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8. 22:11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예레미야 10:19-25)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2009년 11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9-25

(렘 10:19, 개정)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렘 10:20, 개정)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렘 10:21, 개정)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렘 10:22, 개정)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렘 10:23, 개정)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4, 개정)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렘 10:25, 개정)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의 전반부 내용은,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징벌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후반부 내용은, 이방나라를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다나라를 징벌하는데 참여 했던 민족입니다. 이 참여한 민족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유다 나라를 치지 말아야 할 나라가 친 경우에나 해당될 사항입니다.

이렇게 되니 이방 민족들은 유다 나라를 안 쳐도 저주받고 쳐도 저주받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면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런 활동을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어떤 통로를 거쳐서 모순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활동이 모순없이 정립이 된 겁니까?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신비로운 분이라는 점입니다. 보통 인간들 생각에는 한 가족으로 같이 살면, 그만큼 남들보다 더 잘 아는 관계라고 여길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그 깊이와 넓이가 더 확대됩니다. 이방인들의 신들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창하게 신을 신봉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자진해서 우습게 취급하게 됩니다. 전혀 신비롭지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갈수록 알 수 없는 하나님 됩니다. 하지만 이방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쉽게 이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이라는 것을 대충은 압니다. 물론 믿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알기만 하면 됐지 구태여 믿을 것까지는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에 성경을 통해서 대략 윤곽을 잡아나가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히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관계 조율만 적당히 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오늘 본문 같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유다나라 징벌에 참여한 이방민족에게 대놓고 저주해야만 하는 사명과 쉽게 연결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가 어디서 도출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말을 저 역사의 끝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 있어 종말은 역사의 끝에 새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이스라엘 밑에 깔려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주’요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 종말이란 이스라엘의 처음 자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말이라는 것이 기차 레일같은 수평적 직선의 끝자락에 둘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애굽기 쯤 되면 창세기 시절은 지나간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있어 출애굽이란 곧 이스라엘의 바탕이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통해서 그들이 뵙던 그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함을 통보해주는데 있습니다. 즉 출애굽 밑에 창세기가 영원히 깔려있어서 같이 나란히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은 결코 창세기 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신비란, ‘주님’이 품고 계시는 그 신비의 토대 위에서 자신이 만들어져서 그 신비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인정하는 신비를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져 말씀으로만 움직여지는 본인도 신비로운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말이 이런 현상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결국 천국 아니면 지옥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 사실이 창세기를 시작할 때부터 계셨던 그 ‘주님’이 품고 있던 신비였고 그 신비에 준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천국가야만 하는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종말이란 현재 자신을 신비롭게 만드시는 그 원천지를 알게 하시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시간적 층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으로 영생을 얻게 되나요? 바로 ‘하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나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처럼 예레미야 선지자가 겪는 고난이며 모두 하나님이 겪는 죽음의 고난의 자리에서 분출되는 같은 신비로운 능력의 결과입니다. 19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 고난에 참여한 참 이스라엘은 이 신비를 압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은 곧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차원인 것을 말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신비에 그들도 신비로운 백성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민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신비라도 자신들이 납득이 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 믿을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신비란 항상 정복과 극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신비 속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신의 신비마저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곧 자기 자신들의 의지요 이성이요 감정입니다.

예수님의 빈무덤과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사람들을 납득을 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곧 본인들부터가 전혀 믿음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즉 본인들부터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납득이 안되니 납득되는 식으로 해명해보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은 그야말로 신비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가 임신한 것도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이었고 이를 통해서 본인의 운명은 본인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 언약대로 진행되어야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주를 모르기에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새로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언약에 의해서 이들은 비언약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저주받아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반면에 성도가 참으로 신비로운 자가 되어 있다는 말은,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의 죽으심’이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증거한 그릇을 따로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신비로움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겁니다. 이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성도를 매일같이 난도질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금방 데려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염려할 필요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늘 죽이고 계십니다. 벌써 죽은 자로서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성도 안에서만 활동하기에 성도는 이방민족들처럼 더 이상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판단하거나 실천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 안에 말씀을 살아서 활동 자체가 말씀의 실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 그릇으로 만드신 그 신비를 신비로서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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