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4. 17:10

성령과 이사야 예언 (누가복음 4:16-21)

성령과 이사야 예언

2010년 3월 1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16-21

(눅 4:16, 개정)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정)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정)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개정)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정)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정)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오늘날 말씀이 응했다’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따집니다. “뭘 주었는데? 우리가 도대체 뭘 얻었단 말인가?” 예수님은 주셨다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받은 게 없다고 하니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유를 주었다고 하시며, 눈을 뜨게 했다고 하시며, 또한 은혜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주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은 갇힌 처지가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눈을 뜨고 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요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힘을 비축해서 그 비축된 힘을 빼먹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주장은 말씀하고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 신체를 보존하는 것을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니다. 악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은 떡으로 산다”. 여기서 ‘산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악마는 뭘 가지고 ‘산다’, 혹은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악마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현 인간의 신체로서는 진정한 ‘삶’과 진정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무척 무서워하는데, 실상은 이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해도 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봤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산 채로 불러나옵니다. 결코 사람이란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기 신체 보존만을 가지고 ‘산다’고 우기면 만약 힘든 일이 들이닥치면, “죽으면 이 고통도 소멸될 것이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모세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11: 15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죽음과 삶이란 인간의 현 신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죽음이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 퍼부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이런 저주를 온전히 받아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진정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영생이란 현 우리 신체를 가지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런 죽음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신체와 신체들만 눈에 들어오는 세상에 살다보니 참된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저 신체 보존만이 살 길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있는 한, 인간은 신체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엄포를 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산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현재 인간들이 기거하고 있는 이 세계는 전에 뱀이 인간을 속이던 그 속임수가 지속되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속임수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의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즉 모든 변화가 다 ‘예수님만이 말씀의 성취자이다’를 말해주는 변화라는 겁니다. 원래 사람들이 말씀의 들러리였습니다. 지옥이라는 것도 원래 악마를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악마의 도장에 이마에 박힌 자들도 합세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결코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나리인데 그 어린양의 도장을 이마에 박힌 자들만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준해서 진행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사야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이사야 61:1-2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뒤 3절의 말씀을 보면, 누가 이런 혜택을 입게 되는지가 나와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갑니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이란 그냥 이스라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속한 자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혜택을 늘 받고 사는 자라는 인식이 퍼져있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주어서 그들을 뿌리채 잘라버리게 하라”입니다. 10%가 남아도 그것마저 잘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을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점이라는 것은 크기나 면적이나 공간이라고 할 것이 따로 마련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즉 점이라면 같은 점끼리, 크기나 면적이나 영역 확장을 가지고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이런 식의 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따로 자기만의 영역이나 공간은 없었습니다. 말씀이 이끄시는대로 움직이는 점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말씀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움직이고 하시는 모든 일이 말씀 그대로가 내용으로 담기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날 우리들은 나름대로 영역과 공간을 사적으로 갖추기를 원합니다. 마치 가인의 후예들 같습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점이 아니라 크기와 면적을 따로 장만해서 그 안에서 자신이 보호받고 생존하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모습은 자유도 아니요, 눈 뜬 상태도 아니요, 은혜로 사는 삶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신체를 가진 모든 인간들은 이런 형태에서 자아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소리마저 자신의 신체의 허약성에 지배를 받아서 자유를 상실한 자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바치는 모든 행위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진짜 죽음을 맛보게 합니다. 곧 저주를 맛보게 하십니다. 무엇이 가난이며 무엇이 포로된 것이 무엇이 은혜가 아님을 혹독하게 느끼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인간은 벌려놓은 자기 세계를 와해되면서 하나의 질점으로 응축되어 말씀이 가득들어 있는 말씀이 필기도구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인 것을 알고 오로지 말씀으로 주어진 진짜 저주와 축복이 뭔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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