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7. 10:24

언약과 저주 (예레미야 11: 1- 5)

언약과 저주

2009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5

(렘 11:1, 개역)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렘 11:2, 개역)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렘 11:3, 개역)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렘 11:4, 개역)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렘 11:5, 개역)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외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이라는 이스라엘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무척 서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한다면 다른 민족에게 없는 인센티브가 있기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도리어 하나님께 있음으로 인해 직접 저주를 받을 위치에 있으니 운수가 사납다고 자책할 만도 합니다. 실은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이 언약의 운반체로서의 기능 때문입니다. 이 기능은 애굽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나라로서 형성될 때, 그 때 그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나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 잘 되기 위해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기 위해 조성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살아있을 때만 이스라엘로 돌출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 언약이 사라지면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나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사나 죽으나 자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언약의 나라입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기 위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우리교회가 있는 겁니다. 언약이 없는 교회는 저주받아야 될 우상의 제단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언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로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선택된 자는 ‘자신의 선택받았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나오는 법입니다. 따라서 선택이란 항상 차후적으로 평가될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지키라는 그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세운 그 언약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이 구절이 나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했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7:2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과 일치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세상에 미물부터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나 악마까지 모두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움직이시는데 그 지향하는 바는, 오로지 영생주실 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거서  ‘거룩한 백성’이 출현과 ‘제사장 나라’의 등장입니다.

이런 나라가 구성되는 것은 오직 언약을 지킬 때만 성립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지켜서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겁니까?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곧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항상 지켜야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거기에 ‘언약의 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언약은 뭐고, 언약의 피는 또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 지킨다고 용쓰다 보니 흘린 피입니까? 아닙니다. 그 피는 화목제물도 투입되는 소의 피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행도 아닙니다. 외부에서 이스라엘로 새로 주입되는 피입니다.

모세는 그 피를 양푼이 담고 십계명과 백성 머리 위에 다 부어버립니다. 이로서 하나님이나 백성이나 모두 ‘언약의 피’ 아래 종속되게 되어버렸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최종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의 피’가 모든 의미를 최종적인 모으게 됩니다. 하나님마저 이 ‘언약의 피’에 종속됩니다.

만약이 하나님이나 백성이 이 거룩한 계명들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목숨 빼앗겨도 할 말이 없음을 선언한 겁니다. 즉 이미 하나님과 백성은 피 아래서 산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피 흘림, 곧 생명 빼앗김이 곧 저주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도 저주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 외의 모든 자도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준비하사 이 ‘언약의 피’ 구조를 성취시켜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 속에 섞어버렸습니다. 이로서 ‘마지막 아담’과 ‘옛 아담’에 속한 자들이 함께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에 속한 자들은 죄가 왕노릇 하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죄를 안 지을 수가 없게 되어 있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처지가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오로지 예수님만 부활시켜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드님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부활시킬 수 있는 권한’이 ‘주님’의 자격으로 제공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이 구원될 경우란 오직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예수님의 의와 공로 속으로 귀속되는 경우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 선택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자입니다. 곧 자신이 입장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오직 예수님의 공로에만 의지합니다. 이러한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피언약’ 관계만 성립될 뿐입니다. 다른 관계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의 피’ 말고 깊은 신학을 따로 숨겨놓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인류의 운명이 길게 늘어진다고 해도 구원은 ‘언약의 피’로만 성립되는 진리를 대체할 신학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이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한다할지라도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본인의 고생담이 아니라 ‘언약의 피’ 뿐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되거나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외면하면 저주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피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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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1:1-5/언약과저주) 

2009-11-27 10:10:45 녹취 : 오용익


20091125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1장 1-5절/언약과 저주(이 근호목사)

(기도)

이 시간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만들지 못하고 하나님이 신앙을 선물로 주셔야 되는 겁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면 항상 가짜 신앙을 가지고 연연하게 됩니다. 죽음보다 더 센 힘으로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 신앙, 그래서 남은여생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은 그런 신앙, 그 신앙이 귀한 줄 알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살아있어도 주의 것이요 죽어있어도 주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이미 주의 것이 되어서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주어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왔기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있기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러한 놀라운 능력과 원리가 살아있으면서 우리를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되게 해주시고 증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 11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1:1-5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좆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좆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 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준 언약, 약속, 그것을 너희가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것을 혹시 잊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나오십니다. 보통 나라들은 나라가 있고 난 뒤에 그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법을 세우는데 이스라엘 나라는 아주 특이한 나라가 되어서 나라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기 위해서, 그 언약이 어떤 내용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만약 그 언약에 위배하면 오늘 읽은 본문 3절의 말씀처럼 “이 언약의 말을 좆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를 위한 우리교회라든지, 나를 위한 나의 구원, 이것은 마귀가 지어낸 종교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언약을 위한 우리교회, 언약을 위한 이스라엘, 언약을 위한 우리들 자신, 그것뿐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것, 그렇게 되어야 될 텐데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언약을 가져오는 것, 이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성질인 것을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요. 그 언약 중에 신약은 바로 새 언약인데 특히 새 언약 같은 경우는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기 때문에 새 언약이 온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라는 초청이기 때문에, 죽으라고 찾아오시는데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든다는 것은, 마치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 때에 자꾸 예수님에게 대드니까, 그것은 맨발로 선인장가시를 발로 차는 것이 되니까 고생은 자기가 되게 하는 거예요.

소유될 수 없는데 그걸 자기가 소유하려 하니까 자기가 괴로운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걸로 오해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목걸이 십자가, 차에 괘종시계모양 장식으로 덜렁덜렁 달고 다니는 것, 그렇게 십자가는 달고 다니면서 차끼리 박게 되면 욕은 또 되게 잘 하지요.

차 뒤에 물고기형상 붙이고 다니는 것 보면 더 가관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보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너의 나라 이스라엘보다도 언약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언약이 갖고 있는 저주성을 이스라엘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교회 날려버리고 ‘너 하나 지옥 보내도 나는 하나님의 언약이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기준’이라는 이 점을,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는 ‘20년 믿었습니다. 30년 믿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님 눈에는 뵈지를 않습니다. 사정없이 갈라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마치 폭탄을 쥐고 있는 셈이 되지요.

자칫하면 폭발하니까 상당히 위험한 물건을 스스로 갖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래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중심에 박혀 있을 때 이스라엘은 애당초 ‘나의 것’이라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할 때 애당초. ‘그러면 내 것은요? 내 축복은요? 내 남은여생은요?’ 이렇게 감히 주님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면서, ‘내 인생은 앞으로 피겠습니까? 한 번 점괘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3년 뒤에는 잘 되겠습니까?’ 이런 것 좀 묻지 말라, 이 말이지요.

그런 것은 무르팍 도사한테나 묻지 주님한테 그런 것은 물으면 안돼요.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좆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해서 ‘이 언약을 지켜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 언약의 내용이 어떤 거냐?’라는 것이 우리가 궁금한 거예요. 어떤 언약이기에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가?

그 언약 내용에 대해서 4절에 보니까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 언약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 출애굽기로 돌아가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준 그 때 그 언약을 주님께서 계속 이 예레미야 시대에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양보하고 포기한 적 없고 계속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언약을 안 믿으면 저주받는다 하니까 도대체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오늘 본문내용과 같은 내용이 나와요.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최 종훈 장로님께서 늘 평소에 기도하시면서 거론하시던 성경본문이 요한복음 17장 2절이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내(예수님)가 영생줄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무엇을 주셨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 천사든 마귀든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미미한 움직임까지 그것이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영생 줄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는 조치로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다.”

똑같은 입장에서 출애굽기 19장 5절부터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겠다고 한 목적은 분명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라는 말이 어떤 백성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거룩한 백성, 그리고 제사장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뭐가 아직도 안 나왔느냐 하면 ‘그러면 뭘 지키면 됩니까?’라는 본 내용이 안 나와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주일학교 애들도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이 나와 있지요. ‘이 십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너희는 내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된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에 ‘지키면 그렇게 된다.’는 것도 있지만 ‘만약에 안 지키면 너희가 저주받는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인들은 날벼락을 맞은 겁니다. 축복 준다는 것은 선뜻 마음이 내키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붙어서 꼬리처럼 달려오는 ‘저주 받는다’가 마음에 부담이 되고 켕기는 겁니다.

차라리 축복도 싫고 아예 저주도 싫고 그냥 나 원래 사는 식대로 내버려 둬, 그냥 가만 내버려두면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그냥 우리 사는 대로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이 말이지요. 여호와도 귀찮고 교회도 귀찮고 우리 하는 식대로 하면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꼭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만들기 위해서 그 중에 누구 하나 뽑혀야 되는데 그 뽑히는 것을 가지고 ‘택함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택함 받았다는 것은 남들 보기에는 ‘당첨 되어서 좋겠다.’ 하지만 자칫하면 저주받기 위해서 택함 받은 백성들이 될 여지가 항상 있는 거예요. ‘저주 받기 위해서 택함 받은.’

그래서 ‘이 십계명을 지키라. 행해야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십계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것은 언약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새 언약이 있는 거예요. 언약은 뭐고, 또 새 언약은 무엇이냐? 언약으로 마감되지 않고 왜 새 언약이라는 것이 추가적으로 또 주어져야 되는가? 이것이 상당히 궁금한데 여기서 언약이라고 해 놓고 그 다음에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의 피’가 나옵니다.

언약은 뭐고 또 언약의 피는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24장 5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화목 제사를 드리면서 번제물로 소를 잡습니다. 그 잡은 소의 피를 버리지 않고 받아서 양푼에 담아요. 양푼에 담아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너와 나 사이에 세운 언약의 피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모세가 십계명 받아 왔고 ‘이 말씀 지키면 너는 거룩한 내 백성이 된다.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그걸로 모든 것이 언약으로서 종결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출애굽기 24장에 가서 갑자기 피가 등장하는 거예요. 십계명을 지키면 되는데 왜 추가적으로 ‘피’라는 말이 왜 등장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 피가 우리가 십계명 지킨다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애쓰고 용쓰다가 정강이 깨져서 흘린 그런 피 같으면 ‘아이고, 십계명 지켜서 네가 거룩한 백성 되려고? 참 애를 쓰는구나. 고생 많이 했다. 그래 네 피는 내가 인정해 줄게. 지키려고 애쓰다가 흘린 피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피다.’ 이래 되면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데 그게 아니고 이 피는 우리 정강이가 깨져서 우리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 흠 없는 제물에서 외부에서 추가적으로 따로 투입이 돼요.

십계명은 내가 지키고 있는데 옆에서 옆구리를 툭 치면서 ‘어이, 이것도 한 번 봐라.’ ‘뭔데요? 언약의 피다.’ 언약의 피가 왜 필요합니까? 백성들이 ‘십계명을 준행하겠나이다.’ 했는데 거기다가 양푼에 피를 담아서 확 뿌려버리죠. 그러면 십계명부터 해서 모든 것이 피로 잠겨버립니다. 모든 것이 피 안에 놓이게 돼요.

이 피는 뭐냐 하면 ‘누구든지 이 십계명을 안 지키면 하나님, 나나 너희들이나 둘 다 우리가 피 흘려서 죽어 마땅함’을 아예 다짐을 하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안 지키면 저주 받겠습니다.’ 하는 것을 아예 각오하면서 피로써 뿌려버리거든요.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예외 없이.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다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피 속에 있는 거예요.

이게 신약의 에베소서 같은데 보면 굉장히 중요해 집니다. 성경의 목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그도 저도 아니고 피냐? 셋 중에 어느 것이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마저 양쪽 다 지배받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언약의 피’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의 피 안에서는 누구든지 이 십계명대로 안 살면 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도 그 사람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마치 타짜, 도박에서 마지막 판에 자기가 가진 것을 다 거는 거예요. 자기가 가진 돈, 부동산, 동산, 자동차까지 다 긁어모으고 집에 있는 마누라까지 다 걸고 마지막,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화투장 까라.’

이처럼 모든 것을 다 걸었다 하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에요.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비밀은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이 우주 천지에 하나님의 언약의 피 말고 다르게 남겨놓은 어떤 깊은 신학, 없어요. 하나님도 다 집어넣고 인간도 다 집어넣었어요. ‘십계명, 하나님 나도 지킬 테니까 너도 지켜라. 둘 다 지킬 때 우리는 한 백성이 되고 한 나라가 된다.’ 이런 약속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기가 택한 백성들에게 뒤집어 씌워버렸어요. 빼도 박도 못하게.

그렇다면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는지…, 십계명 열 개중에서 9개나 8개 정도가 아니라 한 계명도 못 지키잖아요. 한 계명도 못 지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한 언약백성 다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누가 투입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도 거기에 합세를 했어요.

합세를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경우에는 저도 죽겠습니다, 라는 것을 다짐을 하고 거기에 합세를 해 버렸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하면, ‘누가 부활했느냐?’ 다 죽으니까, 예수님도 죽고 인간도 죽고 난 뒤에 ‘십계명을 다 지킨 분은 누구다.’라고 최종판정을 내리는 것은 죽어 마땅한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난 분이 모든 거룩을 다 이룬 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오직 예수님만이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모든 의를 다 이룬 겁니다.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따로 취급해서 마지막 아담으로 봤고 그 예수님외의 모든 사람을 옛 아담에 속한 사람으로 본 겁니다. 옛 아담의 특징은 뭐냐? 죄가 지배하고 죄가 왕 노릇해서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이 주는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만은 그 죄를 이기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하면, 요한복음 5장 21절에 보면 아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수 있는 권한을 준 겁니다. 예수님의 권한으로 십계명 못 지켜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예수님의 권한으로 살려내는데,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살린다는 뜻에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구원 어림도 없었습니다.’를 고백하는 거예요. 평생 동안.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제가 어제 대전을 갔었는데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해요. ‘예정된 사람도 예정 안 되도록 변경할 수 있으며 예정 안 된 사람도 예정되도록 자기 행동을 조정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정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돌이켜서 판단하는 겁니다. 이러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 예정된 사람입니다.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 이러한 조건에 맞을 때 예정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조건이 뭐냐? 예정이라는 것이 조건이 아니고 ‘예수님 아니었으면 구원될 수 없음’을 아는, 그 정도로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이며 평생토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지 않는 한 우리는 구원될 수 없고 모든 권한은 이미 예수님의 손에 일방적으로 넘어가 있고 예수님께서 작용하시는 그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음을 아는 사람은 차후 적으로 이미 선택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정부터 출발하니까 예정조차 자기 행위로 조정하려 드는 거예요. 그러나 제 답변처럼 이래 되면 자기 행위가 몽땅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아담 속에 들어오셔서 같이 율법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누구든지 율법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라는 것을 그대로 몸소 다 보여줬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다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것은 이미 저주받도록 태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저주받았다면 나머지 인간은 볼 것도 없어요. 이미 다 저주 받은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예수님이 살려주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저주에서 못 벗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저주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저주에서 사흘 만에 부활할 때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수 있는 율법적인 권한이 있어야 하는데, 그 율법적인 권한이 뭐냐? 그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이웃을 위해서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마태복음 7장에 나오듯이 ‘모든 율법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이웃사랑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다 이루었다.’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정말 저주받은 우리를 예수님의 자기 이웃으로, 또는 다른데 보면 형제로서 간주하여 예수님은 자기공로를 우리에게 나눠줬어요. 예수님이 자기공로인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우리에게 자기의 공로를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의롭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교도소만 백번 왔다 갔다 했는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졸지에 의인되고 말았어요.

이 의인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어떤 행위로 의인되었다고 따지고 들면 그것은 길이 없고 막혀 있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되지요. 이 모든 사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복음으로서 다 해명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제 대전 갈 때 대전역 가까이 가니까 철로가 급커브를 돌고 있어요. 그때 창가를 보니까 KTX 열차의 꼬리가 보였어요.

그걸 보고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시작을 해서 자기 옆에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 자기보다 연배 많은 사람들과 연배적은 아이들, 그 기차에 달린 몇 칸이 세상의 전부 인줄 알고 있어요. 세종대왕은 세종대왕 그 시대가 세상 전부인줄 알고, 석가모니는 석가모니 자기가 살았던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도 닦고 있고, 달라이라마는 독립하기 위해서 중국하고 싸운다고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고, 김 정일은 핵 가지고 장사해먹다가 그것만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뭘 알고 있느냐 하면 KTX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다 알고 있으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고 어떻게 하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창가에 가서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시키면 그때부터 성도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자기 코앞에 있는 자기 시대만 아는 것이 아니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다 보이는 겁니다.

전부가 다 예수님의 안목이기 때문에. ‘처음이요 나중이니’ 그 예수님의 안목으로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보이는 거예요. ‘아, 피구나, 피! 언약의 피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차 칸이 6호 칸, 7호 칸, 이렇게 딱딱 끊어졌으니까, 자기 딴엔 고생 되게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안식에 넣어주지 않겠느냐, 이래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시편 95편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 직사하게 한다고 해서 천국에서 보상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를 제가 이렇게 들었어요. 제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서울의 노량진에 가면 고시촌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시험, 교사임용시험, 경찰채용시험, 7급, 9급 공무원시험, 세무공무원채용시험등 이런 수험준비학원들, 수험생들이 기거하는 숙박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노량진이에요. 거기서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을 죽 찍은 것이 다큐멘터리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대위로 제대해서 경찰공무원 되려고 4년 동안 7번 떨어진 사람이 있어요.

어떤 여성은 24살인데 대학 4학년 다니다가 휴학하고 지방에서 올라와서 고시촌에 있으면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서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하고 있어요. 보통 대 여섯 번씩은 다 떨어지면서 그러고들 있는데 그 사람들도 사연들이 많지요.

집안 가난해서 힘든 사람들도 있고. 그러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시험에 일곱 번이나 떨어지고, 대위로 제대해서 장가도 안 갔는데 나이도 서른네 살이 되었으니 그 만하면 경찰에서 좀 뽑아줬으면 좋겠는데 경찰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고 도둑놈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거예요.

그 사람이 시험 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소방공무원시험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또는 가정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소방법조항을 다 외우고 소방공무원으로서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뽑는다고요.

하늘나라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밥 먹고 산다고 지질이 고생하고 부부가 서로 잘못 만나서 이혼한다고 그러고 아무리 해도 하늘나라에서 뽑는 것은 거룩한 백성이에요. 의로운 백성이에요.

개척교회 하면서 난로가 엎어져서 불나는 바람에 3도 화상입고 목사도 못하게 되고, ‘하나님, 이 정도 고생했는데 구원 좀 해주세요.’ 안돼요. 난로 엎어져서 몇도 화상이 아니라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그게 하늘나라하고 관계없다 이 말이지요. 하늘나라는 거룩한 분의 거룩한 공로가, 거룩한 그분의 의가 그 사람의 속에 있어서 화상을 당하든 교통사고를 당하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고 진짜 중요한 문제는 ‘내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그 것 뿐이에요.

그 공로가 바로 피, ‘언약의 피’라는 말이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게 복음입니다. 그 피에 삼위일체 하나님마저 종속됩니다. 그 범주를 안 벗어나요. 본인이 만들었으면서도 본인이 그 원칙을 지키고 그 원칙 바깥에서 일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 공로 아니면 저주를 받습니다.

누가 되었더라도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오직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용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체가 피를 담는 그릇인 것을, 하나님의 의를 담고 예수님의 공로를 담아 거룩한 백성 되었음을, 우리가 이 효과와 이 결과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