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2. 13:33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누가복음 4:1-4)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2010년 3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1-4

(눅 4:1, 개정)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2, 개정)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 4:3, 개정)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눅 4:4,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성경에 성령이라든지 마귀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현실에 있지도 않는 존재라고 일축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는 그들을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3;21에 보면,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거기서 성령님이 내려왔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이 임한 예수님이 가시는 길마다 숨어있는 악마와 귀신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비로소 성령이라든지 악마나 귀신은 비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라는 존재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악마는 어디있습니까? 귀신이나 악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반응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2:35에 보면,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하셔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 칼로 모든 이의 마음을 찢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는 ‘애벌레 자아’라는 것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애벌레 자아는 한 두 마리가 아닙니다. 여러 마리입니다. 이 자아는 성장해서 의식의 표면을 이르러서는 자아가 됩니다. 주체가 됩니다. 이 애벌레가 자아가 한 둘이 아닌 이유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대해서 각자 종류가 다른 자아들이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서 감추고 있는 것은 ‘막’인데 사람들은 흔히 이 막을 자신의 전부라고 남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평생이 두꺼운 막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작업에 불과합니다. 속에 애벌레 자아는 구더기처럼 오골오골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검으로 이 막을 찢게 되면 그 동안 곱게 숨어있던 모든 괴물같은 애벌레 자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예수님에게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간들로부터 피해를 봐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야지만 이 세상이 확연하게 악마가 지배하고 통솔하는 세상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만 구원되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인간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한 사람인 아담의 자손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상대해도 그 아담으로 상대합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과실을 절취한 그 아담 말입니다.

이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서 다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과 미움받기로 작정된 사람으로 나누는 겁니다. (로마서 9:13) 그 나누는 방식이 바로 하늘이 열리면서 내려오신 그 성령이 임한 그 분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눕니다. 그래서 참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라면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리는 말씀을 합니다. 이 점을 알기 쉽게 하는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화투장 48장을 미리 방바닥에 한꺼법에 다 깔아놓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화투장이 ‘사랑받기로 작정된’ 화투장인지 아니면 ‘미움받기로 작정된’ 화투장‘인지 하는 것은 ’구원될 자‘들만 알아먹는 내용을 예수님을 통해서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즉 그 화투장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나오도록 들추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미 확정된 인생이며 팔자대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 성도의 그림에는 반드시 말씀이 그려져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그림이 있습니다. 물론 아담의 욕심의 그림도 함께 그려져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좋아하는 그림이 함께 들어있는 겁니다. 그 그림이 빠져있는 성도란 없습니다. 교회란 스스로 자신을 새 사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창세전의 운명을 확인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산다’가 들어 있는 않는 사람은 오로지 ‘떡으로만 산다’로 일관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말씀의 구조가 그 사람 속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벨의 죽음 이후에 땅의 저주를 뿜어내게 되어있습니다. 노아 홍수 직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정결한 짐승의 죽음을 통해 인간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가 보여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지상의 ‘피 값’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피 값’이란 이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피를 보시고 햇빛과 공기와 비를 내리시면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살게해주고 계시다는 겁니다. 만약에 분식집에 들어가서 만두를 먹고 그냥 가면 주인이 ‘만두 값’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두 값’입니다.
그런데 이 ‘피 값’에 해당되지 않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귀신이요 악마입니다. 악마가 아담의 세계를 점령하고부터는 다른 방식의, ‘산다’를 인간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힘’으로 사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게하셔서 힘이 쏙 빠지게 하셨습니다.

애벌레 자아가 추구하고 소망하고 노리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막 너머로 튀어나와 힘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힘있는 자아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마는 힘이 다 빠져버린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힘을 축적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면 된다”는 구호는 즉 “할 수만 있거든 힘 모아라”는 구호입니다. 힘으로 전도해서 목회성공한다는 겁니다. 그게 현실적으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비책이라고 우십니다. 악마의 외침이요 울부짖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생명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 즉 ‘힘으로 사는 삶’을 선전하고 전도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겁니다. 들을 귀 없어도 누구나 수긍이 되는 이야기로서 교회를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말합니다. “십자가만이 생명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말씀 가지고 쉴새없이 쑤심을 당하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회투패 그림 안에 예수님의 피로 적셔져 있음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이 악마의 소굴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왜 말씀으로 십자가만을 언급하시는 그 취지를 헤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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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강-누가복음 4장 1-4(예수님과 마귀의 만남)-luk100307

2010-03-10 12:55:09 : 오용익


018강-누가복음 4장 1-4(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이 근호 목사

(기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시편 108:1-3)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의 마음을 확정 시켜 주시고 저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결정지어 주옵소서. 그래서 평생의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매진할 수 있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4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93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4: 1- 4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방금 읽었던 성경 본문에 성령 나오지요. 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마귀 나옵니다. 성령 나오고 마귀 나오고. 이것은 기존의 언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혹은 mbc, kbs, sbs 에 이런 용어가 안 나옵니다. sbs에 보면 김연아 이야기 나오지요. 그런 이야기나 나오지 거기에 성령 이야기 안 나오고 악마 이야기 안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 보는 것을 주저하게 돼요. 비현실적인, 현실과 안 맞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쟁이들이나 믿을 이야기지 이것이 어떻게 보통 사람들에게 다 믿으라고 할 이야기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되어 있는데 여기에 ‘하늘이 열리고’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하늘이 열리면 이 땅에 새로운 개념들이 생깁니다. 하늘이 열리면 새로운 단어가 이 땅에 쏟아져요. 하늘이 닫혀 버리면 성령이라는 분이 이 땅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닫혀 있으면 이 땅에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이 땅에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늘이 열려야 되고, 순서를 잘 아세요, 하늘이 열려야 되고, 하늘에서 성령님께서 특정인물, 예수님에게 임해야 되고 그 예수님은 성령이 임한 유일한 분으로서 이 세상을 다니시면 갑자기 숨어 있던 마귀들이 예수님에게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제가 또 나쁜 놈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써서 성경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보고 믿지 마라,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그런 이야기 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원하고 있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이야기를 성경은 안 해줍니다.

그래서 목사가 성경대로 하려면 사람들이 이해 못할 일만 줄줄이 내뱉어야 돼요. 성경내용만 설명하는 목사 같으면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 못할 말만 내뱉어서 ‘이래도 예수 믿으려고 합니까? 그만 중도에 포기하세요. 안 믿어지거든 그냥 포기하세요.’라는 말을 목사가 계속 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들을 귀 없는 자와 들을 귀 있는 자가 구분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저도 할 줄 알아요. 옛날에 한국에 복음이 없고 한국에 성령이 없을 때도 사람들은 신을 향하여 잘 빌었습니다. 음력으로 1월 28일 되면 삼신 할매에게 잘 빌었어요. 그 비는 기도내용이 뭐예요? 정성만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신이 어떤 신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것은 몰라도 그저 이 지상에서 정성만 들이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 그저 제 정성 받아주세요.’ 이렇게 정화수 떠놓고 열심히 빌었다 이 말이지요. ‘빌면 어떤 복이라도 오겠지.’ 라고 열심히 그냥 비는 거예요. 새벽제단 쌓는다고 빌고 금요철야에 빌고, 교회 나와서 빌고, ‘그저 빌면 복주겠지.’ 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을 향하여 제가 ‘여러분, 비세요. 바치세요. 충성 하세요. 그러면 복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 납득이 되고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여러분, 성령 왔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분이 등장하니까 악마도 같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들을 귀 없는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악마는 성경책에나 나오지 이 세상에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 성경은 악마가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바로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말이 들어오기만 하면 반발하는 우리 속에, 악마가 들어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하게 되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뭔가 속에 반발이 있어야 성령 받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그냥 곱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냥 몇몇이 주동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강도는 풀어주되 예수님 죽이라고 합세했던 그 예수입니다. 우리가 무슨 양심이 고와서 그 예수를 믿는다고 나서겠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핍박했다면 요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고 핍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상한 사람이에요. 우리가 진짜 예수님 말고 다른 예수를 꾸며서 섬기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반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한 번 보자 이 말이지요. 누가복음 4장 자체가 예수님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대로 이야기하니까 오늘 본문 4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을 제대로 된 예수님에게 제대로 하는 겁니다. 여기서 ‘산다’가 두 종류의 ‘산다’가 있습니다. 떡으로 사는 것 따로 있고 말씀으로 사는 것 따로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분은 제대로 살았습니다. 제대로 돌 맞고 제대로 죽어서 현재 제대로 살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이 세상에서 돈이나 챙기기 위해서 설교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이 사람들에게 호응 받는 총회장 되려고, 인기 있는 스타목사 되려고 설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에 충만했다 했습니다.

지금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도 성령 충만했어요. 스데반 집사님도 충만했고 그래서 돌에 맞아 죽었고 예수님도 성령에 충만했고 그래서 십자가에 달렸고 그 다음에 우리 차례, 우리가 성령에 충만했다, 그러면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이 고백되어 나오느냐 하면, ‘여러분, 사람은 떡이 다 아닙디다, 돈이 다 아니에요.’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쏟아져 나와야 됩니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참, 맞아 죽으려고 이런 소리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딱 깨놓고 인간적으로 이야기해서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예요? 혼자 힘으로 돈 벌기 힘드니까 하나님 힘 빌려서 돈 더 달라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돈 있어야 사람노릇하고 돈 없으면 인간취급 못 받는 그런 사회 속에서 돈도 벌고 천당도 가고 두 마리 토기 다 잡으려고 교회 온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예수님은 조작된 예수님입니다. 지난 토요일의 이야기를 제가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만 그 논문에 보면 서론 부분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 짐승과 같은 그리스도를 원했다.”는 겁니다. 짐승과 같은 그리스도, 그 짐승과 같은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한 것처럼 평소에 내 소망한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 그런 그리스도를 찾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사람들에게 등장한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달라고 요청한 우리에게 맞아죽은 예수님인데 그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렸어요. 그로 인하여 졸지에 우리는 마귀가 되고 살아계신 참된 주님만이 우리 앞에 부각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 분 앞에서 자기 죄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네가 상상한 예수님 말고 진짜 너에게 와서 너를 할퀴는, 너의 모든 것을 긁어버리는, 곱디고운 내 양심조차 긁어주시는, 그걸 깨주시는 그 주님, ‘네가 말씀에 의하면 이런 문제가 있잖아.’ 라고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주시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주님이 아니고, 그것은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령을 안 받았으면서도 성령을 받은 척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아기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언하기를 ‘이 아기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말씀이라는 칼을 가지고 사람을 푹푹 찔러서,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음탕하고 음란하고 욕심 많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얻기 위해서 교회 왔던 사람들을 푹푹 찔러서 그 속의 더러운 것을 욱, 하고 토해내게 하시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기 예수님입니다.’ 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하시는 일에 성령 받지 않고서는 우리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을 왜 자꾸 믿으려 합니까? 그냥 집에 가시지.’라는 식으로 목사가 설교할 수밖에 없어요.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님께서 말씀이라는 칼을 쥐고 장구나 북을 찢듯이 푹푹 찔러서 ‘감추지 마. 네 속에 이거 들어 있잖아.’라고 찔러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먹물을 튀기도록 그걸 다 끄집어내시는 수술하시는 의사 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자신이 의롭고 자신이 건강하고 자신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런 예수를 피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어요.

그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래서 내가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으라고 하지 않더냐. 들을 귀 없는 자는 못 듣는다 했잖아.’ 이렇게 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마귀는 어디에 들었느냐? 세상에 나와 있는 귀신영화, 마귀영화 보면 항상 귀신은 인간 바깥에 있어요.

자기는 정상인데 귀신이 인간 바깥에서 우리 가족을 괴롭힌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서 말하는 귀신 축출하는 것도 다 귀신이 바깥에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네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들어 있다.’

악마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우리는 몰랐는데 어떤 경우에 반응을 나타내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 되면 ‘나, 이제 안 들을래.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이런 예수는 안 믿을래.’라고 갑자기 속에서, 내 안에서 마귀가 퉁탕퉁탕, 예수님 떴다 하면 그 안에서 반응을 나타내요. ‘저리가요. 좀 봐주세요. 나는 그런 예수 싫단 말이에요.’라고 퉁탕퉁탕 반응을 나타내요.

울산의 정 낙원 목사님하고 지난 금요일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정 낙원 목사님이 토요일 날 참석을 하셨어요. 그날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제 강의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고 그 듣는 사람들의 태도와 분위기, 이쪽은 가야바고 이쪽은 제사장들이죠. 저보고 발제를 하라고 자리를 제공했는데 강의 도중에 항의가 막 들어오는 거예요.

‘누가 불렀어, 저 사람’ 이런 항의가 막 들어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정 낙원 목사님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십자가라는 것이 말만 십자가가 아니고 실제로 현장에서 그대로 하나님께서 배치되어 나타나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발표할 것에만 집중하느라고 그것을 못 느꼈는데 정 낙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미워져야 돼요. 여러분이 예수님이 미워진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증거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평생 예수님 믿었는데 주님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라고 예수님이 밉상이 되고 ‘정말 내가 저런 예수를 안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선택했기 때문에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질질, 끌고 가듯이 ‘너는 나한테 발길질해라. 나는 너를 용서하겠다.’ 하는 식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만 구원받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신 은혜로만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는 눈만 뜨면 주께 반발하고 원망하고 반항하는 그것이 하루 24시간입니다. ‘기도 했는데 기도응답도 안 해주고 이래서 무슨 재미로 교회를 가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항상 불평을 하지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유일하게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자마자 주위에 감추어져 있던 마귀들이 마귀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항의하지 마세요. 마귀는 이렇게 합니다. ‘사람은 돈 있어야 산다.’ 마귀입니다. 두 번째 시험, ‘사람은 인기 있어야 산다.’ 마귀입니다.

세 번째, 사람 사는 것이 세상 부귀영화, 강남살고 보석 손에 끼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출세하고 김 연아처럼 1등하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1등 하고 싶고, 그것이 또 마귀의 이야기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목말라 하면서 교회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 마귀 들린 사람들이죠.

이것은 누굴 탓하지 마세요. 왜냐? 우리는 타고난 태생이 이렇습니다. 이걸 탓하려면 엄마 아빠에게 탓하세요. 울산강의에게 이런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에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했습니다.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아담 한 사람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백 명이 오든 천명이 오든 단 한 사람으로 봅니다.

‘내 선악과를 따먹은 놈들, 그리고 그 새끼들’ 그렇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한 사람으로 봅니다. ‘너희들은 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 값을 치러야 되지만 그 값을 위해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시는 분은 따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아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해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시선을 우리가 접수해야 돼요. 나의 시선을 고집하지 말고. 정신병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남의 힘을 의식할 때부터 정신병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저렇게 힘을 가졌는데 왜 저한테는 저 사람 같은 힘이 없습니까? 저 사람은 출세하는데 왜 저는 출세 못합니까?’ 이처럼 남을 의식할 때 비로소 본인의 잠자고 있던 마귀가 꿈틀거리죠.

이것을 어떤 철학자가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을 애벌레 자아라고 했습니다. ‘애벌레자아’ 제가 책을 읽으면서 애벌레자아만큼 자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은 처음 봤어요. 애벌레자아의 특징이 뭐냐? 애벌레처럼 자라서 의식의 표층에 나가면 그것이 우리의 자아가 된다는 겁니다. 새끼자아니까 애벌레자아인데 그 애벌레자아의 특징이란 크면 본격적으로 나의 자아가 된다는 의미에서 애벌레자아라고 하고 또 그 특징이란 이것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침부터 더럽게 구더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고 안해야 되지만 그래도 해야 됩니다. 우리 속에 한 두 개가 아니라 구더기 자아가 수천마리가 오글거리고 있는데 어떤 사건이 터지면 이쪽 자아가 불쑥 튀어나왔다가 쑥 들어가 버리고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그 자아 말고 또 다른 애벌레 자아가 반응을 일으키면서 불쑥 솟아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모습, 여자니 남자니 키가 몇이고 학력이 어떠하다는 그 우리 모습은 뭐냐, 이것은 하나의 막입니다. 그러면 그림이 나오지요. 막이 있고 그 안에 애벌레가 오글거리고 있는 겁니다. 애벌레자아, 영화에 보면 에이리언에 그런 게 나오는데 거기서는 괴물이 한 마리가 들어 있는데 우리는 여러 마리가 들어 있어요.

애벌레자아가 들어 있어서 바깥에 새로운 힘의 사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다 아는 ‘김연아 금메달 땄다.’ 하니까 어린 딸을 키우는 엄마라는 그 막에서 ‘우리 딸을 지금부터 김 연아처럼 피겨를 한 번 가르쳐 봐?’ 가 튀어나옵니다. 올림픽의 김연아 사건 때문에 내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자아 중에서 ‘내 딸을 피겨 가르쳐서 선수를 한번 만들어 볼까?’라는 것이 불쑥 하고 내부에서 내 막을 쳐버려요.

외부에서 김연아 사건이 터지자마자 내부에서 내 딸을 김연아의 대체물로 김 연아처럼 여기는 그 막이 튀어나오면서 내 막을 탁 쳐버립니다. 내 막을 탁 쳐서 그 날 저녁에 ‘여보, 우리 딸 하나 있는 거 피겨 가르칠까?’ 이렇게 합니다. 하게 되면 다른 막이 있어요. 남편이라는 막이 있어서 ‘가만있어 봐라.’ 하고 지금 월급을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월급 받는 거 생각하고 피겨 배우는데 한 달에 한 50만원이 들어간다면 ‘여보. 안되겠다. 우리 애는 김 연아처럼 못 키우겠다.’ 하고 다른 막이 그걸 반대를 해요. 남편도 남편대로 그 속에 애벌레자아가 있어서. ‘그 애 그렇게 키우다가 우리 노후대책 적금 부을 것 없다.’ 해서 비교하는 거예요.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애벌레자아라는 표현을 썼다 이 말이지요.

인간은 그냥 마귀일 뿐이죠. 그러면 교회 나온다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이 애벌레자아는 그대로 두고 이 막에다가 종교인이라는 위선을 덧칠하는 거예요. 덧칠하고 삼겹살처럼 자꾸 보태고 더 보탤 뿐이에요. 교회 와서 사람이 달라져야 구원받는데, 내부가 달라져야 되는데 외부만 천당 간다고 해 봤자 교회에서 문제하나 발생하면 애벌레자아가 또 튀어나와서 ‘내가 어쨌는데 나를 비난하느냐’고 하면서 막을 칩니다. 그 막이 다른 막을 쳐버리면 그 다른 막도 상처받아서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그러면 어떻게 이걸 조치를 하느냐. 우리는 이게 감당이 안 됩니다. 애벌레자아라는 것이 이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차후 적으로 ‘내가 인간 만든다.’ 이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인간 만들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발 여러분 죄 좀 지으시고 욕심 좀 내세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습니다.

“제발 죄짓고 싶으면 죄 지으시고 욕심나면 욕심 좀 내 주세요.”라고 했어요. 울산 사람들은 이해를 해요. 여러분은 이해 못하겠지요. ‘죄짓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해야 될 목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욕심이 죄인 줄 알면 욕심을 줄이라고 이야기해야 될 목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래서 울산강의 처음에 이런 이야기, 화투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화투 48장을 전부 방바닥에 깔아놓습니다. 죽 깔아 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느냐? 이미 깔려있는 화투를 들추기를 합니다. 들춰서 보면 ‘어, 이 사람은 천당, 이쪽 화투장은 지옥, 천당, 지옥’ 이미 이 사람들은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고 또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화투를 미리 다 깔아버렸어요.

화투에 이미 그려진 자기 그림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믿어야 돼요.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되어 있든지 아니면 저주받기로 되어 있든지 둘 중에 하나뿐이에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돼요. 이걸 믿으셔야지 내 속에 있는 애벌레자아를 좋은 애벌레로 바꿀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우리로서는 안 됩니다.

그냥 태어난 대로 사시고 그냥 생긴 대로 노세요. 교회라 하는 데는 인간 바꾸는 데가 아니라 내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화투장 까는 데가 교회입니다. 나는 고함을 지르는데 여러분은 아무 감동도 없고 뭐……. 교회가 사람 바꾸는 데가 아닙니다. 술 고 담배 끊고 이런 데가 아니고 ‘내가 창세전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뭡니까?’ 나는 몰랐지요. 몰랐는데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고 믿는 순간 패를 까보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피라는 그림이 깔려 있는 구원받는 사람이더라,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성도요 그게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인간고치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새삼스럽게 살면서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지정해 놓은 팔자가 있어요. 그 팔자대로 가는 겁니다. 인생은 그냥 제 팔자대로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는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못 올수도 있고 그래서 심한 말을 못 하겠습니다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말을 다시 설명할게요. 이 말은 ‘네 능력 밖의 말을 (예수님이) 내가 할 테니까 이것을 기존의 네 능력을 가지고 믿을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아예 안 믿어지는 말을 할게. 하지만 성령이 임한 사람 같으면…….’ 성령이 임했다고 해서 성질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죄 욕심 그래도 있어요. 어떤 교회는 교회 오면 봉투에 돈 만원씩 넣어서 준대요. 제가 그 소리를 듣고는 우리교회 부흥은 간단하다. 저쪽에서 만원을 준다면 우리교회는 5만원을 넣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다 옵니다.

5만원 주니까 교회 왔는데 만약에 한두 달 주다가 그 다음부터 5만원 안줘보세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안 나오겠지요. 다른 교회에서 10만원을 주면 또 그리로 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교회 와서 성도가 아니지요. 역시 돈 좋아해서 온 거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도 지금 교회는 나오지만 돈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돈 좋아하는 인간에서 돈 안 좋아하는 인간으로 바꾸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바꿔봐야 애벌레자아가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바꾼 척 해 봐야 그것은 하나의 막에 불과해요. 남에게 보기 좋으라고 하는 제2, 제3의 내가 만든 자아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패 까보자 이 말이죠. 패 까볼 때 어떤 패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말씀이 뭐냐, ‘말씀으로 산다.’ 하는 거지요.

그러면 떡, 요새말로 경제적인 문제니까 돈, 우리는 돈만 좋아하는데 여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뭐가 스며들어오느냐 하면, 돈 좋아하는 그것은 그대로 있고, 그것은 그대로 있어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돈 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돈 좋아해요. 교회 나와도 바이어 만난다고 서둘러서 나갈 사람들 많아요. 돈은 다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거 말고 우리 속에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들어와요.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말씀도 있고 돈 좋아하는 악마의 마음도 같이 있고 두 계가 있는 거예요. 두 계가 있으면 주께서 패를 까보면 안에 성령이 들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말씀이 들어 있는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교회충성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용서하심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마지막 죽을 때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교회 십일조 하고 돈 바쳤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목사는 목이 쉬라고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아직도 성령이 안 왔다는 뜻이고 성령이 온 사람은 놀랍게도 우리 안에 말씀이 흡수가 돼요. 돈 좋아하는 것은 그냥 있고, 그걸 버리면 안 되지요.

돈 좋아하는 것은 그대로 있지만 말씀이 들어오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주께서 피 값을 달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씀 전체의 흐름을 말씀드릴게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이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저주받아야 되지요. 그것이 기본인데 가인이 아벨과 싸워서 아벨이 가인한테 얻어맞아 죽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땅이 피 값을 달라는 거예요. 저는 성경 보면서 피 값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는데 여러분은 모르겠어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김밥 먹으면 그거 먹고 도망가면 안돼요. ‘김밥 값 줘야지.’ 이러지요. 오뎅 먹고 그냥 가면 오뎅 값 달라고 하지요. 노아홍수 이후에 주님께서 피 값을 달라는 거예요.

날 때부터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복주시고 농사 잘되게 해주시는 그것이 다 공짜가 아닙니다. 그게 다 값을 치른 거예요. 누가 값을 치렀는가? 예수님이 자기 피 값으로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나 몰라라, 하고 입 싹 닫으니 뭐라고 합니까? ‘피 값 내놔라.’ 하지 않습니까?

먹은 만두 값 김밥 값 오뎅 값 내놓으라는 거예요. 왜 굳이 예를 들면서 오뎅이나 김밥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걸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만두 값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 땅은 인간들의 땅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피 값으로 은혜를 주신 땅이에요. 무지개가 떠서 은혜를 줬는데 무지개 값은 뭐냐? 지상의 피 값에 의해서 무지개로 보호해 주는 겁니다.

그걸 제가 지난 토요일에 이야기하니까 옆에 있는 박사님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세상에 신학박사가 되어서 무지개언약이 제물의 피 값으로 은혜 주신다는 그걸 자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비평하는 글에 그대로 쓰여 있어요. “나는 무지개언약이 피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러고 있어요.

“……무지개언약이 ‘피’를 조건으로 한다는 발제자의 견해는 특이하다. 사실 창세기 본문은 무지개 언약을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소개하고 있다(창 9:8-17). 논평자가 아니는 한 발제자의 견해는 해석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한국개혁신학회 제 83차 정기학술발표회지 47쪽)

사람들이 왜 지옥 가는지 압니까? 은혜는 받아놓고, 이것을 공짜로 받아놓고 영광 돌릴 데가 없어서 영광을 안 돌려요.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냐 하면 자기한테 영광을 돌려요. 공짜로 은혜 받고 공짜로 햇빛과 공기를 받고 공짜로 심장 뛰고 평생을 공짜로 살아놓고 ‘내가 값을 치를 사람이 없지.’ 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입을 싹 씻어버려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에게로 끌어 당겨버렸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자기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피를 흘리게 하셔서 피 값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피 값을 내놓으라고 할 때 그 흘린 피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노아홍수 이후로 이 지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짜여 진 세상이 될 때 그 다음부터 그 은혜의 땅에 살 수 있는 자격자는 어떠한가?

애들 장난감 중에서 퍼즐조각 있지요. 은혜로 사는 땅에서 사는 사람은 특징이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는 사람과 착한 사람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다릅니다. 착한 사람은 나쁜 짓 적게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죠. 그런데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평생을 다 해도 나는 지은 것이 죄밖에 없는데 이 몽땅 지은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은혜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착한 사람 되지 마시고 은혜의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착한 사람 되지 말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신나서 ‘이 목사는 방종 한다, 나쁜 짓을 조장한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은혜를 아는 사람 같으면 항상 관심사와 방향이 모든 것을 은혜 쪽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나오느냐?

잘 들어보세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남이 가진 힘이 탐나서 그 다음부터는 탐욕을 부립니다. 힘을 자꾸 부려요. 교회 나와도 힘자랑하고 밖에 나가서도 힘자랑하고 하여튼 힘에 환장한 사람입니다. 그 힘에 밀려서 누가 죽었느냐 하면 은혜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산다.’ 이 말은 ‘힘으로 산다.’는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전의 이 세상의 본래부터 있던 법칙이었어요.

지난 금요일에 김 ◯◯ 집사님 가게에 심방을 갔어요. 심방인지 보신하러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갔어요. 제가 실명을 거론해서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김 ◯◯ 볼 때마다, 오늘 안 오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볼 때마다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요. 어떻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힘을 빼고 사느냐 말이에요. 물론 키가 작아서 힘 뺄 것도 없겠지만.

사람이 힘을 빼고 사니까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지 않아요. 하여튼 어디가도 시비 거는 사람 없고, 지금 부인되시는 집사님이 웃고 계시는데, 어디가도 시비 거는 사람 없고 사람 좋다 소리 듣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힘을 빼고 ‘나 같은 인간은 구원받은 것만 해도 감사하지.’라고 힘을 빼고 사니까 우리 온 교인들이 그 집사님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 혼자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못사느냐 그 말입니다. 왜 우리는 김연아 쳐다보고 왜 우리는 힘 있는 것만 좋아하느냐 그 말입니다. 교회 와서조차. ‘아이고, 저 소리 들으니까 힘 안 되겠다.’ 삐져서 나가버리고. 왜 자꾸 힘자랑하려고 사느냐 이 말이지요. 그게 자기가 망하는 길인데.

좀 반대로 살자는 거지요. ‘심령이 가난한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의 힘을 빼자 이 말입니다. 좀 힘 빼고 살자는 것인데 세상은 뭐냐, 악마는 ‘예수여, 네가 힘이 있어야 메시아 구실을 할 수 있잖아.’ 힘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힘을 쏙 빼버렸습니다.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40일 동안 완전히 굶겨놓고 그 때 성령께서 마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마귀가 같잖다는 듯이 봅니다. ‘어이, 예수여, 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우선 먹어야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맞잖아. 일을 하려거든 일단 저기 있던 돌더러 떡이 되라고 해서 일단 먹어 챙겨서 힘, 힘, 힘을 가져서 그 힘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지.’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말씀하지요. ‘산다는 개념이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사는 것이지 이 땅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재벌 되어봐야 생명나무를 못 따먹으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저주요 그것은 죽음이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는 말씀의 구조가 차 있는 겁니다. 따라서 노아홍수 이후에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애벌레자아속에 그 옆에 하나님의 용서하는 은혜가 있어야 돼요. 그 은혜가 있으려면 한번 힘을 쏙 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힘이 쏙 빠지도록 합니다. 십자가의 그 코스를 밟게 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왜?” “이런 식으로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여주세요. 하나님, 날 죽여주세요.” 그럴 때 그 사람은 기존에 알았던 산다는 개념, 기존의 밥 먹고 살고 떡 먹고 사는 그 삶의 노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살려줘야 제가 삽니다.’라는 새로운 노선과 연결이 되게 되어있어요.

‘아,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말씀이 이루어지면 사는 것이구나.’라는 절차가 있을 때 그 사람은 48장 화투에서 ‘이 근호 너는 뭔지 한번 까보자’ 하게 되면 저는 몰라요,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돈만 좋아하고 죄만 짓고 욕심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밥 먹고 산다고 이러고 있습니다만, 패를 싹 까보게 되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예수님의 피 값이 들어 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값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도 그 피 값으로 말미암아 대신 값을 다 치른 상태에요. 값을 치른 상태 같으면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패가 뒤집어 졌습니다. 패가 뒤집어지고 난 뒤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전도라고 합니다.

‘나는 천하에 죄인인데,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내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그 화투장에 걸려 있는 그림 그대로 자기를 소개하면 그것이 바로 전도가 되는 겁니다. 전도순서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 말씀이 오게 되면 칼로 옵니다. 칼로 오면 막이 있고 그 막을 칼로 온 말씀이 찢어 버립니다.

찢어버리면 왈칵 하고 그 속에 거룩한 체 하면서 따로 꼬불쳐 놓은 돈 좋아하는 것, 세상 좋아하는 것, 남에게 인기 얻고 싶어 하는 것, 유명한 목사 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세상 영광 다 차지하고 싶고 큰 교회 가고 싶은 것 이런 욕심들 애벌레자아가 와락 쏟아지면서 동시에 또 튀어나오는데 뭐냐, 그 애벌레 자아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 그 애벌레자아로 인해서 피해자가 되신 예수님과 함께 같이 튀어나올 때, 그때 전도할 때 우리는 힘이 쏙 빠집니다.

힘이 쏙 빠지면서 ‘주여, 전도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지 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주께서 말씀으로 오니까 나는 힘 빠져가면서 힘을 뺄 때 비로소 전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ㅆ습니다.’ 로버트 박(박 동훈)이 미국선교사인데 북한 들어갈 때 ‘나는 김정일을 하야시키고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러 간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몇 시간 만에 매를 맞았는데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정신 줄이 나가 버렸어요. 정신 줄이 나가서 회개했습니다. ‘내가 북한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북한이 좋은 나라인줄 모르고 오해했습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북한을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두 손 바짝 들고 나왔어요. 왜 그랬습니까?

‘나는 이제 죽은 사람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간사람, 분명히 자기공동체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죽은 사람이니까 나를 잊으라.’고 했어요. 죽은 인간 같으면 죽어야지 왜 튀어 나왔어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도할 때 너무 힘을 줬어요. ‘나는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의 힘으로 북한을 전도하리라.’ 이게 바로 잘못이었습니다.

신앙은 힘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신앙이란 ‘나는 북한에 전도할 가치도 없는 존재고 설교할 가치도 없는 존재고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한 존재다.’라는 것을 힘을 쪽 뺄 때 주께서 때가 되매 그 때 북한에 가라 그 말이지요. 한 번 보란 듯이 실적 올리듯이 내가 아프리카를 선교하면 아프리카가 달라지고, 이런 식으로 자기의 힘을 가지면 그것은 악마의 일, 애벌레자아의 일이지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냥 힘 빼고 사시면 그것이 전도고 여러분을 어느 정도 알아주고 힘이 차이면 주께서 또 전도를 막으시고, 그렇습니다. 날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와서 여러분속의 구정물 같은 것이 토해지면서 동시에 여러분의 패가 항상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받는 은혜의 사람인 것을, 항상 그것만을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안에 마귀가 들었습니다. 남한테 믿는척하고 신앙 좋은 척 하고 훌륭한 척 하고 다른 사람 된 척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악마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피를 모독할 수밖에 없는, 내 자랑할 수밖에 없는 악마의 하수인 노릇 했습니다. 이제는 푹푹 찔러서 우리 안에 죄만 있고 십자가가 더불어 같이 있어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남에게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