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9. 07:48

비공개적인 예수님 (누가복음 4:31-36)

비공개적인 예수님

2010년 3월 28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31-36

(눅 4:31, 개정)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눅 4:32, 개정)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눅 4:33, 개정)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눅 4:34, 개정)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5, 개정)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 4:36, 개정)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교회란 사람을 상대해서 끌어모으는 데가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인간들이 모든 수완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우겨도 하늘나라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진짜 교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보세요. 그리고 그것인 사람들의 ‘교회 만들기’라고 어떤 차이가 나는가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의 교회 만들기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냥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요소들을 제공해주는 식으로 교회 만들기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들어있는 귀신은 스스로 인간들이 굿 하듯이 해도 나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들어온 귀신이 인간보다 더 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빼내어주셔야 합니다. 처음 인간이 만들어져 에덴동산에 살 때에는 그 인간에게 귀신이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신없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들어오고부터 인간들은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소위 ‘신처럼 살아보겠다’는 욕심이 내부에서 가동되기 때문에 그 욕심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사 한 거룩의 티를 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행함으로는 자신의 귀신들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현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이 보내신 그 인간형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진짜 인간은 죄없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즉 ‘죽음이 없는 존재’가 원래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죽고 난 뒤에 어디로 가게 되는지로 알지 못하기에 살아있으면서 공포에 떠는 가련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에게는 안에 있는 귀신을 긁어내십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뿜어내는 ‘복음의 광채’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져야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자는 어떤 이유나 변명도 통하지 않고 사람 취급받을 수 없습니다.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속에 똬리 틀고 있는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귀신 나감’을 경험한 사람들은, 전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마귀 들린 채 살아왔는가를 그대로 증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 생활 방식을 한 마리로 말해서,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아 만들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귀신이 원하고 있고 악마가 원하고 있는 교회나 천국이나 자아관이나 구원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참으로 귀신이 나간 사람이라면 그 사람 속에 말씀이 그득 들어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주는 완성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안 죽겠다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자’라는 점을 고맙게 여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미 죽은 자라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게 되면,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 눈 뜨게 됩니다.

즉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부터 ㅇ요한계시록 전체를 다 이루신 분으로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곧 우리의 생명임도 동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세계에 대한 예수님과 함께 죽은자로서 합류되어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죽음 안에 함께 묻어가는 그런 식의 죽음 안에서 세상을 평가하게 됩니다. 이 죽음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등장으로 실제상황임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애는, 그들은 살기 위해 살지 이미 죽었음을 인정하는 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린양의 죽음’에다 집어넣으셨습니다. 즉 죽음을 싣고 다니는 민족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속에서 비로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외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부르는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안에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귀신에 매여서 안절부절하며 몸사리게 만든 죽음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알지 못하는 죽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알게 됩니다.

생존의 문제와 더불어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죽음 안에 비로소 들어오게 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만이 특별히 만드신 죽음의 동굴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게 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무엇이 애굽적이며 무엇이 귀신적이냐 하는 것을 실감나게 생존이 힘든 상황에서 체득하게 됩니다.

즉 애굽에서의 자기네 사고방식이 뭐가 문제인가를 광야 시절을 통해서 절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왜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면 천국행이 불가능한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족스럽게 창조하시고 기념하기 위해서 정해진 날입니다.

그런데 창조의 완성 기념이 하나님의 안식에만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기 됩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안식은 바로 아예 죽겠다는 마음으로 드러나는 ‘여유’입니다. 이 ‘여유로움’ 안에서 이스라엘은 생존차원의 삶이 아니라 말씀의 완성이 가져다주는 생명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때부터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존심없는 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신이 빠져나가고 말씀의 완성이 그 내부를 채우게 되면, 힘을 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즉 현재 내가 사는 것 자체가 곧 내가 달성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만들겠다는 작품이 됩니다. 어떤 완제품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작업과정이 실시되고 있다는 이 자체가 곧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손을 떼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주하게 말씀으로 다루고 계심을 절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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