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1. 17:59

누가 죄를 사하는가? (누가복음 5:17-26)

누가 죄를 사하는가?

2010년 4월 18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5:17-26

(눅 5:17, 개정)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 5:18, 개정)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개정)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개정)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개정)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개정)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눅 5:23, 개정)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개정)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개정)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개정)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두 개의 방향이 서로 마주칩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 쪽으로 나아가겠다는 방향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 쪽으로 다가오셔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 와중에서 평소에 인간들이 갖고 있는 장애물이 뭔가도 밝혀지고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지도 알려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상대하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발생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람객이요 그저 군중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만큼은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이 일하시는 재료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만의 세계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세계 안에 놓여있는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이 구원받고자 할 때는, 자기 쪽에서 구원받을 준비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자기에게 철저해도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여행을 해도 여전히 그 현장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과 마주 대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관찰의 대상이 될 뿐이요 자신은 예수님을 구경하는 관람객일 뿐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안’에 그대로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로마서 8: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즉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구원될 때면, 필히 내용을 갖고 다가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원칙입니다. 문제는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춤을 추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 황급히 궁전을 빠져나오면서 벗어놓은 유리 구두가 있었는데 차후에 왕자가 그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와 춤을 추었던 여인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막상 유리구두, 즉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를 들이대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다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과 ‘예수 밖’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거울을 두고서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거울 안’에서 사는 사람과 ‘거울 밖’에서 사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올 때는, 안과 밖을 자신이 결정하려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현재 ‘예배당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고, 예배 마치고 교회 밖을 나가면 ‘예배당 밖’에 거주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 들어오나 아니오나 여전히 자신은 ‘자기 안’에 있는 바가 됩니다. 또한 사도행전 20:28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받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헌금으로 평수 넓힌 교회’, ‘자신의 기도발로 사람 끌어 모은 교회’, ‘사람들은 온화한 분위기와 친목으로 결속을 다져서 부흥된 교회’ 같은 식으로 교회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바로 여전히 ‘자기 안’에 깨어지지 않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병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와 함께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의 능력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혜택을 입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주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개인적으로 이득을 보았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벌리고 계시는 그 일들이 발현되었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인으로부터 시작으로 도로 본인에게도 돌아가는 식의 하나님의 영광이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거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4:9에 보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주되심은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는 온전한 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요구하고 있는 병고침이나 직업구함이나 결혼이나 가정의 화목 같은 것을 해결하는 것이 예수님의 근원적으로 하실 일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는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뭐가 필요할까요? 바로 ‘죄 사함’입니다. 즉 ‘정죄함이 없는 것’이 영원한 구원이요 축복입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예수 밖에 있는 인물이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껏 관람객이나 관중 정도로 머물러 두지 않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태가 죽는 시점이 오기를 예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자손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될 것이다” 이 약속이 아브라함이 믿게 되는 것은 오로지 약속 말씀 자체가 은혜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내부까지 파고들어와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영혼이 아예 말씀이 노니고 성취되는 공간으로 전환되어 버릴 경우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자신의 병을 예수님의 죄사함의 위력이 드러나는 믿음의 장(場)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이 일에 장애물이란 오직 ‘나의 몸은 내가 지배한다’는 의식 뿐입니다. 지붕을 깨면서 중풍병자 일행은 자신을 관람자 입장에서 깨어버리고 주님의 일에 자신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노선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자기들에게 임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인 것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행위보다 “이미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가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아의 전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활기치는 움직이는 공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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