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지 않으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여호와 하나님성전에 보금자리 짓는 참새와 제비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성전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짓는가? 나도 이 성전이 내 보금자리였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천 날보다 하루라도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그것이 더 좋사오니.’

그런 고백을 만약에 어떤 사람이 했을 때 믿음이 없는 사람 눈에는 그것이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저 사람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섬긴다’ 고 이렇게 경솔하게 단언을 해버려요. ‘저 사람은 교회가 좋은 모양이다. 저 사람은 우리교회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생각하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가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왜? 그것은 인간인 자기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본인들이 생각해도 ‘이것은 웬 복입니까?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라고 자기의 불가능성, ‘이것은 내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저 사람은 신학도 하고 목사나 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 또 저 사람은 우리교회에 다니면서 그런 설교를 많이 들으니까 그런 맘이 생겼겠지.’

아닙니다. 설교 많이 듣는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우리교회가 헌금이든 봉사든 강요도 안하고 예배를 드리러 오든 가든 신경 안 쓰고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니까 그래서 그러겠지’ 라고 합니다. 남들은 자꾸 자기가 할 수 있는 그 차원에 맞추어서 자기가 할수 있는 그 기준에 맞추어서 ‘저 정도 같으면 나도 하겠다’ 자꾸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이 그렇게 약속 받아서 만났습니까? ‘야, 이쯤 되어서 예수님이 나타날 걸’ 그래서 만났습니까? 완전히 말에서 떨어지고 내동댕이쳐진 사람입니다. 사울이 소경이 된 것이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찔러서 소경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광채를 보고 그냥 눈이 멀어버렸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것이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사 보고 싶다고 하지요. 천사 보고 싶다 할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 말을 들으세요. 이것이 천사의 말보다 훨씬 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꼭 글자를 써야 믿겠습니까? 이 사도바울의 말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썼다(갈 1:1)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그것을 보증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한번 끌어 모읍시다. 헌금해서 세웁시다’ 이게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밀어내요. 오려고 해도 계속 밀어내요. 그리고 안와야 될 사람이 분명히 안와야 될 것인데, 저 사람은 분명히 저런 욕을 얻어먹고는 그만 올 것인데, 하면 또 계속 와요.

사람이 교회 참석한다는 그 고상한 행동,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리 되면 그것은 이방종교 바알종교입니다. 온갖 고상한 찬양과 헌금과 헌물과 착함과 구제와 금식과 절기지킴, 이런 것을 총 집합시켜서 가져다가 도배를 해보세요. 그게 교회되는가? 그런 것은 인간들이 잘 하지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부흥되었다 하잖아요. 내부에서 자존심 경쟁을 시켜서.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진짜 교회는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는 너 나 할 것이 없이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내놓으면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도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은 갑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러라.”

그런데 다른데서는 유무상통하면 그게 진짜 교회라고 하면서 재산을 바치라고 해서 그것가지고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밥 퍼주는 것 같은 것. 진짜 십자가복음이 좋아서 다른 것이 생각이 안 나서 모였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인간적으로 조작해서 어떻게 한 번 교회 해볼까 싶어서 모인 단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그들이 생각했고 그들이 한 행위로 모든 도배를 한 바로 거기다가 요 앞에 주유소가 있거든요, 휘발유 한 드럼 사서 확 뿌려서 중국제 라이터로 불질러 버립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한 두 번 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불나거든 대충 챙겨서 나가면서 복음 이야기하면 그것이 교회라고.

부동산이 교회가 아니고. 제가 수십 번 이야기를 했어요. 나의 나된 것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구원시켜 줬어요. 그것은 ‘어린양의 죽음에 같이 너희들도 같이 죽음으로써 동참해 봐라’ 그 말이지요. 그냥 ‘양 잡았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제부터는 양잡는 것은 그만하고 아예 ‘네가 죽는 양이 되라. 네가 심판자가 되라’ 그 말이지요.

십자가를 지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너, 실패자 되라’ 그 말입니다. 실패자가 되면 성공시켜 준다는 말이 아니고 실패자가 될 때 비로소 어린양의 보좌가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는데 실패만한 좋은 도구가 없다는 말입니다. 흔히 초짜 목사들이 개척교회 하면서 그런 것을 많이 노리지요.

‘십자가복음 좋아하면 좋은 교회 됩니까? 십자가실패를 자주 경험하면 그 다음에 성공할 수 있습니까?’ 또 성공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주님을 가해한 가해자고,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성공 실패라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 버렸어요. 성공, 실패라는 그 자체도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그 공로를, 자비를 드러내는데 참여케 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상관없이 어린양의 십자가용서만 나온다면 우리로서는 땡잡은 거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 남들이 보면서 ‘너희 하나님 이제는 그만 믿어라’ 하겠지요. 진짜 예레미야 같은 성도는 ‘그게 진짜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탈 때 불탄 예루살렘 위에서 어린양은 이제 인격자가 되셔서 등장할 날이 곧 다가온다’ 이말입니다.

이제 이 눈에 보이는 이 성전건물, 부동산이 날아갈 때 그때 진짜 성전, 어린양의 보좌가 비로소 그 불탄 죄인위에서 세워질 때, 불에 태움으로 말미암아 성도로 하여금 ‘정말 네가 믿느냐? 정말 네 행함 믿느냐, 주님의 거저주신 사랑과 용서, 피를 믿느냐’ 하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실패할까봐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조마조마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눈을 어린양의 보좌에 두고 볼 때에 성공도 성공이요 실패도 성공인 것을, 예수님 살아계시고 용서받은 것 드러내는데 하자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