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5. 07:15

칼 같은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34-35절)

칼 같은 그리스도

2010년 1월 1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34-35

(눅 2:34, 개정)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 2:35, 개정)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시므온에게는 공터가 있습니다. 그 공터는 하나님이 기거하시는 장소입니다. 이런 공터가 발생됨으로 말미암아 시므온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은 온통 주님의 세계이지 결코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에서는 관통하는 원리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들의 마음을 찌르는’ 겁니다. 인간들은 세상이 전부 주님의 세계인지를 모르고 그 속에 소박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갖추어놓고 삽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는 그 구조와 맞지 않습니다.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는 결코 에덴동산을 점령하지 못할 입장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을 운영하는 중심 원리가 인간들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중심지역인 선악과와 생명나무라고 하는 두 개의 나무 지역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존재로 인하여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지역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이제 자신들이 중심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놓고 삽니다.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것을 지킨다는 것은 곱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힘이 된다고 여길 때만 우호적으로 나오지만 자신의 중심부위를 누군가가 접촉하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환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환자입니다. 병들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병들은 환자입니다. 환자라면 병원에 가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간을 찾습니다. 자신의 중심지점을 하나님께 내드림이 아니라 도리어 확고하게 더 견고하게 사수하고자 절에 갑니다.

강단에 선 목사의 입장은 참으로 비장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서 천국의 유일한 길을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을 그들의 의견에 동조를 해주자면 그들이 구축해놓은 것들을 치하하고 위력하고 격려해줄만도 하지만 주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기에 그 세계에 들어가지면 인간의 세계를 와장창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십자가 피만을 증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는, 그의 중심지는 비워있었고 그 빈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차지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아기 예수님에 의해서 알아? 내가 알려주마. 그분은 사람들을 찌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 찌름에 대해서 그 예수님을 강하게 비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결정지을 증거로서 작동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현 상태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구태여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가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는 것을 못하게 하신 것은, 영생이란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고 난 뒤에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생입니까? 바로 사람 자체의 질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질이 바뀌어지지 않은 채 아무리 죽어봤자 여전히 저주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질의 사람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기 예수님의 출생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미래로 진입하는 자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기 예수님과 연결이 가능합니까?

여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가 다시 등장됩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바쳐서 구원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 이삭을 바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 이삭’에게 일어난 일이 거꾸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었기에 아브라함이 구원된 것입니다.

즉 아들 이삭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며는,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단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과 본인이 같이 몸으로 하나로 묶여서 새 몸으로 다시 살 때만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그 어떤 행위나 행세는 자기 구원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것은 기껏 선악지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악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그 아브라함의 행위를 탓해봤자, 여전히 선악과 수준에서이 변화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선악과 수준에서 벗어나 생명나무 수준으로 진입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대신 죽되 그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의 힘으로 죽는 죽음이어야 그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죽으면 소용없습니다. 생명이 죽이는 죽음에 합류되어야 생명 세계에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죽고 사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죽고 삶을 보았다면 우리는 이미 죽고 사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았기에 그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같이 죽고 더 이상 우리 자신은 자신의 세계가 남아있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은 전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세계를 시므온이 알았기에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의 세계’를 극구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힘들이 모여드는 세계입니다. 세상의 힘이 그대로 교회 내부의 힘으로 넘쳐납니다. 악마가 교회를 만들고 키우는 이유는 이 십자가의 원리를 가로막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십자가 피의 능력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 부르짖는 ‘힘 모으기’가 다 악마의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의 층입니다. 이 세상은 기적의 층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힘을 모를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하지만 정작 구원되는 것이 표적의 층에서 보여지는 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표적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를 이유도 없이 미워하셔서 기어이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극구 밀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움이 눈에 들어와서 비로소 극구 사랑해주시는 이유없는 그 사랑으로 구원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에 사로잡혀 자는 구원된다는 것은 이러한 표적층에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이유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체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사랑할 자에게만 사랑을 하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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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0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2:34-35/칼같은 그리스도)

2010-01-13 17:19:50  녹취 : 오용익   
 
20100110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34-35절/칼같은 그리스도(이 근호목사)

(기도)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땅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감히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성전에도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받아주고 있다는 이 사랑과 이 은혜를 오늘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찬송하는 시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2장 34절에서 3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4-35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지난 시간에 본 시므온이라는 분은 아기예수를 만났는데 그 사람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말씀하신대로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아기 예수님을 만났는데 하는 말이 ‘이제 제 맘이 다 풀립니다. 이제 편안합니다. 아무 걱정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지요.

“당신은 아기 예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기에, 다른 사람은 아기 예수를 봐도 편안한 마음이 안 드는데 당신은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아, 이제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기쁨을 갖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궁금해 할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아기 예수님은 어떤 아기 예수님이냐 하면…’ 하고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34절, 35절에 나오는 거예요. “‘이 아이는 이스라엘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인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라는 일을 하시는 아기 예수가 됩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시므온은 뭔가 알고 있어요. 시므온은 뭔가 알고 있는데, ‘당신은 아기예수를 만나고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편안해 했느냐?’ 하고 그 이유를 대보라고 하니까 시므온이 대답을 해요. 아기 예수는 이러 이러한 분이기에 제 맘이 편합니다, 하는 데 어떤 분이냐? ‘이분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는데 저주 받고 구원받는 그 기준으로 내세운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데 그 비방을 받는 과정 속에서 아기 예수는 우리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이 푹푹 찔러대는 그 아기예수를 보내주시니 저는 얼마나 맘이 편한지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주님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요. 하나님의 세계라는 말은 나의 세계가 없다는 말이에요. 목사 입장에서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이 강단에 서야 되는 이유가 사람들이 각자의 자기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의사는 의사, 판사는 판사,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대로 애들 다독거려서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애쓰는 일을 하는 식으로 각자 자기 세계가 있어요. 목사 입장에서 비장한 각오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기세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일체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인간의 세계는 없고 전부 다 주님 세계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밖에 없는데 주님의 세계는 주님의 뜻만 관통해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세계는 구부러지고 무너지고 붕괴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흡사 여리고성처럼.

그러니까 주님의 세계, 주님의 완성된 세계에 가려면, 제 마음으로야, ‘오늘 여러분 교회 나오셨습니까? 정말 다행이십니다.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아니 제 마음은 그것보다 더 해서 교회 나오지 않아도 ‘단 한번이라도 성경을 보신 분이 있습니까? 예,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싶은데, 아니 아예 그런 것도 치워버리고 ‘여러분, 사람이십니까? 사람이라고요?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저의 세계고요 주님의 세계에서의 천국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이러니 목사 입장에서 환장하겠어요. 왜 마음이 뒤집어지느냐 하면 주님의 세계에서 천국 가는 길은 십자가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각자 자기세계에 몰두하다 보니까 날이면 날마다 가면 갈수록 십자가 없는 곳으로 거기서 자기 전을 펴는 거예요. 십자가하고 동떨어진, 십자가가 눈에 안 띄는, 십자가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나만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비장한 각오로 목사가 설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의 나름대로의 세계인 그 쪽에 가서 똑똑똑 문을 두드려서 계십니까, 실례합니다, 혹시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 거예요. 마치 길거리에서 돈 오백만원을 주고 천도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번잡스럽게 하는 것처럼, 각자 자기세계에서 성실하고 충실하고 최선 다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교회 나올 필요도 없고 성경 볼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이 시므온이 보고 있는 세계에서는 시므온의 안목과 관점이 자기세계가 없어요. 저는 주일이 되면 어떤 충동이 있는데 그 충동을 억누른다고 아주 애를 먹습니다. 그 충동이란 지난시간에 설교한 것을 또 하고 싶은 충동입니다. 분명히 들었어도 교회 문 열고 나가면서 다 잊었을 테니까.

지난시간에 시므온 안에는 빈 공터가 있다고 했지요. 그 공터는 자기를 위한 공터가 아니고 누구를 섬기기 위한 존재이어야 하는 빈 공터이기에 그 중앙지점에는 자기가 끼어들지를 않는 거예요. 마치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결코 에덴동산의 중앙지점은 점령할 수가 없어요. 중앙지점은 하나님이 심으신 두 개의 나무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과 나무고 하나는 생명나무에요. 이것은 인간이 손대면 안돼요. 손댈 수가 없어요. 생명나무도 후다닥 도망가고 맙니다. 선악과도 물론 따먹어서도 안 되고. 이것은 사람이 내가 지금 살았다고 해서 내가 세상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단지 여기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에요.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은 나만의 소박한 세계를 꾸미는 것은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레드카드, 반칙이 되는 겁니다. 나만의 세계가 반칙이 돼요. 처음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나만의 세계의 경계선이 허물어 떨어지고 원래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내 가슴팍에 팍 꽂혀야 돼요. 뭔가 내 가슴팍에 생명나무가 커져서 생명나무 열매인 생명과일이 열려서 그것이 나의 생명이 돼야 됩니다.

그래야 사는 거예요. 그것을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존심 밖에 없어서 이 자존심을 남에게 양도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목사는 비장한 각오로 설 수 밖에 없어요. 맨 날 해봐야 헛발질이지만. 어떤 교인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다른 말씀은 믿어지는데 이 말씀은 안 믿어집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웃지요.

성경의 모든 말씀에서 한 말씀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은 성경말씀 전부를 싫어하는 것이고 곧 그것은 이런 잔소리를 해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싫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미워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든 세계, 나만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남하고 악수하고 껴안고 뽀뽀하고 서로 좋게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나만의 세계를 침범하고 공격하는 것은 적극 저지하고 극렬하게 저항하고 공격을 하게 되고 미워해야 만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나만의 세계에요.

우리가 밀어내고 밀쳐내고 떠밀고 자빠뜨리고 죽이고 공격하는 그 대상 중에 누구도 섞여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하려는 예수님도 같이 섞여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 네가 뭔데 감히 네가 내 맘을 안다는 말인가?’라고 화를 내시겠지만 간단합니다. 십자가복음만 증거 하면 담박 그 표정이 드러나요.

다른 것을 증거 하면 상당히 좋게 받아들입니다. ‘기도 하세요.’ ‘기도하지요.’ ‘헌금 하세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도 하세요.’ ‘전도 열심히 하고 있지요.’ 교회에서 다른 것을 전하면 사람들은 순하게 받아들여요. ‘집사 되셨는데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장립집사 되시고 권사 되시고 나중에 장로가 되셔야죠.’ ‘주의 은혜로 그렇게 되려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버리면 사람들은 발작을 일으키고 아주 극렬하게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병들었어요. 환자입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의사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의사들은 직업의식 때문에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픈가를 살펴봐요.

그런데 의사로서 답답한 것은 뭐냐? 분명히 건강검진해서 내시경으로 분명히 헬리코박터라는 균이 다 보이는데 ‘그까짓 거 뭐 그거 좀 있으면 같이 살면 되지 그게 뭐 어떤가?’ 이래 나와요. ‘그 균이 위염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빨리 그걸 치료해야 됩니다. 2주치 약 잡수세요.’ ‘에이 뭐, 지금껏 그런 약 안 먹어도 잘만 살았는데.’

그렇게 되면 의사로서 답답한 게 병든 환자인데 병원에 오지 않고 절에 가는 거예요. 절에 가서 무조건 비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환자입니다. 왜 환자냐 하면 그 사람이 남보다 더 나쁘다고 해서 환자가 아니고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 이미 나밖에 모르는 그런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에 못 들어가요.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난 수요일에 안 오신 분들, 안 보신 분들, 안 들으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합니다. 이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다고 여기는데 옛날 시골 사진관에 가면 안에서 사진 찍어도 진짜 야외에서 찍은 것처럼 꾸미려고 아주 조잡한 야자수풍경그림, 옛날 이발소에도 많이 걸려 있던 조잡한 그림을 배경으로 해놓고 소파에 앉아서 가족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진관은 그 배경 그림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요.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놓으면 진짜 야외에서 찍은 것 같이 보이지요. 사진관에서 그냥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을 깔아놓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 배경을 깔아놔요. 그 배경이 바로 부자와 나사로라는 배경입니다.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간 거예요.

그 배경을 깔아놓고 거지를 보고 부자를 한 번 대조해 보자 이 말이죠. 그 배경이 없어버리면 거지는 세상 천하에 그렇게 불쌍한 존재가 또 없습니다. 개들이 핥고 있는데 ‘저리가’ 할 힘도 없어요. ‘인간아, 왜 사나? 차라리 그렇게 사느니 죽어라. 자살하라.’할 정도로 비참한 인생인데 그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가고 그 거지 나사로를 구박하던 앞집에 있는 부자는 신났어요.

그 부자는 성경에 보면 매일 같이 파티를 열어요. 그것도 아주 호사스런 파티를 매일 같이 열어요. ‘사람은 살아도 저렇게 살아야 사는 거야.’ 누구로부터도 부러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 배경을 딱 깔아버리니까 그 사람은 지옥을 가려고 환장을 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아무리 친구들과 함께 화려한 파티를 해도 파티는 하는 그 순간뿐이고 그 인생 끝나고 보니 두 번 다시 못 빠져 나오는, 아주 뜨거운 진짜 물 한 방울도 없는, 시계조차 없는 영원한 지옥 불에서 고생할 때 그 부자와 거지나사로를 자기 안목에서 자기 세계에서 쳐다봤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오류인데 그 시선이 병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든 자를 천국에 보내기 전에 먼저 이것을 고쳐야 돼요. 예수님께서 ‘나는 병든 자를 부르러 왔다.’고 했거든요. 어디서 문제고 어디서 병들었는가를 십자가 복음 앞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야 돼요. 그것도 매주, 매일! 시므온이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의 선지자에요. 아기 예수를 만난 선지가 되어서 소위 병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엑스선 기사입니다.

‘잠시 실례합니다. 여기에 가슴을 똑바로 대주세요. 예, 되었습니다. 이제 잠시 뒤에 사진 나옵니다. … 여기도 썩고 여기도 썩고 다 썩었네요. 다 썩었네요.’ 그렇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시므온인데 우리도 미처 모르는 근원적인 병든 것을 몽땅 비춰주는 그 기계, 절단하는 그 기계, 찌르는 그 기계가 아기 예수가 왔다 하니까 시므온이라는 그 엑스레이 기사는 맘이 편히 놓이는 거예요.

‘이제는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가 뭔지 하늘나라가 어떤 세계인지 몰랐는데 이제 아기 예수가 오셔서 이런 저런 일을 해 주시니 내가 썩어도 어디가 썩었으며 우리가 왜 죽으며 왜 세상이 무너져야 되며 죽어서 어디가게 되며 우리는 누가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으며 …… 이 모든 것을 진리가 다 알려주니 이제 저로서는 선지자입장에서는 편안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시므온의 똑똑한 아이큐가 아니고 성경 27절에 보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며’ 이래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 선지자가 되고 선지자는 자기 세계가 없고 이 세상 전부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움직여 나가는 세계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렇게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그 분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하느냐? 칼 가지고 사람들을 찔러대는 거예요. 엑스선이 우리 내부를 다 탐색해서 잘라내듯이. 단층촬영이라는 것이 일종의 광선으로 된 에너지 칼이거든요. 단층이니까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듯이 전부 다 층층이 잘라서 디지털로 보여주게 되면 두뇌가 뭐가 잘못되었는지가 입체적으로 발견된다는 말이죠. 그게 단층촬영 아닙니까?

전부 다 잘라주는 거예요. 칼 가지고 자르는 거예요. 병원에 가면 엑스선을 가지고 우리 육체를 자르지만 우리를 진짜로 자르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잘라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 말씀의 세계로 들어와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인간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는 영적 세력인 악마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세계로 오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마귀가 만든 조직이 뭐냐, 교회라는 겁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교회는 교회까지만 오게 해요.

‘여러분, 교회 목사 있지요. 목사에게 순종해야 됩니다. 헌금하시면 복 받습니다. 교회 충성해서 복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오시면 장로되고 교회 오시면 세례주고 교회 오시면 천국 갑니다.’ 전부 다 교회 장사하는 인간들이 교회까지만 오게 해요. ‘교회가 크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렇게 키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눈에 보이니까.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야 자기의 진상,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이는데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 맨, 교회의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세상에서 하는 그 힘 가지고 부리던 그 행세를 이제는 교회 장로 되어서 부리고 목사 되어서 힘을 부리는 거예요. 목사라는 것이 일종의 힘을 가진 사회적인 지위가 되고 말았어요.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으로 세상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중요한 것을 많이 했어요. 목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내가 사별한지 2년 만에 그것도 나이 60에 새장가를 갔다는 말이지요. 목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서로 오려고 해요. 줄 서시오, 아예 줄을 섰어요. 그것도 명 짧고 돈 많은 과부가.

힘이 있다는 그것은 목사가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 바깥이나 교회 안이나 똑같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 장로 되는 것도 조건이 돈 많은 사람, 배운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우선순위고. 세상에, 어떤 교회는 20년 동안 성가대 지휘를 해도 장로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거짓말 아닙니다. 있어요. 30년 동안 사찰을 해도 집사도 못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말씀의 세계에 못 가게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그것으로 전력을 다해서 말씀의 세계를 보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는 세계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알아버리면 무엇을 감 잡느냐 하면 구원받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세례나 학습이나 직분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 그 예수님 흘리신 피가 나를 오늘 이 순간도 거지 나사로가 갔던 그 천국에 합류할 수 있게 한다, 그 예수님의 피가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 말은 뭐냐? 이 말은 하나님은 일체 인간의 행세를 보지 않습니다. 간음했습니까? 살인 습니까? 거짓말 했습니까? 주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이름도 안 불러요. 인간은 선악과를 안 다음부터 선악을 아는 자체가 이미 죄가 되었기 때문에 선악적인 차원에서 주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시비 걸지 않습니다.

‘네가 아는 선악체계에서 네가 악한 놈이다.’라고 시비 걸지 않아요. 주께서 접근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것이 우리를 병들게 만든 원인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빼내면 돼요. 선악과를 집어넣고 ‘너는 왜 선악을 알면서도 왜 악한 짓만 하느냐 이 나쁜 놈아, 앞으로는 선해라.’ 이렇게 선악과를 가지고 따지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우리는 병원 가서 토하면 되는데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 손가락을 넣어서 토할 수도 없어요. 이미 끝나버렸어요. 우리 힘으로 이미 박혀 있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우리 힘으로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착하면 힘주시겠습니까?’ ‘힘 줘서 뭐하는데?’ ‘저는 착하다는 이유로 힘을 얻었기 때문에 나만의 세계,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힘 있게 구축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없어서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러 왔습니다. 하나님, 힘 주셔서 나만의 세계를 이루게 하옵소서.’

그 세계가 뭔데, 선악세계잖아요. 주님께서는 선악세계에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생명나무, 그냥 거저주시는 생명나무세계로 우리를 바꾸고자 합니다. 어떻게 바꾸는가? 사람을 찔러야 돼요. 칼 가지고 사람을 속속들이 찔러서 모든 구석이 찔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리라는 것을 다 깨우쳐 주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아기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그 일을 왜 하시느냐? 사람이 죽으면 구원받습니까? 사람이 죽어도 구원 못 받아요. 그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올 때 ‘제가 예수님 위해서 죽겠습니다.’ 할 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어도 구원 못 받는 존재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죽어서 구원 받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 안 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것을 이유로 해서 생명나무를 격리시킨 것은 선악과나무 따먹은 상태에서 오래 오래 사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이, 저주가 계속 이어질 뿐이에요. 그래서 이 힘든 세상 콱 죽으면 좋은데 갈 것인데 …, 하는데 같은 성질을 가지고 죽어봐야 그 성질 그대로 저주 받습니다.

산다는 것은 질이 바뀌어야 돼요. 성질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어야지 죽어서 영영히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죽었을 경우에 장례식에서 설교할 때 참 힘들어요. ‘세상에서는 고생 많이 하셨으니 죽어서는 편히 쉬세요.’ 최 진실이든 노무현이든 유명한 사람 죽을 때 마다 하는 소리가 그거잖아요.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저 땅에서는 낙을 누리세요.’ 누구 맘대로?

이 땅의 질이 뭐냐 하면 내 중심의 세계였어요. 내 중심의 세계가 안 바뀐 채 천당 가봐야 천당 다 버려놓습니다. 이 땅도 이 세계도 주님의 세계 같으면 이 땅에서 나의 세계가 있지만 ‘아, 이것이 죄였구나. 내가 주님의 세계인 것을 몰랐구나.’ 하면 주님의 세계로 바뀌는 채 가야 주님의 세계에 영원히 살 수 있는데 나만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려는 이 세계가 안 바뀌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지옥 가서 영원히 사는 거예요.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 말고 인간을 위해서 죽되 그 인간 말고 다른 분이 그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어야 돼요. 죽음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을 취소시키는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거든요. 죽은 그 인간이 죽었던 성질 가지고 계속해서 살아봐야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입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시작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시작하면 안돼요. 자기 미래가 되면 안 됩니다. 아기 예수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되고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의 일생으로 이어져서 선이 연결이 되어야 돼요. 이 땅에서 교회 장로 되고 집사 되고 훌륭하다는 소리 들어봤자 그것은 교회에서 또 자기세계를 구축한 것이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교회 다녀도 소용없고 목사 해도 소용없고 장로 해도 소용없고 집사 해도 소용없고 모든 것이 소용없구나.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생각하는 것은 내 세계밖에 생각 안하니까 이런 더러운 것 가지고는 천국 가도 소용없구나.’ 하는 것을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계기, 연결고리가 와야 돼요.

그 연결 고리가 뭐냐? 누가 여러분들을 찔러 줄 겁니다. 맘 같아서야 집에서 창을 대나무로 깎아서 성경도 필요 없이 이거 들고 이 창 끝에 예수의 피를 발라서 한 사람씩 오는 대로 푹푹 찔러서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구원될 것 같으면 그러고 싶은데 대나무 창이 아니고 말씀의 창이니까 이걸 내 맘대로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푹, 푹 찔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찌를 때 찌른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된 사람에게만 찔러 주는 겁니다. 구원 안 된 사람은 안 찔러줘요. 아기 예수가 찔러준다는 말은 ‘죽어라 이놈아!’ 이런 뜻이에요. ‘죽어라 이놈아! 너는 죽어야 살 수 있어.’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딴 사람으로 바뀌어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끝이 뾰족하잖아요. 십자가 피 가지고 푹푹 찔러주는 거예요.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 인간은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존재를 드러나게 했는데 그게 아브라함의 아이에요. 누구냐 하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타난 그 이삭이라는 아이와 엮일 때, 무슨 관계가 수립될 때, 그래서 그 아기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현상이 곧 자기를 살릴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겁니다. 로마서 4장에서.

저는 로마서 4장이 가면 갈수록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겉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이 되거든요. 저는 지금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참 어려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고 ‘이삭과의 만남의 의미를 네가 아느냐’고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고 그 이삭과 아브라함을 자꾸 엮어 주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래서 진짜 엮이는가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보고 ‘네가 하나님께 이삭을 바쳐라.’ 한 거예요. 그 죽어야 할 이삭이 하나님의 준비하신 수풀속의 수양 때문에 되살아 났거든요.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브라함부터가 아니고 사실은 이삭부터 먼저였어요. 이삭이 먼저 죽었다가 살아났고 그걸 믿는 아브라함은 그 이삭처럼 자기도 동일한 작용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짐을 믿은 거예요.

뭘 보고, 이삭 보고 믿은 거예요. 지금은 누구 보고 믿는가 하면 이삭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 딸 진주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우리의 아기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아봐야 소용없어요. 지난 금요일 날 서울 가서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는데 제가 풍선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오면서 풍선을 들고 와서 풍선에다 대고 훅훅 부는 거예요.

훅훅 불 때마다 ‘이번에 우리 애가 서울대학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훅! 사업 잘되게 하옵소서. 훅!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훅훅 부는 거예요. 특히 날자 정해서 부는 날이 뭐냐 하면 송구영신예배입니다. 헌금 들고 와서 성경 뽑기를 하지를 않나, 온갖 행사를 하면서 성가대준비해서 자정예배 드릴 때 훅훅 부는 거예요.

그렇게 불면 각자의 머리위에 바람 든 풍선이 다 있는 겁니다. ‘입을 크게 열라.’ 그 풍선이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심폐량이 좋아서 아주 큼직하게 불어서 열 가지의 소망을 담고 어떤 이는 심약해서 조금 불면서 ‘그저 월급 한 2백만 원만 되게 하옵소서.’ 하면 옆 사람이 그걸 보고 ‘입을 크게 열라. 천만 원 달라고 해야 2백만 원 건지지.’ 하면 ‘천만 원 되게 하옵소서.’ 하면서 풍선 들리기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이러한 각자의 욕망이 담겨 있는 그 풍선들이 교회마다 가득해요. 어떤 사람은 고부간의 갈등 해결해 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픈데 낫게 해달라고 하고 온갖 것 다 있는데 아기 예수가 주머니에 가위를 들고 와요. 가위를 들고 와서 그것을 다 끊어버린다고요. 똑딱, 똑딱, 다 끊어버려요. 다 끊어 버리면 사람들이 뭘 아쉬워하느냐 하면 남의 풍선 날라 가면 그것은 아주 고소해 하죠. ‘짜식, 기도하더니만 죄지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자기풍선이 날아간다는 거예요. 이게 사람들이 미처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인간이 어떤 행세, 행위를 하게 되는데 그 모든 행위들은 결국 자기가 자기한테 바람 넣는 것 밖에 안돼요. ‘보이즈 비 엠비셔스.’ 꿈, 비전, 바램들의 모든 것. 어떤 사람은 사명을 감당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사명은 자기 야망을 위해서 바꿔치기 한 봉사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 봉사하면 내 꿈이 이루어집니까, 해서 바꿔치기하기 위한 용도에 불과합니다. 아주 음흉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우리의 아기는 그 모든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때문에 그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매일 올라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풍선들을 싹둑 싹둑 전부 다 자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위들고 설칠 때 교회에서 인간들이 그런 사람을 용납하겠습니까? 그게 뭐냐? 오늘 본문에 ‘비난받는 표적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층이 두 층이 있어요. 이것을 상세히 아시려면 이번에 대전에 가시면 되는데. 층이 두층이 있는데 하나는 기적 층이 있고 하나는 표적 층이 있어요.

기적 층은 뭐냐 하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사도바울의 손수건이랄지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 자기들도 병이 나을까 싶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그것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내가 하나님 믿어줄게.’ 이거거든요.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지만 기적을 베풀어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줄게.’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은 ‘내가 이렇게 억지로 교회 나오는 것도 행여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하나님께 잘해 주~지.’ 이런 뜻으로 온다 이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의 중심부는 찔리지 않습니다. 꽉 차단시켜 놓고 거기에 힘 있는대로 무조건 끌어 모으는 거예요. 풍선을 키우는 거예요. 주위에서 닥치는 대로 풍선을 끌어 모아서 자기를 거대한 힘의 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배추한단에 염가로 200원에 팔면 아침부터 사려고 확 달려들지요. 명품을 헐값에 판다고 하면 백화점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문도 채 열기 전에 사람들 줄 죽 서 있다가 문 열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달려들 듯이 사람들은 자기에게 힘이 된다면 뭐든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이게 기적 층이에요. 그래서 기적을 베풀었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교회는 비좁아서 터지고 난리 났어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이 진짜 목회 성공하고 싶습니까? 진짜 그러고 싶습니까? 다른 것을 하지 말고 간증거리 500개를 외우는 거예요. 외우기도 힘들지만 돈 번다는데 그것도 못합니까? 500개를 외워서 그것을 바꿔치기 하면서 적절하게 간증거리만 계속 설교하는 거예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는데 그냥 간증거리를 그냥 하면 외우기 힘드니까 부흥사들이 부흥회할 때 써먹는 재미있게 꾸며놓은 기적 층의 간증들이 많아요, 그것만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어서 그대로 내뱉어 주면 목사가 교인들 말씀 안 가르쳐도 교인들이 그것을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 소화시켜서 ‘나는 저쪽 기적보다 이쪽의 기적이 맘에 든다.’ 해서 기적을 얻기 위해서 알아서 성경을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 층에 그냥 머물러 있게 하는 거예요. 그 기적층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당신이 기적을 일으킨다면서? 우리한테 기적을 보여주면 우리가 당신을 메시아라고 믿어줄~게.’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적 층에서 표적 층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내가 주는 기적은 요나의 죽음밖에 없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그것뿐이라고 하는 거죠. ‘나의 죽음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유일한 표적이다.’ 합니다. ‘너희들은 날이 갤 때 노을이 지면 내일은 날이 흐리다는 사실을 알잖아. 너희들은 이 세상의 표적은 알면서도 내가 나타난 표적은 왜 모르느냐? 내가 이 땅에 온 그 표적은 왜 모르느냐?’

표적은 모르고 왜 기적만 원하느냐, 이 말이지요. 기적은 자기를 안 다치는 거예요. 기적은 자기를 더 부풀게 만드는 겁니다. 그 힘을 끌어 모은 게 기적이에요. 그런데 표적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런 나가 나를 방해해서 내가 나를 구원 못되게 만드는 악마의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표적 층에 들어갑니다. 표적 층에 들어가 버리면 거기에 놀라운 원칙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적 층에서는 ‘내가 어떻게 하면 기적을 얻습니까?’ 하는 행함이 들어가지만 표적 층으로 그 위층에 올라가게 되면 인간의 손은 다 놔야 돼요. 이것은 인간이 하고 말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은 지옥가게 되어 있는 그 층은 표적 층에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중국집에 가보면 출입구가 요란할 때가 있지요. 허름한 거지 노숙자가 와서 ‘돈 천원만 주소, 자장면 한 그릇만 주소.’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중국집 주인이 ‘이게 어디서 행패야. 왜 또 왔어. 어제 자장면 먹여 줬잖아. 이제 다른 데로 가라.’ 하고 떠밀지요. 얼마나 밉겠습니까? 바로 2층의 표적 층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천당 쫌 보내 주이소!’ ‘내 가라 안캤나! 가라캤제. 안가?’ 하고 미워서 떠미는 그런 현상도 눈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애쓰고 교회 나와도 떠밀려서 교회 못나오고 나오려고 해도 교회 못나오고. 그 때 중국집 손님들이 ‘주인양반, 참 야박하네. 그거 한 푼 그냥 주소. 그거 왜 그리 미워합니까?’ 주인이 하는 말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얼마나 저 사람이 미운지.’ 하나님이 진짜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절대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겁니다.

미워하는 것이 있어야 사랑이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고 사랑을 입을 자에게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입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렇습니다. 그게 하나님이에요. 중국집 주인입니다. 천국 오지 못할 사람은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미움이 눈에 들어와야 됩니다.

‘아, 참 안되었다. 왜 저리 밉상 받나.’ 그런데 미워하는데 있어서 이유가 뭐냐 하면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 본인이 만든 피조물을 본인이 밉다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저 같은 인간을 왜 사랑했어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해주겠다고 교회로 십자가로 말씀 속으로 십자가 앞으로 불러내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표적 층에서는 이유 없는 믿음과 이유 없는 사랑으로 하나는 천국으로 하나는 지옥으로 가는데 이걸 2층에 안 올라가고 1층인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하고 있노? 기도 적게 해서 응답이 없지.’라고 기도하라고 난리치고 ‘네가 기도 열심히 하면 힘 얻을 수 있는데 힘없다고 질질 짜면서 살지 말고 교회 와서 복 받아라.’ 하고 목사들이 장사한다고 바글바글 대면서 세일하고 난리 났어요.

여러분, 위층으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로 올라가시게 되면 거기에는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라 또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일체 선악적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생명나무에서 거저주시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계속 천국으로 천국으로 지금도 밀고 있다.’ 하는 것으로 오로지 모든 공로는 주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힘 더 얻으려고 교회 오지는 않았습니까? 아쉬운 것 달래 보려고 수월하게 한 번 살아보려고 세상에 남 가진 것이 부러워서 하나님 이용해서 내가 갖고 싶은 것 얼른 가지려고 교회 오지는 않았습니까? 주여, 이런 인간 바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미래가 우리 미래 아닌 아기예수의 미래가 우리미래가 되게 해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서 새롭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만들어내고 있는 과정인 것을 저희들이 눈여겨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