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1. 16:43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4:22-30)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2010년 3월 2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22-30

(눅 4:22, 개정)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정)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정)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정)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정)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정)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눅 4:28, 개정)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눅 4:29, 개정)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 4:30, 개정)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성도에게는 고향은 따로 있습니다. 빌립보서 3:20-21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과의 괴리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떠납시다. 남의 땅에서!”라는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이 땅 말고 떠날 데가 어디있다는거냐? 그냥 살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몽땅 포기하자!’고 나오는데 듣는 사람들은 “애써 모은 것을 왜 버리는데?”라는 투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땅의 정경처럼 하늘나라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낡은 아파트와 호화 아파트를 똑같이 보고 있으면서 어느 곳에 살겠느냐고 묻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질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호화 아파트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호화 아파트를 보이지 않는 곳이 숨겨놓고서는 말하기를, “이 낡은 아파트 버리면 호화 아파트에 넣어줄게”라고 나오면 백발백중 사기꾼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면 상대편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호화 아파트 보여줘 그러면 버리지 말래도 이 낡은 아파트를 버릴게”라고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세상적인 안목이 예수님의 말씀에 곁들여서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보고 요셉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는 “의사야 너의 병이나 고치거라”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모든 과부나 모든 문둥병자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장벽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 땅을 버리고 하늘의 고향을 말하는 사람은 이 땅을 떠나기 싫은 자들로부터 ‘미친 자’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소위 예수님을 미친 사람을 몰아세우는 자기네들은 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침착한 자들이라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정상인 중에서 정상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예수가 살았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적 미친 자들을 잡아내는 수사관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고부터 그는 자진해서 ‘미친 자’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전까지 예수님을 육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벗어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즉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이미 정상이 아닌 사람들 뿐인 세상에서 도대체 예수님을 누구를 구원하려 오신 겁니다. 민수기 24: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즉 모압이라는 이방나라을 통과하려다가 저지를 받을 때에 발람이라는 이방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단순히 기존의 나라 틈바구니에서 그냥 살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기준점으로 등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는 나라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는 처음부터 가짜 메시야였거든”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그 증거수집에 나섭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그들이 쓰고 있습니다. 근본이 별게 없다는 겁니다. 믿을 가치도 없는 존재가 예수라는 겁니다. 더나아가서 자기 고향말고 다른 동네에서 반짝 히트를 쳤지만 그들은 “남의 병 고친다는 의사가 제 병은 못 고치나? 네나 잘하세요”라는 상투적 격언을 동원해서 비난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흔들기는 곧 유대나라가 이미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는 저주의 대상으로 굳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이스라엘은 오로지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새로이 선택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를 거론하십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3년 반이나 지독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땅이 저주받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는 그 땅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누구나 땅과 더불어 저주받아도 마땅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합니다. 아합왕은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조성해놓으신 심판 분위기 속에서 진정 여호와의 속성이신 은혜와 긍휼이 돌아갈 그런 자들을 만나 무상으로 제공되는 은혜와 자비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참 이스라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도의 고향이 이 땅말고 따로 있다는 사실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을 어디까지나 이 땅에 국한하려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받은 고난만 되풀이해서 생길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 사람들인 아나돗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러움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12:6에 보면,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힘으로서는, 진정한 고향을 발견할 재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가뭄은 모든 인간이 저주받아도 합당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고침을 주신 적이 없다고 분명히 해두십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달라고 요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 살이에 고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사람만 구원이 될 뿐입니다. 과부나 문둥병자라는 이유로 구원되지는 않고 단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갔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이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흘리심도 이런 자들만을 위한 죄씻음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자는 직접 하나님이 관리하는 대상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피를 모독까지 해가면서 그들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왜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더 이상 미련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가득 싣고 다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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