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8. 18:33

예수님의 족보 (누가복음 3:23-24)

예수님의 족보

2010년 3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23-24

(눅 3:23, 개정)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눅 3:24, 개정)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따분한 족보를 가지고 무슨 은혜가 나오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족보가 하나님에게까지 도달되는 것을 봐서 그 가운데 끼인 자들은 큰 복을 잡은 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마치 어묵을 꼬챙이로 관통을 하게 되면 어묵들은 꼬챙이 주변에 팔랑개비처럼 매달리는 꼴이 됩니다.

전 세계가 이런 구조를 핵심으로 갇히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지난번 시간에 했던 ‘세례’입니다. 즉 전 세계는 세례구조 안에 갇혀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불세례와 성령세례에 의해서 세상을 절단 냅니다. 지옥 갈 자들에게는 불세례를 구원받을 자들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집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 전우를 군 본부에서 헬리콥터를 보내어 동료 군인이 지상까지 내려와서 그 전우의 껴안고 다시 헬리콥터에 실어서 본부까지 데려가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구출’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구출 작전’이 구약의 출애굽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로프를 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로프를 따라 연결된 분들은 ‘예수님 족보’에 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족보를 따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빠진 족보에 대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성도가 주님이 관통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자기만의 역사와 자기만의 족보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당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만의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없게 됩니다. 이 로프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사도행전 2:34에 보면,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주님’이 두 분 등장합니다. 왜 한 분만으로 구원이 안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용쓰고 애쓰도 인간은 스스로 무너져야 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에 입회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모든 일을 자신이 선택해서 주어진 상황이라면 죽음이란 인간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 죽음이 도리어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상황을 뜻합니다. 즉 인간이란 죽음에 갇혀있는 꼴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과 주님께서 창세전에 의논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에 영광 돌릴 자들은 지정받게 되어 있는데 그 근거가 인간에게 일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바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곧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인간이 결코 그 완성에 대해서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인 김연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습니다. 이 언약이란 로프가 주님과 주님 사이에 탱탱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해야할 필요도 없고 더 해야 할 남은 일도 없습니다.

마치 군대 유격 훈련받으면서 외줄타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지상에서 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즉 주님으로서 주님에게도 건너가신 것입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셔서 그 길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위에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힘과 공로로 외줄 타기를 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도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쪽 지옥으로 통하는 길에 대로가 펼쳐져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를 노리는 자들이 벌떼처럼 들끊고 있는 길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자들이 다 상인들입니다. 지식 팔아먹는 상인이요 영혼 팔아먹는 상인들입니다.

인간들의 타고난 욕망으로 서슴없이 들어설 수는 길이 바로 지옥 가는 길입니다. 그냥 방치하면 누구나 좋아할 길이요 외롭지 않는 길이 지옥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장세우시면서 간섭하지 아니하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길이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이요 지금도 우리가 가고 싶어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하면서 원하는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하지만 좁은 길, 주님 가신 길에는 숱한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로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 피를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그 피가 왜 흘러져야 하고, 왜 그 피가 우리를 살려내는 용서의 피가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 피가 가는 길이 바로 언약이며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언약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그 언약에서의 원칙은 “행함으로 구원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언약의 로프는 쭉 늘어지게 늘어뜨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을 사람들이 보고서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나도 나의 행함을 긍정하면서,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나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 사이에, 말씀 많이 지킨 자와 말씀을 못지킨 자 사이에 경쟁이 우월감과 서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로 인해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얻어맞아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본인도 모르고 악마로부터 사주받는 악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즉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임으로서 선악적으로만 구원이 성사되도록 부축인 것입니다. 바로 그 실상을 노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것이고 인간은 거기에 말려들어서 메시아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죄를 드러내게 됩니다. 즉 메시아 죽인 가해자로서 말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대로 믿는 자를 믿게 하심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즉 “주님, 우리의 행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내놓으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죽은 자를 건져내시는 그 과정에 들어서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관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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