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0. 17:47

과부 선지자 (누가복음 2장 36-39절)


과부 선지자

2010년 1월 1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36-39

(눅 2:36, 개정)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개정)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 개정)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오늘 본문에 불쌍히 보이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결혼한지 7년만에 남편을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과부된 지 84년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의 나이가 대략 나옵니다. 과연 이 백살 가까이 사신 이 여인이 불쌍한 분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은 보이지 않는 분과 만나기 위해 그 긴긴 세월을 성전에 출근하면서 기어이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이로서 안나라는 분은 자신이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일찍 남편을 사별하는 아픔을 준 것일까요? 저는 지난 주는 장례식장을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죽음을 보기 위해 갔지만 죽음은 보지 못하고 산 자들만 만나고 있습니다. 산 자들만 분주하고 산 자들을 맞이하고 산 자들만 밥 주고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는 자기 장례식장이라도 여전히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산 자가 죽음을 맛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이 ‘산 자’라고 느낄 때는 누군가 자기를 불러줄 때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아니하면 살아있다 할지라도 산 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홀로 산다는 것을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 자로서 구실을 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가 자살하기 위해 약을 먹으려는데 누군가 자기를 불러줍니다. 마치 학교 마치고 현관에 들어선 자기 딸이 말하기를 “ 엄마 밥 줘”라고 합니다. 즉 엄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살아 있으나 죽어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겼지만 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산 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란 이처럼 피조물이 된 이상, 죽어도 소멸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사람’으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5:25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의해서 호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결코 솔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나라는 사람은 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자란 남자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생겨난 인간입니다. 남자가 없으면 생겨날 필요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이름은 남자가 지은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나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여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결혼이란 남자가 여자에게 와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와서 결합하는 겁니다. 원래 자기 출신처를 찾아가는 겁니다. 마치 안테나 같이 접히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와서 남자 속에서 사라집니다.

여자로 단독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물론 이 때부터 남자의 속알맹이는 여자에게 다 갉아먹히게 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남자가 살아있어야지만 여자는 그 안에서 살아있는 겁니다. 남자가 자신을 아내라고 호출할 때만 여자가 됩니다. 남자가 죽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불러줄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안나는 ‘성전’을 찾습니다.

즉 안나에게 있어 남자란 곧 성전입니다. 안나가 사는 이유는, 죽은 전 남편 때문이 아니라 성전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지난 시간에 시므온과 같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살던 사람입니다. 성령이란, 인간의 세계가 아닌데서 오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므온은 그 하나님 때문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는 겁니다.

그에게 찾아온 성령이란 곧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사에 불과합니다. 사사와 왕의 차이점은, 사사란 일시적인 일만 하는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왕이란 영원한 자리가 보장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치 않는 겁니다. 필요한 때마다 성신에 의해서 사사만 등장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 자리를 영원히 왕의 굳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다윗 왕을 왕으로 세워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왕 자리를 양도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성신이 임한 다윗은 이점을 압니다. 즉 성령이 임하게 된 시므온 같은 경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히 믿은 대상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비로서 영원한 다윗의 자리에 앉아 계실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고 그 분의 오심을 감사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쓸려내렸던 것입니다.  

똑같은 입장에서 안나라는 과부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 성전이란 인간의 모든 ‘살았다’는 근거들을 철폐시키고 하나님만이 살게 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안나는 더 이상 남편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사는 여인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않는 분과 성전이 연관이 있음을 알고 사셨던 사람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 즉 빅마마라는 가수가 팬들을 그동안 속이다가 지방흡입술로 살을 뺐다는 고백을 하면서 눈물로 사죄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과연 눈물 흘릴 만한 일인가요? 아닙니다. 안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나’라는 과부 선지자는 분명히 그녀 나름대로의 젊은 시절과 중년시절과 노년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드러난 세월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드러난 세월은 숨어있는 세계를 소속되면서 그녀가 뱉아 낸 배설물의 집합에 해당됩니다.

시편 39:4-7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90:8-10에 봐도,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드러난 인생만이 전부라고 우긴다면 즉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을 애초부터 나를 위한 인생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가치를 위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숨어있는 세계와 연계되어야 하고 그 세계에 계신 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보여주는 ‘언약의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등 뒤에 누가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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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누가복음2:36-39/과부선지자)

2010-01-20 08:24:59   녹취 : 오용익

20100117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36-39절/과부선지자(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기념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그의 긍휼히 여기실때라.”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계신다는 그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때에 백성이 되는 줄 압니다. 저희들이 잘나서 백성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백성으로 삼아 주셨사오니 이 시간 그 하나님의 반겨주시는 긍휼과 얼마나 끊어지지 않는 놀라운 능력인 것을 실감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장 36절에서 3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0페이지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팔십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좆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오늘 본문에 여자 하나 나오지요. 이름이 안나 라고 되어 있는데 이분의 연세에 대해서 대충 가름할 수가 있습니다. 몇 세에 결혼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결혼한 지 7년 동안 남편하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하고 난 뒤에 과부된 지 84년 동안 혼자 지냈다는 겁니다. 84년(과부된 햇수) + 7년(결혼해서 산 햇수) 하면 계산 나오지요?

결혼하고 난 후에만도 91년이니까 이분의 연세가 100세가 훌쩍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 백세라는 긴 백년의 인생 가운데서 그 태반을 혼자 과부로서 지냈다는 것, 상당히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있으면서 지난 시간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오늘 본문에서는 할머니, 그것도 평생을 홀로 살았던 할머니 선지자 이 사람을 등장시키고 그러고 나서는 성전을 떠나서 ‘갈릴리 나사렛에 가서 살았다.’ 이렇게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불쌍한 분이라고 여겨지는 이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게 했는데 과연 안나 라는 이 사람이 우리보기에 불쌍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이 분이 그렇게 불쌍하냐, 하는 그 문제가 등장합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이 안나 라는 분은 결코 불쌍하지 않다는 겁니다. 결코! 불쌍하게 보는 그 눈, 시선들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시므온이 아기예수 만나고 나서 횡재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볼 때 나처럼 되지 않으면 전부 다 불쌍한 것처럼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안나 라는 사람이 예수님과 엮여져 있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볼 때에, 이것은 도리어 우리 자신도 이렇게 되어야 영생을 얻는다, 라는 대표적인 사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언약의 존재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혼자서 자기를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어떤 사람은 저렇게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조정을 받는 것이 사람이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없이는 사람도 아니라는 거지요.

제가 지난주에 두 번씩이나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맛보기 위해서 갔는데 실패했어요. 장례식장에 가니까 죽은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산 사람들이 주인공이에요. 산 사람들이 산 사람들 만나서 부조 받고 밥 먹여주고 처리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기껏 가서 산 사람만 만나고 왔어요.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

죽은 사람은 그냥 누워있고 산 사람들만 웅성거리다가 장례식 끝,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그 죽음을 미리 맛볼 방법이 없느냐?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혼자 살기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혼자 살다가 때가 되면 약을 먹고 죽든지 안 그러면 알아서 죽든지, 하면 될 것 같은데.

만약에 어느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주머니가 약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죽기 직전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엄마 밥 줘!” 그랬어요. 그럴 때 뭘 느끼느냐 하면 사람이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남이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때 느끼는 겁니다. 만약에 누가 불러주지 아니하면 살아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 되는 겁니다.

약 털어 넣으려고 하는데 “엄마, 밥 도!” “그래, 그래. 밥 줄게.” 밥 해주고 죽으려고 밥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를 했지요. ‘사람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누가 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죽도록 까지, 인생 끝 날까지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보면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무리 사람이 교회를 안다니고 예수를 안 믿고 죽어도 반드시 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호출하게 되면 소멸하고 싶어도 소멸이 안돼요. 사람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존재가 이게 인간이라는 피조물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너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었어?’라는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그 책임을 묻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나를 호출하는 그 타인의 눈초리를 우리는 피할 수가 없어요. 그분의 시선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평생 절에 다니는 보살로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이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예수라는 인간, 이스라엘에서 살았다는 그 인간, 그 인간하고는 두 번 다시는 볼 일 없고 아예 끝났다, 라고 생각했는데 무덤에 가니까 호출당하는 거예요.

‘너 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왜 그 예수님을 못 믿었던가? 아까 장로님 기도하는 가운데 의미 있는 말씀하나 들어갔어요. ‘보기 때문에 믿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보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고 아이티 지진문제 같은 그런 세상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다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를 않는 거예요.

사람은 각자 혼자서 살다 보니까 자기 혼자 약 먹고 죽으면 그만인 줄 알고 있습니다. 누가 나로 하여금, 너는 이런 직업을 가져야 해, 너는 이 땅에 태어나야 해, 이런 동생을 만나야 해, 라고 누가 나에게 배치되어 있는 환경을 제공하신 분이 있어요. 우리는 그냥 모든 것이 우연, 우연, 우연, 나는 이 집안에 우연히, 눈에 뭐가 띠는데 그것은 다 우연이라는 겁니다.

우연과 우연을 엮을 관계, 고리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 안나 라는 사람은 남편과 결혼해서 7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마 남편과 결혼했을 그 당시에는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죽어버리면 내가 왜 사는지,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자살해도 그만 이에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여자라는 것은 여자 단독적으로는 사람이 아니에요. 듣는 여자 기분 나쁘겠습니다만 남자이름 아담은 하나님이 지었지만 여자 이름은 하나님이 짓지를 않았습니다. 남자가 지었어요. 남자 만들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서 남자는 남자 혼자로서의 사람이지만 여자는 단독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누구누구의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여자가 된 겁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지요. ‘누구누구에게서 나왔기에 이제부터 너를 여자라 부를게.’ 다시 말하면 ‘너는 나에게서 삐어져 나온 존재, 나에게서 나왔던 존재’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라는 것은 남자가 다시 회수해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 볼펜이나 안테나 있지요. 쏙쏙 쑤시면 쏙쏙 들어가잖아요. 여자가 남자하고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것으로 소멸되고 사라지고 없어요.

물론 사라져서 남자의 속 알맹이는 다 빼먹고 갈라먹지만, 남자는 나중에 껍데기만 남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여자는 남자 안에서만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 밖에 나가면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에요. 그냥 고기죠. 고기처럼 되는 겁니다. 존재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는 결혼해서 남자 죽으면 여자도 따라 죽었어야 했습니다.

왜? 자기의 주인 되는 남자가 죽었으니까, 너는 너의 주인 되는 남자가 죽었으니까 거기에 붙어 있는 여자 너도 같이 죽은 것으로 간주해서 같이 죽어라, 그 말입니다. 그것을 순장제도라 하지요. 무덤 속에 같이 집어 넣어버립니다. 요새 같으면 남자 안 죽이는 것만도 천만 대행이에요. 옛날에는 그랬었어요.

오늘 본문이 그래요. 남편이 죽으면 과부된 여자를 주위에서 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하다. 어찌 살지.’ 사람이 이래요. 남자 없이 혼자 살면 혼자 살 수 있는데 일단 결혼 하고 난 뒤에 남자를 알고 그 남자가 죽어 버리면 죽고 난 뒤에 그 남편의 그림자가 날아가 버리면 괜찮은데 남편의 빈 자리가 계속 남아 있어요. 계속 남아 있으니까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뭔가 모자람을 느껴요. 뭔가 내 인생이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아요. 뭔가 정상적인 인생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처음부터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면 모태솔로라 해서 마음대로 살면 되는데 무슨 팔자가 내가 만나는 남자는 다 죽이는 재수 없는 여자가 되었느냐, 하는 그런 오해를 주위에서 받을까, 사회에서 그런 오해를 요구하고 있으니까 참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분문이 안나 라는 이 여인은 남편이 결혼한 지 7년 만에 죽어버리고 84년 동안 혼자 살았어요. 과연 이분, 이 여자는 죽은 여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남편이 있어요. 뭐냐? 성전이 남편이에요. 성전에서 누굴 만나는가?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 안나 라는 여인이 남편이 죽고 나서 그 다음부터 성전에서 출근도장 야근도장 계속 찍으면서 살았는데 성전에 뭐가 있다고 아침저녁 온 종일을 성전에서 살았을까요?

이점을 오늘 본문에서 밝히 밝혀내야 되는 겁니다. 이걸 밝혀내기 전에 잠시 지난 주에 본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잠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27절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성령이 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안나 라는 여인은 성전에서 아기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선 성령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성령이 우선이 되고 자기는 뒷전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혼자 있어버리면 대체 내 가치가 뭐고 내 의미가 뭐냐 상당히 주춤주춤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시므온은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간에 어떤 형편에 놓이든 간에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뭔가 필요에 따라서 나로 하여금 현재의 나 되게 했다는, 뭔가 이유 있어서 태어났고 그 이유를 기어이 알게 되는 순간을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한 나가 아니라 누구누구 때문에 있어야 될 나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분 없는데 제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교회 오면 어떤 느낌으로 교인들이 보이느냐, 하면 “목사님, 예수님 부활 없다고 우리 이야기 합시다.” 하는 느낌이에요.

설교를 듣는 태도가, 없는데 일부러 제가 지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마 다른데 그런 경우가 있는 모양이라, “예수님 없다고 치고 우리 이야기합시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이야기합시다.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왔으면 그 성도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떤 성과를 내는지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시면 시키는 대로 해서 큰 성과를 내겠습니다. 그것만 이야기합시다. 이 땅에 없는, 없는 예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맙시다.”라는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아요.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집어넣어 버리면 앉아 있는 여러분 각자 각자가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왜 이 자리에 앉게 했습니까, 왜 보냈습니까, 그 의미를 어디서 풀어나가야 하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성공하느냐, 거기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풀어나갈 수밖에 없어요.

각자 각자가 시므온이고 각자 각자가 안나 라면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마련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순간순간 만나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 오니까, 천상천사유아독존, 나는 눈에 보이는 나밖에 없다, 이렇게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 와서 ‘주님이여,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여, 저를 왜 이 자리에 보냈습니까? 무슨 이유 때문에 보냈지요? 찾아볼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등 뒤에 뭔가 우리를 조정하시는 분이 계신 거예요. 그 분이 이유가 있어서 우리를 이 자리에 보낸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있어서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우리를 통해서 뭔가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럴 때 과부된 안나가 84년 동안 혼자 살았다, 남들 보기에는 동정하고 불쌍하다고 하지만 안나의 관심사는 지금 그게 아니에요. 안나가 휴, 저, 불쌍해요, 이게 관심사가 아니고 주님이여, 빨리 성전에서 오실분이 나타나소서, 그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84년 동안. 지금 죽은 남편 생각할 수가 없어요. 남편을 위해 사는 남편의 여자가 아니에요.

장차 성전에 나타날 아기 예수의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쌍하다, 혼자 안 되었다, 지금 남에게 이런 동정 받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안나는 여선지자에요. 그런 시시껄렁한 것에 인생의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없어요. 남편 안 죽고 백 년 동안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이 안나에게는 없습니다.

안나는 죽은 남편의 사람이 아니고 장차 오실 아기예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사람이에요. 제가 인터넷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제가 불러볼 테니 여러분이 어떤 내용인지 보세요.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 연세 많으신 분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겁니다. 빅마마라 하니 저는 빅파이인줄 알았어요. 초코파이보다 약간 납작하게 생긴 것 있잖아요.

빅파이가 아니고 빅마마, 나이 많은 엄마가 아니고 3인조 여자 가수에요. 지방흡입이라 하는 것은 뱃살의 지방을 뽑아냈다는 말입니다. 성형수술을 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동안 그것을 숨겼는데 이제는 고백하면서 눈물로 한다는 거예요. 눈물 날 일입니까?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 이거하고 안나가 결혼한 지 7년 되었는데 남편과 사별하고 84년동안 성전에 있었다, 이 확연한 차이점을 여러분 아시겠지요.

울어도 누가 울어야 되느냐 하면 사실은 안나가 울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이여, 남들처럼 희로애락하면서 평생토록 살아야 하는데 왜 남편을 7년 만에 사별하게 만듭니까? ‘안나 결혼 7년 만에 남편과 사별, 눈물고백’ 이래야 이야기가 되는데 그게 아니고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이라, 똥배 뱃살 뺐다고.

눈에 보이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이 빅마마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안나입니다. 그리고 지난시간에 이야기한 시므온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기예수가 성전에 있을 동안에 두 분을 만났다는 거예요. 만나고 난 뒤에 오늘 본문 39절에 보니까 “주의 율법을 좆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아기 예수가 엄마 품에 안겨서 잠시 성전에 있던 그 사이에 두 명의 언약의 사람,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고 다시 본 동네에서 성장과정을 거쳤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이 나중에 성장해서 십자가지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 결국 구원될 대표자가 될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빅마마는 아니다 이 말이죠.

지방 흡입 했다고 눈물 고백하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이 말이지요. 빅마마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면 그렇다 이 말이지요. 여기서 아주 어려워요. 뭐가 어려우냐? 사람이 성전에 갔다는 그 문제,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고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옛날에 성신을 받아서 활동했던 사울 왕이 있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를 잠시 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 왕이 자기가 왕이라는 거예요. 제 말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이스라엘 왕 사울 왕이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여러분, 말이 매끄럽지 않지요? 방금 목사님이 사울 왕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소개해놓고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하겠지요.

성경에서는 사울 왕이 이스라엘왕인 것은 이스라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으로 했다는 거예요. 점점 더 미궁에 빠집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왕이 되면 안 되고 사울은 사사시대와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사사시대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구약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사사시대가 뭔지 잘 모를 거예요.

사사시대라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성신이 임해서 잠시 잠깐 동안 일시적으로 지도자로 세운 사람을 사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사라는 지도자와 왕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왕이 세습제가 되어서 계속 영원히 이어져 가는 것에 비해서 사사는 일시적으로만 사용했다가 유통기한 끝나면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사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면 뭐가 영원하고 뭐가 왕이 되는 겁니까?” 사사시대는 모세율법이 지배하는 시대라서 모세율법, 모세언약, 모세가 준 말씀, 말씀이 영원한 거예요. 마치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영원하고 목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이게 목사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잠시 사용될 이 사사에 해당되는 이 사울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정신이 어떻게 나갔느냐 하면 자기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영원한 왕인 것처럼 오해를 한 겁니다.

마치 어떤 교회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교인들로 하여금 너는 태어날 때부터 나의 사람이야. 내가 너를 호출했어. 너 죽어도 나한테 무덤에서 호출 당한다? 그래서 너는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야, 그래서 교인들을 모아 놓았는데 목사라는 작자가 와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좀 있고 설교 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 놓으니까 그 목사가 그 교회에 계속 있으면서 돈을 빼먹고 생활비를 빼먹는다 이 말입니다.

이제 감이 오지요? 아직 감이 안와요? 그럼 우리 다른 교회 한 번 가볼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대전에서 강의를 할 때도 그런 모션을 취했는데, 지금 화면 안에서 해야 되지 화면 밖으로 나가면 안 보인다고 또 전화가 올 텐데 할 수 없습니다만. 교인들이 십자가지신 예수님께로 죽 가면 목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피해야 됩니다.

살짝 피해서 예수님께로 가서 십자가 잘 보이도록 살짝 피해줘야 되는데 교인들이 믿음주시고 성령 주셔서 예수님께로 가니까 목사라는 인간이 짠, 하고 나와서 하는 말이 나를 경우해서 천국가라 하는 거지요. 목사가 그렇게 나서는 거예요. 일종의 바바리맨이지요. 여학교에서 발가벗고 바바리만 입고 다니는 바바리맨처럼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여러분, 내말 들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 대부분이 가짜 교인이 되어서 목사 없이는 구원 못 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강의할 때 여러분, 목사 없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구원받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성경을 보세요, 라고 하게 되면 기존 교인들은 화를 벌컥 내요. 그 훌륭하신 목사를 왜 욕하고 목사 없이 무슨 교회가 될 것이며 ‘목사 없이 교회 꼬라지 잘 되겠다, 그래. 목사가 세례주지 그러면 집사가 세례 주나? 아님 사찰이 세례 주나? 성만찬 할 때 목사가 떡을 떼 주지 ○○○가 떡 떼 주나?’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니 교인들부터가 가짜에요. 목사 없이는 자기가 천국 못가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세뇌를 받은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보다 더 깊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이라는 왕은 백성들의 그런 약점, 눈에 보이는 목사 없이는 우리가 영원히 구원 못되겠다는 그 약점을 노리고 사울이 왕으로 등극하는데 하나님이 그걸 허락을 했다는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이 그 점을 허락한 거예요. 오늘날 하나님께서 목사를 허락한 겁니다. 왜 허락했느냐 하면 목사 제치고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과 목사 제치면 아무것도 안보여서 구원 못 받아가지고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스러워하는 교인들을 선별하기 위해서 목사라는 것을 끼워 넣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허락한 거예요.

처음에는 말렸지요. ‘목사 필요 없다. 그냥 말씀이 있으면 되잖아.’ 교인들은 말씀을 안 좋아해요. 목사를 좋아해요. 목사한테 사랑받는 재미로 교회 나옵니다. ‘어느 교인은 천대해도 우리 목사는 나만 되게 좋아하더라, 아 기분 되게 좋아.’ 또 어떤 교인들은 ‘목사가 나는 보지도 않고 나하고는 제대로 인사도 안하고 나는 이 교회 안 다닌다.’ 그래서 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요.

바로 인간들의 그 약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그 약점, 그 약점을 더욱더 크게 키우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울을 세워버린 겁니다. 여기서 성령과 관계되어 있어요. 딱 세우고 나서 그때부터 성신이 사울을 떠났습니다. 성신이 떠나고 그냥 성신이 없는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에요. 성신이 떠나고 악신이 옵니다.

성신이 떠난 자리에 악신이 와요. 꼭 귀신이 머문 자리에 더 나쁜 귀신이 들어오듯이 성령이 떠난 자리를 빈 공간으로 그냥 두지를 않아요. 마귀가 옳다구나, 하고 그 빈자리를 찾아 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목사가 원하는 사람만 그 교회에 남고 싫은 눈치를 보이는 사람은 그 교회 나가줘야 되는 겁니다.

사울이 그렇게 장난질을 쳤는데 그 뒤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서 다윗 왕을 보냅니다. 쉬운 말로 합시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에 두 왕이 있는 것처럼 같은 교회에 당회장이 두 사람 되었어요. 내가 당회장이라고 나선 사람은 사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는 말이 ‘여러분, 저를 보지 마세요. 제가 왕이 아니고 왕은 여러분 머리 위의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다윗은 이야기해요.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동시에 성신을 줘놓고 두 왕이 함께 있어 버립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다음부터 혼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이 성신을 받고 난 뒤에 악신을 받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축출하기 위해서 악신이 사울 왕을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다윗왕은 영원하잖아요.

비정규직인 사울이 영원한 것이 시기 나서 일시적인 자신이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고 그 영원한 다윗을 죽여 버리기 위해서 악신이 임하여 작동을 시작하지요. 책략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윗의 자리에 메시아, 예수님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늘 계시는 우리의 구세주가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구세주는 우리한테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왔습니다. 시므온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이 세상에 나를 구원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없고 오직 아기예수가 나를 구원한다, 그래서 잠을 자도 편안하게 잘 수 있고, 꿈을 꿔도 편안한 꿈, 세상을 살아도 이제는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다 이루었다 할 정도로 내가 구하고 싶은 것은 다 한 거예요.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거든요, 성령이 임할 때 아기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는 구세주를 만났기에 더 이상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거예요. 아기 예수를 만나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버린 겁니다. 그 뒤에 시므온이 간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나 라는 여선지자에요.

여선지자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84년 동안 성전에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이 와서 그것을 알았는데 이 안나는 성전에 매일같이 출근하면서 그 점을 아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성전의 의미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그 앞에서 토해놓으면서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기 자신의 그 쓰레기 같은 인생과 비교하는 공간이 바로 성전입니다.

시편 90편을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이게 성전에서 해야 될 기도인데요. 시편 90편 9절부터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갑니다. 그렇게 지나가면’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주님성전 앞에 나서니까, 세상에서는 잘난체하고 멋있어 보이고 출세한 것 같지만, 성전 앞에 서니까 하나님 앞에 서니까 아무것도 아닌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자신의 속마음 정체가 비로소 들통 납니다.’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안나가 매일같이 성전에 갔다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그런 것 듣기 싫고 내 본모습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의 영광 앞에서 초라한 존재임을 파악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안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출근하는 거예요. 시편 39편 4절에 보면 “여호와의 나의 종말과 나의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이것이 성전에 갔을 때, 그러니까 타인들 앞에서 말고 진짜 타인 진짜 나를 호출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인간의 진면목이란 ‘결국 나는 산 것이 아니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말씀 앞에서. 그래서 우리가 교회 나온다는 것, 성전에 나온다는 것은 사람 만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만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주여, 내가 어쨌기에 주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야 될 정도로 죄인입니까? 도대체 내가 살아온 한평생이 주님 보기에 어떻게 무가치하기에 내가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 대신 주님이 죽어야, 돌아가셔야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에 불과합니까?’ 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성전이에요.

안나 같은 경우에는 그 성전에 예수님 십자가 이전에 매일같이 출근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 이게 인터넷에서나 할 말이고 세상에서나 할 말이고 무대에 서는 가수가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빅마마라는 가수가 십자가 앞에서 눈물로서 ‘제가 지방흡입 했습니다.’ 한다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뭐가 문제냐, 그게?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데?’ 그러면 ‘빅마마 지방흡입 눈물고백’ 대신 다른 것 집어넣어 봅시다. ‘아이티 강도 7 지진으로 20만 명 사망’ 성전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합시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사람이 단독적으로 있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누가 나를 여기 보냈는가? 죽고 난 뒤에 누가 나를 호출할 것인가?’

그분을 모르게 되면 그분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도 산자가 아니에요. 그저 똑같은 인간들 만나서 잘난 체 하다가 그 사람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인생은 다 허사고 헛된 것뿐이에요. 정말 우리가 찾아야 되고 발견해야 될 것은 ‘누구세요?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그것을 찾아야 됩니다.

‘누구세요? 나를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 죽게 만들고 84년 동안 계속 과부로 살게 한 당신 누구요?’라고 그것을 우리는 성전에서 찾아야 됩니다. 시므온은 성령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사울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내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잠깐 살다가 그만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다윗처럼 나로 하여금 나에게 뭔가 담아주는 그분 나의 남편 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분의 사람이고, 그분의 남자요 그분의 여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 때문에 이 땅에 있는 거예요. 그분을 찾아야 됩니다. 장로님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보다가는 믿음이 없어요. 보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어느 신문에 납디까? ○선일보에 나던가요, 어디에 났던가요? 그런 것은 신문에 안나요. 성경책만 있는 겁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된 안나가 84년 동안 성전에 있다가 아기 예수 만나서 평안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에요. 다른 데는 안나오는 이야기에요.

‘시므온이 성령 받아서 아기예수 만나고 난 뒤에는 이제는 편안히 살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제는 우리차례에요. 우리가 죽어도 우리는 죽지를 못합니다. 죽고 싶어서 자살을 천 번을 해보세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어요. 왜 살아 있는가? 처음부터 살아 있는 사람은 끝까지 갑니다.

우리를 언약의 사람으로 만드는 분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를 이 땅에 만드신 분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도 영원히 그냥 가는 겁니다. 계속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그냥 살아야 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영원히 천국에서 그냥 살아야 되는 거예요. 살면서 우리의 할일은 간단합니다.

‘제가 이 땅에 살면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을 주신 분을 이렇게 알게 하시니 진짜 나로 하여금 사는 이유와 목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종이 편안하군요.’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그것은 시체가 손가락질 한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냥 ‘음, 이런 쓰레기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대전에서 그런 강의 했거든요, 간음한 여인보고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고소하지 않으면 어떤 누가 우리를 고소해도 그것은 무효입니다. 해당이 안돼요.

안나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축복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는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요, 스트레스 받아요, 목사도 신경 쓰지 마시고요, 말씀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즐거움, 그 자유를 악마한테, 내 욕심에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쌍한 여인이라고 여겼는데 불쌍한 여인이 아니라 부러운 여인이었습니다. 84년 동안 성전에 다니면서 결국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안나의 심정, 정말 다 이루었다 할 만한, 다 알게 되었다, 다 얻었다, 다 누렸다, 너무 행복하다는 그 고백이 이제는 우리와 같은 고백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가 주 안에서 영원함을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