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1. 10:44

세례요한의 역할 (누가복음 3장 3- 6절)

세례요한의 역할

2010년 1월 3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3-6

(눅 3:3, 개정)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눅 3:4, 개정)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눅 3:5, 개정)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정)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하려 오시는 분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그 쪽 세계가 이 쪽 세계보다 더 안전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위험한 이 세상에서 보다 안전한 세계로 이동되지 아니하면 멸망받고 이동되는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쪽 세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힘들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온갖 정성과 수모를 견뎌내 가면서 성취한 것이 이 세상에서 얻은 결과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현대건설 시절, 정주영 회장과 함께 밀어붙이기 식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이명박식 공사처럼 느껴집니다.

불도즈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이게 되면 각 고을마다, 고장마다 추억과 전설과 행운이 깃든다는 고목나무나 성황당마저 싸그리 밀려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자가 오기 전에 사람들의 생각해놓은 생각들이란 각자의 상상력과 환상에 의해서 구상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구원자가 들이닥치게 되면 이런 인간들의 소박한 세상관은 여지없이 환상으로 발각당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하실 일의 그 과정에 철저하게 예속될 뿐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농담하거나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진지합니다. 이사야에게 내려왔던 그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세례 요한에게 들이닥쳐서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평생 밥먹고 살만한 내 만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자리를 잡을려고 하지 말고 때를 미리 당겨야 한다’는 겁니다. 즉 공간을 잡을 것을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 수 있는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왔다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자신이 잡은 자리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키우기 위해 열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잡은 그 자리는 평평한 것 같지만 실은 경사져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그 자리는 자꾸 미끌어집니다. 나중에 어디에 처박히는가 하며는, 죽음이라는 자리, 심판의 자리에 처박히고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은 반성이 아닙니다. 자기 우수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저쪽의 세계로 가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쪽의 세계, 즉 심판하는 그 시점으로 미리 가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쪽 세계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세례에 합당한 생활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9-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온 세상이 물이 빠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물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그 중에 8 명이 물을 듬뿍 뒤집어쓰고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근본 원천에서부터 튀어나온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위력이요 세례요한의 위력입니다.

노아 홍수에 살아남은 노아 식구나 세례요한이나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람은 무슨 표를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것은, “네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맛보니 혼났다. 그러니 너희들이 미리 하는 것이 좋을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표’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표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런 표를 보여주게 됩니다. 마치 화투장 12월달에 해당되는 화투를 보게 되면 어떤 신사 한 사람이 우비를 입고 우산 쓴 것이 보입니다. 바로 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 세계를 맛보고 온 사람은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즉 ‘죄사함’을 전제로 한 세례이기에 죄사함과 무관한 세례는 세례 받아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세례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죄사함도 함께 받았네요?”라는 물음에 “예”라고 할 건덕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구경하고 싶어하고 관찰하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들이닥치는 것은 거절하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마치 어떤 아가씨 뒤를 아저씨를 열심히 따라오니 아가씨는 자신을 해꼬지할 치한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말하는 것을 보니 자기 뒷머리에 껌이 묻혀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고마운 청년이었음을 드러나는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푼다고 세상 불심판을 거론하니 사람들은 자기만을 빼놓고 하나님께서 일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죄씻음과 관련된 홰개의 세례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직접 다가올까요?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신명기 21:23에 보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나무에 달렸으면’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보라’고 하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무엇을 통과하느냐 하며는 바로 그 저주의 지점을 통과하게 됩니다. 곧 ‘나무’에 달려서 죽게 됩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라는 분이 저주받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 맞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3일 만에 부활시키므로서 모든 인간이 실은 저주받은 자임을 드러내버립니다. 즉 그들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은 실은 그들 자체들이 저주받아야 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저주받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다 환상이요 죄에 해당됩니다.

즉 인간들이 구원받겠다는 것조차 죄에 해당됩니다. 이제 구원될 일은 마치 노아 가족이 홍수에 삼킴을 당하듯이 이 십자가의 세례에 삼킴을 당하는 경우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십자가 앞에서 나온 사람은 그 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증거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표입니다. 세상이 모두 환상임을 알게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를 믿지 말고 십자가가 우리를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3강-눅3장3-6(세례요한의역할)-luk100131.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3강-눅3장3-6(세례요한의역할)-luk100131.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3강-눅3장3-6(세례요한의역할)-luk100131.hwp



========================================

20100131우리교회주일낮설교녹취(눅3:1-6/세례요한의 역할)

2010-02-02 14:21:33   녹취 : 오용익
 
20100131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3장 1-6절/세례요한의 역할(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까지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편 103:17,18)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언약에 의해서 구원됨을 그 내력을 그 과정을 다시 이 시간을 통해서 확신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3:1-6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는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에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라고 되어 있지요. ‘구원하심을 본다.’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 같이 빠져 나가자.’ 하는 겁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모든 세계가 우리 인간들끼리만 모여 사는 세계라면 구원이라는 게 필요치 않아요. 사는 대로 살다가 칵, 죽으면 그 만이다, 이렇게 되겠는데 여기에 구원자가 등장합니다.

구원자가 등장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되고 구원자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되고 구원자가 원래 계셨던 그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구원자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시기 전에 구원자가 저쪽에서 사시던 그 세계가 구원자가 나타남으로 드디어 알게 된 겁니다.

‘아하, 구원자가 사시던 세계가 따로 있기는 있겠구나. 그래서 구원자 입장에서 볼 때 너희들은 여기서 살면 안 되고 내가 살았던 그 세계에 너희도 같이 살아야 된다.’ 하는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보는 거예요. ‘구원받았다. 구원을 보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든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냐, 들어본 적 없다.’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모든 육체’에 속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겠지요. 그것은 사람취급도 못 받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이 땅에서 실시를 했다면 그 동안 구원하심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해가는 그 일 이전에 우리가 관심 두고 생각했던 이것은 중요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고 별 가치가 없고 환상이며 허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됩니다. 방금 제가 환상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구원하신 분이 구원하러 오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현실인데 구원하시는 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너희들이 뭔가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잘못보고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허물어야 돼요. 본문 4절부터 5절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고 그 다음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그리고 “그의 첩경” 첩경은 지름길이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데 5절에 보니까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지고.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에 계시던 그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경부고속도로 뚫기 위해서 불도우자로 밀 때 그 때 생각나요. 경부고속도로를 닦는데 야당에서는 반대를 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밀어 붙여야 된다는 것이고, 독재자가 밀어붙여야 된다는데 밀어 붙어야지요.

그때 마을의 사당 같은 데에 있는 늙은 고목나무 같은 것, “안됩니다. 이 마을은 조상 대대로 이 고목나무 때문에 복 받아서 잘 사는데 이 나무 밀어버리면 우리 마을 다 저주받습니다.” 하고 얼마나 반대가 심했겠습니까? 그럴 때 옛날 현대건설에 있던 이 명박 그 분이 뭐라고 했대요? “지금 새로운 시대입니다.” 옛날 사고방식 가지고 느티나무나 여기 조상 대대로 살았다느니 성황당이 어떠니 이런 것은 다 밀어버려야 된다는 거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식 자체, 소박하게 살아왔던 나만의 세계, 내가 꿈꾸던 그런 세계, 그런 것이 이제는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이제는 다 허구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지금 하나님께서 불도우자를 앞장세워서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세례요한은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상대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한테 협박하고 공갈해서 돈이나 우려먹자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세례요한은 심각합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이 이야기도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4절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그러니까 선지자 이사야도 자기 맘대로 못했지요.

이사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예언했는데 이사야에 발을 들였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사야에게 전했던 그 말을 그대로 딱 들어서 이제는 세례요한의 입에다가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사야도 자기 맘대로 말 못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겨야 되고 추진해야 될 세례요한도 자기 맘대로 못하고 성령이 임해서 ‘모든 것이 말씀대로만 진척될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뿐이에요.

이것은 세례요한뿐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닦아놓은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 세례요한이나 우리 입장은 ‘미래를 앞당겨서 당겨라.’ 그 말이지요. 미래를 당기면 미래가, 미래의 그 시점이 여기에 와 있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떤 자리를 원해요. 지난 금요일에 제가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서울의 어느 여자 분이 전화를 했는데 버스를 타고 오는 중에 한 삼십 분정도 전화를 했어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기애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요즘에 와서 영 학습능률이 안 오르고 영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2월 27일에 시험을 치는데 시험일 가까워서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주팔자를 봤답니다. 물론 교회 다니지요. 사주팔자를 봐놓고도 기독교 신자로서 이런 것을 봐도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찝찝해 하고 있었는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어떤 목사가 사주팔자에 관해서 소상하게 적어놓고 문제점도 적어놓고 해서 누군가 보니까 저라는 거예요.

‘사주팔자를 보는 것이 잘못입니까?’라는 것을 가지고 전화를 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약간 피식 웃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앞으로는 사주팔자를 본인이 점쟁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보지 마시고 점쟁이보고 성도한테 사주팔자를 물으라고 이야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정답을 아는 사람은, 미래를 앞당겨서 사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에 성도밖에 없어요.

자기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하는 그 것, 혹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뭐냐? 그 사람은 자기 아들의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그 자리를 확보하는 거죠.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자기 자리 확보하는데 몰두하면서 자기 모든 힘을 다 쏟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자리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고 요즘 20대들이 자기자리 찾겠다고 그렇게 힘 드는데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자리를 뭉개버린다는 거예요.

자리를 뭉개면서 자리를 찾을 생각하지 말고 때를 찾으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환상임이 다 노출될 그 때를 살아라 그 말입니다. 자리, 공간에서 시간으로 가라는 거예요. 공간위주로 살지 말고 ‘하나님, 내 자리가 어디입니까? 평생 밥 먹고 살 자리가 어디입니까?’ 이렇게 자리를 찾지 말고 ‘주여, 내 때가 어떤 때입니까? 내 본 모습이 드러날 때가 어떤 때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어떤 때입니까?’ 하고 때를 찾으라는 겁니다.

때 안에서 자기를 찾아야지 현재 있는 자기 자리, 자기가 구하는 자리, 그것은 회개해야 될 거리라는 겁니다. 그게 3절에 나오지요.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데 “여러분, 세례 받으러 오세요. 요단강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면 무슨 홈쇼핑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들이 그런다고 오겠습니까?

안 오지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금 이명박 불도우자가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내가 영원히 갖고 싶었던 평생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다 뭉개집니다. 그 불도우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그 때를 그 때라고 하지 말고 지금 이때다, 하면서 그 심판의 때를 미리 당겨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그 소리를 전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오게 되면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평평하던 육지를 45도 가도로 60도 각도로 기울여버렸어요. 평평하게 있으면서 그 자리, 의사되고 판사 되고 검사된 그 자리는 평생 간다고 여겼는데 이걸 기울여버리면 어, 어어, 하면서 자꾸 미끄러져요. 미끄러져서 어디에 처박히느냐 하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처박힌다고요.

‘이것은 내 자리다.’ 만약에 교사라면 ‘나는 교사해서 평생 먹고 산다. 마누라, 걱정하지 마. 연금도 나온다.’ 하고 좋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애는 애먹이지 학교업무는 점점 힘들지 담임 맡으면 그것도 골치 아프고 ……,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꾸 뭔가 내가 지금 허상을 붙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허상을 붙든 나라는 주체도 내가 지어낸 허구적인 나가 아닌가? ‘나는 누구누구다’ 하고 ‘나’라고 여기는 그 ‘나’도.

사실 하나님보시기에 우리는 죄 사함 받을 죄인에 불과한데 우리는 어떤 고생을 좀 했다고 잘난체하는 그 ‘나’라고 구상된 그 나의 모습, 그것도 뭔가 허구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꾸 줄줄 미끄러져요. 어디 한군데 쥘 곳이 없어요. 자꾸 처박히는 겁니다. 나이가 50, 60, 70, 80 계속 아래쪽으로 처박히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반발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라 하는 것은 공짜로 주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공짜를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세상이 은혜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고생이 많아요. 사는 것이 힘들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말로 너무나 쉽게 ‘얘들아, 너희들 은혜로 산다.’고 이야기 하는데 막상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은혜가 아니고 죽도록 고생하면서 살아봤자 겨우 밥 먹고 사는, 양심이고 윤리 도덕이고 뭐가 다 집어치우고 ‘쏘리, 쏘리, 쏘리’ 비벼가면서 열심히 살아봤자 겨우 잎에 풀칠할 정도로 인생을 그렇게 살면서 이게 무슨 은혜입니까?

이게 무슨 은혜가 됩니까? ‘주여, 주님은 은혜, 은혜 그렇게 무책임하게 은혜를 남발하지만 우리는 한평생 살아가면서 곡소리 나고 죽을 판이라고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가 아니고 내가 양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먹고 살려고 애쓴 덕분에 아파트 한간이라도 장만하고 이만큼이라도 살지 주님의 은혜 쳐다보고 살다가는 이미 백수 되고 우리는 벌써 죽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정신 좀 차리세요.’

우리는 하나님께 충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은 그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도 일관되게 이야기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너는 영원한 나라에 못 들어간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지요. ‘글쎄, 하나님, 우리가 고생해서 이만큼 살았다니까요. 하나님도 위에서 큰소리나 치지 말고 이 땅에 직접 와서 우리 사는 꼴 한번 톡톡히 맛이나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이 땅에 왔어요. 와서 딱 33년 살고 모든 통 밥 다 굴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사람이 힘들게 사는 것은, 문제는 죄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자존심으로 인하여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서 점점 더 구속으로 처박힌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세례요한을 보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 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을 전제로 한 세례가 되는 거예요. 죄 사함을 전제로 한 세례라는 것은 ‘나는 정상적인 사람인데, 나는 교회 올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거기에 추가적으로 세례를 더 받으면 천당 가는데 효과 있을 것이다.’ 이런 세례가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서 세례 받은 것조차도 나는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세례, 그게 바로 성령세례라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이 땅에서 세례 받고 성만찬 하는 것조차도 나의 죄에 해당되는 것을 확인할 뿐인 것을,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 어떤 사람은 회개하라고 하면 막 반성하는 사람 있어요. 반성이라는 것은 기껏 해봐야 부메랑처럼 돌아다니다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와서 꽂히는 것이 반성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원망을 하고 어떤 불평을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지 말고 세례를 주는 내 쪽으로 방향을 저쪽으로, 주님 쪽으로 오라는 것이 회개인데 우리는 맨 날 반성해요. 부흥사가 와서 월화수목 부흥회 하는데 언제 회개하라고 하느냐 하면 꼭 목요일 날 회개하라 해요. 왜냐하면 목요일이 헌금하는 날이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하면 교인들은 지은 죄 회개한다고 옛날 회개했던 것 또 회개하고, 한 것 또 하고 그런 짓들을 한다 이 말이지요. 누가 압니까? 백날 회개해 봐야 회개할 정도로 대단한 자기 우수함만 점점 부각돼요. 그래서 세례요한의 물세례의 의미라 하는 것은 너부터 시작해서 다시 네 쪽으로 돌아오지 말고, 그것은 하나의 자리이니까 네가 돌아올 때는 ‘아하, 그동안 괜찮던 내 자리가 완전히 뭉개졌다.’ 하는 거죠.

의사입니까? 판사입니까? 평생 밥 먹고 산다고 여겼던 그 자리, 의사라는 자리, 판사라는 자리, 교사라는 자리, 목사라는 자리, 사업가라는 자리 그 자리는 이미 없어졌어요. 언제? 회개하는 순간에. 돌아갈 자리가 없어요. 이제는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 주님을 만나는 때, 구원의 때, 천국에 입성하는 그 때만 남아 있다니까요.

사람들이 주일날만 교회오고 월요일만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자기 가정으로. 그거 이명박이 와서 불도우자로 다 밀어놓았습니다. 그 자리 없어요. 만약에 그 자리에 여러분이 집착하게 되면 자꾸 그 자리를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구하게 됩니다. ‘내 자리 누가 부수어 놓았는가? 내 자리를 어느 놈이 부수었는가?’

원래 환상이기에 부서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것이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옵니다. 3장에 보면 거기에 한 가족이 나와요. 8식구가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3장 20, 21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여기 보면 세례라 하는 것은 구원하는 표시라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런 뜻입니다. 노아홍수를 당한 노아가족 같은 경우에 노아가족은 물속에 들어갔다가 튀어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체험하지 못한 놀라운 세계를 경험했다. 낯선 세계를 경험했다.” “무슨 세계냐?” “물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노아식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떤 표시가 있는데 물에 빠졌다가 나왔다는 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게 구원받은 표시에요. 그 표시가 뭐냐? ‘너희들은 몰라. 우리가 물에 빠졌다가 나왔다는 것을’이라고 노아의 식구는 계속해서 후대에 구원하는 표시가 되는데 그것이 세례라는 거예요.

제가 말을 어렵게 해 버렸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화투에 11월 달에 보면 그 화투장을 ‘비’라고 하는데 그 ‘비’ 화투장에 보면, 예? 11월 화투장…, 아, 12월 화투장이죠. 죄송합니다. 12월 화투장에 보면 어떤 신사가 일본식 비옷입고 우산 쓰고 있는 그림이 있지요. 우비 입고 우산 쓴 신사 분, 어떤 아저씨가 나오는데 그게 표시에요. 구원받은 표시.

그런데 햇빛 쨍쨍 비치고 구름 한 점 없는데 우산 쓰고 비옷입고 돌아다니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이, 당신은 외계인이야? 왜 이러고 돌아다니느냐?” 하겠지요. “니들은 몰라. 그쪽 물의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쪽 층이 있어요. “이쪽 층 말고 다른 지층이 있는데 그 지층 속에는 물이 있어서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는 세계였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줬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빠져나온 구원의 표시로 지금 12월 화투장의 비옷을 입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라는 것은 반성이 아닙니다. 이쪽세계에 자기가 자리 잡은 그 자리를 옹호하고 그 자리가 커져서 복 받아서 사업 잘되라고 하는 그것이 세례가 아니고 그것은 회개도 아니에요. 내 쪽 세계는 어쨌든 나를 살리는 세계지만 진짜 그것은 가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 허구에 불과하고 진짜 세계는 나를 물속에 집어넣는 그쪽 세계가 이미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쪽 세계가 지금 세례요한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명박 고속도로건설 불도우자가 밀듯이. 인간들이 세운 모든 가치관, 사고방식, 세상 사람의 눈들, 세계관, 과학적인 것, 철학적인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골짜기를 이루고 어떤 산을 이룬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든 인간의 철학들을 다 뭉개버려요.

윤리 도덕 다 뭉개버립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제발 인간들이 만든 법에 기죽지 말라고. 인간들이 만든 법에 기죽지 마세요. 사람이, 성도가 이 땅에서 자꾸 기죽고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이 만든 윤리 도덕에 비춰볼 때 나는 인간도 아니고 개차반이기 때문에 남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수군 거리느냐, 이것이 자꾸 신경 쓰이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신경 쓰지 마세요. 세상이 허상이고 허구라면 그 인간들이 만든 법도 다 무너집니다. 그 율법적인 것도 다 무너져요.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 겁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우리가 생각하는 법에 맞추어서 우리가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출제기준이 달라졌어요. 천국의 출제기준이 달라졌어요. 천국의 출제기준이 옛날에는 율법이고 양심이었습니다.

지금의 새로운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가 불도우자를 알아?’ 이겁니다. ‘네가 이 세상을 밀어붙이는 그 정당함을 알아?’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각기 이것은 내 자리, 이것은 네 자리, 내 자리와 네 자리 이것을 불도우자를 가지고 일시에 밀어붙이는 그 정당함, 그 정당함만이 기준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여, 어서 오셔서 지금 내 자리 완전히 말끔하게 밀어붙여버리세요. 주께서 나를 밀어붙여버리세요. 밀어붙이시면 제가 속이 다 시원하겠습니다. 내가 만든 환상에 내가 놀아나는 꼴을 내가 보기 싫습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자기가 상상한 세계에 자기가 주눅 들고 기죽고, 이 성경은 안보고.

성경에서 주님께서 ‘내가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너는 나의 양떼다. 내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 위로의 이야기를 해도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주님의 사랑은 질겨서 끊어지지 않는다.’ 백날 이야기해 줘도 우리는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진짜로 듣지 않고 정작 내가 고생해서 일구어 낸 내 자리 뭉개질까봐 그것 지킨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누구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 너부터 무너져야 한다고 해서 세례요한은 이 무너짐을 우리 마음에 비유한 겁니다. 이제부터 하는 것은 좀 어려운 설명인데요, 그것 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세상, 대자연은 불 심판 받습니다. 옛날에 물로서 심판받듯이 이제는 불로서 심판받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당황하거나 따질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 심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세상에 있는 너의 자리, 너도 그 심판대상에 포함된다는 그 점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롯 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불 심판 내려지고 불탔잖아요. 주님의 관심사는 롯을 건지는 것, 아브라함자손을 건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다른 사람들, 하나님 말씀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인간 같지도 않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 태우는 것은 소방서에서 피해보호도 안 해요. 어느 쓰레기장에 불이 났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입니다, 그런 것이 없어요. 쓰레기는 불에 타도 피해액도 없어요. ‘애들이 장난하다 불내서 쓰레기 태웠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자기 건질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낮추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요. 4절부터 다시 보게 되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라고 되어 있거든요.

자 여기에서 제가 아까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에 현대건설에 있을 때 경부고속도로 길 낼 때 불도우자가 밀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아하, 불도우자가 우리 선산을 미는구나. 우리의 정든 뒷산 느티나무를 밀어붙이는구나. 그 동안의 모든 기억들, 추억들은 다 날아가고 이제는 고속도로의 시대가 되었구나.’라고 되겠는데 만약에 그 불도우자 기사가 불도우자를 가지고 직접 나에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줄기차게 도망치고 말겠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돼요.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은 이단종교도 다 그렇게 말해요.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안 밀렸다는 거예요. 본인이 구원받아야 되는데 본인은 그냥 쌍안경 가지고 산위에 올라가서 세상 멸망하는 것 구경만 할 따름이고 본인이 주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한 예를 들게요. 밤 10시가 넘어서 어떤 여성이 직장에서 집에 가는 길인데 자꾸 뒤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까 어떤 남자가 따라 오는 거예요. 그래서 혼비백산해서 핸드폰 이렇게 쥐고 막 달아났어요. 계속 뒤따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참다 참다 못해서 경찰서에 전화를 할까, 오빠를 부를까 하다가 휙 돌아보면서 “아저씨 왜 따라옵니까?” 하니까 하는 소리가 “뒤에 머리카락에 껌이 붙어서 껌 떼 주려고 따라 온 건데…….”

이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이 세상 망하라고 우리는 자꾸 그러는데 그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시기심내고 질투심 내는 나는 안 망해야 됩니까? 지금 정작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주님이여, 어서 와서 이 더러운 세상 전부 다 박살내소서.’ 자꾸 자기는 빼놓고 뭉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줘도 자기 빼놓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러니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구원을 못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세상멸망, 코끼리 돼지 구원에 관심 없어요. 정작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구원받을 우리가 자꾸 빼니까 우리가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니까 주님의 구원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정작 빼고 도망치고 자기는 괜찮다, ‘주님이여, 다른 사람 손대도 나한테는 손대지 마소서.’ 하는 우리에게 직접 손대는 작업에 나서는데 그게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직접 바로 너, 너한테 다가서는 겁니다. 그리되면 물 심판, 홍수 맞고 비올 때 비옷입고 돌아다니는 그 화투장 12월의 신사처럼 진짜 우리가 주님께서 인간을 무섭게 심판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 입에서 나올게 뭐냐 하면 십자가를 아예 뒤집어쓰고 십자가이야기 하면서 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는가? 약간 어렵습니다. 3절 끝에 보겠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죄 사함을 전제로 하는 세례가 아니면 세례가 아니지요. 그냥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수영이지 죄 사함과 관계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례는 반드시 효과가 있는데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세례전과 세례후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겁니까? 세례 전에는 ‘세상 나쁜 놈들, 나를 힘들게 하다니’ 라고 ‘세상을’ 하다가 막상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내가 죄인 맞습니다.’ 라고 그 달라진 경험이 계시거든 성령세례 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바뀌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바뀌는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망치에 맞은 것도 아니고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나무에 달려서 죽으셨는데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신명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는 나무에 달려 저주받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대목이 나와요. 그 대목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 있다.’

십자가는 니켈도 아니고 구리도 아니고 청동도 아니고 나무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다.’ 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무에 달려서는 안 돼. 왜? 나무에 달리는 경우란 저주의 경우이기 때문에 내가 만약 나무에 달리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저주받는 경우이고 지옥 가는 경우이기에 나는 싫어.’라고 다 기피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이제 제가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는 그 대목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을 못 보면 구원을 못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보여주는데 어디를 통과하느냐 하면 실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듯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는다.’ 하는 신명기 21장의 그 성경 구절을 예수님이 일부러 통과해요.

일부러 통과하게 되면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받는다.’ 하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 예수라는 작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자구나.’ 왜? 하나님의 말씀은 모순이 있으면 안 되니까, 틀리면 안 되니까.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는데 자칭 구원자라고 온 그 예수라는 청년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예수는 가짜고 사기고 믿어봐야 소용없고 괜한 해프닝이고 자기 잘난 맛에 까불다가 죽은 것이고 이것은 진짜 이단 맞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리게 했지.’ 라고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뭐라고 했는가?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구원받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나무에 달린 자 되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괜찮은 인간이 괜찮은 인간으로 천국가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조작된 구원이고 정작 이 땅에 오셨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리게 해서 나무에 달린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이단이야. 누가 뭐래도 당신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라고 해서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은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나무에 달렸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 말이지요. 사흘 만에 부활해 버리니까 예수님을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그 인간들은 뭐가 됩니까?

그 인간들이 바로 처음부터 저주받아 합당한 인간들이 되는 거예요. 저주받아 합당한 인간들로서 그 인간들이 ‘하나님, 저 인간은 누가 보더라도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나무에 달리게 했는데 그 저주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켜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했으니까 그게 구원이라면 졸지에 우리는 뭐가 됩니까?

구원될 자격도 없고 구원될 아무 권리도 없는 인간이 감히 천국을 운운했고 죽고 나서 좋은 나라 가기를 고대했던 겁니다. 이것은 우리 몸 자체가 환상을 만들어냈어요.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주여, 이 몸 죽으면 좋은데 가겠지요.’ 이런 환상을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아무리 십자가를 쳐다본다 해도, 또 십자가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십자가를 인정하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확실하게 단정 지을 뿐이지요.

그 다음에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 십자가가 통째로,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와서 우리를 덮쳐야 구원되는 겁니다. ‘십자가, 예수님께서 죽은 십자가’ 백날 머릿속에 우리가 기억해도 구원 안돼요. 이제는 그 십자가가 다가오면, 작았던 십자가가 점점 크게 다가오면 예수님을 저주받을 자로 단정 지었던 바로 우리 자신이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우리의 자리,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과학관, 우리의 생활관, 우리의 자녀관, 우리의 국가관 이 모든 것, 우리의 교회 관, 우리의 하나님 관, 우리의 삼위일체론, 언약이 어쩌고 삼위일체가 어떻고 하는 이 모든 것, 중얼중얼 하다가 그 십자가가 갑자기 오면 ‘믿어줄게요, 믿어줄게요.’ 하다가 점점 더 다가오면 그 십자가눈송이가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하얀 눈송이에 파묻혀 버리지요.

십자가에 파묻혀 버리면 그때는, 우리애가 공부를 잘했는지 내 나이가 몇 살이고 내 몸이 아프고 우리 교인 숫자가 얼마고 예산이 얼마고 대한민국이 어쩌고 북핵문제가 어떻고, 이것은 뭐가 되었든 다 그게 저주받을 이야기라니까요. 기도를 했느니 마느니, 금식을 며칠하고 십일조를 냈느니 어쩌니, 내가 개척교회를 몇 군데 했다느니 하는 그 전부가 아직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환상을 자아내는 죄에 불과한 거예요.

그냥 십자가로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십자가 삼킴을 당하니까 이것은 마치 노아가족이 “엄마 오늘 비가 몇 미리나 오는데?” “기상대에서 한 200미리 온다고 했다.” “엄마, 비가 더 오는 것 같아.” “그러면 1미터 오나?” “엄마, 뜬다, 떠!” “빨리 방주에 들어가자.” “방주 떴어. 다른 사람 다 죽었어.”

이것은 비가 몇 미리가 오는지 측정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홍수에 삼킴을 당할 때, 나중에 거기서 빠져나오면 12월 화투장마냥 비옷 입고 우산 쓴 신사가 되는 겁니다. ‘너희들은 몰라. 너희들은 비 맛을 몰라. 너희들이 비 맛을 알아? 너희들이 오늘 점심때 나오는 게 맛을 알아? 너희가 홍수 맛을 알아?’

이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3장에서 ‘너희는 구원의 표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겁니다.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 한다고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다는 표식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홍수 맛을 알아?’ 이것처럼 ‘너희들이 십자가 맛을 알아?’ 사실은 우리가 저주받은 항아리 속에, 저주라는 지하의 땅굴 속에 우리가 놓여 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일부러 땅 끝까지 오셨는데 우리는 착각을 해서 예수님이 말씀대로 나무에 달리니까 ‘야, 역시 성경말씀은 맞다니까? 저런 인간은 나무에 달리는 것이 맞잖아. 봐.’ 했는데 그 성경말씀대로 나무에 달린 자가 사실은 ‘너희 죄 때문에 너희가 달릴 나무에 내가 대신 달린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다가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안에 삼킴을 당한 채 이제부터는 우리의 있는 현재 자리, 지금, 가족들, 이것은 십자가 안에 미리 그때의 심판대가 미리 도착한 그 지점, 그 시점 안에서의 공간, 그 자리이기 때문에 ‘네가 너 된 것은 나의 은혜’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겁니다.

내 가족들, 내 교회, 내 조그만 저금통하나, 이 전부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심판 이후의 은혜들이 다 놓여 있는 겁니다. 자다가 받혔던 책상다리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이번에 사업 잘되어서 복 받으셨네요.” 하면 “당신은 눈에 환상이 씌워져서 눈에 내 사업 잘되고 빌딩 올라가는 것 밖에 안보이죠. 빌딩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비옷이 안 보입니까? ‘모든 육체가 주의 구원을 보리라.’ 안보입니까? 사고방식을 바꾸세요. 그 사고방식을 불도우자로 밀어붙이세요. 밀어붙여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가 구원이라고, 그 십자가세례, 성령세례, 당신은 내 사업 잘된 것만 보고 복 받은 것으로 여기지만 나는 내가 십자가를 알게 된 이것이 나의 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세계는 없어지고 주님의 세계에 이미 도착한 진정한 성령세례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주의 자리라고 여겨졌던 그 나무에 일부러 달렸습니다. 우리의 눈 뜨라고 우리의 귀가 열리라고 우리의 자기주제를 파악하라고. 우리가 구원을 운운하지만 그것도 저주였고 우리가 십자가, 언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저주였고 기도하지만 그것도 저주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삼킴을 당하니 우리의 진정한 축복과 진정한 구원은 십자가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그 고백밖에 없사오니 이것이 우리의 평생자랑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귀한 보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