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8. 17:36

참으로 자랑할 것 (예레미야 9장 23-26절)


참으로 자랑할 것

2009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23-26

(렘 9:23,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렘 9:24, 개정)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5,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렘 9:26, 개정)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이 자랑한다는 것은 필히 자기를 위한 자랑입니다. 타인이 넘볼 수 없는 나만의 공을 드러내기 위한 자랑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지혜를 자랑하는 것은 ‘나만이 지혜롭다’를 것을 전제로 한 자랑입니다. 용사가 용맹을 자랑하는 것도 ‘나만이 용맹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자랑입니다. 부자가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 만이 독보적으로 부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랑입니다.

이런 자랑들의 문제점은 모두 사적이고 개별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이 못되는 자랑거리입니다. 신약시대의 자랑거리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0-31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 때에는 지혜나 용맹이나 부유함이 자랑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지혜나 용맹이나 부유함을 자랑해도 됩니다. 단 그 모든 것은 사적인 열심이나 용을 써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모두 주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결국 ‘주님만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취지를 그대로 오늘 본문에 다시 적용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이미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주 안에서 자랑하고, 용사는 주 안에서 그 용맹함을 자랑하고 부유한 자는 주 안에서 그 부유함을 자랑하되 모두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이 용맹과 하나님의 부유함만을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할례 안 한 자는 할례 한 자나 모두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해놓으시고는 그것을 취소하거나 무효화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없었던 것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게 인간을 다루십니다. 예를 들면, “애들아, 내가 내어준 숙제 했어? 안했어? 그러면 멸망당해야지”라는 식입니다.

할례 했음에도 망하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숙제를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했으니 당연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가 신약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인간이 하나님께서 내어준 숙제인 ‘마음의 할례’를 행해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 나타난 성도의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먼저 ‘해답’을 주시고 문제는 자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다 그리고 난 뒤에 “흠 만족스럽군”라고 붓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그 어떤 화가도 자신이 만든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는 화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주께서는 그 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뛰어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이 뛰어들어가서 자신을 포함해서 그림을 친히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 죽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 “저들이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입니다.(요 10:17-18)

이런 사실을 알아 채는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이미 해답을 하나님에게 받아버린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세상 완성에 나서시면서 그 완성될 자기 백성에게 완성자로서의 필요한 해답을 미리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의 해답을 아는 지혜자가 되고 용맹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되어져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8-10에 보면,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영입니다. 사적인 애씀과 노력과 열심히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기에 이 선물을 분명 사도 바울 자신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성도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은, 왜 십자가 복음이 최종 해답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인가를 확인해 나가는 세월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이 선지자 중에 최고의 선지자이지만, 그렇더라도 천국에 들어있는 아이보다는 작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벌써 주님 안에서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를 많이 했는지 정작 자신의 집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집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죽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온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그는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즉 사적인 자기만의 공간이 따로 필요치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도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예루살렘에 가도 거기에 주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약의 혜택이 오기전까지 구약은 멸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해답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해도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거룩함을 위해 자기 안에 불결한 요소를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내부에서, 모든 면에서 죄가 나온다고 한다면 도무지 무엇을 따로 남기도 무엇을 따로 제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스라엘은 ‘유대공동체’로 바뀌어집니다. 하지만 자칭 이 ‘남은 자’라는 이들만거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교회는 최후의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이 됩니다. 그 안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들어있어 사도 바울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가 사적인 자랑을 인정치 않는다는 뜻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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