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8. 13:04

회개 (누가복음 3: 7- 9)

회개

2010년 2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7-9

(눅 3:7, 개정)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정)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정)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이고 격한 말을 서슴없이 세례요한이 내뱉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반발할 수 있습니다.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인데 네가 뭐길래 감히 우리를 향하여 그런 심한 말을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단순한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세례’라는 아이디어는 세례 요한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대중들이 요구한 바도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작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필히 들어가야 될 요소가 바로 ‘세례’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바가 됩니다.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 구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극도의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사람 구원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행하심’ 위주입니다. 즉 행하심 그 자체에 대해 비중과 초점을 두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기 구원에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차이성이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려 나오는 사람을 보고 도로 호통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렇다면 누구나 삐칠 수밖에 없는 과격한 발언이 됩니다. 이런 과격함이 세례 행위를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즉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세례를 받고 더 나아가 세례의 합당한 열매를 맺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그런 의식이나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의 자식’들이 할 짓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길 가에 있는 돌멩이들도 능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독사의 자식’들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더욱 질이 나쁘다는 말이 됩니다. 길에 있는 돌멩이들과 ‘독사의 자식들’과의 차이점은 ‘주체’에 있습니다.

즉 주체적으로 회개가 가능한 것은 ‘독사의 자식’들이요 그렇지 않는 자들은 ‘돌멩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을 놔두고 길의 돌멩이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세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5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물’이나 ‘성령’이나 모두 하늘에서 주신 일방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즉 물 세례의 최초의 의미를 부여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요한 물 세례에 참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결국에서 성령까지 내리시는 성령의 세례의 주체자가 되십니다. 결국 이것은 성도가 맨처음 돌멩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됩니다. 돌멩이로부터 출발해서 ‘아브라함 자손’이 된다면 물 세례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돌멩이보다 더 못한 ‘독사의 자식’로부터 ‘아브라함 자손’이 되려면 여기에 누가 개입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개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완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완성이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물로서 시작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불 세례, 즉 저주 세례 받으시고 궁극적으로 자기 사람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므로서 구원이란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성사될 수 없음’이 분명히 확실해져 버리게 됩니다. 돌멩이가 아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희망없이는 못삽니다. 천국가겠다는 것도 모두 사적인 희망의 산물이요 열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독사의 자식’으로서의 희망입니다. 과거를 짤라야하듯이 뿌리채 도끼로 잘라져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본인의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인간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보이는소망이 아닙니다. 성도는 보이는 소망을 소망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로마서 8:24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덮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방으로 전근을 하게 된 사람은 우선적으로 그 지방에 적응하려고 조마조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과거의 뿌리에서 나오는 희망성에 준한 주체관 때문에 발생된 감정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주체관이 구성됩니다. 즉 거대하고 강력한 자석이 진행하면 졸지에 주변에 있는 철물들의 배치의 방향성이 달라지고 재배치되는 것처럼 지방으로 전근하는 성도 안에 들어있는 그 귀한 복음으로 인해 그 지방이 비상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성진정한 성도는 이 주체가 둘로 갈라져야 합니다. 균열이 일어나야 합니다. 희망에 속한 주체와 소망에 속한 주체로 갈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 자기 희망의 노선에 속한 자아상은 물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에 이미 예수님께서 물 세례로서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일대기와 그 노선을 뒤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례의 합당한 회개의 열매란 딴 게 아니라, 자기를 더 살려내기 위해 여분의 것들을 제거하는 구조를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도대체 왜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구조에 편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죽고 그 구조가 요구하는 자로 탈바꿈 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바꿈 당해야 하는가’ 아니면 ‘탈바꿈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12절 전체를 다시 보겠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되지 그 뒤에 또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보아서 세례를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고 난 뒤에 달라진 인간상을 보인다는 조건 하에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들 있습니다.

즉 “나는 세례를 받을 테니까 받고 난 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까?”라고 묻는 물음입니다. 전과 어떤 식으로 달라야 합니까 라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차이를 뜻합니다. 즉 세례란 세례 전과 후에 차이가 진다는 겁니다. 이 차이의 내막을 세례라는 것이 어떤 구조를 나타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기존의 주체 안에는 환상을 유발하는 요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유발요인을 겨냥하면서 설교를 하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꿈을 스스로 깨는 겁니다. 그 깨는 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규정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어서 두 벌이 없게 하라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옷이 두 벌 있다는 말은 꿈을 이룬 시점에서 입을 옷을 미리 장만한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여유가 있도록 먹을거리가 있는 자들도 그 여유분을 스스로 삭제하라는 겁니다. 세금 징수자도 그렇게 하고 힘을 가진 군인들도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축적된 힘의 누적분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운 구조 안에서의 삶이다 는 겁니다. 이것은 곧 ‘독사의 자식’으로 간주하라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다음 조치를 고대하는 겁니다. 즉 꿈을 버리고 자신에게 덮칠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과 처신에 모든 것을 일임하며 사는 것이 새로운 천국 세계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끼가 와서 우리의 허구적 삶을 뿌리 채 잘라버린 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보물이 있어 그 보물로 인하여 주변이 새롭게 반응을 나타내는 인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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